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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91~193) 중앙SUNDAY 김명호(57세)교수는... 성공회대 중국학과 교수로 있다. 경상대·건국대 중문과에서도 가르쳤다. 1990년대 10년 동안 중국 전문서점인 싼롄(三聯)서점의 서울점인 ‘서울삼련’의 대표를 지냈다. 70년대부터 홍콩과 대만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한 데다 ‘서울삼련’ 대표를 맡으며 중국인을 좀 더 깊이 알게 됐고 희귀 자료도 구했다 <191>원폭·수폭 만든 중국의‘퀴리 부부’허쩌후이(何澤慧)와 첸싼장(錢三强) |제192호| 2010년 11월 14일
▲1980년대 말 손자들을 데리고 중산공원에 국화 구경을 나온 허쩌후이(왼쪽)와 첸싼장(오른쪽). 서구에서는 이들을 ‘중국의 퀴리 부부’라고 불렀다. 김명호 제공
1932년 여름 칭화대 물리학과는 신입생 28명을 선발했다. 그중 열 명이 여학생이었다. 교수들은 “학과가 망하게 생겼다”며 걱정이 태산 같았다. 여학생들을 붙잡고 여자들이 하기에는 힘든 학문이라며 전과를 권했다. 성적이 상위권이던 여학생들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작전을 바꾸는 수밖에 없었다. “연구실에만 있다 보면 결혼 적령기가 후딱 지나가 버린다. 그 사이에 똑똑하고 잘생긴 놈들이 다른 여자애들과 결혼해 버릴까 봐 걱정이다.” 결국 여학생 6명이 학과를 옮겼다. 신중한 축에 들던 3명도 한 학기가 지나자 결단을 내렸다.
교수들은 허쩌후이(何澤慧)에게만은 전과를 권하지 않았다. 성적이 제일 좋았고 남학생들이 무 더기로 따라갈 가능성이 있었다. 실제로 경제학자 위광위안은 물리학이 체질에 맞지 않았지만 한 가지 이유 때문에 학과를 옮기지 않았다.
◀1936년 독일 유학 떠나기 직전의 허쩌후이.
첸싼장(錢三强)은 허쩌후이와 입학동기였다. 어릴 때부터 프랑스 사상가 오귀스트 콩트의 이름에서 따온 쿵더(孔德)학교를 다니며 좋은 교육을 받았다. 아버지 첸셴퉁(錢玄同)은 신문화 운동 시기의 대표적인 학자였다. 루쉰(魯迅)도 첸셴퉁이 권하는 바람에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칭화대 기숙사는 8명이 한 테이블에서 밥을 먹었다. 언제부터인지 몰라도 남녀합석이 전통이었다. 아는 게 많고 언변이 뛰어났던 첸싼장은 신이 나서 떠들다가도 허쩌후이만 나타나면 딴사람으로 변했다. 갑자기 말을 더듬고 예의를 차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4년 후 허쩌후이는 물리학과를 1등으로 졸업했다. 고향에서 지급하는 장학금으로 탄도미사일 만드는 법을 배우겠다며 독일 유학을 떠났다. 목적이 분명했다. “일본인들이 중국을 못살게 군다. 귀국하면 이것들을 아주 날려 버리겠다.” 3년 만에 ‘유도탄 비행속도에 관한 새로운 측량법 연구’로 학위를 받았다.
2등으로 졸업한 첸싼장도 베이징물리연구소 조수로 있던 중 프랑스 유학 기회를 얻었다. 일본과의 전면전이 임박한 때였지만 연구소 소장은 “너 아니라도 전쟁할 사람은 많다. 너는 할 일이 따로 있다”며 직접 프랑스까지 데리고 가 제2대 퀴리실험실에 입학시켰다.
첸싼장은 틈만 나면 허쩌후이에게 안부 편지를 보냈다. 무미건조한 내용이다 보니 답장도 비슷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에는 양국 간 서신왕래 금지로 그나마도 불가능했다.
1943년부터 25자 이내의 편지를 개봉 상태에서 주고받는 것이 가능해지자 허쩌후이가 먼저 편지를 보냈다. “내가 잘 있다는 편지를 쑤저우에 있는 부모에게 보내 달라”는 내용 이었다. 첸싼장은 ‘나를 얼마나 믿었으면 이런 일을 시킬까’라는 생각이 들자 기분이 좋았다고 한다.
