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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왕상13:11-24)-2024.9.29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감당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마다 당신의 사람을 부르셔서 당신의 일을 맡겨주십니다. 본문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등장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북왕국 이스라엘로 보낸 특사였습니다. 솔로몬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그리고 르호보암을 통해 남왕국 유다가 세워지고, 여로보암을 통해 북 왕국 이스라엘이 세워졌습니다. 문제는 북왕국 이스라엘보다는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한 편에 속했지요. 물론 둘 다 큰 차이는 없었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 남왕국 유다가 하나님 편에 가까워 보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여전히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북왕국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아니하셨던 것이지요. 비록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왕 여로보암이 여호와의 신앙을 저버리고 우상을 숭배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계셨던 것이지요. 북왕국 이스라엘의 여로보암은 그릇된 종교정책을 가지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서 벧엘과 단에 두었습니다. 그리고 다시는 남 왕국에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한마디로 여호와의 신앙을 버리고 금송아지 우상을 숭배하게 만든 것이지요.
그는 산당을 짓고 레위자손이 아닌 보통 백성으로 제사장을 삼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이지요. 심지어 자기가 직접 절기를 정하고 벧엘에 쌓아놓은 단에서 분향까지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가증히 여기는 못된 짓거리를 서슴지 않고 한 것이지요.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포기하지 아니하시고 불쌍히 여기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남 유다의 선지자를 북 이스라엘로 파송하신 것입니다. 특사로 파견하신 것이지요. 그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왜냐면 북 왕국 이스라엘에 진실한 선지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북왕국 이스라엘에 선지자라는 직함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참 선지자가 없었다는 것이지요. 대부분 정권에 아부하는 어용 선지자들이었던 것입니다. 북 왕국의 왕들이 우상숭배에 빠져들어 있어도 단 한 마디의 경고나 충고조차도 할 수 없는 정치권에 결탁한 어용 선지자들이었던 것이지요. 이처럼 종교의 타락은 정치권에 붙어서 자기들의 안전과 평안한 삶을 영위하는 종교인들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느 시대나 있었습니다. 지금도 예외는 아니지요. 문제는 여로보암 때 극심했던 것입니다. 그런 이스라엘을 하나님은 지켜만 보고 계실 수 없으셨습니다. 그래서 남 유다의 한 선지자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신 것입니다.
(1) 하나님의 사람의 사명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북 왕국 여로보암에게 보내어 특별 경고를 하신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죄악을 폭로하게 하시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드러내는 것이지요. 때마침 여로보암은 제사를 주관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하나님의 사람이 나타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의 죄악을 깨우쳐 줌과 동시에 장차 다윗의 집에서 일어나게 될 요시야라는 아들에 의해서 대대적인 개혁이 있을 것을 선포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여로보암을 향해 거침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했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의 예조가 임할 것을 통보했습니다. 단이 갈라지고 단위에 재가 쏟아질 것이라는 것입니다(3절). 그러자 여로보암은 자기를 향해 거침없는 말을 토해내는 하나님의 사람을 향해 손을 펴며 잡으라고 명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막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여로보암의 손을 말라서 다시 거두지 못하게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님의 사람이 선포한 예조대로 단이 갈라지고 재가 단위에 쏟아졌습니다. 순간 왕의 마음이 무너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여로보암 왕이 전략을 바꾼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자기를 위해 너의 하나님께 도움을 요청해 달라는 것이지요. 너는 나를 위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 은혜를 구하여 자기 손을 고쳐달라는 것입니다(6절). 그러자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간구하여 여로보암의 마른 손을 고쳐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살아계심을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지요. 그랬더니 여로보암의 태도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와 같이 자기 집으로 가자고 요청합니다. 쉬었다 가라는 것이지요. 거기다가 예물까지 주겠다는 것입니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호의를 베풀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은 왕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왕의 집의 절반을 준다할지라도 왕의 집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곳에서 베풀어주는 어떤 호의도 사양한다는 것입니다.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9절). 이는 우상숭배자들과 어떤 교제도 나누지 말라는 것입니다. 거기다가 유다로 돌아갈 때에 오던 길로 가지 말고 다른 길로 가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신속하게 사라지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오던 길은 익숙한 길입니다. 익숙한 길이기에 고생이 덜할 수 있습니다. 또한 왔던 길로 돌아감으로 인하여 도중에 좋지 않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나 지체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때 까지만 해도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미션을 잘 수행했습니다. 최소한 여로보암에게만은 무난하게 수행한 것이지요.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여주신 것이지요. 여로보암의 죄악을 미워하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보여주신 거예요.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이 특사로 보내신 성과를 다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마지막까지 주어진 사명을 잘 감당했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가 돌아가는 길에서 돌이킬 수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만 것입니다. 실수라기보다는 불순종의 죄악을 범한 것이지요.
