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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산 동기와 카프리 블로그에 원본을 남긴 동기
쉽게 말해서 아래 내용은 책자를 직접 제 블로그에 타이핑 한 겁니다...
출판사에서 항의할 수 있으니..복사 금지로 게시하겠습니다.
최남선이 지은 조선광문회본 산경표입니다.
(교보문고에 산경표를 조회해 봤더니 1990년 발행 산경표가 조회된다. 그러나 아쉽게 절판이다)
(중고서적에 조회가 되는데..산경표 책의 값은 3,500원인데..중고가격은 95,000원이다)
(신경준 지음에 박용수 해설, 푸른산에서 발행한 책자이다)
(지리학에 대한 책, 대동여지도, 택리지, 태백산맥은 없다 등 여러 책을 읽다보니 산경표 원저 한 권 정도는)
(소장하고 싶어 몇 번 고민하다 샀다)
(이 책을 읽고 내용이 길지 않아 카프리 블로그에 원본 그대로 옮겨본다)
(본 산경표 책자는 1913년 최남선의 주도로 발행한 조선광문회 산경표의 영인본이다)
(영인본이란
(박용수님이 해설을 맡아 발행했다)
(수시로 산경표를 읽으며, 선조의 고귀한 숨결을 느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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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읽은날짜 : 2016.10.22 - 10.25
2. 지은이/출판사/페이지수 : 신경준 지음. 박용수 해설 / 푸른산 / 153페이지
○ 지은이 신경준(申景濬, 1712~1781)
자는 순민(순민), 호는 여암(여암), 조선조 숙종 38년에 전라도 순창에서 태어나 주로 영조 때 활동한 실학자로서 특히 국어학과 지리학에 큰 업적을 남겼다. 1750년 한글의 특징과 구조 등을 과학적으로 연구한 '훈민정음운해'를 지었으며 1770년에는 당시 우리나라 문물을 집대성한 문헌비고의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고, 팔도지도, 동국여지도 등의 지도를 제작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소사문답, 직서, 강계지, 산수경, 도로고, 사연고, 가람고, 일본증운, 수차도설, 장자변해 등이 있다.이중 대부분이 1939년 선조선사에서 간행한 여암전서(여암전서)에 실려 있다. 신경준의 학문적 탁월성과 특징은 방대한 자료의 집성과 이의 과학적 분류 및 구성에 있다. 그의 저서들은 앞으로 한국학 연구의 자료적 가치로 더욱 주목받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에 대한 평가도 새로와질 것이 분명하다.
○ 해설 박용수(朴龍洙)
1956년 서울 출생으로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였다. 1987년 중편소설 '1986년 9월의 비망록'으로 제1회 KBS 방송문학상과 1989년 중편소설 '대리인'으로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에 각각 당선된 바 있다. 현재 소설가로 활동하면서 우리국토와 문화에 관련 문헌연구와 사진작업을 하고 있다. 한국문화역사지리학과회, 한국산서회 회원이다.
(2016.10월 현재 교보문고 박용수님의 이력사항)
소설가 지리학자 사진작가
서울 출생으로 단국대학교와 같은 대학원에서 영문학과 국문학을 전공했다. 1980년대 말 중편소설 <대리인>으로 <문학정신> 신인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문단에 데뷔하였으며, KBS 방송문학상, 단국대학교 문학상 등을 받았다. 소설집으로는 <유언의 땅>, <1986년 9월의 비망록>과 문학상 수상 작품집 등이 있다.
우리나라 전통 산맥체계에 대한 최초의 논문 <산경표의 한 연구>를 1990년대 초에 발표하여 사회적인 관심을 이끌었으며, 논문 <택리지와 청화산인 이중환>으로 학계의 주목을 받았다. 2백여 편에 이르는 우리 국토 관련 글을 잡지 등에 발표한 바 있으며, <산경표>, <오대산>, <택리지>, <백두대간> 등의 지리 관련서적을 출간했다.
파리에 관한 저서로는 <파리 산책>, <파리에서 음악을 만나다> 등이 있다. 현재 체코와 이탈리아, 독일의 문화예술에 관한 책을 집필 중이며, 아프리카와 티베트, 중국에 관한 사진작업도 진행 중에 있다.
3. 책 제목 : 산경표
4. 목 차
산경표를 다시 펴내면서(1990.8월 박용수)
산경표의 한 연구(박용수)
1. 머리말
2. 산경표 저자 및 간행시기
3. 조선광문회 산경표 발간의 의의
4. 산경표 산줄기의 검토
5. 산경표 연구의 시대적 필요성
6. 맺음말
5. 박용수님이 작성한 산경표의 한 연구 원문내용
(책자 그대로 원문을 남긴다)
(몇 일 걸렸다)
(남기면서, 인터넷에서 산경표에 대한 백과사전, 지식블로그 내용을 조회해 보았더니)
(박용수님의 연구 내용이 질적으로 제일 좋은 것 같다)
『산경표』는 80년대 중반부터 비록 일부에서나마 주목하고 있는 지리서이다. 산경표의 문헌적 가치는 무엇보다 이 책이 우리 고유의 지리인식에서 비롯된 산줄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뚜렷한 활자를 통해서 처음으로 확인해주는 데 있다. 그리고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 이 책에 나타나는 산줄기 이름이 우리가 배웠고 또 그렇게 믿으면서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태백산맥, 소백산맥 등의 명칭과 다르다는 점에서 매우 충격적이기도 하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 이름과 구성은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며 일제 식민지 지배하에서 통용되었고, 그로부터 해방된 지 반 세기가 가까와진 지금에도 사용되고 있다.
