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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산비명(四山碑銘)》
작성자지리산문학관|작성시간23.12.08|조회수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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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성주산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聖住山聖住寺朗慧和尙白月葆光塔碑)〉
1〈지리산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智異山雙谿寺眞鑑禪師大空塔碑)〉
4〈초월산대숭복사비(初月山大崇福寺碑)〉
3〈희양산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曦暘山鳳巖寺智證大師寂照塔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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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河東 雙磎寺 眞鑑禪師塔碑)
연대887년(정강왕 2)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이 탑비(국보)는 비신의 일부분이 마멸되어 있으나 여러 탁본과 판본이 전하고 있어 비문 내용은 완전하게 알려져 있다. 비는 887년(정강왕 2)에 건립되었으며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비문을 짓고 아울러 전서의 제액과 비문의 글씨도 썼다. 서체는 해서이며 최남선은 ‘구양순의 골(骨)에 안진경의 육(肉)을 붙여’ 특색을 나타낸 글씨로 평가하였고, 구양순체의 엄정(嚴正) 방경(方勁)한 체격에 우세남의 온아한 필의가 가미된 독특한 필체로 굳센 기상이 부드러운 운필 속에 녹아들어 강약이 혼연 조화를 이루어 신운(神韻)을 느낄 수 있는 글씨라고도 한다. 비문을 새긴 이는 환영(奐榮)이다. 비문의 내용은 진감선사(眞鑑禪師) 혜소(慧昭 : 774~850)의 입당 구법 과정과 830년 귀국 이후 지리산 화개곡에서 선법을 펼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비의 서문에 유교와 불교사상이 근본은 다르지 않다고 하고, 본 내용에서도 노장사상을 보여주는 용어와 개념들을 다수 사용하여 삼교를 하나로 파악하는 찬자 최치원의 사상적 입장과 아울러 당시 지식인들의 사상 경향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쌍계사의 유래, 범패의 전래와 유포, 효소왕(孝昭王)의 피휘사실 등도 전하고 있다. 혜소(慧昭)의 선문(禪門)은 나말려초(羅末麗初) 구산(九山)의 하나로 발전하지는 못하였으나, 후일 북종선 계통인 희양산파(曦陽山派)의 긍양(兢讓 : 이몽유(李夢遊) 찬(撰) 「정진국사탑비명(靜眞國師塔碑銘)」 참조)이 자신의 법계를 고쳐 혜소의 증손제자라 칭하여 그의 법맥을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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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郞慧和尙塔碑)
