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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뱃대와 함께 동래의 명물로 손꼽혔던 것은 유기(鍮器)다. 백동(白銅)으로 만드는 수저와 밥그릇은 동래의 것이 가장 모양이 좋았으며, 유기에 색깔과 무늬를 넣는 정교한 세공(細工)은 전국에서 알아주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 담뱃대와 유기를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로서 일본에서 가져와서 쓰던 니켈이 수입금지되자, 재료난으로 유기공업은 자연히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해방 후 스테인리스 및 플라스틱 용기의 양산(量産)으로 섬세한 공정(工程)아래 만들어지는 동(銅)유기는 차츰 가정에서 밀려났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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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의 맛은 풍토(風土)가 지닌 향기와 같다. 부산의 음식에는 경상도 사람만이 느끼고 맛볼 수 있는 갯냄새의 향수가 담겨있다. 동래지방 음식물의 첫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동래파전이다. 일반적으로 파전은 밀가루 반죽에 파를 넣어 부치는 데 비해 동래파전은 동래에서 많이 생산되는 미나리를 곁들이고, 또 인근 해안에서 생산되는 굴, 홍합 등 조개류를 섞은 것이 특색이다. 또한 만드는 솜씨도 일반 파전은 물기가 없이 부치는 데 비해 동래파전은 좀 질게 하여 위에 달걀을 풀어 덮었으며 쇠고기, 송이 등 여러 가지 재료를 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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었다. 한편 동래파전에서 가장 큰 특징을 내는 것은 반죽이 밀가루만 쓰는게 아니고 쌀도 갈아서 사용하므로 차진 맛을 준다는 점이다. 이러한 파전이 언제부터 동래에서 유행되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동래장날에 노점에서 구워 파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음력 삼월 삼짇날을 전후하여 동래장이 열릴 때면 이 파전이 점심 요깃감으로 등장, 장꾼은 물론 장보러 온 사람들의 입맛을 당기게 했다고 한다. 해방 전까지만 하여도 인근 고을에서 동래파전 먹는 재미로 동래장에 간다고 할 정도로 유명했다. 한편 이 동래파전은 6·25 동란 후 동래 기생들이 부산으로 진출할 때 그녀들이 경영하는 요정의 술상에는 으레 이것을 올려 동래 기생이란 이름과 함께 더욱 알려진 명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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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꺼비춤은 동래야류(東萊野遊)의 본 마당이 시작되기 전 길놀이의 절정을 이루는 군무(群舞) 마당에서 추어지던 춤으로 최근 발굴되었다. 이름 그대로 두꺼비의 동작이나 형상을 본 따 엉금엉금 기다가는 훌쩍 뛰는가 하면 뒤로 벌렁 뒤집어지기도 한다. 이 춤은 당시 동래야류 연희자들이 곧잘 했었는데, 춤의 성격상 실내 연희 같은 데서 즉흥적으로 추어졌기 때문에 일반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동래야류 길놀이가 끝나고 이어 벌어지는 주민들의 춤자랑판이었던 군무 마당에 가끔 선을 보이곤 했다. 춤추는 복장은 머리에 수건을 동이고, 저고리를 옷고름이 동쪽으로 가게 돌려 입고는 등과 가슴에 솜방석을 넣는다. 다른 춤에서처럼 정해진 스텝은 없으나, 춤은 두꺼비처럼 엉금엉금 기는 것으로 시작한다. 이어 두꺼비가 안개를 피우며 도약하듯 꿈틀거리며 도약할 자세를 취한다. 이 자세에서 앞과 좌우로 뛰고 마지막엔 뒤로 벌렁 뒤집어진다. 버둥거리다가 일어나면 처음 동작부터 다시 시작한다. 장단은 동래지방 춤가락인 덧배기 장단(4박자)이다. 지금 재현된 두꺼비춤은 단독춤인데 옛날엔 상대역이 있었다고 한다. 암·수 두꺼비가 서로 희롱하며 춤사위를 주고받아 혼자 추는 것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운치가 있었다는 것. 우리 나라의 춤은 춤사위가 다양하지 못하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설인데, 이 두꺼비춤에서는 "누운 사위", "두 팔을 앞으로 짚는 사위" 등 지금까지 없던 춤사위를 보여주어 우리 무용의 춤사위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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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의 고로(古老)들은 이 지방의 명산물로서 서슴지 않고 담뱃대를 든다. 그만큼 동래지방에는 일찍부터 담뱃대를 만드는 수공업(手工業)이 성행하여 부산지방 수공업의 대종을 이루었다. 옛날에는 연관(煙管)이란 이름으로 불린 담뱃대가 언제부터 생산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조선시대에 울산(蔚山)의 병영(兵營)에 무기 제작창(武器製作廠)이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연관이 많이 생산되었는데 이곳에서 동래지방으로 옮겨진 것이라고 추정한다면 대략 150년은 됐을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울산을 비롯, 경주(慶州), 김천(金泉) 등 전국 각지에서 담뱃대가 다량 생산되었지만 가장 성했던 곳은 동래라고 한다. 풀무불에 쇠까치를 달구어 두드리는 쇠망치 소리가 여기 저기서 쉴새없이 들려왔고, 연관공(煙管工)들이 부르는 흥겨운 담바귀타령이 밤늦게까지 흘러나오곤 했던 것이다.