국토는 하나의 민족이 살아왔고 살고 있으며 앞으로 살아나가야 할 민족생존의 공간적 터전이다. 그리고 국토는 단순히 지형, 기후, 토양 등 물리적 자연환경만을 뜻하지 않고, 대대로 살아오면서 이룬 우리의 민족문화가 뿌리내리고 있는 삶의 현장인 것이다.
따라서 미미한 지명일지라도 그 속에는 그 땅 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지리 인식과 언어, 풍습 등 생활양식이 용해되어 있다. 이러한 지명의 왜곡, 훼손은 결과적으로 땅에서 비롯된 삶의 양식과 정신적 소산을 손상시키는 것과 같은 의미를 갖는다.
1913년 최남선의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의 중요성을 발견하고 출판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일제의 식민지 교육 때문에 그 가치가 80년 가까이 버려져 있었고 민족 간의 전쟁 등 이 땅을 휘몰아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광문회 간행의 『산경표』도 이제는 희귀한 귀중본이 되었다. 이를 다시 펴냄으로써 조선광문회에 지고 있던, 소중한 문헌을 보존, 보급해야 하는 빚에서 얼마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새로운 책임을 떠맡게 되었다. 『산경표』가 제시하고 있는 산줄기와 이름 그리고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음이 분명한 풍수지리사상 등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과 사상 등을 과학적이고 합리적으로 연구해야 하는 시대적 요구 앞에서 있게 된 것이다. '우리의 것이기 때문에' 혹은 '일본인이 만들었기 때문에'라는 식의 배타적인 민족의식을 억제하고 타당성과 설득력을 갖출 때만이 '창씨개명'된 우리 산줄기 이름을 되찾을 수 있다. 이 책의 발간은 이같은 연구와 논의를 위한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산경표』에 대한 연구가 모든 관련 분야에서 하루 속히 그리고 심도깊게 진전되어 앞으로 10년 뒤인 21세기에는 우리 교과서에 백두대간이라는 뚜렷한 활자가 자리잡을 수 있기를 갈망하면서, 영인에 사용된 『산경표』는 필자 소장의 조선광문회 본임을 밝힌다.
1990.8
박용수
『산경표』를 다시 펴내면서
하나의 문헌이 지니고 있는 사회적 가치는 시대의 변화와 필요, 재인식의 결과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다.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던 문헌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그 반대로 무관심 속에 묻혀 있던 자료가 새롭게 평가받는 경우도 있다.
※ 해제(解題)* 풀해, 제목제
*해제란(1.
산경표의 한 연구
-원전, 간행시기 등 서지학적 검토를 중심으로- 박 용 수
1. 머리말
산경표(山經表, 지날경)는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알기 쉽도록 만든 지리서이다. 그동안 간행 시기 등이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채, 신경준의 저작이거나 아니면 그의 여지고를 바탕으로 후대 사람이 쓴 책일 것이라는 정도만 알려져 있었다.
산경표와 마찬가지로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에 대한 연구도 아직 미진한 형편이다. 그에 대한 연구는 훈민정음운해를 지은 언어학자로서 주로 국어학계에서 행해졌다.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의 여지고(輿地考,수레여)를 담당하고 강계지(疆界志,지경강,경계할계,뜻지), 산수경(山水經,지날경) 등의 지리서와 동국여지도(東國(輿地圖), 팔도지도(八度地圖) 등 지도를 제작한 신경준이지만 지리학자로서의 그의 위치와 학문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절대적으로 부족한 실정이다.
신경준은 조선조 후기 영조 때의 실학파 지리학자 중의 하나이다. 그가 활동하던 18세기는 실학사상의 영향으로 국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한국 지리학사에서도 보기 드물게 많은 지리학자가 배출되고 뛰어난 지리서, 지도 등이 제작되던 때였다. 그 대표적인 업적으로 지리학적 백리척(百里尺,자척)을 사용해 만든 정상기의 동국지도(東國地圖)와 과학적 체계화를 이룩한 인문지리서라는 평을 받는 이중환의 택리지 등을 들 수 있다.
여암 신경준은 우리나라 지리학 발전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보여진다.
그 근거로
첫째, 신경준(1712~1781)이 활동하던 시점이 정상기(1678-1752), 이중환(1690-1756)과 정약용(1762-1836), 김정호(?-1864)를 연결하는 시기라는 점이다. 조선조 후기 특히 18세기 후반의 지리학의 전개 및 발전과정 연구에 그가 차지하는 비중은 크다고 할 수 있다.
둘째, 신경준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담당하는 등 관찬(官撰,지을찬) 지리지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는 점이다. 그 동안의 조선조 후기 지리학 연구는 주로 이중환, 김정호 등 개인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민찬(民撰) 지리지에 치중해왔다. 이 때문에 신경준에 대한 연구가 부진했을 것이다.
하지만 민찬 지리지 연구만으로는 당시의 지리적 지식과 지리사상 등을 파악할 수 없다. 관찬 지리지의 편찬사업이 전국토에 대한 국가의 행정적 파악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지리지에서 볼 수 없는 시대적 상황과 행정적 필요성 등이 잘 나타나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정부에서 관찬했기 때문에 관찬 지리지의 내용은 당시의 지리적 지식을 사실상 공식화한 것이라는 점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잇다.
산경표는 요즘 들어 그 자료적 가치가 주목받고 있는 문헌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산맥 명칭과는 다른 백두대간, 장백정간 등의 산줄기 이름이 기록되어 있고 백두산을 정점으로 하는 산줄기의 분포 등이 기술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는 그동안 밝혀지지 않았던 산경표의 저자 및 간행시기 그리고 조선광문회 발간에 따른 시대적 상황 그리고 산경표 연구의 필요성 등을 서지학*적인 검토를 중심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書誌學 : 책의 분류와 해제(解題),감정(鑑正,거울감) 따위의 연구를 하는 학문. 문헌학)
2. 산경표 저자 및 간행 시기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발행한 산경표에는 이 책의 원저자가 미상임을 밝히면서 다음과 같은 해제를 싣고 있다.