연대888년(진성여왕 2)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는 충청남도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터에 있다. 탑비의 높이 263.8cm, 너비 156.6cm, 양측면 41.9cm이며, 글자는 5,120자로 상태가 양호하여 모두 판독이 가능하다. 탑비는 최치원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주인공 낭혜화상(朗慧和尙)은 태종 무열왕 김춘추의 8대손으로 그의 아버지 범청(範淸)이 김헌창의 반란에 연루되어 진골에서 신분이 득난(得難: 6두품)으로 강등되었다. 법호는 무염(無染)이며, 800년(애장왕 1)에 출생하여 13세에 출가하였다. 처음에 부석사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에게서 화엄학을 배웠고, 821년(헌덕왕 13)에 중국에 유학하여 선승 보철(寶徹)에게서 선법을 수학하였다. 중국에서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수행하다가 845년(문성왕 7)에 귀국하여 왕자 흔(昕)의 요청으로 성주사(聖住寺)에 머물렀다. 여러 번에 걸쳐 왕명을 받아 궁궐에 드나들었으며, 경문왕 사후에 성주사에 되돌아가 제자들을 양성하다가 888년(진성여왕 2)에 88세의 나이로 입적하였다. 비문을 지은 사람은 최치원이며, 비의 건립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대략 890년(진성여왕 4)에서 얼마 멀지 않은 시기에 건립되었다고 보인다. 비문에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언급되어 있어 이것은 신라 하대 불교 학풍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낭혜화상이 국왕의 자문에 응하여 유교경전 등을 인용하고 있어 유교와 불교의 관계를 연구하는 데도 필수적인 사료이다. 아울러 비문에 신라 골품제와 관련된 결정적인 내용이 언급되어 있어서 골품제 연구의 핵심 사료로 주목을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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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비는 원래 위치인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구 보령군 미산면) 성주사지(聖住寺址)에 그대로 남아 있는데, 귀부(龜趺)와 이수(螭首)가 있으며 높이 251cm, 폭이 148cm에 5천여 자(본문 5,022자, 주 98자, 합 5,120자)가 기록된 비교적 대규모의 비이다. 보존 상태가 좋아서 거의 판독이 가능한데 단지 제액(題額)부분은 마멸이 심하다. 이 비의 비문작성과 건립연대는 명확하지 않은데, 비문은 낭혜화상의 사리탑이 건립된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890) 이후에 최치원이 왕명을 받아 작성하였고, 그 얼마 후 건립된 것으로 생각된다. 종전에는 이 비문 중에 경문왕(景文王)과 헌강왕(憲康王 : 비문에서는 獻康王이라고 하였다)을 각기 중국에서 추증(追贈)한 태사(太師)와 태부(太傅)라는 말로 일컫고 있어서, 두 왕에게 이러한 관작을 추증하는 관고(官誥)가 전달된 효공왕(孝恭王) 원년(897) 7월 이후(『동문선(東文選)』권33의 효공왕의 사은표(謝恩表))부터 비문의 찬자인 최치원이 관직에서 물러난 효공왕 7년 사이에 이 비문이 편찬된 것으로 생각되기도 하였지만 (管野銀八, 「新羅興寧寺澄曉大師塔碑の撰者に就て」와 葛城末治, 『朝鮮金石攷』), 진성여왕이 당 황제에게 보낸 글 (『동문선』권33의 「謝賜詔書兩函表」)에도 이미 두 왕에 대한 추증의 내용이 나오고 있을 뿐 아니라 비문 내용에서도 비문을 지으라고 명한 왕이 경문왕을 아버지[文考]라고 일컫고 있어서 그가 바로 경문왕의 딸인 진성여왕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비의 건립연대에 대해서는, 비문의 글씨를 쓴 최인연(崔仁滾)이 이 비문에서와 같은 관직을 지니고 쓴 창원(昌原)의 「봉림사진경대사탑비(鳳林寺眞鏡大師塔碑)」가 경명왕(景明王) 8년에 건립된 것에 근거하여 비슷한 시기로 추정하기도 했지만(葛城末治), 그 관직이 현직이 아닌 전직(前職)이어서 명확한 근거는 되지 못하고 있다. 비문의 찬자인 최치원은 자(字)는 고운(孤雲 또는 海雲)으로 헌안왕(憲安王) 원년(857년)에 태어났고, 어려서 중국에 유학하여 18세에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였다. 