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베들레헴
마태복음 2:1-12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기쁜 성탄이다. 간밤에 ‘고요한 밤 기도회’는 흐믓 하셨는가? 색동교회가 10년 동안 반복해온 거룩한 밤을 맞는 방식이다. 올해는 ‘찬양과 시로 함께’하였다.
네 편의 시는 어땠는가? 허림의 ‘마중’이란 시는 유명한 가곡의 가사로 만들어졌다.
그대여 내가 먼저 달려가
꽃으로 서 있을게
꽃으로 서 있을게
성탄은 마냥 기다리는 것이 아닌, 그 기다림에 지쳐 너무나 그리워 내가 먼저 달려가 꽃이 되는 일이다. 꼭 노래를 들어보길 바란다.
또 김현승의 시 ‘크리스마스와 우리집’에는 이런 대목이 있었다.
은접시와
이층으로 오르는 계단은 없어도,
웃는 우리집.
모여 웃는 우리집.
소와 말과
그처럼 착하고 둔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우리집.
그런 착하고 소박한 사람들의 삶의 자리에 찾아오신 성탄의 풍경이 아름답다. 2020년 성탄이 그렇게 우리들 가운데 임하신 것을 감사드린다.
본부에서 일할 때 감리회 본부는 광화문 감리회관 빌딩 앞에서 ‘광화문 크리스마스’라는 성탄행사를 열었다. 해마다 반복하는 큰 행사이다.
아주 오래 전에 멀리 창원에서 비자연장을 받지 못한 외국인노동자 140여명이 불법체류의 신분이 되어 본부를 찾아 왔다. 호소할 곳을 찾아 피난처로 삼은 것이다.
그들은 2주간 동안 감리회 본부의 보호를 받았다. 그 중 두 사람은 강제출국을 당했지만, 대부분 다시 자기 공장으로 되돌아 갈 수 있었다. 그때 서울 목동 출입국관리소와 화성시 외국인보호소를 들락거리던 기억이 난다.
나는 그 때만큼 감리회 본부가 세상의 주목을 받고 교회다운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본다. 가난한 자들, 학대받는 자들, 외로운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 성탄, 그들을 외면하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다.
본부에 외국인 노동자들이 찾아왔다는 소문을 듣고 본부 앞에 있는 구두방에서 떡과 부침개 두 상자를 보내왔다. 궁금한 마음에 일부러 그 구두방으로 구두를 닦으러 갔다.
어떻게 그렇게 귀한 일을 하셨냐고 여쭈었더니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내가 어려서 서울로 무작정 상경했을 때, 잠 잘 곳이 없어서 그때 감리회관 건물 계단참에서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계속 목사님들이 도와주셔서 이 앞에서 구두닦이 터를 잡을 수 있었지요.
외국인 노동자들이 회관을 찾아온 모습을 보니 그들의 고생이 남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밤늦게까지 두 딸들과 함께 전을 부쳤습니다.”
내가 색동교회 성탄절 예배에서 이런 제안을 한 적이 있다. 언젠가 ‘광화문 크리스마스’가 열리면 색동교회가 찬양대로 나섰으면 좋겠다. 날은 춥고, 사람 모으기는 힘들고 특히 예배에서 성가대 구성에 애를 먹었던 기억 때문이다. 커다란 서울 시내 교회들도 엄두를 내기 힘들어 하였다.
성탄은 궂은일에 나서는 날이다. 성탄은 내가 꽃으로 서 있는 날이다. 그렇게 착하고 둔한 삶을 결심하는 날이다.
오늘 마태복음 2장은 가장 많은 드라마의 대본이 되었다. 몇 해 전 영국 BBC는 4부작 미니 시리즈 ‘위대한 탄생’(the Nativity)을 만들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성탄에 관한 수많은 영화가 만들어졌는데, 아직도 만드는구나!
아기 예수의 탄생이 여전히 뉴스거리가 되고, 영화의 소재가 된다는 사실이 놀랍다. 바라기는 여러분에게도 성탄의 소식이 날마다 최신 뉴스가 되길 바란다. 해마다 새로 만들어진 영화가 되길 기대한다.
