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 이황의 15세 종손인 이동은 옹(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사진)이 7일로 만 100세를 맞았다.
이옹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 1909년 7월7일(음력 5월20일) 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를 마친 16세 무렵, 주위의 권유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대구로 유학을 떠나 경북중학교(당시 5년제)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중의 어른들이 "왜놈들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호통, 1년만에 귀향했다. 대구에서 보낸 1년을 제외한 평생을 퇴계종택에서 성리학에 매진하며 웃대 어른을 따라 문중의 일을 챙겼다.
1970년대 중반 부친이 유명을 달리하자, 퇴계 선생의 15세 종손으로서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불천위 제사와 4대 봉사를 비롯한 차례 등 연간 20회에 달하는 제사와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데 평생을 바쳤다.
종손으로서 이옹의 몸가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세수를 한 뒤 의관을 정제하고, 종택 뒤편에 조상의 위패를 모진 사당에 참배하고 나서야 아침을 먹었다. 또 먼 곳으로 갈 일이 생겨 집안을 잠시 비워야 할 때면 반드시 사당을 찾아 두 번 절하고 나섰으며, 귀가한후에도 먼저 사당에 들러 참배를 마친 후 여장을 풀었다.
이렇듯 몸과 마음가짐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종손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은 또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제사를 준비하는 것 역시 종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조상들의 기제사를 준비한 것 외에도 많을 땐 200명되는 손님을 한꺼번에 치르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종부이자 아내였던 김태남 여사가 2000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7년 앞서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났다. 10여년 가까이 '안주인'이 없던 종택을 지키던 이옹에게 몇 해 전 손자 며느리에 이어, 증손자를 보는 경사가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얼이 담겨 있는 퇴계 종택의 종손 4대가 종택 앞마당에 나란히 섰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격랑 속에서 종택을 지켜 왔고, 지켜갈 이들이다. 왼쪽부터 16대 이근필씨, 15대 동은씨, 18대 이석군, 17대 치억씨. 안동=최정동 기자 현재 퇴계종택에는 이옹을 비롯해 맏아들 근필씨(77)와 맏손자 치억씨(34), 증손자 이석군(2)까지 15~18세손 4대가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퇴계 선생의 '수신십훈(修身十訓)'을 붓글씨로 써 맏아들이 이를 복사본으로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나눠 줄 정도였지만, 현재는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해진 이옹. 하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퇴계 선생의 양생법인 활인심방으로 심신을 수련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김상보 교수는 예서(禮書)에 나타난 제례음식과 현 종가 제례음식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종갓집 제사 음식이 반드시 예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현장 조사 결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토론을 맡은 김미영 연구원은 안동 지역의 제례 음식을 사례로 예서와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의하고 있다.
퇴계 종택의 장손인 탓에 결혼과 출산 소식 등이 언론 매체에 오르내렸던 이치억씨는 자신의 젊은 날의 방황과 제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의 발표는 앞으로 제사를 이어갈 젊은 세대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값진 교훈을 던져줄 것으로 생각된다.
종가제사와 관련된 연구사를 정리한 김인규 연구관을 포함하여 발표자 및 토론자들은 한결같이 종갓집 제사에 대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 가운데 종갓집 제사만한 것은 없다. 따라서 종갓집 제사가 계속해서 지속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고민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그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하는 자리이므로 당장에 해결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아울러 이번 심포지엄 참석자 모두에게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만든 「알기 쉬운 명절차례와 제사」 책자도 제공된다.
퇴계 이황의 15세 종손인 이동은 옹(안동시 도산면 토계리·사진)이 7일로 만 100세를 맞았다.
이옹은 지금부터 꼭 100년 전 1909년 7월7일(음력 5월20일) 안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소학교를 마친 16세 무렵, 주위의 권유로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대구로 유학을 떠나 경북중학교(당시 5년제)에 입학했다.
그러나 문중의 어른들이 "왜놈들에게 배울 것이 뭐가 있느냐"고 호통, 1년만에 귀향했다. 대구에서 보낸 1년을 제외한 평생을 퇴계종택에서 성리학에 매진하며 웃대 어른을 따라 문중의 일을 챙겼다.