그후 황소(黃巢)의 난(亂)에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겸제도행영병마도총(兼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토적(討賊)에 나선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문장을 인정받게 되었고(「檄討黃巢書」), 이로 인하여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 내공봉(內供奉)이 되었다. 28세(884년)에 당의 조서를 전달하는 사신(使臣)의 형식을 빌어 귀국하였고, 헌강왕은 이에 시독(侍讀) 겸한림학사(兼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知瑞書監)을 삼았다(이 비에서는 중국에서의 관직을 적고 있다). 그러나 정치에 영향을 행사하지 못하고 주로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진성여왕 8년에 시무책(時務策)을 건의하여 아찬(阿飡)으로 임명되기도 하였지만, 결국 자신의 뜻을 펴지 못한다고 생각하여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서 말년에는 해인사(海印寺)에 은거하였다. 『계원필경(桂苑筆耕)』과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 그밖에 여러 시문집을 지었는데, 지금은 『계원필경』과 『동문선』에 전하는 약간의 시문, 그리고 금석문들만이 전하고 있다. 특히 그의 금석문 4편을 모아서 후대에 『사산비명(四山碑銘)』으로 전하게 되었는데 본 비문도 그중의 하나이다. 이 비의 주인공인 낭혜화상(朗慧和尙)의 법호(法號)는 무염(無染)이고 무열왕의 8대손으로 경애왕(哀莊王) 원년(800)에 태어나 진성여왕 2년(888)에 89세(법랍(法臘) 65)로 입적(入寂)하였다. 13세에 처음 출가하여 법성선사(法性禪師)에게 능가선(楞伽禪)을 배우다가 부석사(浮石寺)에서 석징대사(釋澄大師)로부터 화엄(華嚴)을 공부하였고, 그후 헌덕왕 13년(821) 경에 사신으로 가는 왕자 흔(昕)의 도움으로 중국에 유학하여 처음에는 화엄을 공부하다가 후에 마조도일(馬祖道一)의 문하인 마곡(麻谷) 보철(寶徹)에게서 심인(心印)을 얻게 되었다. 보철 입적후 여러 곳을 다니며 수행을 계속하다가 당 무종의 폐불(廢佛 : 會昌法難, 845)로 인하여 신라에 귀국하였다. 귀국 후 왕자 흔의 요청에 의해 웅천주(熊川州 : 지금의 公州)의 사찰(「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의하면 원래 이름은 오합사(烏合寺))에 머무르게 되었는데 문성왕은 사찰의 이름을 성주(聖住)로 지어주고 대흥륜사(大興輪寺)에 편입시켰다. 그후 경문왕의 즉위하자 왕성에 초치되어 머물다가 상주 심묘사(深妙寺)에 거주할 것을 허락받았고, 경문왕 사후 다시 성주사로 되돌아갔다가 헌강왕에 의하여 한 번 더 왕성에 초치되었는데 이때 광종(廣宗)이라는 법호를 받게 되었다. 제자에 승량(僧亮), 보신(普愼), 순예(詢乂), 심광(心光) 등이 있다. 이 비에는 낭혜화상의 신분과 관련하여 족강(族降), 득난(得難) 등의 말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골품제(骨品制)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으며, 낭혜화상의 불교 공부 과정이 당시의 주요 학풍인 능가선(楞伽禪), 화엄(華嚴), 남종선(南宗禪) 등을 두루 거치고 있어 불교학풍 연구에도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 또한 낭혜화상 스스로가 유학을 공부한 후 불교를 공부하였고, 국왕에 대한 자문에서 『예기(禮記)』, 『서경(書經)』 등의 유교경전을 인용하고 있어서 유불(儒佛)관계를 비롯한 당시 사상계 전반의 이해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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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 鳳巖寺 智證大師塔碑)
