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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적 전쟁의 차원의 개념을 인정할 때의 실익 >>
영적 전쟁의 차원에 대한 이해는 생활 속에서 움직이는 사탄의 동선을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실익이 있다. 영적 전쟁은 영적 분별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영적 전쟁의 차원에 대한 이해는 국가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 사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 교회 차원의 영적 분별력, 개인 차원의 영적 분별력 등으로 나누는 것이 실질적이라고 본다. 영적 전쟁의 차원에 대하여 지상 차원의 영적 전쟁, 밀교 차원의 영적 전쟁, 전략 차원의 영적 전쟁으로 나누는 경우도 있지만(각주참조) 영적 전쟁이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기 때문에 일상의 생활과 연결되는 직접적인 개념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 현실적이라고 본다.
1. 국가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
국가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통치자의 통치스타일이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그의 책에서 “공산주의와 전체주의 구조에서도 마귀적인 요소를 볼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 통치자를 숭배하는 쪽으로 몰고 가는 독재자의 통치 스타일은 마귀적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공산주의는 경제적인 질서 체제에 머무르지 않고 그 체제 자체를 경배하며 믿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각주참조) 마귀적 요소의 기본은 경배와 숭배에 있다. 이런 맥락에서 각 국가의 통치 구조와 통치 구조를 뒷받침하는 경제 질서 체제를 살펴보면 그 속에서 사탄의 요소를 분별할 수 있다. 사회주의 경제의 기본은 계획경제인데 계획경제라고 하는 것은 집권적 중앙계획의 통제에 의해서 재화의 생산, 분배, 소비가 관리되는 경제로서, 여기의 핵심은 규제와 통제라는 것이다. 사회주의의(각주참조) 기초는 강권제强勸制 사회주의로서 강권제 사회주의의 경제인 계획경제는 통제경제가 기본이다.
통제라는 것은 사탄의 요소이다. 모든 사람들이 공공복리의 이념을 추구하고 사회적 기본권을 실현하기 위해서 민주주의 기본질서 속에 들어있는 규제와 통제를 당연시하고 있지만, 그 속에 들어있는 규제와 통제라는 사탄의 요소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경우도 조종이나 통제, 억압이나 강요를 하지 않으신다. 만약 하나님께서 조종이나 통제, 억압이나 강요를 하셨다면 에덴동산에서 선악과를 따먹는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조종이나 통제, 억압이나 강요가 사탄의 요소라는 것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만 적용하는 범위에서 그 강도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사탄의 요소인 것임에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세계 전쟁사에도 사탄의 개입이 있다. 히틀러의 전쟁은 사탄의 전쟁이었다. 히틀러는 광기가 있었고 자신을 숭배하게 하여 모든 민족을 통제하려고 시도하였다. 도조내각東條內閣의 태평양 전쟁도 사탄의 전쟁이었다. 일본의 왕을 숭배하게 하였고 세계 통치를 목표로 하였다. 북한의 김일성가의 독재에도 사탄이 개입되었음이 분명하다. 숭배와 경배의 수준이 지구상에서 그 유래를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이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들이 계획은 하늘에서 이루어지고 그 결과는 땅에서 나타난 것이다.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사와 권세와 하늘에 있는 악한 영들과의 싸움이다.(엡 6:12)
착취와 살인 속에 들어있는 사탄의 요소, 광기의 지배 속에 들어있는 사탄의 요소, 독재자의 전쟁 속에 들어있는 사탄의 요소 등을 분별하지 못하면 전략적 차원에서 사탄을 대응할 수 없게 된다. 영적인 분별력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공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 영적 전쟁의 차원의 개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국가의 지도자를 선출하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이다. 히틀러의 정권을 창출할 때 그 정권에 동조한 기독교인들이 없었겠는가? 그들에게 동조한 자들은 누구에게 동조한 것인가? 선출된 국가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만들어지기까지의 과정 속에서 깨어있어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왕이 세워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한다. 하나님께서는 사울왕과 같이 왕을 세우시기도 하고 폐하시기도 하신다. 왕은 다윗과 솔로몬과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는 축복의 대상이 있는 반면, 바로나 네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징계의 대상이 있기도 하다. 정권이 세워지는 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논점을 벗어나는 주제이기 때문에 피하기로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어있을 때에는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왕들이 세워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깨어있지 못할 때에는 하나님을 모르는 고약스런 통치자들이 등장한다는 것이 성경의 원리이다.
