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충무공전서 특강_04_송여종과 진무성
- 어제(8.18,금) 오후에는 충주 탄금대에 올랐다. 인천집으로 가는 퇴근길에 박현모교수의 세종실록 충주 답사팀과 합류하여 남한강과 달천을 내려다보며 탄금정에 앉아 임진왜란과 신립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 내 얘기의 주된 골자는 이순신이 말한 충의담략의 관점에서 볼 때, 신립은 죽음을 택한 절의보다는 군사를 살리는 지략을 좀 구사했으면 좋았다는 것이었다.
이미 그르친 조령의 매복을 차치하고라도 배수진으로 군사들을 험지로 몰지 말고, 적의 기세가 강하면 서서히 군사를 물려 전력을 보전하거나 후일을 기약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컸다는 것이었다. (신립 장군 관련 자료는 8.14~15일자 참고)
* 손자병법에서도 군대의 장수는 지, 신, 인, 용, 엄을 갖추어야 한다고 했는데, 이를 통해 보더라도 가장 우선시되는 지략과 지혜가 장수에게는 중요한 것이다.
* 반면에 충무공 이순신은 무인들을 바라볼 때 그들의 충의담략(忠義膽略, 충성·절의·담력·지략)을 유심히 살펴서 그 뜻과 행실이 도드라진 사람을 높이 기용하였다.
예를 들어, 무술년(1598) 조·명 연합수군이 순천 왜교성을 공격하는 와중에 진린이 이끄는 명 수군의 전선 3척이 썰물에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채 갯벌에 얹히게 되었다.
일본군은 화공을 준비하고 개미떼와 같이 몰려오고 있었다. 진린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이순신도 뾰족한 계책이 나오지 않았다. 이때 류형은 모든 배를 그 3척의 고물(함미)에 매고 한꺼번에 힘을 합쳐 노를 움직여 마침내 나올 수 있게 하였다.
이즈음 좌의정 이덕형이 순천 지역에 내려와 이순신을 불러 전황에 대해 논의하던 중 이순신에게 후계자를 묻는데, 이순신은 자신의 부하 중 류형보다 나은 사람이 없다고 답한다. “충의와 담략이 류형보다 나은 사람이 없소. 관직은 비록 낮으나 크게 쓸만하오.”
노량해전이 끝난 후 류형은 부산진첨사로 발탁되었다가 부임하기 전에 경상우수사로 임명되었으며, 후일에는 이순신처럼 삼도수군통제사를 역임하였다. 이순신의 지켜본대로 류형은 충의담략으로 무인의 직분을 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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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충무공전서 권14』 부록6 기실 하편을 읽다보니 송여종과 진무성의 얘기가 눈에 띈다. 임진왜란 당시 충의담략으로 어려움을 헤쳐나간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여기에 올려본다.^^
1. 송여종(宋汝悰), 몽진한 행재소에 다녀오다.
송여종은 낙안군수 신호의 막하에 나아갔다. 신호는 평소 공(송여종)을 기량이 있는 인물로 여기고 고을 일을 모두 다 공에게 맡겼다. 신호가 좌수사 이순신 공의 부서로서 한산도에서 왜적을 격파하였는데, 공은 하루도 군중에 있지 않은 날이 없었다.
수군이 크게 승리하기에 이르러 이순신 공이 조정에 왜적의 목을 바칠 사람을 구했으니 적절한 사람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때 왕의 수레가 먼지를 뒤집어 쓰며 피란가고, 세 도성(한양, 개성, 평양)은 모두 함락되어 연도의 왜적들이 겹겹이 주둔하여 서로 바라보고 있어서 왕께 문안하러 달려가는 이들도 문득 도로가 막혀 중도에서 돌아오고 있었다.
이순신 공은 공이 평소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듣고 공에게 격문을 보내서 장계를 주었다. 적의 진영을 전전하며 낮에는 숨고 밤에는 움직여 구사일생으로 왕의 행재소(의주)에 도달하였다.
상께서 즉시 불러 보시고 친히 변방의 일을 묻고 술을 하사하며 수고를 무척 갖추어 위로하시니 조정에서 모두들 평원태수 안진경과 이평에 비유하였다. (당나라 안녹산의 난때에 안진경이 샛길로 이평을 보내에 황제에게 방어태세를 보고함)
즉시 서부주부에 임명하고 상께서 이조에 전교하기를, “전라좌수사의 군관 송여종은 온갖 고생을 하며 멀리 천리길을 왔으니 지극히 가상하다. 남방의 수령 중에서 빈자리가 있으면 보임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조에서 즉시 남평현감을 의망하여 임명하였는데, 병조에서 또 왕에게 아뢰어 청하기를, “전임 녹도만호(정운)가 탄환에 맞아 사망하여 마땅히 그 대신할 사람을 정밀하게 선발해야 합니다.
비록 송여종이 이미 남평현감에 임명되었으나 일찍이 이순신의 관하에서 공을 세웠고 수전에도 익숙하니 이 사람으로 대신하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무술년(1598년) 7월에 이순신 공이 또 (녹도만호) 공에게 명하여 몽충선 6척을 거느리고 바닷길을 파수하게 하였다. 공이 즉시 이끌고 출발하여 녹도 앞바다에 은밀히 정박하였다. 적선 10여 척이 바다 안개를 타고 몰래 이르러 장차 야습을 할 계획이었는데, 공이 즉시 염탐해 알아내고 돛을 올려 직진하여 남김없이 모두 죽이고 개선하였다.
이순신 공은 즉시 표창을 청하는 계를 올렸고, 명나라 장수도 상으로 은과 베를 무척 후하게 주었다. 11월에 이순신 공이 수군을 대대적으로 모아 노량에서 격전을 벌여 적병이 대패하고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다.
나라를 중흥시킨 전공은 이것이 제일이 되었고, 공의 공로 또한 모든 장수보다 앞섰다. (송여종비명)
2. 진무성(陳武晟), 격전지 진주성에 다녀오다.
진무성은 고려의 병부상서 진광현(陳光賢)의 후예로 활쏘기를 잘했다. 임진년 왜란에 충무공 이순신이 막하에서 보좌하여 당포 전투에서 여러 차례 탁월한 공을 세웠다.
진무성은 1566년생으로 이순신보다 21살 어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27살의 진무성은 사도첨사 김완의 군관으로 참전한 이래로 매번 눈부신 전공을 세웠다.
이순신의 장계에 따르면, 제2차 출전 중 당포해전에서 중위장 권준이 쏘아 넘어뜨린 적장을 진무성이 뛰어들어가 목베었다고 했다.
계사년(1593년) 6월 진주가 왜군에 포위당하게 되자 충무공이 실상을 탐색하고자 하였으나 감히 갈 사람이 없었다. 진무성은 분개하여 자신이 가기를 자청하여 공이 편지를 써서 주었다.
진무성은 왜복으로 변장하고 성 아래에 이르러 줄을 타고 올라가 도달하여 마침내 사정을 모두 알아가지고 돌아왔다. 그 공로로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다.
그는 종전후인 1599년 34살에 무과에 급제하여 1638년(인조16년) 73세로 죽을 때까지 유원첨사, 경흥부사, 통제영우후, 구성부사 등을 거치며 국사에 매진하였다.
* 충주 세계무술박물관에 있는 임진왜란 시 토왜대장 정기룡의 칼을 모사한 도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