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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저기 꽃이 만발하고 있습니다. 세상은 시끄러워도 주변에는 봄 잔치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우리네 마음들이 이 반만이라도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싶기도 합니다. 왜들 못 잡아먹어서 아우성인지, 모두가 욕망에 배고픈 자들만 사는가 봅니다. 하기야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욕심 없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그 욕심 채우느라 발전하는 것이기도 하니 뭐라 하겠습니까? 다만 정도(定度)껏 정도(正道)를 지키면 좋겠다는 말이지요. 과연 이 진흙탕에서 장미가 피어날지 걱정도 되고 기대도 됩니다. 모두들 하나님이 되어 심판만 부르짖고 있습니다. 글쎄, 누가 심판을 해야 하는지, 누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지도 헷갈립니다. 그저 뚜껑 열리기만 기다릴 뿐입니다. ㅋㅋ
그래도 지난 주말까지 두터운 점퍼를 입었습니다. 이제 가벼운 것으로 바꾸고 한 주를 지나네요. 가벼워진 몸만큼 기분도 상쾌합니다. 사람들 차림새도 많이 달라졌습니다. 그렇게 마음들도 가벼워지기를 바랍니다. 현실은 무거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특히 마트에 가면 쉽게 느낍니다. 얼마나 양보하며 살아야 할지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고민합니다. 때로는 먼 나라 소식을 보고 들으며 위로를 받기도 합니다. 이 작은 별 안에서 크고 작은 사건 사고들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전쟁의 피해를 당하고 있는 곳의 백성들이 당하는 고통은 비교하기 어렵겠지요. 위험을 안고 있어도 전쟁은 없으니 그나마 우리는 다행이다 싶은 것입니다. 편하게 먹고 잘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사하지요.
4월, 전에는 잔인한 달이라도 이제는 아름다운 봄이기를 바랍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한 달을 빕니다. ^)^
2024년 4월 6일 김종우 목사 드림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아가 5 : 8)
<패스트 라이브즈>
사랑이 결실하는데 가장 큰 걸림돌이 무엇일까 생각해봅니다. 시간? 거리? 그 모두? 다 나름의 타당성이 있습니다. 서양에는 이런 속담이 있는 줄 압니다. ‘Out of sight, out of mind.'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 그만큼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자주 만나면 정이 들고 나아가 사랑으로 자라기 쉽습니다. 아무리 가까웠던 사이도 오래 만나지 못하면 점점 멀어집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시간을 보내지 않기 때문입니다. 각자의 삶이 있게 마련입니다. 일이 있듯이 사람들과의 만남이 계속 이어집니다. 언제 어떻게 누구를 만나서 새로운 인연을 만들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인연은 얼마든지 앞의 인연을 능가할 수 있습니다.
본인들도 이야기했지만 그들이 계속 가까이서 살며 교제를 이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겨우 열두 살 된 아이들의 바람이었지만 결혼해서 살았을까요? 그것도 사실 모를 일입니다. 십년, 이십년 세월 속에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나 분명한 것은 떨어져 지내는 것보다는 가까이 지내는 것이 가능성을 훨씬 높인다는 것입니다. 서로 좋아하면 어려움도 함께 헤쳐 나가려는 힘도 생깁니다. 앞일을 모르지만 가능성은 확실히 높습니다. 자주 보면서 정이 쌓이고 사랑이 익어갈 수 있습니다. 어쩌면 더 깊어질 수도 있습니다. 더구나 양쪽 부모까지 알고 지내는 사이라면 서로의 신뢰까지 업게 됩니다. 물론 꼭 사랑만 가지고 결혼이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헤어지고 12년, ‘해성’은 인터넷을 통하여 ‘나영’을 찾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연결이 됩니다. 이민 간 현지에서 나영이 이름을 바꾸어 살았기에 찾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나영이 놀라워하며 연결을 했는데 해성이 화면에 뜹니다. 놀라움? 반가움? 그런데 서로의 가는 방향이 따로 있습니다. 공부도 해야 하고 일도 배워야 하고, 사실 서로가 모두 바쁩니다. 그래서 다시 따로 시간을 갖기로 합니다. 다시 12년, 해성이 나영을 만나려 미국으로 가보기로 합니다. 물론 나영이 이미 결혼한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래도 보고 싶습니다. 화면으로 본 것 이상의 실제를 보고 싶습니다. 지구 반대편으로 긴 여행을 합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저 사람들 봐. 어떤 관계일까? 카페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의 모습이 묘합니다. 그래서 조금 떨어져 그들을 보던 사람들이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럴 만한 호기심이지요. 한 여자를 가운데 두고 두 남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는 한쪽 편의 남자와 주로 이야기를 나눕니다. 다른 쪽의 남자는 어떤 관계의 사람일까요? 게다가 이야기를 열심히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은 동양인 얼굴입니다. 그렇다면 이 두 남녀가 남매일까요? 닮은 모습은 별로 없는데? 아니면 부부? 그러면 옆의 미국인은 누구지? 왜 그 자리에 와 있는 거지? 참으로 묘한 관계를 상상하게 만듭니다. 그렇게 영화가 시작됩니다. 이 세 사람이 어떤 사람들일까, 궁금해 하면서 말입니다.