893년(진성여왕 7) 撰
연대924년(경명왕 8)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는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다. 귀부 및 이수,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서 국보로 지정되었다. 비신의 높이는 273.0cm, 너비 164.0cm, 두께 23.0cm이다. 탑비는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 유명하다. 지증대사(智證大師)는 진골출신으로 속성이 김씨이고, 법호는 도헌(道憲)이며, 선종 9산문의 하나인 희양산문(曦陽山門)을 개창한 사람이다. 824년(헌덕왕 16)에 태어나 9세에 출가하였고, 이후 여러 사찰에서 교화활동을 벌였다. 879년(헌강왕 5) 56세에 대사가 소유하고 있던 전장(田莊) 500결을 사찰에 희사하였고, 이 해에 심충(沈忠)이 희사한 땅에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희양산문을 개창하여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지증대사는 진골출신으로서 신라 왕실과 매우 밀접한 관계를 맺었으며, 헌강왕의 부름을 받아 경주의 월지궁(月池宮)에 나아가 직접 설법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882년(헌강왕 8) 41세-법랍43세,세수59세-의 나이로 입적하였고, 헌강왕은 885년에 왕명으로 최치원(崔致遠)에게 지증대사의 비문을 짓게 하였다. 893년(진성여왕 7) 무렵에 최치원이 비문을 완성하였고, 탑비는 그 보다 훨씬 늦은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비문에서 신라불교사를 크게 3기로 구분하였고, 제3기를 선종의 시대라고 정리하였다. 지증대사는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北宗禪)을 계승하여 신라 하대에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한 남종선과 구별되었다. 비문의 내용은 신라 선종사 이해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료일 뿐만 아니라 신라시대 토지소유관계, 전장(田莊)의 성격 등을 연구할 때에도 기초 자료로 적극 활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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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탑비는 지증대사 도헌을 현창하기 위하여 893년(진성왕 7) 무렵 찬술되었으며, 924년(경애왕 1)에 건립되었다. 현재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위치해 있다. 귀부·이수 및 비좌의 조각이 뛰어나서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은 청석(靑石)으로, 높이 273.0cm, 너비 164.0cm, 두께 230cm, 글자지름 20cm이며, 왕희지체의 영향을 받은 행서체이다. 찬자는 최치원(崔致遠)이며, 서자 및 각자는 분황사(芬皇寺) 석혜강(釋慧江)이다. 이 비문은 이른바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하나로서 그 가운데 가장 늦은 진성왕 7년(893) 무렵에 찬술되었다. 이 비문은 신라불교사를 3기로 시기구분하고 있는데, 제3기에 관한 서술은 일종의 신라하대 선종사에 해당한다. 특히 도헌은 일찍이 신라사회에 수입된 북종선을 계승하고 있으므로, 신라 하대에 중국에서 비로소 들어오기 시작하는 남종선과는 구분된다. 그리고 주인공인 도헌(道憲) 이외에 당시 활약한 상당수의 선종 승려 이름을 전해주고 있다. 