하나님을 안다고 한다면 십계명 중 1계명에서 4계명까지는 타협대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 것이다. 다른 신을 섬기는 것, 우상을 섬기는 것, 하나님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는 것,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 이것은 타협 대상이 아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고 하나님을 말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죽은 사람을 신으로 만들고 우상화시키는 사람과 손잡고 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종이라는 사람들이 점쟁이와 손잡고 간다면 안 된다고 할 것이다. 죽은 사람을 신으로 만드는 사람들은 점쟁이와는 차원이 다른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을 지지하고 손잡고 간다는 것을 어떤 논리로 설명할 것인가? 만약 죽은 사람을 신격화시킨다면 야스쿠니 신사와 무엇이 다른가? 만약 그리스도인이 죽은 사람을 신격화시키는 자들을 지지한다면 이들에게 영적인 분별력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것이 지금의 기독교의 실상이다. 대통령을 위한 조찬 기도회라는 것을 하나의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권력에 맛을 들이고 발람의 길을 가는 영적 지도자를 진정한 하나님의 종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런 면을 볼 때 지금 기독교의 실상은 암울하다는 것이다.
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자들에게 복종하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권세는 없나니, 모든 권세는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라. (롬 13:1, 한글킹)
본문의 말씀에 의해 이미 세워진 정권의 권력에 복종하는 것은 성경적이다. 지금 여기서 논하는 것은 정권의 창출 과정에서 민주적 정당성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세워진 정권이 잘못된 정권이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내용을 보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신당神堂을 만들고 우상을 섬기는 자가 지도자로 등장할 때는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인 수준을 논할 수 없을 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 사람과 다를 것이 없을 때 등장하는 정치적 현상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를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영적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어찌 책망하지 않고 질책하지 않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국가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의 마비는 이런 결과를 낳는다. 국가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은 악한 영의 세력들이 정치 지도자라는 사람들을 어떻게 끌고 가는가를 알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실익이 있다 할 것이다.
2. 사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
사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은 사회의 흐름 속에 들어있는 사탄의 일들을 변별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실익이 있다. 교회 수에 비해서 배로 늘어나는 점집들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들 속에 있는 사탄의 움직임들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사용하는 경들이 무엇이고 사용하는 책들이 무엇인가를 본다면 세상의 종교들의 실체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모든 것들이 영적인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대중문화의 흐름을 보라. 흥행되는 영화의 주제들을 보라. 살인, 섹스, 폭력, 절도, 강도가 대부분이다. 편 가르기를 노골화하는 스포츠의 본질을 보라. 개념 없는 섹스가 보편화된 사회를 보라. 도덕규범의 선이 무너지면 인간과 동물의 경계가 사라진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소돔과 고모라로 치닫고 있는 섹스문화 속에 하나님은 없다. 사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은 사탄이 선택한 대중문화의 흐름을 볼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실익이 있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은 세상 속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실익이 크다. 하나의 예로 연예계에서 활동하는 크리스천들이 있다. 이들이 정말 그리스도인들일까? 대중문화에 동참하는 자들의 영적인 상태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방사능 누출지역에 아무런 보호 장비 없이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방사능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볼 수 있겠는가? 독사들이 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독사 굴에 들어가 잠을 자다가 물려 죽은 사람을 보고 독사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중문화에 동참하는 자들이 사탄에 대한 지식이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저들은 영적 전쟁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차원의 영적 전쟁은 죽어가는 우리 아이들을 살릴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한 이익이 있다. 게임에 중독되어 있는 아이들에게 게임을 못하게 하면 금연을 할 때 나타나는 금단 현상보다 더 큰 금단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을 게임을 안 해본 사람들은 모른다. 거의 마약 수준의 중독성을 가지고 있다면 그 심각성은 보편적인 사고의 기준을 넘은 것이다. 이 사실을 부모 세대는 잘 모른다. 게임 산업이 왜 각광받고 있는가? 그것은 중독성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경마의 배팅금액이 백원부터 시작되고, 국민 오락이라는 가면 뒤에 수많은 사람들을 파멸로 몰아넣었듯이 게임 산업이 급부상하고 산업동력의 한 부분으로 등장하는 이유는 분명히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우리 아이들이 빠져들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관심을 갖는 곳에 사탄이 뿌려놓은 독이 있다. 이것을 분별하는 것이 사회적 차원의 영적 전쟁에 대한 이해이다.
3. 교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
교회적 차원에서의 영적 분별력은 교회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사탄의 회들을 분별하고 그들의 정체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실익이 있다. 즉,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한다는 데에서 그 실익이 있다는 것이다. 자기 의가 드러나고 자기 자랑이 있는 것은 존경받고자 하는 마음이 도사리고 앉아 있는 것이고, 이것은 경배 받고자 하는 사탄의 마음이 있는 것이다. 거짓 겸손 속에 들어있는 거짓 선지자들을 분별하는 힘이 곧 교회적 차원에서의 영적 분별력이다. 목회자의 허위 학력이 왜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가? 목회자가 학력이 왜 필요한가? 베드로가 배움이 있는 사람이었는가? 베드로가 학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는가? 목사가 왜 학위를 받고자 하는가? 목회자의 논문 표절이 왜 사회적 이슈로 등장하는가? 회칠한 무덤 같은 자들이다. 교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의 흠결에서 나오는, 피로를 누적시키는 파열음들이다.
