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태양이 이글거리던 안동의 초여름이 아직도 내 마음 속에 그대로 남아있는데, 벌써 한 해가 넘는 시간이 흘렀습니다. 지난해 여름 경북 안동을 찾게 된 것은 서른이 다된 나이에 건축에 뛰어든 한 지인 때문이었습니다. 저와 더불어 법학을 공부하며 논리, 이론에 입각한 법체계를 하나하나 쌓아나가던 그가 그 길을 접고 집 짓는 일을 공부하겠다고 했을 때 적잖이 놀랐습니다.
하지만 결국 법이란 것도 우리 삶에 둘러진 커다란 테두리이듯, 집 역시 우리네 삶을 따뜻하게 감싸고 있는 울타리이기에, 늦은 시작이지만 당신의 올곧음과 한결같은 끈기로 잘해낼 수 있을 거라고 격려를 해주었습니다. 그는 더딘 출발을 만회라도 하듯 남들보다 배의 노력을 기울이며 첫학기를 다녔고, 방학을 맞자 경북 안동의 옛 건축물을 돌아보는 여행을 계획했습니다. 저도 기꺼이 동행길에 올랐습니다.
삶과 문화가 함께 하는 안동
경북 안동 하면 하회마을이 일단 떠오르지만 그 밖에도 우리 조상들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역사적 건물들이 참 많습니다. 사찰 봉정사를 비롯해 도산서원, 병산서원 등 우리 조상들이 가장 중시했던 덕목인 충·효·예를 가르쳤던 서원들도 모여있고, 안동김씨종택, 예안이씨종택, 전주유씨종택 등 전통한옥의 고유한 아름다움도 이 안동에서 제대로 느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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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여름 오후 햇살이 내리쬐는 도산서원에서. 우리 전통한옥 지붕의 정갈함, 처마 끝이 빚어내는 아름다움에 가슴이 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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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우리는 경북 안동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도산서원으로 향했습니다. 도산서원은 퇴계 이황 선생님이 유생을 가르치며 학덕을 쌓던 곳입니다. 일명 영남지방 유학의 메카로 불리웠던 곳이지요. 향교가 마을의 중심에서 지금의 학교 같이 제도적 교육을 이끌어왔다면 서원은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산수가 빼어난 한적한 곳에 정자, 전사청(제사를 지내기 위해 제수를 마련하는 곳) 등을 지어놓고 유생들의 교육과 함께 학문의 전통을 지켜나가고자 했습니다.
도산서원의 가장 중심인 도산서당을 찾아 마루에 걸터앉아 보았습니다. 도산서원 중에서 가장 소박하고 투박합니다. 이황 선생님의 청렴한 심지를 알 수 있게 합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서당을 둘러싼 담이 독특합니다. 담을 세워놓긴 했지만 주변 풍경이 가리워질 않고 너무 자연스럽습니다. 도산서원의 담은 일반 주택에서의 담 역할을 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닙니다. 중간을 터내고 그 자리에 나무를 심었습니다. 작은 정원이지만 절대 답답해보이지 않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이황 선생님은 주위를 둘러싼 산의 녹음까지 건물 안에 끌어들이는 지혜를 발휘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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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은 벽이되 벽이 아니노라. 주변의 풍광까지 안으로 담아낼 수 있는 이황 선생의 지혜가 담긴 벽을 내 안에 세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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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바로 앞에는 우물 '정(井)' 자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는 '열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이 물은 깨끗하고 맛이 좋아 선생께서 식수로 사용하시던 우물이라고 합니다. 우물 앞엔 담이 없는 것처럼 서당 왼편 담도 터 있습니다. 군자만 다닐 수 있다는 산책길인데요. 이황 선생님께서 거닐으셨던 길이겠죠? 그런데 동행이 갑자기 주위를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이 산책길을 올라가자고 합니다. 아주 멋진 풍경을 보여주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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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밟았는지 작은 냇가에 놓여있는 돌다리가 반들반들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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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자, 지금 1000원 지폐를 한 번 꺼내보시겠어요? 동행을 따라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니 우리에게 익숙한 풍경이 펼쳐집니다. 녹음이 우거진 도산서당의 모습은 우리가 1000원 지폐에서 보아오던 그것이었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삼촌이 1000원 지폐 속에 있는 집들을 잘 살펴보면 마당에 비질하는 할아버지가 있다고 그랬습니다.