따라서 이 비문은 신라시대 선종사 이해에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또한 도헌의 행적을 열 두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하고 있는데, 이러한 서술형식은 열 가지 항목으로 나누어 서술한 최치원 자신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과 함께 이 비문이 갖는 특색이다. 문장구조는 다음과 같다. 제액(題額), (찬자)撰者 서(序)-- 도입부 *舒曰~波及海隅之始: 불교의 연원과 중국전래 *昔當東表鼎岐之秋~畢萬之後斯驗矣: 삼국 및 통일신라 *불교의 유래. *其世緣則~宿習之異二也: 가계와 출생 *九歲喪父~垂訓之異六也: 출가와 수행 및 교화활동 *贈大師景文大王~出處之是五焉: 신라 왕실과의 만남, 안락사와 *봉암사 생활 *在世行~遂窆于羲野: 교화활동과 입적 명(銘): 其詞曰~來向山中看篆刻 음기(陰記): 太傅王馳□問疾~庶幾騰日域高譚 芬皇寺~六月 日竟建: 서자·각자. 건립에 관계한 인물. 건립연대. 도헌의 연보는 다음과 같다. - 824~882. 속성 김(金)씨, 경주 출신. 호는 도헌(道憲), 자는 지선(智詵). 아버지는 찬괴(贊瓌), 어머니는 이(伊)씨. - 824년(헌덕왕(憲德王) 16) 4월 8일 출생 - 9세(832: 흥덕왕(興德王) 7): 아버지의 죽음을 계기로 부석사(浮石寺) 범체(梵體) 문하에 출가. - 17세(840: 문성왕(文聖王)2): 경의율사(瓊儀律師)한테서 구의족계를 받음. - 계람산(鷄籃山) 수석사(水石寺)에서 교화활동. - 경문왕(景文王)이 제자의 예(禮)를 갖추고 초청하였으나 거절함. - 41세(864: 경문왕4) 겨울: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가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를 시납하자 옮겨서 활동. - 대아찬(大阿飡) 김의훈(金嶷勳)의 명복을 기리고자 장육현금상(丈六玄金像)을 주조. - 44세(867: 경문왕 7): 단의장옹주가 토지와 노비를 시납. - 56세(879: 헌강왕 5): 도헌 자신이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있던 전장(田莊) 12구(區) 500결(結)을 희사. - 심충(沈忠)이 땅을 희사한 것을 계기로 봉암사(鳳巖寺)를 창건하고 철불상 2구를 주조. - 58세(881: 헌강왕(憲康王) 7): 국가에서 사역(寺域)을 획정하고 ‘봉암(鳳巖)’을 사호. - 헌강왕의 부름을 받고 월지궁(月池宮)에 나아가 왕에게 선을 얘기함. - 59세(882 : 헌강왕 8) 12월 18일: 현계산 안락사에서 입적. 승납 43세. 시호 지증선사(智證禪師), 탑호 적조(寂照). - 885년(헌강왕 11): 왕명으로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함. - 924년(경명왕(景明王) 8): 비석 건립 <계보> (화엄종) 浮石寺 梵體───────────┐ ─ 道憲 (선종) 雙峰道信-法朗-愼行-遵範-慧隱嚴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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숭복사비(崇福寺碑)
연대896년(진성여왕 10)
숭복사비는 896년(진성여왕 10)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비의 모습이나 탁본도 전혀 전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서산대사의 제자인 해안(海眼)이 최치원(崔致遠)의 문집에서 4개의 비문을 뽑아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고 불렀는데, 숭복사비도 여기에 포함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비문은 바로 사산비명(四山碑銘)의 필사본에 근거한 것이다. 숭복사는 원래 원성왕의 어머니 외삼촌이며 왕비 숙정황후(肅貞王后)의 외할아버지인 파진찬 김원량(金元良)이 창건한 곡사(鵠寺)에서 기원하였다. 곡사는 사원에 고니모양의 바위가 있어 붙인 명칭이다. 