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털리 포트먼의 형형한 눈빛은, 삭발한 머리보다 인상적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어린 소녀였을 때부터 그랬다. <레옹>의 마틸다는 킬러 앞에서 마릴린 먼로를 흉내내며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았다. 12살 어린 나이에 성적 대상으로 낙인 찍힌 것이 두고두고 끔찍한 일이었다고 반복해 말하지만, 자신이 하는 몸짓이, 표정이 어떤 결과를 불러올지 모르고서도 소녀는 끔찍할 정도로 요염한 롤리타가 될 줄 알았다. <스타워즈> 프리퀄 시리즈와 함께 10년을 보내면서 소녀는 여인이 되었다. <클로저>를 통해 <레옹>의 기억을 환기시킨 동시에 그 벽을 뛰어넘었다.
우연히도, <레옹> <스타워즈> <클로저>에 이르는, 그녀를 기억하게 만든 굵직한 작품들에서 포트먼은 헤어스타일로 인물을 표현했다. 머리 색깔을, 스타일을 바꿀 때마다 포트먼은 새로운 환상의 주인공이 되었다. <브이 포 벤데타>에 이르러 포트먼은 삭발을 했다. 더이상 아름다운 환상으로 머물기를 거부하는 듯. “어떤 사람들은 내가 네오 나치거나 암 환자거나 레즈비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영화를 위해 감수해야 했던 모든 기괴한 헤어스타일들을 생각해볼 때 머리카락이 없다는 건 꽤 자유로운 일이다.” <브이 포 벤데타>에서 제2차 세계대전 뒤 영국, 완벽하게 통제된 미래사회에서 테러리즘의 한복판으로 걸어들어가는 이비를 연기한 포트먼은 아름다운 꽃으로 존재하는 대신 치명적 독으로 다시 태어났다. “거의 모든 영화들이 남자들이 각본을 쓰고 연출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영화 속 여자들은 남자들이 상상하는 여성일 뿐이다. 그래서 섹시한 여성에 대한 고전적 이미지들은 모두 유아적 순수함을 지니고 있다.” 남성의 환상을 이용해 배우로 성장했으면서도 그 환상에 휘둘리지 않는 힘을 키운 것은, 배우 내털리 포트먼이 가진 가장 큰 무기이다.
내털리 포트먼 현지 인터뷰
“삭발하고 나니까 부드러워서 더 좋던데”
조엘 실버, 와쇼스키 형제 제작, <매트릭스> 시리즈의 조감독 제임스 맥티그가 감독 데뷔, 휴고 위빙, 내털리 포트먼 주연. <매트릭스> 사단의 신작 <브이 포 벤데타>의 화려한 타이틀이다. 네오의 뒤를 이어 이번엔 내털리 포트먼의 여전사 이비가 현실을 믿지 말라고 유혹한다. 작은 체구에 야무진 인상과 좌중을 압도하는 웃음소리를 가진 이 젊은 배우를 LA에서 만났다.
-이 영화가 왜 당신을 매료시켰나.
=재미있고, 흥미로우면서, 빅 스케일이지만 생각할 거리도 갖춘 영화는 찾기 힘들다. 적어도 지난 20년 동안 메이저 영화사의 빅 스케일 영화가 이렇게 시각적으로도 흥미롭고, 재미있으면서, 지적으로도 자극적인 경우는 본 적이 없다. 보통 빅! 무비는 빅! 실망이게 마련인데.
-이비 역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든 역이었을 텐데 어떻게 준비했나.
=이 영화야말로 독서가 큰 도움이 됐다. 맥티그 감독이 <신념과 반역: 건파우더 플롯 스토리>라는 책을 줬는데, 가이 폭스 데이의 유래를 알게 됐다. 특히 주인공 가이 폭스보다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이라든가 이들이 정부에 대항해 폭력을 쓰게 된 배경 등의 역사가 재밌었고… 또, 영국의 식민지주의에 대항해 시베리아 정치범 수용소에 갇혔던 사람의 이야기도 읽었다. 그를 테러리스트로 볼 것인가, 반정부 혁명가로 봐야 하나 등의 문제가 흥미롭지 않나.