(2) 하나님의 사람의 불순종
하나님의 사람은 끝까지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해야 합니다. 아마도 하나님의 사람은 자기를 파송하신 하나님의 목적을 잘 감당했다는 안도감으로 충만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자기를 여로보암에게 보내신 미션을 잘 감당했다는 뿌듯함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는 할 이야기는 다하고 보여줄 것은 다 보여주었습니다. 여로보암 왕 앞에서 기죽지 않고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다 보여주었던 것입니다. 그것만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래서 굉장한 포만감을 갖고 유다로 돌아오던 참이었을 것입니다.
그가 돌아오던 길에 상수리나무 아래 앉아서 쉬고 있었습니다(14절). 아마도 그가 쉬고 있던 상수리나무는 누구라도 알 수 있는 특별한 나무요, 사람들 눈에 금방 드러나는 곳에 있는 나무였을는지 모릅니다. 이는 오던 길로 돌아가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분명히 위배되는 곳에 있는 나무일 수도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피곤하면 쉴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상수리나무 아래에서 쉬었다는 것을 트집 잡을 수는 없습니다. 피곤해서 쉬고 있었는지, 혹은 모든 미션을 다 소화했다는 안도감으로 잠간 머물고 있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상당한 긴장감과 부담감을 갖고 여로보암 앞에서 하나님의 미션을 소화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수행했다는 안도감으로 몸과 마음이 릴렉스하게 되었을는지 모릅니다.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잠간 쉬었다 갈 생각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그때가 가장 위험합니다. 평안할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이야기합니다. 정상에 올라가는 것보다 내려올 때가 더 위험하고 조심스럽고 힘들다고 말입니다. 드디어 그곳에서 사단이 나고 말았습니다.
당시 벧엘에 한 늙은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북 왕국에도 명목상 선지자가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종교의 자유가 없는 북한에도 명목상의 교회가 있고 목사도 있습니다. 벧엘에도 늙은 선지자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때 늙은 선지자의 아들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벧엘에서 여로보암 왕에서 행했던 모든 일을 다 고했습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가 아들들에게 묻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어느 길로 돌아 가더냐는 것입니다. 아들들이 하나님의 사람이 돌아가던 길을 알려줍니다.
그러자 늙은 선지자가 아들들에게 아주 다급하게 나귀를 준비하라고 시킨 후에 하나님의 사람을 좇아갑니다. 그리고 상수리나무 아래에 쉬고 있던 하나님의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다짜고짜 하나님의 사람의 신분을 물은 후에 자기 집으로 초대합니다. 자기 집에 가서 떡을 먹고 쉬었다 가라는 것이지요. 사실 그가 무슨 목적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는지 모릅니다. 그가 영적 호기심이 발동하여 하나님에 관한 정보를 얻고 싶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진짜 그가 하나님의 사람인지 확인해보고 싶어서 그랬는지 알 수 없다는 말입니다. 혹은 또 다른 목적을 가지고 그랬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는 선지자라는 직함을 갖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참 선지자는 아닌 듯 싶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사람은 이번에도 늙은 선지자의 초대를 거절했습니다. 나는 그대와 함께 돌아가지도 못하겠고, 그대와 함께 들어가지도 못하겠으며, 내가 이곳에서 그대와 함께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겠다는 말입니다. 마치 여로보암에게 거절하던 방식으로 말입니다. 하나님이 자기로 하여금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오던 길로 돌아오지도 말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17절).
