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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장 실존적 위협
지난 반세기 동안에 현대판 묵시록을 이끌었던 네 기사는 인구 과잉, 자원 고갈, 환경오염, 핵전쟁이었다.
거기에 나노 머신, 즉 우리를 노예로 만들 로봇, 인간을 원료나 연료로 뒤바꿀 인공 지능, 침대 앞에 앉아 치명적인 컴퓨터 바이러스를 만들어 퍼뜨리거나 인터넷을 붕괴시킬 불가리아의 10대들이다. 고도로 발전한 기술 문명의 시대로 진입한 현재, 첨단 기술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이들은 대개 자신의 독창성을 발휘해서 세계가 멸망에 이를 다양한 경로를 찾아내는 과학자이거나 기술 공학자이다.
진보의 이면에 도사린 위협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대재앙은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고 예언할 수 있는 사람은 없고 이장에서 나 역시 그런 장담을 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에 그런 위험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제시하고 주요한 위험들을 검토할 것이다. 그중 인구과잉, 자원고갈, 온실기체를 포함하는 완경오염. 이 세 가지 위협에 대해서는 10장에서 논의했다. 일부 위협은 문화적, 역사적, 비관주의가 만들어 낸 허구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위험은 진짜로 위험하지만 우리는 기다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천재지변이 아니라 해결 가능한 문제로 다룰 것이다.
- 실존적 위험에 대해 생각한다는 게 좋을 것도 나쁠 것도 없다. 최악의 경우라고 해봐야 시간이 흐른 뒤에
돌이켜 보면 실은 불필요 했다고 밝혀질 예방 조치를 취하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종말론적 사고에는 심각한 부정적 측면이 포함되어 있다. 우선 대재앙의 위험을 가짜로 알리는 허위로는 그 자체로 재앙이 될 수 있다. 예를 들어, 1960년대의 핵무기 경쟁은 구 소련과의 ‘미사일격차’가 크다는 황당한 공포에서 촉발 되었다. 2003년 이라크 침공은 당시 사담 후세인이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으며 언젠가 그 무기를 미국에 사용할 것이라는 생각에 근거한 것이었다. 세계 열강이 핵무기를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거부하는 이유는 생화학 테러나 사이버 공격처럼 가상의 다른 실존적 위협이 닥쳤을 때 핵무기를 사용할 권리를 지키고 싶기 때문이다. 가상의 재난을 부풀려 공포의 씨앗을 뿌리는 일은 인류의 미래를 보호하기는커녕 오히려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다. 최후의 날 시나리오를 하나하나 열거하는 일이 위험한 두 번째 이유는 인류가 가진 자원, 지력, 불안의 예산이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기후 변화와 핵전쟁처럼 우리가 마주한 몇 가지 위협은 거의 확실하고 문제를 완화하려면 막대한 노력과 창의력을 투입해야 한다.
미국인이 객관적인 부의 상승에도 더 행복해지지 않은 주요 원인은 “붕괴 불안”, 즉 문명을 스스로 파멸할 것이며 누구도 이것을 막지 못할 것이라는 공포라고 말한다. Y2K 버그를 기억 하는가 이 때 컴퓨터 과학자들은 세계에 대재앙이 임박했다고 경고하기 시작했다. 당시에 어셈블리 언어 프로그래머로서 종말론에 회의적이었던 나는 마침 절체절명의 순간에 제일 먼저 새천년을 맞이하려고 뉴질랜드에 머무르고 있었다. 2000년 1월 1일 12:00에 분명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일부 소프트웨어는 업데이트가 필요했지만 그 해에 버그가 발생해 연산 문제로 폭주한 프로그램은 거의 없었고 특히 기곙레 내장된 경우에는 더욱 없었다. Y2K 공황은 기술의 진보가 종말을 가져오리라는 망상에 우리가 얼마나 취약한 지 상기시켜 준다.