성탄절은 12월 24일 이브로부터 시작해 새해 1월 6일 주현일 직전까지이다. 주현일은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한다. 그날로 아기 예수는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어 평화의 임금으로 높임을 받았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그렇게 낮은 아기가, 천한 아기가, 보잘 것 없는 아기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을 구원한 메시야라니 이런 상상력이 꿈에서조차 가능한가?
동방박사들은 그 꿈을 찾아서 페르시아에서 왔다. 그들은 멀리 동방의 페르시아에서 별자리의 변화를 보고 베들레헴을 찾아왔다. 점성학적 계산에 따른 것이다.
물론 일찍이 선지자 미가의 예언이 있었다(미 5:2).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서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6).
베들레헴은 아기 예수처럼 가난한 땅, 아픔의 땅, 아주 작은 마을이었다. 그런데 베들레헴에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태어날 것이라는 예언은 마침내 현실이 된다.
그런데 훼방꾼이 있었다. 그것은 시대정신을 거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당시 임금 헤롯이 장본인이었다. 당시 역사가들은 헤롯을 평가하기를 팔레스타인에 평화를 가져오고, 질서를 세우는데 성공한 유일한 통치자라고 하였다. 그는 훌륭한 건축가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힘과 폭력에 의한 평화에 불과했다.
먼저 동방박사들이 찾아간 곳은 바로 헤롯의 왕궁이었다.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유대 땅에서 유일무이한 왕인 그에게 또 다른 왕의 탄생 소식은 반역 소문과 다름없었다.
따라서 예루살렘은 온통 술렁거렸다.
“헤롯 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3).
여기에서‘소동하다’(타랏소)는 뒤흔들다, 당황하다는 뜻이다. 요즘말로 뒤집어졌다는 의미다.
그때 헤롯과 예루살렘 성내가 얼마나 놀랬는지 생동감 있게 표현하고 있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기 예수는 세상을 뒤집기 위해 오신 분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 소식은 ‘로마의 평화’, ‘폭력에 의한 평화’를 꾸며온 이들에게는 악성루머요, 유언비어처럼 들렸다. 그러나 ‘사랑에 의한 평화’를 꿈꾸던 이들에게는 구원의 복음임에 틀림없다.
베들레헴에는 지금도 예수 탄생교회가 존재한다. 이 교회는 주후 324년,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팔레스타인으로 성지순례 후, 예수 탄생 동굴 위에 건축한 것이다.
그 입구가 매우 인상적일 만큼 작고, 낮다. 처음에는 출입문이 아주 컸다. 그랬더니 상인들이 낙타를 끌고 들어오고, 군인들이 말 위에 앉은 채 교회에 드나들었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십자군이 보수공사를 하면서 높이 120cm, 폭 80cm로 문의 규모를 축소하였다. 예수 탄생교회를 드나들 때는 누구든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래서 겸손의 문이라 불린다.
행여 우리가 현재 상태로 아기 예수를 맞이하고자 한다면 실패할 지도 모른다. 다만 내 마음의 문을 겸손하게 리모델링해야 할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아기 예수를 찬미하며 이렇게 고백하였다.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7-8).
세상의 왕들과 영웅의 탄생설화들은 허황된 가장과 신비로 과대포장한 반면, 아기 예수는 허풍과 위선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있다.
그 분은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시고, 가장 가난한 구유에 뉘였으며, 또 어머니로서 자격을 갖추지 못한 처녀의 몸에서 태어나셨다. 낮아질 대로 낮아진 모습이다.
이 사실은 사람들에게 큰 놀라움이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은 누구도 예상할 수 없는 뜻밖의 방법으로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가 기다린 분은 그런 모습이었다. 어제 낭독한 첫 번째 시 ‘주여 오세요’에서 실야 발터는 그 기다림이 얼마나 무모한 지 이렇게 고백한다.