(해제) 우리나라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산을 논한 것은 많지만 심히 산만하고 계통이 서있지 않다. 오직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輿地考)의 산경(山經)만이 산의 줄기와 갈래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 어느 산의 내력과 높낮이, 산이 치닫다가 생긴 고개, 산이 굽이돌며 사람 사는 마을을 어떻게 둘러싸는지 등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어, 이는 실로 산의 근원을 밝혀 보기에 편리하도록 만든 표라 할 만하다.
이 산경표는 산경을 바탕으로 살고 옆에 이수(里數)를 부기하고 있어 이를 펼치면 모든 구역의 경계를 마치 손바닥 위에 올려놓은 듯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이 산경표는 바탕으로 삼은 산경을 일목요연하게 나타낼 뿐 아니라 지리연구가의 지침서가 될 만하다.
앞의 해제를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은 중요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첫째, 산경표의 저자를 모르지만 신경준이 지은 여지고의 산경을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고 믿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 당시까지 전하는 지리지 중에서 신경준의 여지고 산경이 우리나라 산줄기와 갈래를 잘 나타내고 있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셋째, 저자를 모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산줄기 계통에 관한 책을 발행해야 할 만큼 시대적 필요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앞의 인용문 중 신경준의 여지고란 동국문헌비고의 여지도를 말한다. 당시의 우리나라 문물과 제도를 집대성할 편찬계획을 갖고 있던 영조의 명을 받아 신경준이 서명웅, 체제공, 서호수 등과 함께 만든 동국문헌비고가 발간된 것은 영조 46년인 1770년이었다. 이 동국문헌비고는 상위(象緯,씨줄위), 여지(輿地,수레여), 예(禮,예절례), 악(樂) 등 모두 13고(考)로 구성되었으며 이때 신경준은 여지고를 담당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후 12년이 지난 1782년(정조 6년) 제2차 편찬사업이 시작된다. 동국문헌비고가 불과 8개월만에 만들어져 착오와 누락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 2차 작업이 완료된 것은 1831년(순조 31년)으로 착수한 지 무려 50년 뒤였다. 하지만 증보동국문헌비고는 인쇄되지 못하고 소수의 관계인들만이 등본(騰本,오를등,근본본)으로 필사하여 이용하는 데 그쳤다.
증보동국문헌비고가 완성된 지 70여 년이 지난 뒤인 1903년(광무 7년) 제3차 편찬작업이 시작된다. 나라의 이름이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바뀌는 등 서구의 근대문물의 본격적인 유입 등 국내외의 상황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이 3차 편찬작업은 약 4년 뒤인 1906년(광무 10년)에 완료되어, 1908년 1월에 간행되었다. 영조 때부터 감안한다면 무려 140년 가까운 세월이 소요된 것이다.
이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는 모두 16고(考)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여지고(輿地考)는 역대 각 부족국가의 국경을 나타낸 역사지리서라 할 수 있는 역대국계(歷代國界), 각 주(州)와 군(郡)의 연혁을 기술한 군현연혁(群賢沿革), 우리나라 각 도의 산천을 설명한 산천(山川), 주요 도로와 각 도로 상의 주요 기점 간의 거리를 나타낸 도리(道里) 등으로 분류, 설명하고 있다.
신경준이 직접 편찬한 영조 때의 동국문헌비고를 확인하지는못했지만 1908년에 간행된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와 그 체제가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전제 항서 보면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조선광문회의 해제는 일단 잘못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여지고에는 산경이라는 항목이 없으며 산천이라 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경이라는 항목은 우리나라 산과 강을 산경(山徑), 수경(水經,지나경)으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는, 신경준의 주요 저서를 모은 여암전서(旅菴全書)의 산수고(山水考)에서 나타난다.
<그림1>은 증보문헌비고의 여지고 산천의 일부분이며, ,<그림2>는 산수고 중 산경이다. 이를 살펴보면 여지고의 산경이라는 조선광문회의 해제는 착오에서 비롯된 것임이 확실해진다.
그림1과 그림2에서 알 수 있듯이 여지고의 산천과 산수고의 산수고의 산경은 그 내용상 큰 차이가 없다. 그리고 삼각산 설명을 앞으로 끌어냈을 뿐 백두산 이하 산의 기술에 있어 연지봉, 허항령 보다 희산 등의 순서를 적고 있어 그림3의 조선광문회본의 산경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사진 크릭하면 원본 큰 사진)
이같은 사실만 가지고 볼 때 비록 여지고는 아니지만 산경을 바탕으로 거리를 부기(附記,붙을부)해서 보기 쉽도록 도표화한 것이 산경표라는 조선광문회의 해제는 어느 면에서 설득력을 가질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산경표가 우리에게 문헌자료로서 가치를 갖고 있는 이유는 산줄기와 갈래의 흐름을 일목요연하게 나열했다는 사실에 그치지 않고, 무엇보다 백두대간 등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을 기록하고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림1과 그림2에서 알 수 있듯이 여지고의 산천과 산수고의산경에는 산줄기 이름이 나타나 있지 않다. 만일 조선광문회 해제를 그대로 따른다면 산의 흐름과 거리 등 지리적 지식이 풍부하고, 이를 도표화할 수 있는 과학적 구심력을 갖추고, 백두대간 등 1개의 대간과 1개의 정간, 13개의 정맥으로 산맥을 나눌 수 있는 지리적 안목이 뛰어난, 우리가 모르는 지리학자가 신경준 이후에 존재했었다는 가설이 성립되는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리지 편찬은 주로 국운 상승기나 민족자각 의식이 팽배한 시기에 이루어졌다. 이 같은 관점에서 영조 때부터 발간된 지리지를 검토해 온 결과 산경표의 저자와 출처, 간행시기 등을 밝혀낼 수 있었다.
