내 마음의 선생님 구두닦이 소년의 꿈
교육부/KBS 공동 주최
스승 존경문화 조성을 위한 대국민 프로젝트
「내 마음의 선생님」 수기공모 대상
글_ 박순걸 밀양송진초등학교 교감
저에게는 한 스승님이 계십니다. 고등학교 졸업식만 생각하면 눈물이 앞을 가리게 만드는 나의 선생님은 현재 창원고등학교에 재직하고 계시는 오재석 선생님이십니다. 28년 전 선생님께 받은 은혜를 조금이나마 갚고 싶은 마음에 올해 KBS와 교육부가 공동으로 주최한 「내 마음의 선생님」 수기공모에 응모를 하게 되었습니다. 전국에서 응모한 수많은 작품 중에서 20편을 1차로 선정하여 선정위원회 심사 80%, 대국민 온라인투표 20%를 더하여 최종 10편의 작품을 수상하게 되었고 10편의 작품 중에서 저의 수기가 대상에 선정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특히 대상작품은 KBS에서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게 되어 지난 8월부터 한 달 동안 오재석 선생님과 같이 KBS다큐 제작팀과 생활하며 촬영을 하였는데 추석특집으로 KBS1에서 방영이 되었습니다. 교사에 대한 존경과 권위가 땅바닥에 추락한 지금 선생님의 은혜와 사랑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는 작은 계기가 되었으면 하고 소망해 봅니다.
내 인생에 선물과도 같은 선생님과의 만남
저는 전생에 나라를 구하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할 복을 28년 전에 만났습니다. 제게 선생님께서 얼마나 큰 선물이었는지 사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잘 몰랐습니다. 초등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어느 순간 선생님을 닮아가고 있는 저를 보면서, 또는 가난하고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보면서 선생님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이셨으리라 의심치 않았습니다.
절벽 앞에서 누군가 살짝만 밀어도 나락으로 떨어졌을 저를 구원해주신 분이기에 고등학교를 졸업 후 지금까지 한 번도 선생님의 은혜를 잊은 적이 없었습니다. 늘 마음 한구석에 은혜를 모르는 놈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선생님을 다시 뵈옵는 날을 늘 꿈꾸며 살았습니다. 그렇게 28년이 지난 지금 선생님의 흰머리와 주름을 보면서 너무 많이 세월이 흘렀음을 짐작합니다. 선생님의 은혜를 갚는 길이 무언지를 몰라 선생님과 만남을 그리면서도 늘 죄송한 마음만 가득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천오백 명이 넘는 전교생 중에 수업료를 내지 못하는 세 명 중에 한명이었던 저는 가난으로 인해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할 자퇴 위기에까지 몰렸습니다.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있어야 취직도 하고 가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차가운 교무실 복도에 쪼그리고 앉아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았지만, 늘 가난한 아이라는 선배와 친구들의 시선이 부끄러워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돌릴 때가 많았습니다.
구두를 닦는 첫 한 달 동안 가난에 대한 설움과 부끄러움에 더 이상 구두를 닦기 싫다고 몇 번이나 선생님께 말씀을 드렸지만, 그때마다 선생님께서는 가난은 죄가 아니라고, 그러니 부끄러워 할 필요 없다고, 그럴수록 더 당당해야 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저를 끊임없이 설득하셨습니다. 덕분에 무사히 고등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고 선생님과 같은 교사가 되는 꿈을 꿀 수 있는 교육대학에 입학도 하게 되었습니다.
대학을 다니던 시절 교대 수업료 지원 제도가 없어져 저는 가난하였는데도 당시 제 형편으로는 힘에 버거운 대학등록금을 내고 다녀야 했습니다. 혼자의 힘으로 대학등록금과 생활비를 마련해야 했던 저는 대학시절 내내 학교도서관 아르바이트, 저녁에는 목욕탕 청소, 방학 때는 일용직 막노동으로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며 대학을 다녀야 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구두를 닦으며 가난과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자신감과 용기를 선생님께 배웠기에 버틸 수가 있었고 힘들게 임용고시를 통과하여 오재석 선생님께서 그토록 바라던 교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꿈을 이루어 주시고 지금의 내가 있게 해주신 나의 선생님. 그래서 선생님은 제게 늘 그리움 그 이상이었습니다. 부끄럽지만 저의 고등학교 시절 저에게 끝없는 격려와 사랑을 베풀어주셨던 창원고등학교 오재석 선생님의 이야기를 몇 자의 글로써 적어보려 합니다.