시작일세 시작일세 담바귀타령이 시작일세 귀야 귀야 담바귀야 동래 울산 담바귀야 너의 국(國)이 어데길레 대한의 국을 왜 왔나 우리 국도 좋건마는 대한의 국을 유람왔네… (담바귀타령의 일부)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물건은 장날이 되면 연관조합(煙管組合)에 갖다주고 그 대금(代金)을 받아와서 직공들에게 임금을 지불했으며, 물건을 인수한 조합은 이것을 직매(直賣)하지 않고 서울에 있는 조합(총판)으로 보내어 전국의 판로(販路)를 통해 거래가 되었다 한다. 그러나 해방 후 서민의 담뱃대가 궐련으로 바뀌고, 언제부터인지 담배가 고급화됨에 따라 담뱃대는 하나 둘 자취를 감추어 민예품으로 액세서리로되어 가는 실정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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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정초부터 보름 사이에 행해지던 동래지신밟기는 잡신을 눌러 일년 동안 마을과 가정의 무사태평과 풍년을 기원하던 종교성을 띤 놀이로서 삼한시대부터 행해지던 축원농악무(祝願農樂舞)에서 발전하였다. 등장인물은 사대부, 포수, 하동, 각시 등 35명 내외로 대개 사대부가 총지휘자격이고, 하동과 포수가 생원과 각시를 상대로 하여 벌이는 해학적인 연기는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데, 이 놀이의 밑바닥에는 양반의 위선을 풍자하는 내용이 깔려 있다. 대체로 정월 초사흘경부터 지신밟기를 시작하는데, 주산(主山) 지신풀이, 당산(堂山) 지신풀이, 우물 지신풀이, 각 가정 지신풀이의 네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른 지방의 지신밟기가 풍물놀음을 위주로 하는 것에 반하여 동래지신밟기는 굿거리 장단에 덧배기춤을 위주로 함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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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에서는 동래야류의 길놀이가 끝나면 연희마당에서는 춤의 명수들이 한바탕 신명나게 학춤 등을 추었으며, 한편으로는 줄다리기가 끝나면 명무수(名舞手)들이 학춤을 추어 승리를 축하했다고 한다. 또한 학춤은 어떤 명무수가 당시 출입복이었던 도포를 입고 갓을 쓰고서 덧배기춤을 멋있게 추니까 누군가가 '마치 학이 춤을 추는 것 같다'라고 한데서 유래되었다고도 한다. 아울러 동래에는 예부터 지형이 학의 모습과 같다 하여 학과 관련된 지명이 곳곳에 산재해 있으며, 학이 떼를 지어 서식하여 학의 모습과 동태를 잘 관찰할 수 있어, 동래 특유의 덧배기춤이 학춤답게 소박하면서도 우아하게 다듬어질 수 있는 요건이 충분하였다. 동래학춤은 동래의 덧배기춤이 예술적으로 발전된 상태이고, 자연미와 예술미의 조화로서 그 가치를 평가할 수 있으며, 춤의 예술성이 모방과 사실성보다는 창조성과 즉흥성, 그리고 상징성에 있다고 볼 때 단순한 민속무의 범주를 넘어 예술적 차원에 도달한 춤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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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특유의 농현(弄弦)에서 발생되는 미분음(微分音)의 효과가 들을 만하고 빠른 장단에서는 다양한 리듬의 변화와 오른손 손가락의 기교가 매우 화려하다. 전반적인 곡의 흐름으로 보아도 끊임없이 긴장과 이완을 대비시켜 나가는 묘미가 이 음악의 특징이라고 하겠다. 각 유파마다 나름대로의 특징을 가지고 있지만 강태홍류는 특히 난해한 기교가 많아 기교파의 총수로 평가되고 있다. 또한 산조음악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계면조(界面調)를 줄이고 우조(羽調)와 강산제(江山制)를 많이 도입함으로써 호쾌하고 온화한 면이 많다는 것 또한 이 유파의 특징이다. 1945년 이후 강태홍이 부산에 정착하면서 이 유파는 부산인에 의해 계승되었는데, 그가 평생 남긴 7-8명의 제자중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은 4명은 모두 부산 출신이다. 이 4명 중 3명은 타계하고, 그의 막내 제자인 신명숙이 유일하게 그 맥을 이으며, 후계자를 양성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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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서남지역에서 계승되어 온 시나위는 오랜 전통성과 민족성이 매우 농도 짙게 내포되어 있어 다른 민족에게서 예를 찾기 어려운 독특한 음악형태이다. 