산경표의 저자는 바로 여암 신경준이며 편찬 시기는 1769년(영조 43년)경이다.
신경준이 향시(鄕試)와 증광시 을과에 합격해 벼슬길에 오른 것은 그의 나이 43살 때인 1754년(영조 30년)이었다. 이후 신경준은 승문원, 사간원, 사헌부에서 일하다가 서산 군수, 장연(長淵)현감을 지내고 58세인 1769년 정3품 당하관인 종부시정(宗簿寺正)을 끝으로 일단 고향인 전라도 순창으로 낙향했다. 그때 당시 영의정이던 홍봉한이 신경준의 사람됨을 전해 듣고 영조에게 천거하여 비국랑(備局郞,사내랑) 직책으로 다시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이때 영조가 신경준이 지은 '강계지'를 보고 여지편람의 감수(監修)를 맡겨 편찬케 하였다. 이 책의 체재가 중국의 문헌통고와 비슷하여 여기서 착안해 편찬한 것이 앞서 설명한 동국문헌비고였다.
동국문헌비고의 여지고를 담당하기 바로 전 해에 완성한 여지편람(輿地便覽)은 그동안 저자와 간행 시기 그리고 그 가치가 널리 알려져 있지 않은 문헌이었다. 책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땅 모습을 알려져 있지 않은 문헌이었다. 책 이름이 뜻하는 그대로 땅 모습을 보기 쉽도록 만든 책인 이 여지편람의 일부가 바로 산경표이다.
여지편람은 2권 2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책*(乾冊,하늘건.책책)과 곤책(坤책,땅곤)으로 분리되어 있는 책 중에서 건책이 바로 산경표이다.
* 건,곤은 우리나라 고문헌에서 두 권이 한 질일 때 사용하는 표기로 3권일 때는 상중하, 4권일 때는 춘하추동 등으로 표기하였다.
곤책은 거경정리표(距京程里表,떨어질거,서울경.헤아릴정)로 당시 서울과 각 지역간의 거리를 표기하고 있으며, 그 체재가 조선광문회 간행의 도리표*(道里表)와 같다.
*도리표 ; 이정표(里
두 책에서 발견할 수 있는 차이점은
첫째, 여지편람 산경표는 낙남정간(洛南正幹,물낙)으로 표기하고 있어 조선광문회 본의 낙남정맥과 다르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선 뒤에서 따로 다루겠으나 단순히 기록상의 실수에서 빚어진 일인지 아니면 지리 해석의 차이 때문인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하겠다.
둘째, 여지편람에 없는 도(道)와 군현(郡縣) 행정구역이 조선광문회 본에는 표기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로 미루어 최성우 소장의 조선광문회 본이 여지편람보다 후대에 만들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필자가 확인한 산경표는 조선광문회 본 외에 해동산경(海東山徑) 등 모두 5종이 있다. 명칭 및 체제에 다소 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모두 필사본이다. 이같은 사실은 이중환의 택리지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산경표가 얼마나 중요한 문헌이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3. 조선광문회 산경표 발간의 의의
오늘날 우리가 산경표를 접할 수 있는 것은 최남선이 설립한 조선광문회의 고전 간행사업 때문이다. 산경표의 가치를 발견하고 또 그것을 인쇄본으로 발간하지 않았다면 우리가 백두대간 등 우리 고유의 산줄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런지 모른다.
앞에서 조선광문회의 해제를 검토하며, 저자가 밝혀지지 않은 산경표를 굳이 발행했어야 하는 시대적 필요성이 1913년을 전후한 당시에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대한 검토를 통해 산경표 인쇄본 발행의 의의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최남선이 조선광문회를 설립한 것은 1910년이었다. 1908년 신문관을 설립해 소년 잡지 발간 등 출판을 통한 국민계몽을 벌였지만 우리나라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 지배하에 들어가자 그는 그해 12월 조선광문회를 발족시켰다. 이 단체는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학 연구와 출판활동이 조선총독부의 비호 아래 식민지 통치의 기본자료로 활용되는 것을 우려해, 우리 고전의 보존과 보급을 통한 민족문화의 선양(宣揚)을 목적으로 설립한 것이다.
조선광문회에서 맨처음 간행한 책은 동국통감, 열하일기였다. 지리서로는 1912년 6월 택리지, 도리표가 발간되었고 산경표는 1913년 2월에 출판되었다.
택리지는 우리나라 지리서 중 가장 정요(情要)하고 또 인문지리학의 시초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지리서이다. 또 도리표는 비록 저자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서울과 각 지역간의 거리를 나타내고 있어 운송 및 교통 등 실제 생활에 필요한 책이라는 점에서 그 출판 의도 및 배경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최남선이 발간을 계획했던 지리서는 택리지 등 모두 22권이었다. 이 중에서 한백겸(韓百謙)의 동국지리지(東國地理志), 성능의 북한지, 민주면 편찬의 동경잡기, 홍양호의 북새기략,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 모두 산경표보다 널리 알려져 있고, 저자가 분명하며 문헌자료적 가치가 높은 지리서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책보다 먼저 산경표를 출간한 이유가 무엇인지 시대적 상활을 중심으로 살펴 보기로 한다.
1908년 대동서관에서 발행한 당시 지리 교과서의 하나인 고등소학대한지지(高等小學大韓地誌)의 편집의 뜻을 밝힌 글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우리나라의 산지(山地)는 종래 그 구조의 검사가 정확치 못하여 산맥이 논(論)이 태반 오차를 면치 못하고 있으므로 일본의 전문대가인 야쓰쇼에이(失洋昌永)의 지리를 채용하여 산맥을 개정하노라.