참으로 그는 분명한 소신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것이지요. 그 말을 들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자기 신분을 밝힙니다. 자기도 선지자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 마디를 덧붙입니다. 천사가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해주었는데 너를 집으로 데리고 가서 떡을 먹이고 물을 마시우게 하라셨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거짓말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문제는 늙은 선지자가 왜 하나님의 사람을 속였을까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것으로 볼 때 늙은 선지자가 참된 선지자가 아니라는 합리적인 추측이 가능할 뿐입니다.
왜냐면 단순히 속인 것이 아닙니다. 늙은 선지자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단서를 붙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속였거든요.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하는 행동으로밖에 볼 수 없는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을 시험하려는 목적을 갖고 했을 수는 있습니다. 혹은 하나님이 늙은 선지자를 사용하셔서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을 테스트해 보시려는 의도를 갖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하나님의 사람이 이 부분에서 무너지고 맙니다. 결정적인 죄악을 범하고 마는 것입니다. 늙은 선지자가 자기도 선지자라는 말에 하나님의 사람이 무너지고 만 것이지요. 선지자라는 말 한마디에 경계를 풀어버린 것입니다.
이것은 믿는 우리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 혹은 죄악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도 믿음생활하면서 우리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이 신앙적인 용어를 사용한다거나, 혹은 교회의 직분을 들먹거리면 금방 아군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자주 발생합니다.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대부분의 불협화음들이 주로 이런 일들로 인하여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불미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때 우리가 자주 듣는 말이 있습니다. 목사이기 때문에, 혹은 장로님, 권사님이기 때문에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들께 당했다는 것입니다.
이번 케이스도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가 자기도 선지자라는 말에 혹한 것입니다. 그냥 선지자라는 한마디 말에 아무 생각없이 무장해제를 해버린 것이지요. 분명히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자기가 직접 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소리를 듣고 무너진 것입니다. 최소한 그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하나님께 물었어야 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변개시키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일 당신의 말씀을 번복하신다면 하나님의 사람에게 말씀하셨어야 옳습니다.
민수기서 23장19절을 보면, “하나님은 인생이 아니시니 식언치 않으시고 인자가 아니시니 후회가 없으시도다 어찌 그 말씀하신 바를 행치 않으시며 하신 말씀을 실행치 않으시랴”.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소리를 하나님의 음성 듣는 것보다 더 우선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늙은 선지자의 집으로 따라갔습니다. 한번쯤 고민해보거나, 하나님께 물어보지도 않은 채 결정하고 만 것이지요. 어쩌면 지금 우리 시대에 우리들이 가장 쉽게 저지르는 실수, 혹은 범죄의 사례를 보여주는 것은 아닌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전혀 양심의 가책없이 늙은 선지자의 집에 가서 떡도 먹고 물을 마셨습니다. 배고픈 하나님의 사람이 떡을 먹고 물을 마시는 것이 무슨 큰 죄라도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명령을 어긴 불순종의 죄입니다. 떡을 먹고 물을 마신 행위가 죄라기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것이 죄악이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사람의 능력은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은 영적분별력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주변에 광명한 천사를 가장하여 믿는 자를 유혹하는 세력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일을 최우선으로 삼아야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할 때 조심할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귀로만 들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이 무엇인가를 분별하는 것이지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할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본문의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마음대로 판단한 것입니다.
(3) 하나님의 사람의 결국
하나님은 더 이상 하나님의 사람을 상대하지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늙은 선지자의 집에 들어가 상 앞에 앉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임한 것이 아니라 늙은 선지자에게 임한 것입니다(20절). 물론 늙은 선지자를 하나님이 인정해주셔서 임한 것은 아닙니다. 늙은 선지자를 하나님의 사람의 미래적인 운명을 알려주는 스피커로 사용하신 것이지요. 그는 불과 몇 시간전만해도 여로보암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선포되는 말씀을 늙은 선지자를 통해 들어야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얼마나 불쌍한 처지가 된 것입니까? 하나님이 상대하지 아니하심은 하나님의 영이 떠나신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가 하나님으로부터 완전히 버림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될 때도 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하실 수 없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은 시종을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자로 살아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이것은 믿는 자들이 가장 주의하고 경계해야 할 대목입니다.