- 파멸의 위협들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생물학자들은 적어도 이제껏 존재했던 종 가운데 99퍼센트의 운명이 필멸했고 일반적인 포유류 종이 대력 100만년간 존속하는데 호모 사피엔스만 예외라고 주장하기는 어렵다. 초신성이 뿜어낸 감마선이나 붕괴된 별에서 나온 방사선이 지구의 절반을 덮고 오존층을 파괴하고 동시에 지구 절반을 자외선으로 뒤덮을지도 모른다 혹은 지구의 자기장이 뒤집혀서 지구가 치명적인 태양 복사와 우주선 복사의 습격에 무방비로 노출될 수도 있다. 소행성이 부딪쳐서 수천 제곱킬로미터를 납작하게 만들어 버리고 그 잔해가 솟아올라 태양이 빛을 잃고 부식성 비가 쏟아질 수도 있다. 초대형 화산이 폭발하거나 엄청난 양의 용암이 흘러나오면 화산재 이산화탄소 황산에 모두 질식 할 수도 있다. 블랙홀이 태양계로 흘러들어와 지구를 궤도 밖으로 밀어내거나 영원한 망각속으로 빨아들일 수도 있다. 인류가 10억년 이상을 살아남을 수 있다고 해도 지구과 태양계가 그러지 못할 수도 있다. 태양의 수소는 소진 되기 시작할 테고 태양이 그 밀도와 온도가 상승해서 적색 거성이 되는 동안 지구의 받나는 펄펄 끓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종이 언젠가 죽음의 신을 마주해야 하는 원인이 기술은 아닌 셈이다.
우리가 먼 미래에 닥칠 가상의 재난을 즐길 생각이라면 동시에 우리를 재난으로부터 구해 줄 가상의 진보 모두 다 감안해야 한다. 핵융합 발전으로 만들어 낸 빛 아래서 식량을 재배하거나. 혹은 바이오 연료처럼 산업 공장에서 식량을 합성하는 기술이 그런 예이다. 그리 머지 않은 미래의 기술도 우리를 구해 줄 수 있다. 인류의 기술이 우리 인류를 유별나게 위험한 시대로 만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유별나게 안전한 시대로 만들었다.
- 핵무기가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될 것이라는 공포 역시 과장된 것이다. 1960년대에 사람들은 곧 25개국 혹은 30개국이 핵무기를 보유할 것으로 예측했지만, 50년이 지난 현재 핵무기 보유국은 9개국 뿐 이다. 핵무기는 애초에 발명할 필요도 없었고 전쟁에서 이기거나 평화를 유지하는 데에도 쓸모가 없었다는 사실은 핵무기의 발명을 무로 돌릴 수도 있음을 의미한다. 핵무기 제조에 쓰인 지식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핵무기를 해체하고 새로 만들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세계를 조금씩 더 안전하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가장 분명한 것은 핵무기 보유량의 규모를 축소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감축과정을 지금 잘 진행되고 있다. 세계가 얼마나 놀라운 속도로 핵무기를 해체하고 있는지 그림 19.1을 참조하자
우리가 갈 길은 이미 펼쳐져 있다. 만일 계속해서 핵탄두를 만들지 않고 오히려 빠르게 해체한다면 헤어 트 리거를 떼어내고 먼저 사용하지 않겠다고 보장한다면 국가 간 전쟁이 감소하는 추세가 계속 이어진다면 이번 세기 후반에 우리는 상호 억지 목적으로만 존재하는 작고 안전한 무기고를 확인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몇 십 년이 지나면 남은 핵무기가 서로를 억지해서 결국 모든 핵무기가 일손을 놓게 될 수도 있다.
20장 진보의 미래
- 18세기 말에 계몽주의가 펼쳐진 뒤로 전 세계의 기대 수명은 30세에서 71세로 부유한 국가는 81세로 증가했다. 산모 사망률이라든가 유아가 5세 이전에 사망한다든가 치명적인 감염 질환도 꾸준히 감소하고 있다.