교회적 차원의 영적 분별력은 교회의 제도 속에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탄의 계략들을 볼 수 있다는 것에서도 그 실익이 있고, 성경의 내용대로 교회가 가고 있지 않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파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실익이 있다. 교회가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분명히 맞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단 열 명이라도 있어야 할 것이다. 참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과 교제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단 열 명이라도 있어야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 차원의 영적 전쟁을 신앙의 본질을 찾고 교회주의자들을 가려낼 수 있다는 점에서도 그 실익이 있다.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뽑으실 때에는 사람들이 만든 제도 속에서 그의 종들을 선출하지 않으셨다. 엘리야 시대에도 선지자 학교가 있었지만 그 선지자 생도들 가운데에서 엘리야의 후계자를 세우지 않고 농부인 엘리사를 세우셨다. 영적인 일에 대해서는 영으로부터 배워야지 인간이 만든 제도 속에서 영적인 일을 배울 수 없다는 영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지금 교회의 리더라고 하는 사람들은 사람이 만든 제도 속에서 나온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세상의 경영 이론을 도입하여 시스템을 만들고 거기에 기독교의 교훈을 바르고 포장해서 교회를 운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에서 인정하는 좋은 대학을 나와야 하고 보기 좋은 간판이 필요했던 것이다. 세상적인 표현으로 좋은 스펙이 필요했던 것이다.
동력, 즉 엔진은 사탄의 것을 사용하고 하나님으로 포장하고 예수 그리스도로 덧칠을 하여 교회를 운영하는 자들이 곧 교회주의자들이다. 그러나 이들을 움직이는 동력은 사탄의 힘이기 때문에 이들 속에는 구원의 표지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의 동행도 없고, 율법의 준수도 없고, 믿는 자의 표적도 없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율법의 완성도 없다.(상세한 것은 회복시리즈 ⌜성경적 구원⌟ 05. 구원의 개요를 참조하라.) 이들은 거짓 선지자들이고 예수를 팔아먹는 사기꾼들이다. 양들을 잡아먹는 늑대들이다. 이와 같은 교회주의자들을 색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교회적 차원의 영적 전쟁은 분명히 실익이 있다.
<< 영적 전쟁의 차원에 대한 이해와 성경적 대응>>
영적 전쟁의 차원에 대한 이해의 개략을 보았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1. 대응에 대한 성경적 원리
영적인 분별과 영적인 대응은 다르다. 분별은 나 자신의 실족을 막고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지만 영적인 공격에 대응하여 저들을 처리하는 문제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역이다. 믿는 자들은 마귀의 공격에 넘어가지 않으면 된다. 성경의 많은 권면 가운데 영적 전쟁의 핵심으로 볼 수 있는 말씀을 본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게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8 근심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님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벧전 5:6-9, 개역)
본문의 핵심은 겸손할 것과 염려하지 말 것, 정신 차리고 깨어 있을 것과 믿음을 굳게 할 것이다. 마귀의 공격을 무력화시키는 것의 첫 번째 방법은 겸손이다. 겸손하지 못한 태도, 즉 교만과 자랑이 드러난다면 이미 마귀의 종이 된 것이다. 나 자신을 낮추고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패망의 지름길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잠 16:18, 각주참조) 둘째는 염려하지 않는 것이다. 삶을 염려하는 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는 데에서 비롯된다. 삶을 염려하는 것은 믿음에 있어서 커다란 구멍이 생긴 것이다. 신앙생활을 유지할 수 없는 절대적인 장애사유가 곧 삶의 염려이다. 우리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지 않는 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셋째로 근신하고 깨어 있으면 마귀의 공격은 힘을 쓰지 못한다.