선생님들의 구두 닦아 받은 근로장학금
정확히 28년 전, 대한민국이 서울올림픽으로 분주하던 1988년 아버지의 사업실패와 부도, 그리고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가난으로 밀양의 시골 고향으로 떠나면서 소년의 아버지는‘자식은 공부를 시키겠다.’며 소년을 창원의 친척집에 맡기셨습니다. 고등학교를 정상적으로 마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가난은 소년을 급우들의 돈이나 빼앗고 담배와 술에 빠진 채 학교폭력이나 일삼는 비행청소년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런 소년에게 오재석 선생님은 평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하는 축복이자 선물이었습니다.
선생님은 이유도 없이 소년을 불러 교무실 복도 한쪽 구석에 구두를 닦을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사비를 털어 구두약과 솔을 사고, 직접 구두통을 제작하셔서 점심시간과 청소시간, 저녁시간에 학교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도록 했습니다. 1980년대의 학생들에게는 공포의 대상인 선생님들과 눈이 마주칠까 두려워 바닥만 보고 다닐 수밖에 없는 교무실을 더군다나 날마다 들락날락 해야 한다는 사실이 두려웠지만 선생님의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선생님들이 신성한 학교에서 무슨 구두닦이냐고 선생님을 놀렸지만 소년을 위해 일일이 다른 선생님들을 설득하셨습니다. 그런 후 선생님께서는 가난한 소년에게는 학비와 한 달 생활비가 될 용돈을 근로장학금이라는 명목으로 모든 선생님들에게서 빠짐없이 수거하여 건네 주셨습니다.
난생 처음 구두를 닦아보는 소년에게 ‘오히려 비싼 구두를 버려놓는다’고 ‘내 구두는 건드리지 말라고 내일 목욕탕 가서 닦으면 된다’는 핀잔을 주는 선생님들도 계셨습니다. 이 모습을 보신 선생님은 어떻게 하면 구두를 더 잘 닦을 수 있는지 목욕탕의 전문 구두닦이가 하는 비법을 직접 배워 오셔서 소년에게 손수 시범을 보여주시기까지 하셨습니다. 덕분에 소년의 구두 닦는 실력은 날로 늘어 고등학교를 졸업할 3학년 무렵에는 양손에 구두 열 켤레를 한 번에 나를 수도 있었고, 전문가 못지않게 광을 낼 수 있을 정도의 경지까지 올라 선생님들의 사랑과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쉬는 시간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점심시간과 청소시간, 그리고 저녁시간에도 교무실로 구두를 닦으러 가야했기에 소년은 늘 시간에 쫓겼고 배고픔을 참아내야 했습니다. 오후에는 피곤해서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기 일쑤였고 공부를 하려고 볼펜을 잡으면 근육이 당겨 아프기마저 했습니다. 소년의 손은 구두약으로 항상 거지마냥 지저분했고 추운 겨울에는 갈라져 피가 날 정도로 터져 있었습니다.
선생님의 숫자가 육칠십 명은 족히 넘었으니 하루에 세 번씩이나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아도 혹시 구두를 못 닦아 드리는 선생님이 계실까봐 늘상 시간에 쫓기는 힘든 노동이었지만, 공부를 하면서 학비와 생활비를 마련할 수 있다는 건 소년에게는 다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었습니다. 피곤함을 못 이겨 수업시간에 자주 졸기도 했지만 신기하게도 전교 꼴찌를 맴돌던 성적이 시험을 칠 때마다 10등씩 뛰었고 졸업할 무렵에는 상위권으로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들은 소년이 애처롭고 불쌍하다고 공부시간에 교실 제일 앞 교탁 밑에 소년의 자리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수업시간에 꾸벅꾸벅 졸면 다른 학생들과는 달리 항상 깨워 주셨고 거의 모든 선생님들이 소년의 공부와 성적에 관심과 응원을 보내 주셨습니다.