-‘반정부 투쟁’ 등 영화가 정치적으로 민감한 부분도 있는데, 부담이 되지는 않았나.
=음, 비교적 열린 마음으로 작업하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분명 스트레스도 많이 받았고 혼란스러운 부분도 있었다. 영화의 주제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볼 수 있고, 보는 사람에 따라 지적으로나 정서적으로 다른 감상을 가질 수 있는 민감한 문제라는 점에서. 지금까지도 영화에 대한 내 생각을 정리 중인데, 이렇게 사람들이 계속 생각하고 토론할 문젯거리를 던져주는 영화가 좋다.
-극중에서 삭발하고 나오는데, 색다른 경험이었나.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극중 이비에게는 악몽 같은 경험이라고 설정되어 있어서 좀더 부정적인 방향으로 느끼려고 노력응 했지만, 나는 만져보니까 머리가 너무 부드러워서 좋던데…. (웃음) 보통 좀더 파워풀해진 느낌이 든다고들 하더라. 삭발하고 나니까 더 터프해진 것 같다. 지금까지 살면서 한번도 터프한 적이 없었는데…. 아니, 마음속으로는 터프한 적이 물론 있었겠지만, 터프하게 보인 적이 한번도 없었다고 말해야겠다. 영화에서 터프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게 나름대로 재미있었다.
-마스크를 쓴 상대 배우(휴고 위빙)와 연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나.
=첫째, 휴고 위빙이 목소리나 몸동작으로 캐릭터를 잘 표현했기 때문에 어려움은 없었다. 둘째, 마스크를 쓴 미지의 인물을 상대하는 게 실제로 이비가 영화 속에서 겪는 경험이다. 이비는 매 순간 마스크 뒤의 사람이 누군지, 그의 감정이 어떤지 등의 미스터리와 마주해야 한다. 나 또한 마스크맨의 작은 몸 동작 하나도 무슨 뜻일까 신경써야 했다. 마스크맨이 웃고 있는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조명 때문인 적도 있었다. 덧붙여 마스크가 또 다른 흥미로운 역할도 했다. 마스크맨과 이비 두 사람의 관계는 영화 내내 계속 변한다. 부녀 사이 같기도 하고, 애인 같기도 하고, 스승과 제자 같다가도 적이 되기도 하는. 마스크 뒤의 사람은 쉽게 어떤 캐릭터든 될 수 있지 않나? 관객이 상상력으로 채울 수 있는 빈틈. 모호한 아이덴티티, 재밌잖아. (웃음)
-당신은 이상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사람처럼 보이는데, 이 영화의 이상주의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은 복잡한 일이다. 신념을 좇아가는 것과 포기해야 할 것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고 어떤 경우에는 위험도 따르지 않나. 영화 초반에 이비가 처한 상황이 바로 그렇다. 부모의 이상 때문에 고생하며 자랐는데, 그 이상이 무엇인지 이해도 해야 하고, 과연 그 이상을 자신의 인생에서 최우선 과제로 받아들여야 할지 고민도 해야 하니까. 실제로는 이비처럼 나중에 부모가 그토록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게 되고 동조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완전히 정치적으로 무관심하게 될 수도 있다. 이비의 이런 복잡한 심리상태가 영화를 더 흥미롭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영화에서 두려움은 독재자에게 통제의 빌미를 준다. 당신의 두려움은 뭔가.
=특별한 포비아를 가지고 있진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다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여자의 경우 자신이 너무 야심만만해 보이지는 않는지 혹은 드세고 전투적으로 보이지 않을까 등을 두려워하지 않나. 아니 두려워하도록 교육받지 않나. 내 경우에는 특히 어려서부터 어른들의 세계에서 일을 하면서, 내가 과연 현명한 선택을 한 건지, 이 길을 택하면 다시는 과거로 돌아갈 수 없지 않을까, 성인 연기자가 될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까, 과연 내 인생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얼마나 있을까 등의 현실적인 두려움을 느낀 적이 많다. 거미나 쥐 따위는 절대로 두려워하지 않는다. (웃음)
첫댓글 레옹의 그 당찬 소녀가 바로 내털리 포트먼이었구만요. 눈빛이 정말 예사롭지 않습니다. 똑똑한 배우인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