후에 원성왕릉을 곡사에 만들면서 사찰을 경주시 외동면(外東面) 말방리(末方里)의 현 숭복사터로 옮겨 새로 개창하였다. 뒤에 경문왕이 꿈에 원성왕을 뵙고 사찰을 크게 수리하여 원성왕릉의 수호와 왕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885년(헌강왕 11)에 명칭을 숭복사로 바꾸고, 그 다음해에 최치원(崔致遠)에게 비문을 짓도록 명령하였다. 최치원(崔致遠)은 헌강왕(憲康王)과 정강왕이 연이어 승하하는 바람에 한동안 비문을 짓지 못하다가 마침내 896년(진성여왕 10)에 완성하였다. 아마도 비는 대략 이 무렵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숭복사비는 신라 하대 왕실과 불교와의 관계, 귀족들의 불교신앙을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사원의 땅에 원성왕릉을 만든 관행을 알려주고 있어 주목을 받은 바 있다. 게다가 비문에 왕릉 근처의 땅을 매입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토지가격을 지불하고 있는 모습, 왕토(王土)나 공전(公田)이란 표현이 보이고 있어 신라 토지제도 연구의 기초 사료로 활용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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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은 진성왕(眞聖王) 10년(896)에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것이다. 최치원(857-?)은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지식인이다. 자(字)는 고운(孤雲)으로 12세에 입당하여 18세에 당의 빈공과(賓貢科)에 급제하고 20세에 율수현위(?水縣尉)가 되었으나, 이듬해 그만두고 24세에 황소(黃巢)의 난(亂) 토벌에 나선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이 되어 4년 동안 군무(軍務)에 종사하였다. 28세인 헌강왕 10년(884)에 신라에 돌아와 헌강왕으로부터 시독(侍讀) 겸(兼) 한림학사(翰林學士)의 직을 받았으나 외직(外職)을 자청하여 대산(大山) 부성(富城) 천령(天嶺) 등의 태수(太守)를 맡다가 견훤(甄萱)이 후백제(後百濟)를 건국하고 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는 듯하자 진성왕 8년에 ""시무10여조(時務十餘條)""를 왕에게 건의하여 받아 들여져 아찬(阿飡)의 위를 받았다. 그러나 개혁안의 시행도 확실하지 않은데다 효공왕 2년 아찬에서 면직되자 벼슬을 버리고 방랑의 길에 들어 산중에 은거하다 어디서인지 모르게 만년을 마쳤다. 문집인 『계원필경(桂苑筆耕)』 외에 불교 관계의 저술도 많이 남겨 「사산비명(四山碑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 「불국사결사문(佛國寺結社文)」 등이 있다. 근년에는 현재 남은 글들이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으로 묶여 나왔다.본 「숭복사비」는 현재 비의 원형은 물론 탁본(拓本)도 남아있지 않고 최치원이 지은 선사들의 비문인 「성주사 낭혜화상비(聖住寺朗慧和尙碑)」, 「쌍계사 진감선사비(雙溪寺眞鑑禪師碑)」, 「봉암사 지증대사비(鳳巖寺智證大師碑)」와 함께 『사산비명(四山碑銘)』이라는 사본(寫本)으로만 전해올 뿐이다. 그리고 숭복사가 있던 절터에서 간헐적으로 발견된 몇 개의 비편(碑片)들이 숭복사비의 원모습을 알려줄 뿐이다. 그러나 이 단편적인 비편들에서 읽을 수 있는 글자들을 통해서도 찬자 자신의 할주(割註) 등 사본과 다른 몇 글자를 복원할 수 있다.『사산비명(四山碑銘)』은 오래전부터 비문의 전범으로서 그리고 신라 불교사에 대한 이해를 위해 널리 읽혀져서, 서산대사의 제자인 중관(中觀) 해안(海眼 : 1567-?)이 이 네 개의 비문을 고운(孤雲)의 문집에서 뽑아 학인(學人)들에게 송습(誦習)토록 한 이래 많은 사본이 만들어지고 난해한 표현을 이해하기 쉽도록 주해도 베풀어졌다. 