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호상(安浩相)
1902∼1999. 교육자·민족사상연구가. 본관은 탐진. 호 는 한뫼. 경상남도 의령 출생. 안석제의 독자로 태어 났으며,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다. 집안 어른인 홍문각 교리를 역임한 항일운동가 안효제와 독립운동 가이자 실업가인 안희제의 뜻에 따라 신학문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19년서울로 올라와 중동중학을 다니 면서 대종교에 입교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민족의 사상을 연구하는 일에 뜻을 두었다.
1922년에는 상해에 가서 독일국립동제대학에 재학 중 김구·안창호·신채호·이시영·전진한·조소앙·이동녕 등 민족지도자들과 만나면서 영향을 받았으며, 학생운동에 뛰어들어 상해 한인 유학생회를 이끌기도 하였다. 조국 독립을 위해서는 보다 장기적인 계획과 준비가 필요함을 절감하고 독일 유학을 결행, 1929년에는 독일 국립 예나(Jena)대학에서 철학박사학위를 받았다. 영국 옥스퍼드대학과 독일 국립 훔볼트학술재단의 연구과정을 거쳐 귀국했으나 당시 조선총독부에서는 민족적 성향이 강한 그에게 교수직을 허락하지 않았다. 1931년에는 일본 경도제국대학에서 연구하였고, 1933년에는 경성제국대학 대학원을 졸업하였다.
그 해 보성전문학교 이사장이었던 김성수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보성전문학교 교수로 부임하였으나, 조선어학회사건과 녹지연맹사건 등에 연루되는 등 연속되는 반일행위로 인해 관헌의 일급 수배자로 지목되었다. 집안문제와 지병으로 인한 휴직과 복직의 와중에서도 1942년『철학개론』을 출간하고 헤겔 철학을 깊이 연구했으며, 1945년에는 가족들도 모르게 금강산으로 숨었다가 그곳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에는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교수를 거쳐, 1948년 정부수립 때 초대 문교부장관을 역임했는데,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을 홍익인간으로 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50년에는 대한청년단 총본부 단장 자격으로 이승만 대통령의 특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1954년에는 학술원 회원에 선임되었고, 1955년 한독협회 초대 회장, 1958년 동아대학교 대학원장, 1960년 초대 국회 참의원 의원을 지냈다. 1964년 배달문화연구원장으로서 민족사상 연구에 힘썼으며, 1966년에는 독일 훔볼트학술재단 초청으로 세계일주 학술강연을 했고, 1967년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사로 독일을 비롯하여 세계 곳곳을 방문하였다. 1968년 국민교육헌장 기초위원, 1969년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장, 1971년 UN봉사단 한국본부 단장, 1974년 국사 찾기 협회 회장, 1981년 한성대학교 재단이사장, 1992년 대종교 총전교, 1993년 경희대학교 재단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95년 개천절에는 민족통일을 위한 교류의 물꼬를 트기 위해 정부의 허가 없이 방북하여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법처리를 당함으로써 상당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1971년에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고, 1974년에는 독일연방공화국 최고십자훈장, 1991년 세계한민족평화상, 1994년에는 대한민국무궁화훈장을 받았으며, 1999년 2월 숙환으로 별세하자 사직공원에서 사회장으로 추모되어 동작동 국립묘지 제일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한백성(일민)주의의 본바탕』(1947), 『민주적 민족론』(1961), 『배달의 종교와 역사와 철학』(1964), 『민족의 주체성과 화랑의 얼』(1967), 『단군과 화랑의 역사와 철학』(1979), 『민족정론』(1983), 『한웅과 단군과 화랑』(1985), 『겨레역사6천년』(1992) 등 28여 권이 있다.
초대장관의 대임을 맡으시고 단군연호 단기, 교육이념 홍익인간, 단군글 한글전용 이러한 3대업적은 질식 상태에 있던 민족정통을 정초석 위 확정하신 것입니다.
■ 입산마을
의령은 의병장 망우당 곽재우 장군이 태어나 임진왜란 때 최초로 의병을 일으킨 고장이고, 일제치하 수많은 독립 운동가를 배출한 기개가 서린 땅이다. 의령은 경남의 한가운데 있다. 동서로도 남북으로도 중간에 위치하기에 예부터 물산이 모이는 곳이었고, 사통팔달의 요충지였다. 이름난 부자도 많다.
독립운동가인 백산 안희제 선생 역시 천석지기 집안에서 태어나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어 독립운동 자금을 대기도 했고, 글로벌 기업 삼성의 창업주 이병철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삼영그룹 창업주 관정 이종환 회장의 고향 또한 의령이다. 곽재우 생가가 있는 유곡 세간, 이종환 회장의 용덕, 이병철 회장의 정곡 등 많은 곳이 있지만 보훈의 달을 맞아 수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부림면 입산마을을 찾았다.
◆가는 곳곳이 명소= 남해고속도로를 내려 임란 격전지인 정암을 지나 부림으로 향했다. 이종환 회장의 생가가 있는 용덕면을 지나 진등재 고개를 넘어서면 정곡면이다. 이곳은 호암 이병철 생가가 있는 곳이다. 다시 한참을 가다 보면 곽재우 장군 생가와 의병을 모으기 위해 북을 걸었다는 현고수가 있는 유곡면 세간마을을 지난다. 유곡천을 따라 좀 더 가면 6·25전쟁 격전지인 창녕군 박진과 부림면의 갈림길이 나온다.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면 바로 부림면 입산마을이다.