이 같은 뜻을 밝히면서 우리나라 산맥을 기술한 제3장에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강남산맥, 적유령산맥 등의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앞의 인용문을 살펴보면 1910년 한일합방 이전에 이미 우리나라 산맥명칭과 구조 설명에 있어 혼란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인용문 속의 야쓰 쇼에이는 일본정치지리 등을 쓴 정치지리학을 전공한 일본인 학자이다. 우리나라 지리에 관한 저서로는 1904년 일본 동경의 환선주식회사에서 발행한 한국지리가 있다.
고등소학대한지리와 한국지리는 그 편집체제에 큰 차이가 없다. 특히 산맥을 설명하는 부분에 이르러서는우리나라 지세를 남한과 북한 둘로 따로 나누어 기술하는 등 야쓰 쇼에이의 책을 거의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한국지리에는 우리나라 산맥이 계통을 고또(小藤,등나무등) 박사가 연구한 개요에 따라 서술하겠다는 언급이 있다. 고또 박사란 일본 동경 제국대학의 이학 박사인 고또 분지로(小藤文次郞,사내랑)를 말한다. 그는 1900년부터 1902년 사이에 2회에 걸쳐 우리나라를 방문해 14개월 간 전국을 답사하면서 우리나라 지형을 연구하였다.
우리나라 산맥과 관련된 그의 논문으로는 조선산악론, 원제 An Orographic Sketch of Korea 등 3편, 지명사전인 로마자 색인 조선지명자휘, 그리고 1903년 제작된 지도 조선전도를 남기고 있는데 앞으로 지리학은 물론 지질학 등 관련분야에서 종합적인 연구 검토가 있어야 하겠다.
<그림 5>는 고또 분지로의 이론에 따른, 야쓰 쇼에이의 한국지리에 실린 산맥 지형도이다. 지형과 지명이 요즘의 지리교과서에 실린 지형도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산맥의 명칭과 개요는 고또 분지로의 이론을 아무런 검토없이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한일합방을 전후해 일본인들에 의해 지어진 우리나라 관련 지리서들이 대량 출판되었다. 이는 모두 일제의 침략과 식민지 통치 그리고 일본 기업과 민간인들이 국내 시장 침투를 염두에 두고 만들어진 책들이었다. 실제로 1905년 발행된 다부찌 도모히꼬의 한국지리지는 당시에 무려 7판까지 발행되기도 했다.
당시 조선광문회는 일본에서 발행되던 온갖 신간서적과 우리의 귀중한 고문헌을 수천 권씩 보유하고 있어서 당시의 지식인들이 자주 회합을 갖던 장소였다. 그리고 주요 실무자는 장지연(張志淵,못연), 유근(柳瑾,아름다울 옥 근), 이인승(李寅承) 등이었다.
이 때문에 산맥 명칭을 둘러싼 문제점을 최남선과 조선광문회 측이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일본인들의 필요에 의해 지어진 지리서가 국내에 유입되고 이를 일방적으로 받아들여 지리 교과서까지 그대로 수록하자 이를 우려한 조선광문회에서 산경표 간행을 서둘렀다고 보여진다. 이러한 의미에서 산경표 발간은 우리나라 고전을 보존, 전포(傳布)하겠다는 조선광문회 설립 목적이 가장 잘 실현된 경우라 할 수 있다.
앞에서 살핀 바와 같이 산경표는 여암 신경준이 감수를 맡아 편찬한 여지편람의 일부였으며 간행 시기는 영조 45년인 1769년이었다.
그리고 최남선이 주도하는 조선광문회에서 1913년 산경표를 발행하게 된 출판배경에는, 일본인 학자들에 의해 왜곡되어가는 우리나라 산줄기 갈래와 이름을 바로잡기 위한 민족적 저항의식이 깔려 있었다.
4. 산경표 산줄기의 검토
산경표에 의하면 우리나라 산줄기는 모두 15개이다. 이를 다시 대간(大幹) 1개, 정간(正幹) 1개, 정맥(正脈) 13개로 분류하고 있다.
원전인 여지편람(輿地便覽)의 산경표에는 낙남정간(洛南正幹)으로 표기하고 있어 조선광문회 본의 낙남정맥과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아직 정맥, 정간의 분류 기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결과가 없어 확신할 수 없지만, 대간, 정간 정맥의 순서로 나열하고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청북정맥보다 앞에 배치한 것으로 보아 낙남정간이 옳은 듯 싶다.
<그림 6>은 여지편람의 산경표 중 낙남정간이 나타나는 부분이다. 지리해석상의 차이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기록 과정의 실수에서 빚어진 일인지 앞으로 검토되어야 하겠다.
여지편람이 아닌 또다른 이본(異本)에는 낙남정맥으로 표기하고 있으나 편집체제가 조선광문회 본과 유사하며 필사본인 탓에 많은 오자가 보여 신뢰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인쇄본으로 발간된 조선광문회 본을 따르기로 한다. 다음은 백두대간을 비롯한 15개 산줄기에 대한 지리적 설명이다.
① 백두대간(白頭大幹)
백두산에서 시작해 원산, 낭림산, 금강산을 거쳐 태백산까지 내려와 속리산 등 지금의 소백산맥을 포함하면서 지리산까지 뻗은, 제일 큰 산줄기이다. 한반도를 세로 지르며 큰 획을 긋고 있다.
② 장백정간(長白正幹)
장백산에서 동쪽으로 뻗어 경성의 거문령, 경흥의 백악산을 지나 두만강 하구의 섬 녹둔도(鹿屯島) 앞에서 멈춘 산줄기이다.