무엇보다 황당한 것은 늙은 선지자가 하나님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외쳐야 했습니다.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며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아니했다는 것입니다. 사실 함정은 자기가 파고서 너무나 뻔뻔스럽게 외쳐야 했던 것이지요. 물론 하나님이 늙은 선지자를 통해서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어 하셨는지 모릅니다. 혹은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진위를 파악해 보려고 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벧엘의 선지자는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물론 우리는 그의 본심을 제대로 알 수는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여금 진짜 선지자인지, 혹은 가짜 선지자인지 테스트해 보기 위해 속였는지, 그것도 아니라면 하나님이 다른 목적을 갖고 늙은 선지자를 사용하셨는지 우리는 확실히 모른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늙은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것으로 보아 하나님의 사람의 믿음을 테스트해보시는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었을까라는 추측이 가능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가 열조의 묘실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22절). 이는 하나님의 사람의 잘못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지를 알려주시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자기 열조의 무덤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객사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굉장히 저주스러운 죽음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늙은 선지자의 마음도 편치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치 그가 하나님의 사람을 저주받게 만든 장본인이 아닌가 싶어서 말입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자기가 직접 목도했습니다. 아주 신비스러운 체험을 했던 것이지요. 자기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는 것과 자기가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친히 목도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무너져가는 북 왕국 이스라엘의 여호와 하나님의 신앙을 회복하기 위한 보루로 삼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늙은 선지자의 거짓말을 마치 용인하신 것처럼 보입니다. 밥 한끼 얻어먹은 하나님의 사람은 저주스런 죽음을 당하게 하시면서 거짓말로 하나님의 사람을 속인 늙은 선지자는 어떤 제재도 아니하십니다. 물론 하나님이 그의 죄악을 용인하시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어쩌면 그런 과정을 통해서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시고 그로 하여금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인지 모릅니다. 그 같은 추측은 32절을 통해서 가능합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외쳤거든요.
지금까지 무늬만 선지자로 살아온 늙은 선지자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가 비록 이름만 선지자의 직함을 갖고 있었을지라도 하나님이 그의 입을 하나님이 일하시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분명히 그는 여로보암의 망령된 행실 앞에서도 침묵할 수밖에 없는 벙어리 선지자였음이 분명합니다. 여기서 늙은 선지자라는 말은 생리적인 나이를 두고 사용하는 말이 아니라 선지자의 직분에 안주하고 살아온 세월을 의미 할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의 일은 직분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붙들린 것에 있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외 없습니다.
하나님이 쓰시기로 작정하여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기만 하면 하나님은 아무 조건 없이 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은 성경에서도 얼마든지 확인해 볼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믿음과도 상관없이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쓰임 받았던 인물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때문에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 붙들리어 쓰임받기를 간구해야 합니다. 늙은 선지자는 우상숭배의 땅으로 전락해버린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똑똑히 목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신앙으로 돌아와야 함을 배웠을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선지자였다면 자기가 속한 이스라엘에서 하나님을 드러내고 증거하며 살아야겠다고 다짐했을는지 모릅니다. 지금까지 정권에 야합하여 살았을지라도 말입니다.