세상은 당신이 오신다는 것을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요?
세상은 당신이 그들의 주인이며
당신이 언젠가 분명히 오신다는 것을
생각이나 하고 있을까요?
그러기에 크리스마스는 마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 아니다. 세상의 고통과 함께 기도하는 시간이요, 참여하는 시간이요, 꿈을 꾸는 시간이어야 한다. 스페인의 시인 오까냐가 ‘조금만 더 가요 마리아’에서 말한다.
힘든 이 시간을 넘길 수만 있다면,
그 좋은 소식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감내할 수 있겠어요
이 작은 나귀마저 줄 수 있겠어요
예수님의 탄생은 참으로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진정한 평화가 무엇인지 들려준다.
그뿐 아니다. 세상 모든 아기의 출생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아이가 이 땅에 태어난다는 것은 이 땅에 희망이 계속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사실 우리도 모두 아기로 태어났다. 내 옆에 앉은 사람을 바라보시오. 바로 ‘이 땅에 희망으로 태어나신 분’이다.
어린 아기로 태어난 우리, 그런 어린 마음 같은 겸허함은 평생토록 나를 성탄으로 인도하는 길동무와 같다.
성탄은 지금 희망을 잃은 사람, 위로가 필요한 사람, 좌절하고 실패한 사람, 대안을 찾지 못하는 사람, 더 큰 도움이 필요한 사람, 자신의 종말을 의식하는 사람까지 모든 사람이 그런 은총을 소망하며, 살아갈 이유를 품는 시간이어야 한다.
베들레헴은 참 작은 마을이었다. 그곳은 흉년으로 강 건너 모압으로 이주한 나오미 일가의 고향이었다. 모압 며느리인 룻을 데리고 돌아 온 땅이었다.
그곳은 희망의 출발점이 된 땅이다. 다윗 왕의 가계가 베들레헴에서 시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신앙은 베들레헴에서 시작한다. 유대인의 새 왕은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 예루살렘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마침내 동방박사들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베들레헴에서 아기 예수를 찾았고, 최고의 공경을 갖추어 인사드렸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
세 가지 예물은 바로 왕을 상징하는 ‘황금’, 제사장을 상징하는 ‘유향’, 죽은 자를 상징하는 ‘몰약’ 이었다.
오늘의 베들레헴은 어디일까?
오늘의 동방박사는 누구일까?
오늘의 목자들과 천사들은 어떤 존재일까?
간밤에 CBS 텔레비전에서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 하는 성탄예배’가 열렸다. 해마다 광화문에서 열던 행사이다. 고난모임에서 늘 주도적으로 함께 한다.
올해는 세월호 가족과 함께 하였다. 얼마 전 나는 BTS의 성공비결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뒤 200일쯤 지났을 때 ‘젊은 친구들’이 유족들을 찾아왔다고 한다. 예의를 갖추어 분향하고, 유족을 위로 하고 갔다. 가족협의회 앞으로 1억 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그들은 데뷔 2년차 아이돌 그룹 방탄소년단이었다.
당시는 문화계 블랙리스트가 만들어지고, 온갖 불이익을 주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소신있게 행동한 BTS가 잘되지 않으면 누가 잘될까? 유족들은 가장 열렬한 아미가족이란다. 당연한 일이다. 세월호 유가족을 위로하던 BTS는 지금 온 세상 사람들을 위로하는 세계적인 가수가 되었다.
성탄은 이러한 소신을, 이러한 믿음을, 이러한 사랑을 다시 확인하는 날이다. 그러기에 성탄은 해마다 반복되는 생일기념식이 아니다. 평화로운 삶이 위협받고, 전쟁과 증오와 가난한 삶이 존재하는 그 곳에, 다시 아기 예수가 오시리라는 목마름을 경험하는 날이다.
하나님께서 성탄을 축하하는 우리 모두에게 평화와 기쁨을 주시기를 빈다. 그리고 여전히 하나님의 샬롬이 없는 사람들의 마음과 온 세상에 성탄의 은총이 함께 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