멍든 종아리에 약을 바르며 가르침을 주시던 날
선생님은 늘 배가 고팠던 소년을 위해 가끔씩 본인의 도시락을 보내주셨고 잘 사는 친구의 부모님께 직접 전화를 걸어 소년의 반찬과 도시락을 부탁하기도 하셨습니다.
새 학기가 되면 다른 과목 선생님들에게서까지 참고서와 영어사전을 구해서 챙겨주시면서 인생을 바꾸고 싶지 않느냐고 소년에게 자주 묻곤 하셨는데 소년을 위해 같은 반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아이를 항상 옆자리에 앉혀주시고 소년의 공부를 도와주라고 따로 부탁도 하셨습니다. 3학년에 올라간 소년이 성적이 떨어질 때는 담임선생님도 아니시면서 소년을 밤중에 따로 불러 종아리를 때리시고는 ‘절대 꿈을 포기하지 말라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소중한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그 동안 구두닦이라고 친구들에게 놀림 받고 고생한 게 억울하지도 않느냐고’ 하시면서 시퍼렇게 멍든 소년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같이 울어주셨습니다. 사실 선생님께 불려갈 때는 무서웠지만 정작 매를 맞을 때는 소년은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습니다. 철이 없는 그때에도 소년은 그게 사랑의 매인 줄 알았나 봅니다. 소년은 매를 맞으며 속으로 많이 울었습니다. 나를 챙기고 걱정해주고 아끼는 누군가가 옆에 계신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모님과 떨어져 살면서 늘 사랑이 고팠던 소년에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때마다 소년은 기필코 당신과 같은 선생님이 되겠노라고 다짐을 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구두를 닦겠습니다
1990년 2월, 교육대학에 합격한 소년은 운동장에서 고등학교 졸업식을 마치고 교문 밖으로 나갔지만 그냥 그렇게 집으로 돌아갈 수가 없었습니다. 차가운 교무실바닥에 엎드려 구두를 닦으면서 어렵게 공부했던 생각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선생님들께 뭔가 보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학교 앞 슈퍼로 향했지만 소년에게는 돈이 없었습니다. 캔커피 세 박스를 겨우 사서는 어깨에 둘러매고 소년은 교무실로 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선생님들의 구두를 닦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모든 선생님들이 사양하셨고 그 동안 고생했다고 소년을 한 분씩 일일이 안아 주셨습니다. 선생님들 책상에 캔커피를 하나씩 올려두고 감사하다고 은혜를 잊지 않겠다고 교무실 바닥에 큰절을 하고는 소년은 한참동안을 엎드린 채 일어나지 못하고 서럽게 펑펑 울었습니다. 대성통곡하는 소년을 눈물이 글썽한 얼굴로 선생님께서 일으켜 세워 주셨고 힘껏 껴안아 주셨습니다. 교대를 졸업하고 이 다음에 선생님이 되면 나보다 더 훌륭하고 언제나 아이들 편에 서는 올바르고 정의로운 선생님이 되어 있으라고.
내 인생 절반의 행복한 삶과 철없는 구두닦이 소년의 꿈을 이루어주신 창원고 오재석 선생님. 글을 쓰면서 오래전 생각이 나서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선생님께서 28년 전에 보여주신 헌신과 사랑, 은혜를 어찌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마는 어렵고 가난한 아이들 편에서 사랑이 고픈 아이들의 사랑을 채워주면서 정의롭게 살겠다고 다짐하면서 밀양의 초등학교에서 선생님과 같은 선생님이 되는 꿈을 펼치는 교사가 되고자 오늘도 열심히 생활하고 있습니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나의 선생님, 항상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창원고등학교에 근무하시는 오재석 선생님께 밀양에 근무하는 못난 제자 박순걸이 이 글을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