2년간 별난 심부름을 하던 첸싼장은 용기가 생기기 시작했다. 몇 날 며칠을 궁리한 끝에 독일로 편지를 보냈다. 하고 싶은 말을 25자로 표현하자니 보통 일이 아니었다. “장기간 편지를 주고받았다. 우리 결혼하자. 동의하면 답장해라. 함께 귀국하자.” 32년을 살면서 처음 써보는 연애편지였다. 자신은 있었지만 무슨 변덕을 부릴지 몰라 불안했다. 답장도 간단했다. “고맙다. 영원히 너에게 충성하마. 만나서 같이 귀국하자.” 1946년 봄 허쩌후이는 가방 하나만 달랑 들고 독일을 떠났다.
4월 8일 밤 파리의 중국영사관에서 허쩌후이와 첸싼장의 결혼식이 열렸다. 퀴리 부부를 비롯한 30여 명이 하객으로 참석했다.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이 신혼부부가 10여 년 후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을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퀴리 부부도 마찬가지였다. <192>마오쩌둥, 외교관 망명 막으려 인민군서 대사 차출 |제193호| 2010년 11월 21일
▲1955년 5월, 반둥회의를 마치고 자카르타 주재 중국대사관에서 관원들과 함께한 총리 저우언라이(밑에서 둘째 줄 한가운데 넥타이 맨 사람)와 부총리 천이(저우언라이 왼쪽). 김명호 제공
1949년 1월 19일, 내전 승리를 앞둔 마오쩌둥(毛澤東)은 외교문제에 관한 세부사항들을 중공 중앙위원회에 서면으로 지시했다. 말미에 “중국은 독립국가다. 그 어떤 국가나 연합국(유엔)의 내정간섭을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 중국 경내에서 발생하는 모든 일들은 중국 인민과 인민의 정부가 스스로 해결하는 것이 마땅하다”며 구(舊) 중국의 굴욕외교와 확실한 선을 그었다.
10월 1일 사회주의 중국을 선포하는 자리에서도 “본 정부는 전국 인민의 유일한 합법정부인 중화인민공화국을 대표한다. 상호 평등과 쌍방의 이익을 준수하고, 영토주권의 원칙을 존중하는 국가들과 정상적인 외교관계가 수립되기를 희망한다”는 말을 덧붙였다.
마오의 외교정책은 부뚜막을 새로 만들고, 집안을 깨끗이 청소한 후에 다시 손님을 초대하고, 사회주의 일변도(一邊倒)를 견지한다는 세 가지였다.
◀1949년 3월 허베이(河北)성 시바이포(西柏坡)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7차 2중전회에서 신중국 외교방침을 선언하는 마오쩌둥.
신(新)중국 선포 1개월 후인 11월 18일, 북양정부 외교부 소재지였던 ‘둥단구(東單區, 현재의 東城區) 외교부가(街) 31번지’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외교부’ 현판식이 열렸다. 판공청(辦公廳) 주임 왕빙난(王炳南)이 성립대회를 주재했다. 부(副)부장 리커농(李克農)이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를 소개했다. 저우의 인사말은 훈시라기보다 덕담 수준이었다. “모든 기관이 성립대회를 연다. 우리도 예외가 아니다. 이게 바로 형식주의다.” 회의장에 폭소가 터졌다. “리커농 부부장의 착오를 수정하겠다. 나는 외교부장이다. 앞으로 외교부 사람들은 나를 총리라 부르지 마라. 부장이라고 불러라.” 저우는 국무원 총리와 외교부장을 겸하고 있었다.
신중국 외교부는 전 세계를 대상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저우언라이가 사무용품을 새로 구입하 지 말라는 바람에 북양정부가 쓰던 비품들을 그대로 사용했다. 자동차도 없었지만 자전거 하나만은 당시 최고급이었던 봉황(鳳凰)표 20대를 홍콩에서 구입해 타고 다녔다. 대우는 형편없었다. 한 달 봉급 3위안(元), 싸구려 신발 한 켤레 값이었다. 매달 아이스케키나 과자 사먹기에도 빠듯한 돈을 받다 보니 끼니는 모두 구내식당에서 해결했다.