③ 낙남정맥(洛南正脈)
백두대간의 끝 지리산에서 동남쪽으로 흐른 산줄기가 고성의 무량산, 진해의 여항산을 거쳐 김해의 분산(盆山,동이분)까지 이어진다.
④ 청북정맥(淸北正脈)
백두대간의 낭림산에서 서쪽으로 뻗어 자연장성을 이루고 있는 추유령, 이파령, 천마산을 거친 후 신의주 앞바다 신도를 마주한 이곳에서 머문다. 청천강 이북의 산세가 이에 속한다.
⑤ 청남정맥(淸南正脈)
낭림산에서 서남쪽으로 흘러 묘향산에이룬 후 계속 서남향으로 이어져 월봉산, 도회령을 거쳐 광량진의 봉수산까지 뻗은 산줄기이다.
⑥ 해서정맥(海西正脈)
백두대간의 두류산에서 시작된다. 서남쪽 개연산에 이르러 다시 북상하여 언진산에서 남쪽으로 고정산, 멸악산을 지난다. 강령의 장산곶까지 뻗은 산줄기이다.
⑦ 임진북례성남정맥(臨津北禮成南正脈)
임진강 북쪽과 예성강 남쪽의 산줄기이다. 개연산에서 서쪽으로 흐르는 해서정맥을 바라보며 남으로 학봉산, 수룡산, 성거산을 거쳐 개성의 송악산까지 이어진다. 개성 유역의 산세가 이에 포함된다.
⑧ 한북정맥(漢北正脈)
한강 북쪽을 흐르는 산줄기로, 백두대간이 금강산을 향해 달리다가 분수령에서 서남쪽으로 꺽어져 금화 오갑산, 불정산, 도봉산, 삼각산을 지난 후 교하까지 이어진다.
⑨ 낙동정맥(洛東正脈)
태백산에서 서쪽 소백산을 이어지는 백두대간 갈래에서 벗어나, 남쪽으로 계속 내려온 산줄기이다. 이화령, 부성산, 가지산, 취서산, 금정산을 지나 부산 다대포 앞바다에서 멎는다.
⑩ 한남금북정맥(漢南錦北正脈)
속리산 문장대에서 시작해 청주의 상당산성을 바라보며 동쪽으로 돌아 죽산의 칠현산에서 북으로 한남정맥, 남으로 금북정맥에 닿는다.
⑪ 한남정맥(漢南正脈)
칠현산에서 북으로 시작해 용인의 보개산, 광주의 광교산을 지나 서쪽의 수리산으로 이어진다. 다시 서쪽으로 소래산 주안산에 이르고 인천의 문학산 봉수를 남쪽에 남겨 둔 채 북쪽의 김포평야 구릉지대를 지나 강화도 앞 문수산에서 멈춘다.
⑫ 금북정맥(錦北正脈)
칠현산에서 서남쪽으로 차령을 지나 남진하다가 상주산에서 북쪽 해미의 가야산을 거치고 다시 서쪽으로 태안반도로 건너가 안흥진까지 이어진다. 금강 이북의 산세가 이에 속한다.
⑬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
백두대간이 지리산에 이르기 직전 영취산에서 장수를 북으로 끼고 돌아 주화산에서 금남정맥과, 곰재(熊峙,산우뚝할치)에서 호남정맥을 만난다.
⑭ 금남정맥(錦南正脈)
전주 동쪽 마이산에서 북으로 치달아 대둔산, 계룡산을 거친 후 서쪽으로 망월산을 지나 부여의 부소산과 조룡대에 닿는다.
⑮ 호남정맥(湖南正脈)
전주 동쪽 곰재(熊峙)에서 남으로 갈라져 운주산, 내장산에 이르고 서쪽의 노령을 무시한 채 담양을 지나 광주의 무등산에 이른다. 보성의 사자산까지 남진하다가 다시 동북쪽으로 올라가 송광산, 조계산을 만나고 광양의 백운산까지 이어진다.
<그림7>은 산경표에 의해 산줄기를 나타낸 것이다.
<표 1>은 산경표에 의거해 산줄기와 분기점을 도표화한 것이다. 부분적으로 필자의 견해 및 이우형의 서술과 다소 차이가 있고 금북정맥이 빠져있는 등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이 도표는 매우 중요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시사해 주고 있다.
즉 산줄기의 분류에 있어 대간의 대(大), 정간 정맥의 정(正)이 산맥 분류의 한 기준 표기로써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이때 '대'는 일반적인 뜻대로 부피나 길이가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는 뜻의 클 대, 정은 정일품, 종일품 하는 식의 위계의 상하를 나타내는 '정' 정의 어의(語意)로서 사용된 것이라 여겨진다.
그리고 산줄기를 다시 맥(脈)과 간(幹)으로나누고 있는데, 이같은 분류와 명명(命名)은 그 기준을 이루고 있는 지리 인식과 지리 사상과 함께 의미하는 바가 매우 중요하다고 판단된다.
산경표의 산줄기 이름은 대체로 산줄기 중심으로 할 때는 간(幹)으로, 강 이름과 연관지을 때는 맥(脈)으로 각각 나누어 표기하고 있다. 이는 산천(山川), 산수(山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우리 고유의 지리개념이 산과 강을 하나로 인식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산악국가인 우리나라 지형에서는 이같은 인식은 과학적이며 또 실제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러한 설명만으로는 우리 고유의 지리사상이 은연 중에 들어 있음이 분명한, 산맥 분류와 명칭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겠지만 필자의 견해로는 이같은 분류와 명칭은 동양철학의 바탕을 이루는 음양오행설과 땅에는 정기나 생긱가 있으며 이것은 일정한 지형에 집중된다고 믿는 전통적인 풍수 지리사상이 결합된 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면 산경표에 나타난 산줄기와 현행 산맥지형도를 비교하면서 그 차이와 문제점 등을 살펴보기호 한다.