1970년대 중반 부친이 유명을 달리하자, 퇴계 선생의 15세 종손으로서 문중의 구심점 역할을 하며, 불천위 제사와 4대 봉사를 비롯한 차례 등 연간 20회에 달하는 제사와 문중의 대소사를 챙기는 데 평생을 바쳤다.
종손으로서 이옹의 몸가짐은 널리 알려져 있다.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인 몇 해 전까지만 해도 매일 아침 세수를 한 뒤 의관을 정제하고, 종택 뒤편에 조상의 위패를 모진 사당에 참배하고 나서야 아침을 먹었다. 또 먼 곳으로 갈 일이 생겨 집안을 잠시 비워야 할 때면 반드시 사당을 찾아 두 번 절하고 나섰으며, 귀가한후에도 먼저 사당에 들러 참배를 마친 후 여장을 풀었다.
이렇듯 몸과 마음가짐 하나라도 허투루 할 수 없는 종손으로서의 막중한 역할은 또 있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찾아오는 제사를 준비하는 것 역시 종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을 비롯한 조상들의 기제사를 준비한 것 외에도 많을 땐 200명되는 손님을 한꺼번에 치르는 일도 허다했다고 한다.
그래서 였을까? 종부이자 아내였던 김태남 여사가 2000년 8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그보다 7년 앞서 며느리마저 세상을 떠났다. 10여년 가까이 '안주인'이 없던 종택을 지키던 이옹에게 몇 해 전 손자 며느리에 이어, 증손자를 보는 경사가 있었다. 퇴계 이황 선생의 얼이 담겨 있는 퇴계 종택의 종손 4대가 종택 앞마당에 나란히 섰다. 근대화와 산업화의 격랑 속에서 종택을 지켜 왔고, 지켜갈 이들이다. 왼쪽부터 16대 이근필씨, 15대 동은씨, 18대 이석군, 17대 치억씨. 안동=최정동 기자 현재 퇴계종택에는 이옹을 비롯해 맏아들 근필씨(77)와 맏손자 치억씨(34), 증손자 이석군(2)까지 15~18세손 4대가 살고 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퇴계 선생의 '수신십훈(修身十訓)'을 붓글씨로 써 맏아들이 이를 복사본으로 만들어 방문객들에게 나눠 줄 정도였지만, 현재는 거동이 어려울 정도로 기력이 쇠해진 이옹. 하지만 아침과 저녁으로 퇴계 선생의 양생법인 활인심방으로 심신을 수련하면서 건강을 다지고 있다.
김상보 교수는 예서(禮書)에 나타난 제례음식과 현 종가 제례음식의 차이점을 부각하고 있다. 이것은 종갓집 제사 음식이 반드시 예서대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현장 조사 결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토론을 맡은 김미영 연구원은 안동 지역의 제례 음식을 사례로 예서와의 차이점에 대하여 질의하고 있다.
퇴계 종택의 장손인 탓에 결혼과 출산 소식 등이 언론 매체에 오르내렸던 이치억씨는 자신의 젊은 날의 방황과 제사에 대한 생각을 솔직하게 소개하고 있어서 주목된다. 그의 발표는 앞으로 제사를 이어갈 젊은 세대의 생각을 말해주고 있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값진 교훈을 던져줄 것으로 생각된다.
종가제사와 관련된 연구사를 정리한 김인규 연구관을 포함하여 발표자 및 토론자들은 한결같이 종갓집 제사에 대한 추가 조사의 필요성을 언급하고 있다. 사실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한국의 전통문화 가운데 종갓집 제사만한 것은 없다. 따라서 종갓집 제사가 계속해서 지속될 방법을 찾아야 하는 고민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번 심포지엄은 그 문제를 처음으로 논의하는 자리이므로 당장에 해결점을 찾을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는 장이 될 것으로 믿어진다. 아울러 이번 심포지엄 참석자 모두에게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만든 「알기 쉬운 명절차례와 제사」 책자도 제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