오늘날 세계는 2세기 전보다 100배 가량 부유해졌고 전 세계 국가들과 사람들은 더 고르게 번영하고 있다. 기아로 죽거나 영양 부족과 발육부진도 꾸준히 줄어들고 있다. 1세기 전에 부유한 국가는 부의 1펴센트를 아동, 빈곤층, 노인을 지원하는 데 사용했지만 오늘날에는 거의 4분의 1을 사용한다. 평화도 자리를 잡았다. 내전은 전 세계의 6분의 5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종적을 감췄다. 전쟁에서 사망하는 사람의 비율은 1980년대의 4분의 1로 줄어들었고 제2차 세계 대전의 0.5% 이하이다. 삶은 모든 면에서 안전해 지고 있다.20세기를 통과하는 동안 미국인이 교통사고로 사망할 확률은 96퍼센트 낮아졌고, 거리에서 공격당해 사망할 확률은 88퍼센트, 비행기 사고로 사람알 확률은 99퍼센트, 추락사할 확률은 59퍼센트, 화재로 사람할 확률은 92퍼센트, 익사할 확률은 90퍼센트 등 사람들은 건강하고 부유하고 안전해졌을 뿐 아니라 더 자유로워지고 있다. 전 셰계의 3분의 2를 아우르는 3분의 2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이다. 전세계에서 다수 국가에서 소수 인종을 차별하는 법이 있었다. 오늘날에는 소수자를 차별하는 정책을 펼치는 국가보다. 그들에게 혜택을 주는 국가가 더 많다. 20세기에 접어들 때 여성에게 투표권이 있는 나라는 단 하나였다. 오늘날에는 남성이 투표할 수 잇는 모든 국가에서 여성도 투표할 수 있다. 오늘날 동성애를 범죄화하는 법은 끊임없이 공격받고 있으며 특히 미래 세계를 엿보게 해 주는 젊은 층을 중심으로 소수 인종, 여성, 동성애자를 관용하는 태도가 늘고 있다. 여성의 희생 아동의 희생이 이어지는 노동력의 착취도 확연히 감소하고 있다. 사람들은 건강하고 안전하고 자유로워진 것과 함께 더 많이 배우고 더 똑똑해지고 있다. 현명해진 삶을 좋은 곳에 사용하고 있다. 미국인의 주당 노동 시간은 예전보다 22시간 감소했고 유급 휴가로 3주를 보내며, 가사 노동에 43시간 적게 투자하고 임금의 8분의 5가 아닌 3분의 1만을 생필품에 지출한다. 미국인은 여가 시간과 가처분 소득을 여행하고 아이들과 함께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연락하고 세계 각국의 요리를 맛보고 지식을 쌓고 문화를 즐기는데 사용한다. 젊은 세대는 불행, 외로움, 우울증, 약물 중독, 자살에서 점차 멀어지고 있다.
계몽주의는 잘 작동해 왔다. 250년 동안 사람들은 지식을 활용해 인간의 번영을 증진해 왔다. 과학자는 물질, 생명, 마음의 작동 원리를 밝혀냈다. 발명가는 자연 법칙을 이용해서 엔트로피에 저항해 왔고 사업가는 그들의 발명품을 제품으로 만들었다. 입법자는 개인에게는 이익이 되지만 집단에게는 해가 되는 행위를 단념시켜 삶의 조건을 향상시켰다. 이 모든 노력은 우리로 하여금 인간 본성의 결함을 우회하게 하고 우리의 선한 천사에게 힘을 부여하는 제도로 이어졌다.
동시에...오늘날 전 세계 7억명의 사람들이 극심한 빈곤 속에 살아가고 있으며 극빈층 계층은 기대 수명이 60세가 채 되지 않고 인구의 4분의 1이 영양 부족 상태에 있다. 해마다 100만명에 가까운 아이들이 페렴으로 사망하고 50만 명의 아이들이 질명으로 에이즈로 사망한다. 10여건의 전쟁이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그 중 한 전쟁에서는 사망자가 2만 500명 이상 발생했으며 2015년에는 최소 1만 명이 인종 청소라는 이름으로 살육되었다. 인류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20억 명 이상이 전체주의 국가에서 압제를 겪고 있다. 세계 인구의 5분의 1이 기본 교육을 받지 못하다. 전 세계에서 거의 3억 명에 이르는 사람이 임상적인 우울증을 앓고 그 가운데 자살자들은 80만 명에 육박할 것이다. 지구는 이번 세기가 끝나기 전에 새롭게 더해질 20억 인구에 적응해야 할 것이다. 지난 10년간 열대 우림 1억 헥타르가 벌목되었다. 해양 물고기의 수는 40퍼센트 가까이 줄었고 수천종이 멸종 위협을 받고 있다. 일산화탄소 이산화황. 질소산화물, 그리고 미립자가 끊임없이 대기로 배출되고 이산화탄소는 만약 배출량을 줄이지 않는다면 매년 380억톤씩 나와 지구그이 기온을 섭씨 2도에서 섭씨 4도까지 상승 시킬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에는 핵무기 1만기가 9개국에 분포되어 있다. 세계 현황을 두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 요지는 물 잔에서 물이 들어 있는 부분과 함께 그렇지 않는 부분도 보라는 게 아니다. 진보는 유토피아가 아니며, 진보를 이어 가기 위해 우리가 분투해야 할 일이 남아 있다는 점을 재차 강조하려는 것이다.