<그림8>은 현행 문교부 검정의 지리부도에 나타난 산맥 지형도이다. <그림7>과 대조해 보면 산줄기의 갈래와 이름 사이에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밝힌 바와 같이 현재 통용되고 있는 산맥의 구성과 명칭이 1903년에 발표된 고또 분지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그림의 차이에서 발견할 수 있는, 특히 현행 산맥지형도가 지니고 있는 문제점들은 다음과 같다.
첫째,
현행 지형도가 우리 국토에 대한 전통적인 지리 개념과 다르다는 사실이다. 관련학계에서 우리나라 지리서 중 가장 정요하고 또 인문지리학의 시초라고 평가를 받는 이중환(李重煥)의 택리지(擇里誌.가릴택,마을리,기록할지) 산수총론(山水總論)에서는 우리 국토의 전체 개요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어떻게 산수(山水)를 말할 것인가?
백두산이 여진과 조선의 경계에 있어서, 나라의 빛나는 양산(陽傘) 처럼 되어 있다.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리이다. 서쪽으로 흐르는 물은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흐르는 물은 혼돈강이 되는데, 두만강과 압록강 안쪽이 바로 우리나라이다.
백두산에서 함흥에 이르기까지는 산맥이 한복판으로 뻗어 내려온다.
이곳에서 동쪽 가지는 두만강 남쪽으로 뻗고, 서쪽 가지는 압록강 남으로 뻗친다....(중략)... 큰 줄기 산맥(大幹) 은 산협으로 끊어지지 않고 세로 뻗어 남쪽으로 약 천리를 내려가서 경상도 태백산에 이르기까지 한 줄기 산맥으로 통하게 되었다....(중략)... 평안도 일도(一道)는 청북(淸北) 청남(淸南) 을 논할 것도 없이 모두 함흥에서 뻗은 서북 지맥이 만들었다.
위의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고유의 지리 개념은 백두산에서 부터 출발하고 있다.
고산자 김정호(古山子 金正浩) 역시 그의 대동여지전도(大東輿地全圖) 발문(跋文)에서 우리 국토를 백두산을 설명하면서 시작하고 있다. 백두산을 가리켜 조선 산맥의 근원이라 한 김정호의 표현은 단순히 상징적인 의미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지리 인식과 지도 제작에 있어 하나의 기점으로 설정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같은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과는 달리 현행 산맥 지형도에는 백두산과 무관하게 산맥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결과로 백두산을 우리 지리 개념 속에서 아예 배제할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림9>는 김정호가 제작한 대동여지도 중 백두산 주변의 모습을 하고 있다. 앞서 인용한 택리지의 표현 '빛나는 양산'을 연상할 수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빛나는 양산으로 해석한 원문은 화개(華蓋,덮을개)인데 이를 눈썹으로 번역한 책도 있다). 이 같이 구체적인 백두산의 표현 양상은 조선조 초기보다 후기에 오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그림10>은 16세기 초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팔도총도(八道總圖)이다. 300여 년 후에 만들어진 대동여지도와 비교해 보면 조선조 후기에 올수록 백두산이 사실적으로 표현되면서 강조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같은 변화는 무엇보다 지리적 지식이 축적되고 특히 김정호의 경우 산악투영법을 사용하는 등 과학적 정확성이 높아진 때문일 것이다. 또한 실학의 영향으로 민족 자각의식이 고취되던 당시의 시대적 조류도 한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림7>과 <그림8>에서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차이는 현행 산맥 지형도에서는 산줄기가 서로 분절(分節,마디절)된 것으로 표현하고 있으나, 산경표의 산줄기는 서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앞의 택리지 인용문이나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서 알 수 있듯이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은 산줄기가 서로 연결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풍수지리사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러한 인식은 고또 분지로의 이론이 국내에 유입된 이후에도 계속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림11>은 1911년 조선산수도경(朝鮮山水圖經,아침조.고을선)을 지은 원영의(元泳義)가 제작한 지도인데 산줄기가 서로 이어져 있다.
앞의 택리지 인용문 중에 고딕체로 표시한 부분이 있다. 대간, 청남, 청북이 바로 그것인데 이는 산경표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용어들이다.
이중환이 택리지를 지은 연대는 대체로 그의 나이 62세인 1751년(영조 27년) 전후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산경표의 원전인 여지편람이 편찬된 1769년보다 20년 가까이 앞서서 지어진 셈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대간 청남 청북 같은 지리 용어들이 산경표 이전에 이미 사용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앞으로 이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있어야 하겠다.
둘째,
산경표 산줄기의 명칭과 구성이 현행 산맥 지형도보다 과학적이며 무엇보다 교육효과가 높다는 사실이다.
산경표에 의거해서 우리나라 우리나라 지도를 그릴 때, 먼저 백두산을 기점으로 시작해서 지리산까지 국토를 세로질러 백두대간을 그리고, 이어 각 분기점을 잡아 1개의 정간과 13개의 정맥을 그리면 전체의 지형이 개략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런 연후 정맥의이름에서 암시를 받아 정맥 사이에 강 이름을 적어 넣으면 완벽한 국토의 전체적인 개요가 완성되는 것이다.
현행 지형도를 그대로 따르면 강의 위치는 물론 태백산, 소백산 등 산맥 명칭에 붙여진 산의 소재지조차 파악할 수 없어, 산경표의 경우 보다 지리 인식에 있어 비효율적이며 또한 교육효과가 낮을 수 밖에 없다.