이러한 시나위 음악을 모체로 하여 독주곡으로 탄생된 산조음악은 다양한 가락의 변화와 대금 특유의 기법을 통해 인간의 회로애락을 유감없이 표현해 내고 있다. 따라서 산조음악은 고도의 기교와 예술적 감각이 요구되는 수준 높은 음악으로서 우리 민족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대금산조는 박종기류의 「소리더늠 대금산조」와 강백천류의 「시나위더늠 대금산조]의 두 가지 유파(流派)가 전해지고 있는데, 특히 강백천류는 창시자 강백천이 부산에 기거하면서 1971년 그 예술적 능력을 인정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45호 대금산조 예능보유자로 지정받고 후계자를 양성하였으며, 후계자인 김동표도 약관의 나이에 동래에 정착하여 지금까지 동래에서 활동하면서 후진 양성에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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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고무는 고려초기 관청 여악(女樂)을 관장했던 교방청 여기(女妓)들에 의해 행해졌던 향악정재(鄕樂呈才)인 무고(舞鼓)가 동래감영의 교방으로 전래되면서 지역의 특성에 따라「동래고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행해졌던 북춤의 일종이다. 동래고무는 궁중 무고의 영향을 받아 손을 여미는 동작, 우아한 디딤법, 나비가 하늘거리는 것 같은 팔동작, 북을 치기 위한 동작들이 제약된 여건 하에서도 순수 신체적 동작변화로 구성되어 춤에 세련된 아름다움이 깃들어 있다. 동래고무는 궁중의 정재도 아니고 순수 민속춤도 아닌 중간 장르의 춤으로서 현존하고 있는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승전무와 함께 교방무의 한 유형이라는 점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1987년 1월 부산민속예술관에서 첫 발굴 시연회를 가졌고, 현재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에서 보유 및 전수에 힘쓰고 있으며, 지도는 동래고무의 유일한 전승자인 김온경(신라대 교수)이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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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속가면극의 명칭은 지방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데, 경남은 오광대(五廣大), 중부지방은 산대놀이, 황해도 지방에서는 탈춤, 부산에서는 들놀음이라고 한다. 들놀음은 정월 대보름달 아래서 마을의 안녕을 빌고 한 해의 풍년을 기원하면서 농토를 상징하는 들에서 펼치는 놀이이다. 동래들놀음을 한자음으로 쓴 것이 동래야류(野遊)로서 다른 곳의 사람들은 일반적으로「야유」라 부르지만 동래에서는 「야류」라고 부르고 있다. 동래야류의 정확한 역사는 알 수 없으나, 증언에 의하면 120여년의 역사를 가진 것으로 생각된다. 일제의 민족문화탄압과 한국전쟁때문에 줄다리기와 함께 중단되었다가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전통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학자들과 지방유지들의 노력으로 조사·정리하여 재현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되어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동래들놀음의 구성은 길놀이와 군무 등의 전편과 문둥이과장, 양반과장, 영노과장, 할미·영감과장 등 탈놀음 4과장의 후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동래들놀음은 대동놀이인 동래줄다리기와 밀착되어 있을 뿐 아니라, 동민을 비롯한 지역민의 자발적인 참여로 단결과 애향심을 기르는 사회성이 강한 집단 연희라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 예능보유 종목은 원양반, 말뚝이, 할미, 가면제작, 악사가 있으며, 동래야류보존회가 부산민속예술보존협회의 후원을 받으면서 전승에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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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렬사의 제향은 조선왕조의 유교적 정치이념에 따른 생활철학이 구체화된 의식으로서, 임진왜란 때 왜적과 싸우다가 장렬히 최후를 마친 동래부사 송상현 공과 동래성 백성들의 영령을 이 고장의 선비들이 자발적으로 송공사에 봉안하고서 제향을 모신 데서 비롯된 것이다. 