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모- 땃사 바가와또 – 아라하또- 삼마-삼붓닷사(3회) Namotassa bhagavato arahato sammāsambuddhassa 제5권 수행를 위주로 한 가르침 Mahā - vagga 제44 주제 설명하지 않음[無記] 상윳따(S44) Avyākata -saṁyutta40) 40) 설명하지 않음[無記]은 Avyākata를 옮긴 것이다. 이 술어는 vi(분리해서) + ā(향하여) +√kr(to do)의 과거분사인 vyākaya에다 부정접두어 a-를 첨가하여 만든 단어이다. 이 술어의 동사인 vyākaroti는 기본적으로 ‘설명하다, 대답하다, 선언하다, 결정하다’ 등의 듯이 있다. 여기서 파생된 명사인 vyākaraṇa는 문법이나 문법학을 뜻한다. 그러므로 avyākata는 ‘설명되지 않는, 답하지 못하는’ 등의 의미이며 그래서 중국에서는 無記로 옮겼다. avyākata는 본 상윳따의 「목갈라나 경」(S44:7) 등에서 보듯이 초기불전에서는 최종적으로 10가지 설명하지 않음[十事無記]으로 정착이 되어 나타난다.(『디가 니까야』 「뽓타빠다 경」(D9)§3의 주해를 참조하기 바란다. 그런데 본 상윳따의 처음 여섯 개의 경들(s44:1~6)처럼 여래의 사후에 대한 네 가지만이 나타나는 곳도 있다.( 『디가 니까야』 「정신 경」(淨信經, D9) §30과 『앙굿따라 니까야』「설명하지 않음[無記 경」(A7:51) 등도 그러하다.] 그리고 『디가 니까야』 「마할리 경」(D6) §15처럼 ‘생명과 몸은 같은 것인가?’,’생명과 몸은 다른 것인가?’라는 두 가지만 언급되는 곳도 있다. 한편 무기(無記, avyākata)는 아비담마에도 채용되어 중요한 술어로 쓰이고 있다. 아비담마에서는 유익한 법[善法, akusala- dhamma] 도 아닌 법들, 정확하게 말하면 과보로 나타난 법들과 작용만하는 법들을 무기(無記, avyākata)라고 정의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비담마 길라잡이』 제1장 §3의 해설과 제6장 §6의 해설을 참조할 것. 그러면 부처님께서는 왜 이러한 10가지나 네 가지에 대해서 설명을 하지 않으셨는가? 『앙굿따라 니까야』「설명하지 않음[無記 경」(A7:51)은 이렇게 설명한다. 첫째, 이것은 단지 견해일 뿐이기 대문이다. 사후의 여래가 존재한다는 것도 견해일 뿐이요. 그렇지 않다는 것도 견해일 뿐이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배우지 못한 범부는 이러한 견해를 꿰뚫어 알지 못하고, 견해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견해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견해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에게 이러한 견해는 강해진다. 그는 태어남과 늙음 ∙ 즉음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A7:51 §2) 둘째 그러면 이러한 견해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그것은 갈애 등에서 기인한 것이다. 여래는 사후에 존재한다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하는 견해는 본인의 갈애나 인식이나 사량분별 등에서 생긴 것일 뿐이다. 그래서 「설명하지 않음[無記 경」(A7:51)에서 세존께서는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이러한 견해는] 갈애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인식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생각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사량분별해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취착에서 나온 것이고, 이것은 나중에 후회할 일이다.”(A7:51 §4) 그런데도 배우지 못한 범부는 나중에 후회할 일을 궤뚫어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일어남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소멸을 꿰뚫어 알지 못하고, 후회할 일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을 꿰뚫어 알지 못한다 그의 후회할 일은 증가한다. 그는 태어남과 늙음 ∙ 죽음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하고, 근심 ∙ 탄식 ∙ 육체적 고통 ∙ 정신적 고통 ∙ 절망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 그는 괴로움으로부터 해탈하지 못한다.”(A7:51 §4)라고 세존께서는 말씀하셨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견해나 갈애나 인식이나 생각이나 사량분별이나 취착을 없애기 위한 가르침이다. 그러므로 여래는 사후에도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가라는 것은 그 대답이 어떤 것이던 경해일 뿐이고 가래일 뿐이고 사량분별일 뿐이다. 그리고 이러한 견해 등은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맛지마 니까야』 「말롱꺄뿟따 경」(M63, 한역 「전유경」(箭喩經)과 상용함, 독화살의 비유)과 『디가 니까야』제1권 「뽓타빠다 경」(D9)에서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10가지 의문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뽓타빠다여, 이것은 참으로 이익을 주지 못하고, [출세간]법에 바탕한 것이 아니며, 청정범행의 시작에도 미치지 못하고,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소멸로 인도하지 못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지 못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지 못하고, 열반으로 인도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설명하지 않는다.”(D9 §28) 부처님께서는 이러한 사량분별 대신에 “뽓타빠다여, ‘이것은 괴로움이다.’라고 나는 설명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일어남이다.’라고 나는 설명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설명한다. ‘이것은 괴로움의 괴로움의 소멸로 인도하는 도닦음이다.’라고 나는 설명한다.” (D9 §29)라고 하셨다. 무슨 이유 때문인가? “뽓타빠다여, 이것은 참으로 이익을 주고, 청정범행의 시작이며, 전적으로 [속된 것들을] 역겨워함으로 인도하고, 욕망이 빛바램으로 인도하고, 소멸로 인도하고, 고요함으로 인도하고, 최상의 지혜로 인도하고, 바른 깨달음으로 인도하고, 열반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것을 설명한다.”(D9 §30)라고 하셨다. 그리고 「말롱꺄뿟따 경」(M63)의 결론 부분에서 세존께서는 “내가 설명하지 않은 것은 설명하지 않은 대로 호지하라. 내가 설명한 것은 설명한 대로 호지하라.”(M63 §7, §10)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불자는 이러한 부처님 가르침의 분명한 입각처에 바른 이해와 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붓다사 사낭 찌랑 띳타뚜(3회) buddhasāsanaṃ ciraṃ tiṭṭhatu) 불법이라 불리우는 법과율의 가르침이 오랜세월 훼손없이 존속하여 머무소서. Sādhu! Sādhu! Sādhu! 사~두! 사~두! 사~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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