정조(正祖) 7년(1783) 몽암(蒙庵)이 주해(註解)한 『해운비명주(海雲碑銘註)』라든가 근세에 석전(石顚) 한영(漢永)이 주해한 『정교사산비명주해(精校四山碑銘注解)』(『계원유향(桂苑遺 香)』) 등이 그 대표적인 정주본(精註本)이다.숭복사는 경문왕의 모후(母后)인 소문왕후(昭文王后)의 외숙이며 경문왕비(景文王妃)인 숙정왕후(肅貞王后)의 외조부가 되는 파진찬(波珍飡) 김원량(金元良)이 세운 곡사(鵠寺)가 그 기원을 이루는 절로서 절에 고니 모양의 바위가 있어 이름붙인 것이다. 그런데 원성왕(元聖王)의 왕릉(王陵)을 조영하면서 풍수상(風水上) 길지(吉地)이던 이 절터를 왕릉 자리로 지목하니, 이에 따라 절은 원터를 비워주고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구 경주군) 외동면(外東面) 말방리(末方里)에 있는 현 숭복사지(崇福寺址)로 옮겨 개창(改創)하였다. 그러나 그 후 70여 년간 절은 큰 형세를 이루지 못하다가, 경문왕이 즉위하여 원성왕의 명응(冥應)을 받아 대규모로 중수하기 시작하여 헌강왕(憲康王) 11년(885)에 절 이름도 숭복사로 바꾸었음을 비문은 밝히고 있다. 그리고 본 비문은 헌강왕 12년에 최치원에게 짓도록 하였는데 헌강왕과 정강왕이 잇달아 승하하여 진성왕 때에야 완성되었다. 따라서 이 「숭복사비문」에는 경문왕과 그의 자녀들인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으로 이어지는 2대(代) 4왕(王)의 공덕을 기리는 내용이 많이 담겨 있다. 본 「숭복사비」는 다른 비문이 대체로 선사(禪師)들의 탑비(塔碑)인 것과 달리 왕실에서 세운 절에 대한 기록이어서 왕실과 중앙 귀족들의 불교 신앙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된다. 그리고 왕릉(王陵)을 조영하기 위해 이미 세워져 있는 사원을 옮겨서까지 길지(吉地)를 차지하는 풍수지리설의 성행을 알 수 있는 자료이기도 하다. 또한 비문에서 표현하고 있듯이 지가(地價)를 지불하고 구입하는 왕토(王土)와 공전(公田) 등은 신라 말기의 토지(土地) 상황을 살필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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與猶堂全書補遺○大東禪敎考
崔孤雲《四山碑銘》,其於新羅名德,冣爲實蹟。
無染國師。○〈葆光塔銘〉云:“無染,於圓覺祖師爲十世孫,【達摩謚圓覺】 俗姓金氏。【武烈王八代孫】 長慶初,舟入唐,游歷佛光寺,問道如滿,【卽香山白樂天之空門友】 去謁麻谷寶徹和尙。【見上《傳燈錄》】 會昌五年來歸,咸通十二年 【景文王十一年】 召居尙州湥妙寺。乾符三年,【僖宗丙申】 復至王居,文德元年 【眞聖王二年】 示滅。【塔在公州聖住寺】 ”
法性禪師。○〈葆光塔銘〉云:“無染大師,零染于雪山五色石寺。有法性禪師嘗扣騣伽門 【少乘法】 于中夏者。大師師事數年,揬索孑遺。”
釋澄大德。○〈葆光塔銘〉云:“無染大師問《驃訶健拏》 【《華嚴經》】 于浮石山,【在順興】 釋澄大德日敵三十夫,藍茜沮本色。
【〈寂照塔銘〉云:“智證大師就學于浮石山,卽石澄大德也”】 ”
昭玄大德。○〈葆光塔銘〉云:“無染示滅,門人昭玄大德ㆍ釋通賢,四天王寺上座釋愼符,請贈謚洎塔銘,教曰可。” 【〈塔銘〉:“又有詢乂ㆍ圓藏ㆍ靈源ㆍ玄影等四人,得其淸浮之法。僧亮ㆍ普愼ㆍ心光等三人,皆無染之門人。”】
崇唱禪師。○〈崇福寺 【在慶州】 碑〉云:“景文王安身代邸,【太子時】 注意玆門,仍請芬皇寺僧崇唱修奉梵居。” 【此唐懿宗咸通年間人】
決言大德。○〈崇福寺碑〉云:“景文王遽命有司,虔修法會,華嚴大德釋決言承旨於當寺,講經五日。” 【咸通六年事 ○碑文又云:“釋門二傑,曰賢諒ㆍ神解,督其事。” ○《源流》云:“決言與順應剏海印寺于伽耶山。”】
道義禪師。○〈寂照塔銘〉云:“洎長慶初,【唐穆宗年號】 有僧道義西汎,睹西堂之奥。” 【注云:“長慶五年己巳,道義行化楓岳ㆍ雪岳,至文德二年己酉。” ○慈弘案,道義大師,寶林寺之先德也】
洪陟大師。○〈寂照塔銘〉云:“興德王之時,洪陟大師亦西堂澄心,南岳休足。” 【注云:“陟師法嗣,德興大王宣康太子】 ○《源流》云:“道義ㆍ弘陟,皆西堂智藏大師法嗣。”
靜衆無相大師。○〈寂照塔銘〉云:“洪陟以降,爲巨擘者可屈指焉,西化,【去中國】 則靜衆 【寺】 無相 【注云:“靜衆在唐玄宗,禮敬殊甚。柳宗元起影堂,李商隱爲碑銘,其門人無住亦名僧也。”】 ㆍ常山慧覺 【注見下】 ㆍ益州金ㆍ鎭州金者是。【《禪譜》云:“黃梅子金生石也。”】 ”