해성이와 나영이는 한 동네 살며 함께 학교를 다녔습니다. 마치 연인처럼 그렇게 붙어 다녔습니다. 나영이는 커서 해성이와 결혼하겠다는 꿈도 가졌습니다. 어느 날 나영이 가족이 캐나다 이민을 가게 됩니다.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충격이었습니다. 그렇다고 이러쿵저러쿵 발할 처지도 아닙니다. 어른들의 일이고 부모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떠났습니다. 나영이는 낯선 이국에서 적응하느라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그 시간들을 이겨내며 작가로서의 길을 걷습니다. 어쩌면 해성이와 있을 때보다 더 단단해졌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길을 고집하며 나아갈 수 있는 강인한 여성이 되어갑니다. 미국으로 들어와 작가의 길을 걷습니다.
외딴 곳에 들어와 원룸을 얻어 생활합니다. 여러 사람들이 그 건물 안에서 거주합니다. 그리고 유대인 청년과 이웃하며 가까워집니다. 시간이 흘러 연인이 되고 결혼합니다. 나름 작가로서의 삶을 살며 성취감도 얻고 자기 삶에 만족합니다. 남편 ‘아서’도 품성이 착하고 아내의 활동을 인정해주고 서로 사랑하며 크게 부하지는 않아도 나름 행복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다시 해성이와 연결이 됩니다. 이제는 서로가 30대의 장년입니다. 해성이는 아직 미혼이지만 내내 그렇게 살 것 같지는 않습니다. 결혼한 나영이가 보고 싶습니다. 그 남편도 만나고 싶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을까,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직 그 때의 감정을 가지고 있을까?
13시간이 넘게 온 사람인데 어떻게 거절할 수가 있어? 남편은 상대 남성의 그 정성(?)에 감복하여 아내가 옛 사람을 만나겠다는 것에 기꺼이 동의해줍니다. 두 사람이 하루를 지내도록 배려해줍니다. 그리고 떠나기 전날 자리를 같이합니다. 함께 나영이 부부의 거처까지 동행하고 헤어집니다. 나영이 해성이를 택시 타는 데까지 배웅해주고 돌아옵니다. 나영이와 해성이 길 위에서 마주하고 한참을 바라봅니다. 무슨 생각이 오갔을까요? 택시가 오고 해성이 타고 떠납니다. 차창 밖으로 보는 이국의 풍경, 다시 볼 수 있을까? 해성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오니 입구에 남편이 서서 맞습니다. 남편의 품에 안겨 흐느낍니다.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Past Lives)를 보았습니다.
복 받고 싶지요?
사람이면 누구나 자기 인생길이 형통하기를 빕니다. 그래서 새해를 맞을 때 우리가 서로 나누는 인사는 축복이고 만사형통이고 건강이고 행복입니다. 누구나 잘되기를 빕니다. 모든 행사가 평탄하고 형통하기를 원합니다. 어느 누구도 환난이나 고통의 길을 바라고 비는 사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게 빌고 소원한다면 미친 사람으로 취급받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든 믿지 않든 여기에 대해서는 예외가 없는 줄 압니다. 한 해를 시작하며 우리가 바라고 소원하는 것은 올해도 사고 당하지 않고 건강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자기 사업을 하든 직장을 다니든 자기가 하는 행사가 평탄하기를 바랍니다. 어느 해를 막론하고 1년 365일 지나오면서 지구촌에는 여러 가지 재난과 각종의 사고를 경험합니다. 하늘에서 땅에서 바다에서 각양각색의 사고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가족을 잃고 재산을 잃어가며 고통을 당합니다. 통계에 의하면 교통사고로만 한해에 1만 명 이상이 죽는다고 합니다. 하루에 30명 이상이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는 것이지요. ‘오늘도 무사히’ 출근하는 아침 우리의 기도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합니다. 우리 모두 복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특히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께로 복을 받고 살기를 원합니다. 복이라고 하면 흔히 육적인 복을 생각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수준이 좀 다르지요? 영적인 복이 우선인 줄 압니다. 그렇다고 우리 하나님이 육적인 복을 무시하지도 않으시는 줄 압니다. 다만 우리가 하늘의 신령한 복을 먼저 찾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마 6 : 33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먼저 구해야 하는 것이 있고 나중에 구해도 되는 것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순서를 흔히 바꾸어 구하고 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래서 또한 하나님이 안타까워하시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우리를 육으로만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영으로만 창조하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육인 짐승도 아니요 영인 천사도 아닙니다. 우리는 영과 육이 한데 어우러진 사람입니다. 놀랍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담겨있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셨습니다.(시 139 : 14)
시 49 : 20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멘!