비질하는 할아버지를 찾으면 1000원 한 장 더 주겠다고도 약속했지요. 어린 마음에 담 뒤에 숨어있을까 싶어 1000원을 올렸다 내렸다 옆으로 봤다 거꾸로도 봤다가 하면서 열심히 찾았지요. 그러면 삼촌이 한 마디 했습니다. "세나야! 네가 찾는 동안 할아버지 비질하다가 들어가셨다!" 옛 추억이 생각나 도산서원 풍경을 내려다보며 웃음을 지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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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00원 지폐 속 도산서원엔 사람이 한명도 없었는데... 보이시나요? 현실 속 도산서당 툇마루엔 한 처자가 앉아있습니다. 바로 접니다. 동행에게 부탁해 한 장 찍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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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도산서원을 돌아보니 벌써 저녁 때가 다되갑니다. 오늘 묵을 곳은 지례예술촌입니다. 전통한옥체험과 동시에 숙박까지 할 수 있는 곳이지요. 동행에게는 전통가옥의 구조를 공부할 수 있는 좋은 기회고, 바다, 강, 호수를 좋아하는 저는 임하호가 내려다 보인다는 것에 혹하여 숙소를 정한 것입니다. 하지만 찾아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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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 가는 길. 비포장길을 굽이굽이 따라가야합니다. 이 길을 따라가다보면 세상에 우리 둘만 있는 것 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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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지례예술촌 가는 초입엔 '수애당'이라는 수애 유진걸이 지은 사가도 있습니다. 이곳도 한옥체험과 함께 숙박이 가능하더군요. 마을 어귀에 들어가자마자 수애당이 보이길래 지례예술촌도 금방 도착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지례예술촌은 그리 쉽게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 산중에 비포장이라도 이런 길을 만들었을까 싶을 정도로 울퉁불퉁 산 깊이 찾아 들어가야 합니다.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는 지례예술촌 촌장님께 전화를 드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안동역이든 버스터미널이든 연락하면 차로 태우러 온다고 하시네요. 직접 차로 운전해간다면 그 역시 한 번 해볼 만합니다. 비포장 길을 힘들게 가야하지만, 그만큼 주위에 펼쳐지는 풍광이 너무 멋집니다. 아름다운 임하호에 넋이 빠졌다가 다시 우리가 제대로 찾아가긴 하는건가, 과연 지례예술촌이 현실 속에 존재하는 곳이긴 할까? 라는 생각이 들 때 쯤 저멀리 한옥 지붕들이 겹겹이 보입니다. 드디어 도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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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묵은 곳에서 보이는 풍경입니다. 며칠전 비가 많이 내려 임하호 물이 많이 불어나있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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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지례예술촌 김원길 촌장님께 간단한 인사를 드리고 늦은 저녁을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날이 복날이라 백숙이 저녁 식탁에 오릅니다. 안동 간고등어도 빠지지 않습니다. 맛있게 한공기 뚝딱 비우고 나와보니 주위가 너무 깜깜합니다. 한여름 밤, 그곳에는 고택과 임하호와 밤하늘의 별 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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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에서 내려다보이는 임하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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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둘이서 방바닥에 누워서 별 보며 그날의 여정에 대해서 이얘기 저얘기 하다가 지례예술촌에 대해서 몇 가지 묻고 싶어서 촌장님을 찾아나섰습니다. 촌장님께선 예전에 서당이었던 지산서당이란 곳에 계셨습니다. 마당에서 바라보면 참 웅장하고 멋이 깃든 집입니다.
촌장님께 지례예술촌이 어떻게 세워졌는지 역사를 전해들었습니다. 1663년 조선 숙종때 지어진 김방걸(1623∼1695) 선생의 종택인 지촌종택과 지촌제청 및 지산서당이 임하댐의 건설로 수몰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건물들을 지금 있는 산등성이로 옮기며 지례예술촌이라는 이름으로 자리하게 되었다고 하네요. 우리는 새벽까지 그 지산서당에서 술잔을 기울였습니다. 그곳에서 학문을 닦으셨던 조상분들이 보시면 예끼! 하셨을까요? 우리는 이곳에서 좋은 사람들 두 분을 더 만났습니다.
영화감독 지망생인 시나리오 작가님과 여행을 좋아하는 멋진 분위기의 40대 언니와 함께 소주 댓병을 놓고 영화, 건축, 문학, 여행…. 여러 얘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나중에 촌장님이 내쫓을 때까지 두런두런 이야기꽃을 피웠다죠? 시나리오 작가님은 이곳에서 장기체류를 하며 감독 데뷔작을 구상하고 계시다고 합니다. 좋은 작품으로 관객과 만날 수 있기를 기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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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예술촌의 지산서당, 앉아계신 분이 바로 전날 함께 지례의 아름다움에 대해 얘기나누던 작가분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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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아침에 일어나서 집에다가 안부 전화를 넣으려고 하니 핸드폰이 안터집니다. 핸드폰을 높이 쳐들고 마당 여기저기를 종종 걸음으로 돌아다녀도 안테나가 뜨질 않습니다. 그때서야 마당에 놓여있는 공중전화기가 눈에 띕니다. 처음 지례에 와서 공중전화를 봤을땐 운치 있으라고 놓으신 줄 알았습니다. 아닙니다. 지례예술촌의 유일한 연락수단이라는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는 녀석입니다. 동전을 넣고 엄마와 통화를 합니다.
"엄마, 여기 너무 좋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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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예술촌의 유일한 연락수단, 공중전화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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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 촌장님께 인사를 드리고 지례를 나섰습니다. 오늘은 안동여행 두 번째 여정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에 마음이 바쁩니다. 처음 지례를 찾아가던 길에선 두려움 섞인 감탄으로 임하호를 내려다봤지만, 지금은 산이 굽이굽이 둘러져있는 임하호를 경이로운 눈빛으로 바라봅니다. 내려가는 길에 전경이 이러하니 정말 지례예술촌은 얼마나 깊은 곳에 그 자태를 숨기고 있는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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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례를 떠나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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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세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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