진보가 계속되리라는 희망은 얼마나 합리적일까?
- 우선 진보가 지속되고 있다는 주장부터 살펴보자 우리는 진보가 가능한 이유를 신비주의적이지 않고, 휘그주의적이지 않고, 팡글로스와도 다르게 설명하는 것으로 이 책을 시작했다. 과학 혁명과 계몽주의는 지식을 활용해서 인간 조건을 향상시키는 과정의 물꼬를 텄다 잘 되지 않을 것이라던 당시의 회의주의를 넘어서 2세기가 지난 지금 세계가 개선되어 오면서 진보의 희망을 입증하는 70여개의 그래프를 확인했다. 시간에 따른 개선 과정을 그리는 선이 죄다 우상향할 수는 없겠지만, 많은 그래프가 그 방향을 가리킨다. 더욱 좋은 것은 발전이 또 다른 발전을 만든다는 점이다. 부유한 국가는 환경을 더 넉넉하게 보호하고, 폭력배들을 더 많이 체포하고 사회적 안전망을 더욱 강화하고 시민을 더 많이 교육하고 치료할 수 있다. 잘 교육받고 잘 연결된 세계는 환경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더 적게 전체주의에 빠져들고, 더 드물게 전쟁을 시작한다.
이 진보를 추진해 온 기술 발전은 속도를 늦추는 법이 없다. 도덕적 진보도 마찬가지이다. 역사는, 미개하고 뒤처진 곳에서나 그런 관습이 간신히 유지될 것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걱정이 많은 사람이라고 해도 인간 제물, 식인, 내시 하렘, 노예, 결투, 집안 싸움, 전족, 이단자 화형, 마녀 물고문, 공개고문과 처형, 유아 살해, 괴물 쇼, 정신 이상자 비웃기 등 인간 극단의 야만성이이 되살아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는다. 비관론자들은 경제성장이 계속되면 자원이 고갈되고 지구가 오렴될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21세기에는 정반대의 현상이 나타났다. 과도한 경제 성장이 아니라 지나치게 저조한 경제 성장이라는 것이다. 경제침체는 수많은 문제를 낳고 그로 인해 21세기의 정책 입안자는 거대한 난관에 봉착한다. 그러나 영광스러웠던 경제성장이 속도는 느리게 진행 되어도 여전히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구가 극빈층에서 벗어나고 있는 것은 오늘날 세계에서 벌어지고 있은 가장 커다란 진보라고 할 수 있다. 정보와 더불어 엔트로피를 피해 갈 유일한 방법이 되어 줄 자원, 다른 모든 요소에 힘을 넣어줄 것은 바로 에너지이다 소형 모듈형 원자로의 형태를 취한 4세대 핵에너지는 소극적 안전성을 갖출 수 있고 확산이 불가능하고 페기물을 만들어 내지 않고 대량 생산이 가능하고 유지비가 적고 무제한적으로 연료를 공급받을 수 있으며, 석탄보다 저렴하다. 탄소 나노튜브로 제작한 태양광 패널의 효율성은 현재 사용하는 광전지의 100배에 달해서, 태양광 에너지에서도 무어의 법칙을 이어 나갈 수 있게 해 줄 것이다. 그렇게 생산한 에너지를 액체 금속 전지에 저장할 수 있다.