5. 산경표 연구의 시대적 필요성
국어사전에서는 산맥을 '여러 산악이 잇달아 길게 뻗치어 줄기를 이룬 지대'라고 정의하고 있다. 지리학에서도 '산들이 맥상(脈狀,형상상)으로 길게 연속된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어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우리 국토에 대한 산맥의 구성과 명칭은 결국 지리학, 지질학, 지형학, 기후학 등 관련 전문학계의 연구 결과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다. 또한 일반인들은 그 결과를 그대로 수용,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현재 사용하고 있는 산맥의 갈래와 이름이 한 일본인 학자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며, 해방이 된 지 거의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 본격적인 검토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그대로 통용되고 있다는 사실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북한의 지형도를 살펴보면 이같은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커진다.
<그림12>는 1982년 북한의 금성청년출판사에서 발행한 흥미있는 지리에 실린 지형도이다.
산경표에 의해 산줄기를 나타낸 <그림7>, 현행 산맥 지형도인 <그림8>과 비교할 때, 북한 역시 산맥의 전체 구성과 명칭에 있어 고또 분지로의 이론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러면서 우리가 사용치 않는 경상산줄기(산경표의 낙동정맥이라 할 수 있는)가 보이는 등 우리의 현행 산맥 지형도와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처럼 하나의 국토를 놓고, 남한과 북한이 각기 다른 산줄기 구성과 명칭을 사용한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또 양쪽 모두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에서 비롯된 산줄기 갈래와 이름이 아닌 일본인 학자의 이론을 바탕으로 한다는 사실에 문제의 심각성은 더욱 증폭된다.
이 때문에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 산경표가 갖고 있는 문헌적 가치는 실로 큰 것이다. 이러한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현실적 방법으로는 현재 산경표 연구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남과 북으로 나누어져 있는 지금 현장조사 등을 통한 자연지리학적 연구가 사실상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또 언젠가 그같은 일이 현실로서 가능하다 하더라도 산경표 연구를 통한 고또 분지로 이론과의 비교 검토작업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산경표가 제시하고 있는 산줄기와 이름 그리고 그 밑바탕을 이루고 있는 우리 고유의 지리 인식과 사상에 대한 연구는, 과거의 지리적 지식에 대한 집착이나 애착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준비로서의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6. 맺음말
우리 산줄기에 대한 올바른 정립을 위해서는 앞으로 산경표와 관련된 연구와 논의가 다음과 같이 세분화되어 심도있게 전개되어야 한다.
첫째는,
산경표가 편찬되기 이전에 축적되었던, 우리 산줄기와 관련된 당시까지의 지리적 지식에 대한 종합적인 연구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20년 정도 앞서 지어진 이중환의 택리지에 이미 대간, 청남, 청북 등 산경표에서 볼 수 있는 용어들이 나타나고 있다.
대부분의 지리적 지식이 그렇듯 산경표에서 신경준 한 개인의 독창적인 연구의 산물이라고는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둘째,
산경표와 저자 신경준에 대한 연구이다. 15개 산줄기를 각기 대간, 정간, 정맥으로 분류하고 명칭을 부여한 기준과 의미 그리고 산경표를 발간하게 된 시대적 배경 등에 관한 것이다. 산경표 이전의 지리 지식과 산경표와의 비교를 통해 지리학자로서의 신경준의 면모와 업적을 살피는 작업도 이에 포함된다.
셋째,
1769년 편찬된 후 구한말까지 산경표가 지리지 및 지도 제작에 미친 영향에 관한 연구이다. 전통 지리학계에서는 산줄기 갈래와 흐름에 있어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와 산경표가 거의 일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대동여지도는 물론 구한말까지 발행된 모든 지리지의 상호 관련여부가 검토되어야 한다.
넷째,
고또 분지로의 이론이 국내에 유입되면서, 1910년 한일합방이 되기 이전에 이미 우리 산맥에 대한 혼란이 있었다. 산맥 구성과 명칭에 혼란이 오는 과정은 물론 고또 분지로의 지질구조 이론과 3편의 논문, 그리고 14개월에 걸친 그의 국내연구활동 등이 연구되어야 한다. 이 밖에 다부찌 도모히꼬와 같이 우리 국토에 관한 지리서를 펴낸 일본인 지리학자들의 저서와 그 영향에 대한 검토가 등도 이에 포함된다.
다섯째,
고또 분지로의 이론이 일제치하에서 어떻게 수용되었으며 어떤 과정을 거쳐 정착되었는지에 관한 연구이다. 그리고 해방 이후 우리의 지리 교과서에 나타나는 산맥 지형도의 변천과정도 함께 검토되어야 한다.
이 같은 연구가 전개되어 일정한 수준 이상의 논리적 체계를 확보할 때, 비로소 산경표가 지니고 있는 민좆적, 지리학적 가치에 대한 총체적인 인식이 가능할 수 있다. 또한 창씨개명된 채 버려진 우리 산줄기 이름을 되찾을 수 있는 미래로 향한 첫걸음이기도 하다. 끝.
1700년도 중반에 신경준님이 지은 산경표는
1913년 조선광문회에서 재발행했고,
일제 시대...잊어졌다가, 1980년대초 이우형님이 우연히 고서점에서 발견했다.
1990년 박용수님이 조선광문회본을 책자로 발행했다.
2000년초 현진상님이 읽기 쉽게 한글산경표를 출판했고,
2004년 박성태님이 신산경표를 발간했다.
카프리는 상기 책을 모두 가지고 있다.
한글산경표는 절판이 되어...도서관 책을 복사집에서 복사했다.
우리가 타려는 신백두대간은 박성태님의 신산경표에 따른 산너울이다.
직접 『산경표』 원문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을 위해『산경표』 영인 자료를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