하나님의 종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옵니다. 그러나 그는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으로 바라보기만 하고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그 동안 모세의 시종으로 수고했던 여호수아가 모세를 이어 새 지도자로 세워집니다. 여태껏 지시하면 따라 하기만 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지시하는 입장이 된 것입니다. 그 차이를 아십니까? 직장에서도 승진을 꿈꾸며 일합니다. 승진, 얼마나 좋습니까? 사원에서 대리로, 대리에서 과장으로 이렇게 한 단계씩 올라간다는 것 그 때마다 누려본 기쁨을 직장생활 해본 사람은 압니다. 그런데 기쁨만큼 그 마음에 눌리는 것이 있습니다. 거기에 걸맞는 책임입니다. 올라갈수록 무거워지는 거지요. 사실 누구나 바라는 것이 정상이지만 정작 올라가서 보면 아찔할 것입니다. 이제 더 이상 기댈 곳이 없는 곳이 바로 정상입니다. 오죽하면 ‘대통령 짓 못 해먹겠다,’고까지 말합니까? 이제 여호수아가 그런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에게 항상 고분고분 순종하였습니까? 이제 그 백성을 여호수아가 짊어지고 가야 합니다. 그리고 지금 가나안 땅에서 ‘환영 이스라엘 백성’ 하고 현수막이라도 세워놓고 기다리고 있답니까? 백성을 바라봐도, 가나안 땅을 바라봐도, 착잡할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12 정탐군이 미리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온 적이 있습니다. 그 때 뭐라고 보고하였지요? 민 13 : 33 “거기서 또 네피림 후손 아낙 자손 대장부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의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그곳은 장대한 용사들이 이스라엘 백성이 오기를 벼르고 있었습니다. 그보다 앞서 그 많은 백성을 이끌고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앞에는 장대한 자들이 오기만 와봐라 하면서 기다리고 있는데 하나님은 지시하십니다. 수 1 : 2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신나는 일입니까, 두렵고 떨리는 일입니까?
1. 하나님, 가라 명하십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2 - 3절 읽습니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으로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땅으로 가라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이 말씀 속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첫째, 하나님은 백성으로 더불어 요단을 건너가라 명하십니다. 그런데 당시의 상황을 봅시다. 수 3 : 15절에 그 요단을 건너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 지역 즉 요단강의 상황을 이야기합니다. 뭐라고 설명하느냐 하면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하는 것입니다. 평상시보다 더 강물이 넘쳐났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건너기가 더 쉽겠습니까, 어렵겠습니까? 웬만하면 그냥 걸어서 건너겠지만 이런 상태라면 헤엄을 쳐야 한다는 뜻이겠지요. 이런 형편을 가나안 사람들이 안다면 가만있겠습니까? 기다릴 것도 없지요. 당장 와서 치면 끝나는 전쟁입니다. 더구나 헤엄칠만한 장정들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여자들과 노약자들이 몇 배나 더 많은 상황입니다. 감히 강을 건널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너라 말씀하셨습니다.
둘째, 하나님은 그 땅을, 건너면 주겠다, 하신 것이 아니라 이미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주신 것이고 그보다 훨씬 전 아브라함 적에 이미 주신 것입니다. 수 1 : 3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아멘! 이미 주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가서 취하는 것뿐입니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조차 누리지 못하고 사는 때가 많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과 영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때부터 우리는 이미 하나님의 자녀요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 죄는 사함 받았고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권세를 가진 자들입니다. 그런데 사는 것 보면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것을 봅니다. 앞에서도 시편 기자의 고백을 들었듯이 “존귀에 처하나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멸망하는 짐승 같도다” 아멘?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따라 합시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나는 하나님의 딸이다! 할!