- 인간의 진보를 완전히 다르게 위협하면서 계몽주의의 토대를 약화시키려는 정치 운동이 있다. 21세기의 두 번째 10년대에 접어들어 포퓰리즘, 더 정확히는 권위주의적 포퓰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반계몽주의 운동이 부상했다. 개인보다 부족에 초점을 맞추는 포퓰리즘은 소수자의 인권을 보호하거나 세계적으로 인간의 복리를 증진할 여지를 지워 버린다. 강력한 지도자를 높게 평가하는 포퓰리즘은 인간 본성의 한계를 가노가한 채 규칙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제도를 업신 여기고 불완전한 인간 행위자의 권력을 제한하는 헌법상의 견제 원리를 무시한다. 수 십년간 세계를 휩쓸어 온 리버럴하고 세계주의적인 계몽주의적 휴머니즘과 그것에 반발하고 있는 되행적 권위주의적 부족주의적 포퓰리즘 사이의 긴장 관계는 어떻게 전개될까 어떻게 하면 계몽주의의 가치를 위협하는 포퓰리스트의 위협에 대응할 수 있을 까 불안정한 경제는 포퓰리즘의 동력이 아니니,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거나 실직한 철강 노동자와 대화하고 그들의 고통을 느껴 보고자 하는 일은 가치 있는 일이기는 대도 큰 효과는 없을 것이다. 포퓰리즘 운동은 그들의 숫자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으므로 게리맨더링(특정 후보자나 특정 정당에 유리하게 선거구를 조정하는 것) 같은 선거제도상의 부정과 시골 지역의 표가 더 큰 무게를 갖는 불균등한 대표성을 개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언론인은 사소한 실수나 추문으로 후보자의 평판에 흠을 내기보다는 그의 이력이 얼마나 올바르고 일관성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나는 언론과 지식인들이야 말로 현대 서양 국가들은 공정하지도 않고 제 기능도 하지도 못하기 때문에 국가를 급격하게 흔들지 않고서는 발전도 없다고 말하는 포퓰리스트들의 공범이라고 믿는다.
- 근대성을 지지하기 위해 넘어서야 할 난관이 하나 있다. 뉴스를 가까이 들여다 보면, 낙관주의는 순진해 보이거나, 전문가들이 엘리트를 표현할 때 가장 즐겨 쓰는 말처럼 ‘세상 물정에 어두운’ 견해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융 신화에 속하지 않는 현실 세계에서,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진보는 막상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동안에는 잘 느껴지지 않는 작은 진보들이다. 철학자 아이제이아 벌린이 지적했듯이, 완벽하게 정의롭고, 평등하고, 건강하고, 조화로운 사회라는 이상은 위험한 환상이며, 자유 민주주의 국가는 그런 이상에 한 번도 도달한 적 없다. 사람들은 단종 재배로 생산된 복제품이 아니고 따라서 누군가의 만족은 곧 다른 이의 불만이 되기 마련이며, 사람들이 평등한 결말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불평등한 대우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게다가 자유의 특권에는 자신의 삶을 망가뜨릴 자유가 포함된다. 자유민주주의는 진보할 수 있지만 누더기 같은 타협안과 부단한 개선이라는 불변의 배경 속에서만 진보한다.
자녀들은 부모와 조부모가 갈망했던 것을 얻었다. 더 큰 자유, 더 큰 물질적인 부, 더 정의로운 사회까지, 하지만 지난날의 병은 모두 잊혔고, 자녀들은 지난 문제의 해결책 때문에 생긴 새로운 문제와 맞닥뜨린다. 그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다고 해도, 다시 그로 인해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요구가 그렇게 영원히 예즉할 수 없는 방식으로 발생한다.
이것이 진보의 본성이다. 창의성, 공감, 좋은 제도가 우리를 이끌어 준다.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과 열역학 제2법칙이 우리를 밀어낸다. 케빈 켈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변증법이 결국 어떻게 전진 운동을 만들어 내는지를 설명한다.
계몽 운동이 시작되고 과학이 발명된 이후로 우리는 해마다 파괴한 것보다 조금 더 많은 것을 창조해 왔다. 하지만 그 몇 퍼센트의 긍정적 차액이 몇십년에 걸쳐 이른바 인간의 문명을 구축했다. 진보는 자신을 감추는 행우하서 돌이켜 볼 때만 눈에 보인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나는 사람들에게 미래에 대한 나의 커다란 낙관은 역사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단기적인 후퇴를 장기적인 진전과 조화시키고 역사의 흐름을 인간의 행위와 조화시키는 건설적인 의제를 귀에 쏙 들어오느 ㄴ이름으로 표현하는 데 서툴다. ‘낙관주의’는 별로 옳지 않다. 사정이 언제나 나아지리라는 믿음은 사정이 언제나 나빠지리라는 믿음보다 더 합리적일 게 없다. 켈리는 progress(진보)와 process(과정)의 앞글자를 가져와 “protopia”라는 이름을 제안한다. 다른 이들은 “비관주의적 희망” “낙관적 현실주의” “급진적 점진주의”를 제안한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름은 낙관주의자인지를 묻는 질문에 한스 로슬링이 내놓은 답에 있다.
“나는 낙관주의자가 아닙니다. 나는 아주 진지한 가능주의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