해방 초기 가장 흔한 식료품이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버터였다. 1년 열두 달 하루도 빠짐없이 좁쌀 밥에 버터를 넣고 비벼 먹던 신중국 초기 외교부 근무자들은 나이가 들어서도 버터만 보면 고개를 돌렸다고 한다. 4년이 지나자 야채 볶음과 닭고기들이 가끔 나오고 제대로 된 봉급을 받기 시작했다.
외교부는 1년 만에 17개 국가와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중 6개는 의식 형태가 완전히 다른 자본주의 국가였다. 영국·파키스탄·노르웨이 등 7개국과도 수교를 위한 회담이 진행 중이었다. 마오쩌둥은 1차로 해외에 파견할 특명전권대사 15명을 인민해방군 지휘관들 중에서 차출했다. 국민당 시절 외교 업무에 종사했던 외교관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해외에 내보낸다면 망명을 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실제로 마오쩌둥은 농담이라며 “왜 장군들을 파견하려 하는지에 대해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적어도 이 사람들은 도망갈 염려가 없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한번도 빨아 본 적이 없는 두툼한 군복에 짐 보따리를 둘러멘 사람들이 꾸역꾸역 외교부로 몰려들었다. 장정과 항일전쟁, 국공전쟁을 거치며 많게는 10여 만에서 적어도 2만 명 이상의 전투병력을 지휘한 경험이 있는 장군들이었다. 개중에는 베이징(北京)을 처음 와 본 사람도 있었지만 평생 주눅이라는 것을 들어 본 적 없는 듯 행동거지에 거침이 없었다. 따라온 부인들의 행색도 남편들과 비슷했다.
저우언라이는 온 몸에서 화약냄새가 가시지 않은 미래의 전권대사와 부인들을 위해 호텔 한 개를 비워놓고 외교부 강당에 ‘대사 훈련반’을 개설했다. 걱정이 태산 같았다. <계속> <193>“총칼 대신 입으로 싸워라” … 마오, 군 출신 대사 설득 작전 |제194호| 2010년 11월 28일
▲대표적인 장군 출신 외교관 황전(黃鎭)은 화가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대사와 프랑스대사, 초대주미연락사무소 소장 등 5개국 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역임했다. 둘째 사위인 외교 담당 국무위원 다이빙궈(戴秉國)도 프랑스대사와 외교부 부부장을 지냈다. 1964년 6월, 엘리제궁에서 드골 프랑스 대통령(가운데)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뒤 기념촬영을 한 중국의 초대 주프랑스대사 황전. 김명호 제공
1950년 봄, 제3야전군 7병단 정치부 주임 지펑페이(姬鵬飛)는 외교부에 근무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왕년의 직속상관 쑤위(粟裕)를 찾아가 군대에 남아 있게 해 달라고 하소연했다. “우리는 장군이다. 국가가 요구할 때 선택할 권한이 없다”는 답을 듣자 군말 없이 베이징을 향했다.
저우언라이의 부름을 받은 제2병단 참모장 겅뱌오(耿飇)는 솔직한 사람이었다.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겠다. 외교에 관해 아는 것이 전혀 없어 걱정이다”며 한숨만 내쉬었다.
장정 시절 백발백중의 사격 솜씨를 자랑하던 중앙군사위원회 정치부 주임 황전(黃鎭)은 부인 주린(朱霖:현 국무위원 다이빙궈의 장모)이 축하는커녕 “혼자 나가서 외교관 노릇 열심히 해라. 나는 국내에서 할 일이 많다”는 말을 하자 난감했다. 겨우 달래 이불 보따리 2개와 자녀들을 데리고 외교부에 도착했다.
유격전과 정규전을 두루 거친 한녠룽(韓念龍)과 황포군관학교 1기 출신인 난징(南京)군구 경비사령관 위안중셴(袁仲賢)도 답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는 작전 지역을 옮겨 다니던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시키기 위해 전쟁과 외교를 교묘히 결합시켰다. “여러분은 새로운 전쟁터로 나간다. 외교는 전쟁과 똑같다. 그동안 총칼을 들고 싸웠지만 이제부턴 글과 입으로 싸워야 한다. 작전 지역 이동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외교무대가 전쟁터와 같다는 말을 들은 장군들은 그제야 귀가 솔깃했다. 전쟁이라면 자신 있었다. 외국어 때문에 걱정하는 사람들에겐 “우리가 언제 외국어 잘해서 전쟁에 이겼느냐. 상대방이 말할 때 웃으며 고개만 까딱거리면 된다”며 안심시켰다.