늙은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람을 집으로 돌아가게 했습니다(24절). 그리고 그에게 나귀를 주었습니다. 아마도 지금까지는 도보로만 다녔던 하나님의 사람에게 선물이 주어진 것입니다. 만일 그가 나귀를 타고 왔다면 자기가 타고 온 나귀로 돌아가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흔적이 없습니다. 그는 도보로 다녔음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로부터 나귀를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사람이 그 나귀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이 정도의 호의는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별로 중대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의 사람에게 영적 경계심이 사라진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떡도 먹고 물도 마시고 나귀까지 얻어 타고 유다로 돌아오던 참이었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무거웠을는지 모릅니다. 늙은 선지자로부터 선포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후 두렵고 떨렸을 것입니다. 그 순간이라도 하나님께 자기잘못을 뉘우치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졌으면 어떠했을까라는 상상을 해 봅니다. 믿는자, 혹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아니거든요. 한순간의 잘못된 생각이나 판단으로 얼마든지 죄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는 자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죄를 버리는 곳을 알고 죄를 버릴 줄 안다는 것입니다. 그런 차원에서 하나님의 사람이 그 순간이라도 하나님께 자기의 잘못을 시인하고 돌아 왔어야 했습니다. 그런데 늙은 선지자로부터 저주에 가까운 하나님의 대언을 받고서 어떤 제스쳐도 취하지 않았습니다. 최소한 그가 하나님께 죄송함을 느꼈다면 늙은 선지자가 제공하는 나귀라도 단박에 거절해야 옳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북 왕국 이스라엘 땅에서 떡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하셨거든요. 하나님의 사람에게 금식을 당부한 것이지요. 그만큼 하나님은 우상숭배하는 자들과의 연합을 싫어하셨거든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의 가이드라인을 무너뜨린 거예요. 순간 양심이 둔탁해진 것이지요. 그래서 늙은 선지자가 제공하는 나귀를 덥석 타고 돌아오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그가 자기 땅으로 돌아오는 것을 허용치 아니하셨습니다. 그가 길에서 사자를 만나 죽임을 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자가 그를 죽인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 불순종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었습니다. 아주 신기하고 놀라운 것은 사자가 그의 시체를 먹지도 않았고, 그를 태우고 가던 나귀도 잡아먹지를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하나님의 섭리가 작동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사자를 피해 나귀가 도망치지도 않았고, 사자 역시 나귀를 잡아먹을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오히려 사자와 나귀가 죽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지켜주는 형국이 되어 버린 것이지요. 이는 사자의 본능으로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지령을 받은 사자가 하나님의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자의 입을 봉하신 것이지요. 결국 하나님이 사자를 불순종한 하나님의 사람을 심판하는 도구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이 대목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한순간의 실수로 떡과 물을 얻어먹은 하나님의 사람을 이렇게 무자비하게 다루실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거짓말로 속인 늙은 선지자는 가만히 내버려두시면서 말입니다. 얼마든지 우리는 인간적인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이 얼마나 이번 사건을 중대하게 다루시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북 왕국 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부터 우상숭배가 만행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은 그들에게 하나님께 돌아오는 것만이 사는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은 것입니다.
그렇게 중요한 사명을 갖고 미션을 수행하러 간 하나님의 사람이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것은 더 이상 어떤 것으로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의 불순종의 결과를 통해 이스라엘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로 인해 가장 가까이에서 목도한 늙은 선지자 한 사람이라도 하나님께 돌아올 수만 있다면 이스라엘은 소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은 것입니다. 물론 당대에 가장 하나님을 아프게 한 우상숭배의 원흉 여로보암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의 미션은 성공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이런 심판이 임했다면 북 왕국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에게는 어떤 심판이 임할까요? 결국 이런 스토리가 이스라엘 왕과 백성들에게 파다하게 퍼질 것이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 돌아와야 함을 분명히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은 전혀 하나님께 돌아올 마음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버림받은 왕이지요. 하나님의 크고 놀라운 역사를 보여줘도 어떠한 변화도 없었던 것입니다. 오히려 이 일후에 그가 악한 길에서 떠나 돌이키지 않았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33절). 그래서 믿음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물론 우리는 늙은 선지자의 믿음에 어떠한 변화가 있었는지 정확히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사람의 시체를 자기 묘실로 안치하고 장사를 지내주고, 자기도 죽은 후에 그 사람의 옆에 두라고 하는 것으로 볼 때 죽은 자에 대한 최고의 예우는 해준 것으로 보여 집니다. 그렇다고 그가 하나님의 신앙으로 돌아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얼마나 사랑하는 지도 보았을 것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을 저버리고 우상숭배를 할지라도 하나님은 여전히 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신다는 것을 배웠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십니다. 그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을 파송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미션을 믿음으로 수행하다가 한번의 불순종으로 비운의 죽음까지 당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의 억울한 죽음보다 하나님이 얼마나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사랑하시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이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반응할 때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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