자 그래서 어떻게 되었나 보겠습니다. 하나님이 제사장들로 하나님의 법궤 즉 여호와의 언약궤를 짊어지고 먼저 요단에 들어가도록 명하십니다. 수 3 : 14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그리하여 15 - 17절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새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 자 백성이 강을 어떻게 건넜다고요? 각자 고무보트를 타고 건넜답니까? 둥근 튜브를 타고 건넜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맨 땅 지나가듯 그렇게 강을 건넜습니다.
하나님은 가라 명하셨습니다. 우리가 그 명령에 순복하면 길이 열립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앞서 가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뒤에서 명령하시는 대장이 아니라 우리 앞서 나아가시는 목자이십니다. 명령만 하고 뒷짐 지고 보기만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우리 앞에서 인도하십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의 발이 물에 닿기가 무섭게 강물은 끊어졌습니다. 온 백성이 단 시간 내에 강을 건널 수 있도록 저 멀리까지 강물이 끊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무사히 이스라엘 백성은 요단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축복과 형통의 길 그 첫째 조건은 하나님이 이미 주신 것을 누리기 위하여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 함께 하마 약속하십니다.
수 1 : 5 “너의 평생에 너를 능히 당할 자 없으리니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아멘! 모세가 죽고 이제 시종에서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 얼마나 두렵고 떨리겠습니까? 그 때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내가 모세와 함께 했던 것처럼 너와 함께 해주겠다, 약속하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겠습니까? 만왕의 왕, 만주의 주, 전능하신 하나님이 함께 해주시는데 두려울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쌍둥이 동생 야곱이 형을 속여 장자권도 빼앗고 그 축복마저 빼앗았습니다. 형의 분노를 피하여 도망을 가지요. 저 멀리 하란 지방에 살고 있다는 외삼촌댁으로 도망을 갑니다. 그런데 가는 도중 벧엘이라는 곳에서 노숙하며 꿈을 꿉니다. 꿈속에서 하나님의 사자를 만나지요. 그리고는 굉장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창 28 :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아멘! 당시 이야기를 보면 야곱이 외삼촌 집에 대하여 부모에게서 듣기는 들었어도 아마 만난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초행입니다. 그냥 들은 것만 의지하고 가는 겁니다. 그러니 사실 불안하고 떨리지요. 도대체 어떻게 맞이해줄 것이며 얼마나 있어야 할 것이며 어떻게 대접받을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는 너 가는 길을 형통케 해주고 너와 함께 하여 다시 네 땅으로 돌아오게 해주겠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얼마나 힘이 되겠습니까?
요셉이 형들의 시기를 받아 졸지에 노예가 되어 생전 가보지도 않았던 이방 땅으로 끌려갑니다. 아직 20도 안된 소년 그것도 집에서 아비의 사랑만 받아오던 곱디고운 소년이 그냥 일꾼도 아닌 노예생활이 쉽겠습니까? 우리는 다만 상상만 할 뿐이지 엄청난 고통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실했습니다. 그래서 주인의 신임을 받았고 가정총무까지 됩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시 화근이 되어 이제는 감옥생활까지 하게 됩니다. 그런 환경의 변화 속에서도 요셉이 절망했다거나 낙심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요셉과 함께 하셨다는 이야기만 반복되어 나옵니다. 바로 그것이 요셉으로 하여금 그 생활을 견디게 해준 것입니다. 창 39 :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이 감옥에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20 - 21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감옥에서도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감옥도 감옥이 아닌 줄 압니다. 우리가 찬송가를 부르지요.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그는 반드시 형통한 자가 됩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 여호수아 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여리고 성을 무너뜨립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진격해 들어갑니다. 축복과 형통의 두 번째 조건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약속하셨습니다. 히 13 : 5 “돈을 사랑치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아멘!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를 버리지 아니하고 함께 해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이 가장 쉽게 의지하는 것은 잘 아는 대로 돈입니다. 돈이면 정말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죽하면 마술을 행하던 자가 성령이 임하는 광경을 보고 사도들에게 돈을 주고 그 능력을 사려고 합니다. 행 8 : 18 - 19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입니까?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직분을 돈으로 살 줄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야말로 망령된 생각 아닙니까?
우리가 사랑해야 할 대상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자녀를 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를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시 27 : 10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아멘! 부모님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이라도 나와 영원히 함께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여기서도 거기서도 환경에 구애됨이 없이 영원히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할!
3. 하나님, 우리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하십니다.
