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정모때 본 '페인티드 베일'은 몇년전에 TV에서 보았는데, 언젠가 다시 보고 싶었던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서머셋 모옴의 원작임을 이번에 알았다구요, 그래서 그의 소설 '인생의 베일'을 읽기 시작했는데,
월드컵시즌이어서 TV중계 보다가, 또 읽다가 한참만에야 겨우 끝내고 몇자 껄적거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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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성토마스 의대에 다니던 서머셋 모옴이 6주간의 부활절 휴가를 얻어 피렌체로 갔는데 여기서
소설 '인생의 베일'의 힌트를 얻었다고 합니다. 그는 '창문너머로 성당의 아름다운 돔 지붕이 보이는 방'
—두오모 성당이었을 듯—에 기거했는데, 주인집 딸로부터 이탈리아어를 배우면서 단테의 신곡을 읽었습니다.
단테의 신곡은 주인공이 저승세계를 여행하며 지옥, 연옥, 천국에 있는 영혼들을 만나는 이야기,
베르길리우스와 베아트리체가 안내한다. 그런데 연옥에서 만난 '피아'는 이승으로 돌아가더라도 부디
자기 이야기를 잊지 말아 달라고 간청한다.
“당신이 현세로 돌아가 긴 여행의 피로를 풀게 되더라도, "나 피아를 기억해 주세요. 시에나에서 태어나
마렘마에서 죽었나니, 반지를 주며 나를 아내로 맞은 그가 잘 알고 있나이다.”
피아는 이탈리아의 귀부인이었으나 남편이 그녀의 불륜을 의심하여 미렘마에 있는 자기 성으로
데려가 독가스로 죽이려했지만, 시간이 오래 걸리자 그녀를 아예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것이다.
모움은 그 후로도 그 구절을 암송하며 깊은 사색에 잠기곤 했다. 그러다가 중국여행을 다녀온 후에
여기에 착안하여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원작에서는 상해가 아니라 홍콩, 그리고 메이탄푸는
위 지명 '미렘마'와 비슷하게 이름 지었다.
아래 사진은 서머셋 모움이 하숙집에서 보았다는 두오모 성당의 아름다운 돔이 보이는 피렌체 전경. 사진 왼편에 보이는 베키오 다리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만났지만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여 2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신곡'중에 천국편에서 단테를 안내한다.(2016년 촬영)
소설은 주인공 키티가 불행한 결혼생활을 통해 진정한 사랑, 용서와 화해, 그리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는 내용,
서머셋 모움의 소설들은 인간 본성을 세밀하게 관찰해가면서 그 특유의 통찰력을 발휘하기 때문에 감동적이고
또 재미가 있어서 전세계에서 많이 읽혀지고 있다.
첫장면은 이들 부부가 메이탄푸로 가는 가마를 기다리며 각자 다른 곳을 응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월터가 태연히 책을 읽고 있는 반면에 키티는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흰색구두를 흙탕물에 마구튀긴다.
그와 함께 페인티드 베일의 음악은 영화 전체에서 주인공들의 감정을 섬세하게 표현해낸다.'
https://youtu.be/NFa_XIFFrDQ
키티는 영화 부분에서 자신의 집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장면이 나오고, 그리고 수녀원에서 월터와
화해하는 시점에서 또 연주하는 모습이 나온다.
https://youtu.be/YlNGACtIm1I
주제음악은 에릭 사티의 '그노시엔느'(Gnossienne No.1), —그노시엔느는 그리스 남쪽의 섬 크레타,
혹은 ‘크레타 사람의 춤’을 뜻하는데, 이는 "신비스럽고 심플한 선율이 반복적으로 지속되는, 명상적이기도
하고, 몽환적이기도 한 음악"이라 한다. 그래서 음악을 만든 알렉상드르 데스플라는 2007년 골든 글로브상을
받았다. 중국의 유명 피아니스트 랑랑이 자막에 나왔는데 아마도 그의 연주인듯 하다.
https://youtu.be/b9WKC5sT9Z4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20년대 런던, 아름답고 명랑한 키티는 나이가 들면서 어머니의 잔소리에 못이겨
세균학을 전공하는 의사 월터와 덜컥 결혼한뒤 중국으로 간다. 그러나 키티는 총독부 고위관리인 유부남 찰스와
부적절한 관계를 맺다가 월터에게 들키고 만다. 월터는 콜레라가 창궐한 오지마을 메이탄푸로 같이 가던지,
아니면 간통죄로 고소하겠다고 협박한다. 키티는 찰스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자기와 결혼하자고 매달리지만
거절당한다.
어쩔 수 없이 키티는 월터를 따라 메이탄푸로 간다. 키티는 사방에 널려져 있는 죽음과 광활한 자연을 목격하며
서서히 변해간다. 특히 메이탄푸에 주재하는 세관원 워딩턴과 그의 아내 그리고 프랑스 수녀들과 교유하면서
자신을 깨우치고 새로운 동양적인 세계관을 접하게 된다.(수녀원장은 다이아나 리그가 연기했는데, 유명한
미드 '왕좌의 게임'에서 멋진 할머니로 나온다.)
그러나 불철주야 콜레라 퇴치에 전념하던 월터는 결국 감염된다. 소설은 영화스토리와 차이가 있다.
월터는 전염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세균실험을 하다가 감염되었을 것으로 유대령이 전한다.
그 시점은 키티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난 후 월터에게 누구의 아이인지 모르겠다고 고백한 뒤였다.
키티는 충격에 빠진다. 이윽고 남편의 장례식을 치르고 홍콩으로 돌아온 키티는 찰스의 아내 도로시의
간절한 청에 못이겨 그들 집에 머물다가 찰스와 또 한번의 관계를 맺게 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혐오감에
몸서리치며 뼈저린 반성을 하고 바로 영국으로 떠난다.
영국으로 가는 배 안에서 키티는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고 자신의 새로운 삶을 계획한다. 그리고 키티는
그동안 무관심했던, 그저 돈 벌어오는 사람으로만 생각했던 아버지를 이해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바하마의 법원장으로 일하게 된 아버지를 모시겠다며 아들과 함께 바하마로 떠난다.
모옴은 소설 첫머리에 셀리(Percy Shelly)의 시를 인용하고 있다.
"살아있는 자들이 인생이라 부르는 채색한 베일을 걷어내지 마라"
("Lift not the painted veil which those who live,.....")
가려져 있는 아름다운 베일을 들어 올리면 희망이 있을 것 같지만 베일 너머로 어른거리는 것은 허무와 공허함일뿐,
제목 '페인티드 베일'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어떻게 보면 세익스피어의 4대비극중에 하나이며 아내가 불륜을
저질렀다는 오해를 한 '오셀로'의 스토리도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다.
마르셀 프루스트는 말했다. “사랑하는 까닭은 상대방이 아니라 우리의 상상력 때문.."이라고, 불륜은 상상만으로도
강력하고 황홀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당사자들도 한결같이 '살아있음을 느껴요' 라고 상담의사에게
말한다고 한다. 찰스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상상한 키티, 그 결과는 비극적이다.
불륜은 어디서나 고통스런 것이다. 순간의 쾌락과 황홀감, 그러나 당사자들은 긴장과 고통에 시달린다.
이를 굳이 우리의 옛말로 표현하자면..........
"그래, 홧김에 서방질한다더니 그래서 행복하냐구 !"
(2018년 7월 음악감상동호회에 올린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