해마다 치르는 충렬사의 봄·가을제향은 음력 2월과 8월의 중정일(中丁日)에 봉행하는데, 제향 당시의 안락서원장이 초헌관(初獻官)이 되고 홀기(笏記: 의식의 순서 등을 기록한 것)에 따라 진행된다. 충렬사에는 수위(首位)의 동래부사 송상현 공,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 다대진첨사 윤홍신 장군을 비롯하여 모두 92위의 신위가 모셔져 있는데, 충렬사를 현 위치로 옮긴 1652년(효종 3)부터 동래의 유림에 의해 끊이지 않고 계속된 의식으로서, 변함없이 옛 법식대로 모셔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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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기간 : 2007/10/12 ~ 2007/10/14
개최지역 : 부산 동래구 동래읍성 북문광장, 동래문화회관
주관단체 : 동래구, 동래문화원
연 락 처 : 051-550-48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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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소개 : 부산의 뿌리이며 역사와 충절의 고장 동래에서
펼쳐지는 동래읍성 역사축제
부산광역시 동래구는 1995년부터 동래충렬제를 개최하여 오다가 2005년부터 자치 경쟁력을
강화하고 지역의 새로운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위하여 문화유산을 테마로 한 "동래읍성 역
사축제" 를 개발하여 지난해 부산시 최우수 축제 선정 및 제2회 대한민국 축제 박람회에서
우수상 수상으로 명실상부한 전국의 대표적인 역사교육형 체험 축제로 새롭게 태어났다.
청명한 가을 하늘아래 마안산 기슭 동래읍성 북문광장에서 전국 어느 축제에서도 볼 수 없
는 임진왜란 당시의 긴박한 전투상황이 스펙터클하게 펼쳐지는 『동래성 전투재현』 과 옛
날 어느 시골장터에 온 듯한 착각을 일으킬 정도로 꾸며진 『동래장터』 는 조선시대 동래
읍성민들의 생활상을 직접 느끼고 체험해 볼 수 있는 역사의 산 교육장이 될 것이다.
특히 『동래파전 주막』에서는 임금님께 진상한 부산의 토속음식 제1호인 동래파전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만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도 있으며 동래읍성에서의 잊지 못할 감동을 함
께 경험하게 될 것이다. |
프로그램 : [여는마당]
* 온천천 가족영화제(문화공연, 영화상영) - 10월 09일(화) ~ 10월 11일(목)
* 온천천건강체험마당(걷기대회 15:00~16:00) - 10월 11일)
[주행사]
* 10월 12일(금)
큰 윷놀이·장기대회, 동래읍성 성곽밟기, 학생백일장 및 사생대회, 동래부사행렬 및 동
래야유 길놀이, 개막식 및 개막축하공연, 개막축하 불꽃놀이
* 10월 13일(토)
전국 시조경창대회, 동래읍성 성곽밟기, 동래성전투 재현(1회), 전통무술시범, 널뛰기서
범단 공연·널뛰기·투호던지기대회, 동래사람 장영실 과학체험, 전통혼례 거행, 동래학
춤·동래야유 공연, 동래성전투 재현(2회), 모듬북 공연, 온천천아티스트팀 공연
* 10월 14일(일)
전국 시조경창대회, 동래읍성 성곽밟기, 동래성전투 재현(3회), 외줄타기 공연,동래사람
장영실 과학체험, 읍성민 씨름대회, 전통무술시범, 외줄타기 공연, 동래성전투 재현(4),
읍성민노래자랑 및 폐막, 소원지 소지
부대행사 : [체험,부대행사]
* 10월 12일(금)~10월 14일(일)
시 문화재시설 무료개방(복천박물관,충렬사), 동래세일대축제
* 10월 12일(금)~10월 14일(일)
역사축제 주제관, 동래 명물거리 홍보관, 민속놀이체험, 동래 문화예술작품 전시회, 우
표전시회, 소원지 쓰기체험, 병영·무기·복식 체험, 옥사·형틀 체험, 체험사진 현장
출력, 인공암벽 등반 체험, 먹을거리 장터·풍물난전,조선시대 동래장터 재현,전통특산
물·동래쑥굴레떡·옛날 군것질 판매, 동래파전 주막·난전·엽전·호패 체험,동기구·
짚풀공예·천연염색 체험,대장간·뻥튀기·전통연·민속놀이 체험, 도자·옹기·민속체
험·동래탈 전시
* 10월 13일(토)~10월14일(일)
동래부사 가마행차 퍼포먼스, 참살기 건강체험(체지방측정,비만상담)
행사장 위치안내 : * 시내버스 - 12, 36, 46, 49-1, 50, 51-1, 100, 110-1, 179, 189, 18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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