수 1 : 6 “마음을 강하게 하라 담대히 하라 너는 이 백성으로 내가 그 조상에게 맹세하여 주리라 한 땅을 얻게 하리라” 그러니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약속의 땅으로, 축복의 땅으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받아 누리기 위해 나아가야 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부동산 투기나 주식투자를 하라는 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7절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아멘! 즉 담대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어떻게 된다고요?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셉이 노예생활을 해도 형통한 자가 되었고 감옥에 들어가서도 형통한 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축복은 물질의 많고 적음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권력을 쥐고 못 쥐고 하는데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복음 12장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이야기를 잘 알 것입니다. 한 해 소출이 너무 많아서 말 그대로 대풍작을 이루었습니다. 오늘날로 이야기하면 사업이 대성공을 한 것입니다. 영화를 제작하였는데 소위 대박을 터뜨린 것이지요. 그 많은 소출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아 기존의 창고를 헐고 다시 짓습니다. 잔뜩 쌓아두고는 만족스러운 듯 말합니다. 눅 12 : 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결과가 어떻게 됩니까? 20절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한 마디로 그는 하나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축복도 축복이 아니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불행도 불행이 아닙니다. 진정한 복이 무엇입니까? 시편 기자가 복 있는 사람을 이야기합니다. 시 1 : 1 - 2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복 있는 사람은 로또복권 당첨된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항상 말씀과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 것인가? 수 1 : 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아멘! 첫째 우리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라 말씀합니다. 늘 말씀을 가까이 하라는 뜻이겠지요. 읽고 듣고 전하며 우리 입에 늘 붙어있게 하는 것입니다. 둘째 주야로 묵상하는 것입니다. 즉 그 말씀의 뜻을 깊이 되새기는 것입니다. 한번 읽었다고 덮어두는 것이 아닙니다. 자꾸만 되새기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몸이 되게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셋째 지켜 행하라 말씀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형통한 자가 되고 복 받는 자가 됩니다. 그것은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복을 다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문제는 하나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고 지키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아니 말씀이라면 성경밖에 더 있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성경임에도 다르게 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과 한 율법사의 대화를 들으면 그 뜻을 알게 됩니다. 눅 10 : 25 - 26 “어떤 율법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가로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가 영생에 대해서 묻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뭐라 하시죠? 그래, 성경에 뭐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느냐? 고 묻습니다. 아니 성경을 어떻게 읽다니요? 그냥 읽으면 되는 거 아닌가요? 그렇지 않다는 뜻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한 예를 보여주겠습니다. 신 25 : 4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찌니라” 이 말씀을 지키며 살아야 했던 이스라엘 백성은 속으로 하나님을 많이 원망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말씀대로 하면 소가 가만있겠습니까? 곡식 다 먹어버리지요. 그러니 어쩝니까? 지키자니 곡식 다 날릴 것이고 안 지키자니 하나님 명령을 어기는 것이니 벌 받을 것이 두렵지요.
자, 하나님이 명령하십니다. 곡식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어쩌시렵니까? 왜 이런 갈등을 겪어야 하지요? 성경을 어떻게 읽느냐, 그 자세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하나님 백성이라 하는 유대인들의 갈등이 왜 심해졌습니까? 하나님 뜻대로 가르치시는 예수님이 전해주는 성경과 유대인들이 읽는 성경이 달라서 그랬습니까? 아닙니다. 똑같습니다. 단지 예수님 질문하신 대로 그 읽는 태도가 달랐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어떻게 읽습니까? 사실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도 없습니다. 여태 그러려니 하고 신앙생활을 해왔기 때문이지요. 하나님이 도대체 무엇을 원하시는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냥 기도하면 되고, 그냥 교회 잘 다니면 되고, 그렇게 신앙생활 하면 그것으로 다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성경을 잘 몰라도 예수만 믿으면 천국은 자동적으로 가는 것으로 믿고 살았습니다. 과연 그러한가?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는 것은 사실입니다. 예수님만 길이기 때문입니다. 요 14 : 6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착각하지 맙시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의 길에 들어서는 것이지 구원 받은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태어났다고 인생 다 산 것입니까?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는 죽었던 영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쉽게 말해서 영적으로 태어난다는 말입니다. 태어났으니까 곧바로 죽겠습니까? 그게 아니지요. 이제부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제부터 영의 양식 곧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먹고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젖을 먹습니다. 자라면 밥을 먹어야 합니다. 그게 다 어디 있습니까? 성경에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어서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러나 자라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단계가 있다는 말이지요. 고전 3 : 1 - 3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그리스도인이라도 어린아이 곧 육신에 속한 자가 있고 장성한 자 곧 영에 속한 자가 있다는 말입니다. 히 5 : 12 - 14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언제까지 젖만 먹을랍니까?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예수님의 신부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 말씀, 성경을 배워 깨닫고 신앙하여 어른이 됩시다. 그래야 하늘의 복과 더불어 땅의 복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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