영적인 세계는 보이지 않는 세계이다. 보이지 않는 세계는 아는만큼 움직인다. 영의 원리를 이해하는 만큼 그 부분에서는 베일이 벗겨지고 힘을 쓰지 못한다.(자세한 것은 필자의 책 ⌜영의 원리⌟ 영의 원리 6. 인색의 원리를 참조하라.) 귀신의 존재에 대하여 경험적인 지식을 통한 이해가 깊을수록 귀신들은 맥을 추지 못한다.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으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모든 부분에서 영의 흐름을 읽을 수 있고 영적인 정보의 제공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가를 분별할 수 있는 경우에 사탄은 전혀 일할 수 없다. 이것이 영적 전쟁에 있어서 개인이 감당해야 할 방어적인 측면에서의 원리이다. 그러나 마귀의 일을 멸하는 것은 주님의 일이다. 믿는 자가 주님과 동역함으로서 마귀의 일을 멸하는 일에 동참하는 것은 주님과 연합되어 동행할 때 가능하다는 것을 놓치면 안 된다.(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영의 원리⌟ 11-2. 그리스도와 어떻게 연합할 수 있는가를 참조하라.) 단순한 인간의 계획으로 영적 전쟁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동행하는 생활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따라서 영적 전쟁은 공격이 기본전략이 아니라 방어가 기본전략이다. 그리고 방어의 가장 기본은 영적인 일에 대해 분별하는 것이다.
전쟁은 항상 하나님의 몫이다. 여러 곳에서 강조되었지만 사탄은 인간을 파멸시키는 기술을 에덴동산에서부터 가지고 있었다. 이런 상대와의 싸움이다. 더군다나 죽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와의 싸움이 영적 전쟁이다. 이런 전쟁을 하면서 아무런 영적 지식이 없이 덤비는 것은 그야말로 무모한 일인 것이다.
2. 영전 전쟁의 성경적 사례
그렇다면,
어떻게 영적 전쟁에 대응할 것인가?
우리가 영적 전쟁에서 승리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성경의 인물들이 어떻게 승리하였는지 그 사례를 보는 것이다. 성경의 사례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가 하나님과의 교제 속에서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행하였다.
6 모세와 아론이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대로 행하였으니, 그들이 그렇게 행하였더라. (출 7:6, 한글킹)
본문은 모세의 사례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이다. 지극히 당연한 것조차도 하나님께 묻고 응답을 들은 후에 행동한다.(삼상 30:8, 각주참조) 성경의 인물들이 영적 전쟁을 하는 방법은 하나님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문제에 대응하는 방법이었다. 인간사의 문제는 끊임없이 발생한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문제의 원인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방법이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어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의 해결은 하나님께서 하셔야 한다. 하나님이 하시도록 우리는 잘못을 자백하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 성경이 제시하는 문제 해결 방법이다. 인간의 생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나서는 것은 사탄의 계략에 말리는 것이다.
영적인 전쟁을 사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성경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할 것이다.(상세한 것은 Part Ⅱ. 13. 마귀의 세력을 적극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가를 참조하라.) 성경의 내용과 다른 인간적인 주장을 따르는 것은 많은 혼란과 영적인 피로를 누적시킨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탄과 그의 부하들인 귀신들이 인간의 삶의 파괴를 일삼는 것은 그들이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허락받은 사간 안에서 활동하고 그들에게 허락된 세상 속에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이 공격하여 왔을 때 영적인 분별력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면 되는 것이다. 사탄이 일하는 모든 곳을 찾아다니면서 그들의 일을 하지 못하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차단하고 가로막은 것이 아니라 저들의 공격을 분별하고 그 공격에 넘어가지 않고 나의 믿음을 지키는 것이 영적 전쟁의 기본이라는 것이다. 이 영적 전쟁의 원리를 알지 못하고 덤빌 경우 그 전쟁은 승리할 수 없다. 학자들이 뭐라고 하든지 간에 하나님은 살아계시고 성경의 내용은 사실이다.
[회복시리즈 05 믿는 자의 표적 中 일부 발췌 / 박찬빈 著]
이상의 내용은 책의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자세한 내용은 책이나 카페(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의 강의를 참조하셔도 우리가 놓치고 살았던 부분들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인식할 수 있게 될 겁니다. 회복시리즈와 신앙의 강요는 반드시 모두 읽어보시길 권해드립니다. 바로 알아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한다지만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정말 바르게 알고 인식해야 제대로 된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는 사람들 (http://cafe.daum.net/onlyjesus1924) 카페 에서 강의영상을 꼭 보시길 권해드립니다.
간증들도 읽어보세요.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만나주시고 일하시며 동행해 주셨는지, 그래서 지금은 어떻게 살아계신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고 있고 정말 성경대로 살아계신 하나님이신지가 잘 나타나있습니다. 우리도 성경 속의 인물들과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서 동행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울이 전한 복음입니다.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 점검할 수 있는 계기가 되시길 바랍니다.
그동안 헝클어져 가닥을 추리지 못했던, 영적인 부분에 있어서의 피로를 조금이나마 풀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회복시리즈 제4권 ‘그리스도의 영’ 중에서...)
주님 안에서 승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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