가장 중요한 사항 중 하나인 ‘신임장 제정’에 관한 설명은 주린이 “대단한 건 줄 알았더니 소개장이네”라며 한마디 하자 다들 “맞다”고 박장대소하는 바람에 쉽게 끝났다. 따지고 보면 신임장이나 소개장이나 그게 그거였다.
각 방면의 전문가와 학자들이 국제법·연합국헌장·면책특권 등 외교관이 꼭 알아야 될 것들을 주입시키고 신임장·비망록·전보·회담기록 등의 전시회도 열었다. 모두 난생 처음 보고 듣는 것들이었다. 장군들의 시야가 서서히 넓어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생활습관이었다. 호텔에 머물며 훈련을 받던 장군들은 아침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것 같았다. 스프링이 달린 침대는 옷 입은 채로 땅바닥에서 자는 것만도 못했다. 소파는 앉으면 몸이 푹 꺼지고 제대로 움직일 수 없었다. 방 안에 화장실이 있는 것도 이상했다.
양식 먹는 법과 사교춤은 정말 배우기가 힘들었다. 양복에 넥타이 매고 포크와 나이프질 하자니 숨이 막혀 음식이 제대로 넘어가질 않았다. 두부 한 판과 찐빵 10개를 단숨에 먹어 치워도 탈 난 적이 없었던 장군들은 화장실 드나드느라 정신이 없었다. 전쟁 시절 틈만 나면 모여 춤을 췄지만 마룻바닥 위에서 추는 춤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부인들은 더 힘들어했다. 포성 속에서 성장한 전사들에게 파마와 얼굴 화장, 치파오와 굽 높은 신발은 애초부터 무리였다. 예절교육 담당자가 “남편은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들이다. 외교관 부인은 복장·행동·말투가 남달라야 한다. 남편이나 과거의 동지들이 좀 모자란 행동을 했다고 소리부터 버럭 지르는 교양 없는 행동은 정말 고쳐야 한다”는 말을 하자 분노가 폭발했다.
주린이 “우리는 자신을 해방시키기 위해 혁명에 참가했다. 부속품 노릇 하라니 어이가 없다. 이건 모욕이다”며 격앙하자 “대사 부인 하느니 이참에 이혼하고 군부대로 돌아가겠다”는 발언들이 속출했다. 여전사들은 총리 면담을 요구했다.
저우언라이는 부인 덩잉차오에게 도움을 청했다. 덩은 “상하이에서 지하공작자 생활할 때 치파오를 입고 나갈 때마다 창피해 죽는 줄 알았다. 뾰족한 신발 신고 계단을 내려오다가 굴러떨어진 적도 있었다”며 부인들을 진정시켰다.
신중국 초기에 군대에서 차출한 장군 출신 대사들의 평균 연령은 41세였다. 초대 북한대사 니즈량(倪志亮)이 49세로 제일 많았고 불가리아대사 차오샹런(曺祥仁)은 35세로 제일 어렸다. 초대 주소대사 왕자샹(王稼祥)은 여권 없이 모스크바로 부임했다. 만드는 것을 미처 생각 못했는지 아니면 놓고 갔는지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다. |
첫댓글 천싼장의 청혼과 허쩌후이의 승락, 참 쿨하네. 그나저나 허쩌후이의 젊은 시절의 미모가 대단하네. 뽀샵도 없었을 텐데... 요즘 중국의 최고 미녀 배우로 치는 탕웨이나 판빙빙 따위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외교관을 군인으로 채운다는 발상은 당시로서는 일리가 있는 선택으로 생각되네. 장군 각시들이 갖고 있던 혁명전사로서의 자존감도 놀랍고. 그런데 박정희 시절 군바리 출신들을 대사로 많이 임명한 것은 경우가 다르겠지?
다시 봐도 김교수 말처럼 何澤慧... 곱네 고와~~~ㅎ
그런데 첫번째 사진에 백발 할망된 거 보면 색즉시공....!
역시 아름다움은 마음이나 영혼 따위에 담아야 할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