다리를 지나자마자 ‘문화역사마을’이라는 커다란 돌 표지석이 있고 안으로 좀 더 들어가면 높이가 족히 10m는 넘는 고목이 맞는다. 이곳이 바로 입산마을의 입구다. 어른이 두 팔로 감싸 안아도 닿지 않는 몸통. 수백 년 자리를 지켰을 느티나무를 시작으로 유곡천을 마주한 입산마을이 펼쳐져 있다.
◆부자마을, 입산= 입산마을은 뒤로는 장백산, 앞으로는 유곡천이 흐르는 ‘배산임수’의 마을이다. 하천과 마을 사이에 넓은 들판에서도 한눈에 살기 좋은 넉넉한 마을임을 짐작할 수 있다. 장백산은 마치 산이 서있는 형상 같다 하여 설뫼라고 불렸다. 한자로 풀면 바로 ‘입산’이다. 탐진안씨 집성촌으로 종가도 이곳에 있다. 탐진안씨 일가는 1600년 초 고승의 예언에 따라 길지인 이곳으로 이주해 정착했고, 10대 종가 천석지기 부자마을이다. 예부터 벼농사와 보리농사가 흥했고, 현재는 양파를 많이 키우고 있다. 현재는 44가구에 100여 명이 살고 있다.
◆한옥마을= 이곳에는 한옥이 즐비하다. 안씨 종택을 비롯해 조선말 부잣집의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탐진안씨 종택이 1906년에 지어졌다고 했으니 현재 남아 있는 한옥들은 지은 지 100년이 지난 것들이 즐비하다. 최근에 복원된 것들까지 다양하다. 경남도문화재로 지정된 곳만 5곳이나 될 정도로 옛 모습이 남아 있는 곳이다.
안희제 선생 생가부터 안범준 고택, 탐진안씨 종택, 한뫼 안호상 박사 생가 등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전통적인 남부지방 부잣집을 만나볼 수 있다. 안희제 선생 생가의 경우 안채는 팔작지붕 기와집이지만 사랑채는 초가를 얹어, 기와집과 초가집이 공존하는 독특한 멋을 자아낸다.
◆명사의 마을= 입산은 독립 운동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기도 하다. 백산 안희제, 송은 안창제, 수파 안효제 선생 생가가 있고, 개화와 항일독립 정신을 일깨웠던 창남학교(최초의 사립학교), 안씨 여덟 분의 정려를 모신 ‘팔효각’, 안효제 선생을 모신 ‘수파정’, 임란 때 곽재우 장군 휘하 의병장 17인 중 한 명인 지헌 안기종 유허비 등이 남아 있다. 초대 문교부장관을 지낸 한뫼 안호상 박사의 공적비와 생가도 있다.
◆쾌지나 칭칭나네= 유명한 민요 ‘쾌지나 칭칭나네’의 유래가 이곳 입산마을이라는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임진왜란 당시 왜군 장수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쳐부순 내용을 담고 있다는 사실은 더욱 의외다. 가토가 이끄는 왜적을 쳐부순 우리 병사들이 ‘쾌재라(좋구나) 청정(淸正)이 나가네’라며 환호를 지른 데서 유래해 지금의 ‘쾌지나 칭칭나네’로 바뀌었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한(恨)의 정서를 가진 다른 민요와 달리 신명나는 ‘쾌지나 칭칭나네’에는 이렇듯 왜적을 물리친 우리 민족의 마음이 담겨 있다.
◆백산 안희제= 백산 선생은 교육자이자 실업가이면서 독립운동에 누구보다 앞장선 인물이다. 백범 김구, 백야 김좌진과 함께 삼백으로 불린다. 교남학우회와 교남교육회를 조직했고, 부산 구포에 구명학교, 의령에 의신학교를 설립했고, 고향인 입산에 창남학교를 설립하는 등 민족 계몽운동에 앞장섰다.
독립운동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당’을 결성했고, 1910년 한일합방 이후 러시아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했으며, 1914년에 다시 고국으로 돌아와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했다. 백산상회를 통해 독립운동의 자금을 지원했다. 1920년대에는 동아일보 창립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시대일보를 인수해 중외일보로 이름을 바꿔 발행했다. 20년대 일제에 의해 투옥된 이후 1930년대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발해농장을 세웠고, 학교도 만들었다. 의령 출신인 고루 이극로 박사가 추진한 ‘조선어대사전’ 편찬을 돕다가 투옥되기도 했고, 이후 수차례 투옥됐다가 1943년 8월 고문 후유증으로 인한 병보석으로 출감한 지 3시간 만에 순국했다.
◆역사·전통문화·농촌체험= 입산마을은 앞서 말했듯 많은 것을 가진 곳이다. 의병 장수와 독립운동가 등 수많은 명사, 멋스러운 한옥, 시골마을의 풍미까지 모두 갖췄다. 이 때문에 입산마을은 지난 2007년 문화역사마을 가꾸기 사업 대상으로 선정돼 국비 13억 원을 지원받아 입산초등학교 자리에 2009년 입산문화역사관을 세웠다.
마을 경관을 개선하고 휴양·체험시설 등을 갖춰 역사문화 테마공원을 조성할 계획이다. 또 농촌 테마파크 조성사업과 연계한 농경문화 체험코스를 만드는 등 개발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입산마을은 600여 년의 역사를 간직한 과거로부터 현재를 지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