常山慧覺大師。○見上。【注云:“馬和尙字慧覺,金雲卿之弟。”】
太安慧徹國師。○〈寂照塔銘〉云:“東歸則前所叙北山義 【卽道義】 ㆍ南岳陟 【卽洪陟】 而降,太安徹國師ㆍ惠目育 【無可考】 ㆍ智力聞 【智力,寺名也】 雙溪炤 【卽慧炤】 ㆍ神興彦 【忠彦,見《傳燈》】 ㆍ湧巖體 【覺體,見《傳燈》】 ㆍ珍丘休 【注云:“玄昱覺休,卽塩官 安法嗣。”】 ㆍ雙峰雲 【卽覺雲】 ㆍ孤山日 【品日,見《傳燈》】 ㆍ兩朝國師聖住染 【卽無染】 菩提宗 【注又云:“惠雲,卽無染嗣。”】 ” ○《源流》云:“太安惠徹,字法寶,姓朴氏,慶州人,謚寂忍,西堂法嗣。” 【碑在谷城桐裏寺】
賢溪智證大師。○〈寂照塔銘〉云:“大師金姓子,【寂照本智證之塔】 號道憲,字智詵,長慶甲辰現于世,中和壬寅歸乎寂。發蒙乎梵體大德,亶具于瓊儀律師,揬玄于惠隱嚴君,【卽法師】 受默于楊孚令子。【卽禪師 ○塔在曦陽山鳳巖寺,而賢溪山安樂寺,師所嘗居也】 ”
法朗禪師。○〈寂照塔銘〉云:“智證以唐四祖爲五世父,【道信之旁出】 東漸于海雙峰。【四祖號】 子法明,孫愼行,曾孫導範,玄孫惠隱,末孫師也。【謂智證】 ” 杜中書正倫纂銘云:【〈四祖銘〉】 “遠方奇士,異域高人,無憚險途,來至珍所。【謂法朗】 肅宗皇帝躳貽天什曰,‘龍兒渡海不憑筏。’”
玄亮禪師。○〈寂照塔銘〉云:“正法大統釋玄亮,聲九皐,獻康大王允之,教南泉郡統僧訓弼 【亦金姓】 標別墅,劃生場。”
俊恭禪師。○〈寂照塔銘〉云:“沈忠聞大師,名白言,弟子有剩地,在曦陽山鳳巖龍谷,至中和辛丑年,教遣前安輪寺僧統俊恭標定疆域。” 【塔銘又云:“門人性蠲ㆍ敏休ㆍ楊孚ㆍ繼徹等咸得鳳尾。” ○又云:“門人英爽,來促受辛。”】
眞鑒禪師。○〈眞鑒碑〉云:【碑在智異山雙溪寺】 “師諱慧昭,俗姓崔氏,全州金馬人,父曰唱元。貞元二十年,舟入唐,行至滄州,謁禪鑒大師。【馬祖之旁傳】 削染徒中,目爲黑頭陀。元和五年,與鄕僧道義邂逅。太和四年來歸,【文宗庚戌年】 憇錫於尙州露岳長柏寺。又至康州知異山,因於花開谷,故三法和尙蘭若遺基,纂修堂宇。師乃曹溪之玄孫,是用建六祖影堂。【魚山梵唄,卽師之遺音】 文聖王時示滅。” 【慧昭,一作慧炤】
近所刻《佛祖源流》,所載新羅名德,𩥫駁紕繆,不可徵信。今姑附見,以僃參考。
阿度和尙。○〈寂照塔註〉云:“阿度作桃李寺于冷山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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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담대사임하록(蓮潭大師林下錄) / 蓮潭大師林下錄卷之三
연담 유일蓮潭有一(1720~1799) 자는 무이無二, 속성은 천千, 화순 사람.
四山碑銘序
天以雲漢星斗爲文 地以山川草木爲文 而人之文 六經禮樂是也 大而性理氣數之說 小而萬物纎悉之事 無不由文而通 故云文者貫道之器也 昔者三聖人 並作於姬周之世 雖設敎各異而同歸乎大道則一也 三敎後學類 皆各安所習 阿其所好 指馬之爭 玄黃之戰 窮塵不已 余未甞不仰屋而嘆洎乎讀孤雲先生所爲文 稽首颺言曰天生我先生 統貫三敎 大哉 蔑以加矣已傳有之 金鐸振武 木鐸振文 先生其三敎之木鐸與 然先生旣冠儒冠服 儒服則必以儒敎爲前茅 由其文子 以憲章孔孟也 自高麗從祀文庙 良以此也而我朝退陶先生曰 近看東文選 崔孤雲以全身佞佛之人 濫厠祀例 盖局於守一也 新羅以前 未聞有爲文爲道者而先生挺生羅季 十二入唐 尋師力學十八登第 歷職淸要 高騈討黃巢 辟爲從事 其表章書啓 皆出其手 巢見檄書 不覺下床 由是名振天下 憲康王時 奉詔東還 欲展西學之所蘊 而爲時輩所忌 未果 眞聖女主時 疏陳時務 主嘉納之 噫 先生爲東國文章之首倡 則未必不能性理之學 而遇非其時 依寶而未售可勝 惜哉 盖先生之意欲仕唐也 則宦寺擅于內 藩鎭橫于外朱梁篡代之兆已萌 欲仕本國也 則昏主委政 匪人女后 淫瀆亂紀 靑松黃葉之運已迫 固不可容吾身 而況望其行吾道乎 遂乃尋深山而友麋鹿 扳薜蘿而弄明月 是豈公之本心也哉 自三國以後 文章才士 代不乏人 而惟公之名 光前絕後 膾炙人口 以至樵夫竈婦 皆知誦公之姓名 稱公之文章 其所得於一身者 必有不可得而名言矣如其遭淸時遇明君 得用其文 得行其志 則其匡君救世之術 何曾偭背於周孔之道乎 東文選余亦曾見其所載先生之文 不過賛佛事與浮屠也 退陶夫子 執此一段而刺之也 先生之文集有三十卷 桂苑筆耕有二十卷 其中豈無治國安民之術 心性理氣之論乎 黃巢下床之檄 女主嘉納之疏 可窺一班也配享文庙 何濫之有 秪緣先生辭榮居山 愽涉大藏 入海筭沙 以明敏之才超詣之見 一覽便知天下無二道 聖人無兩心 不滯方隅 不袒左右 故各隨其敎而弘賛也 昔王子安 撰益州夫子庙碑 盡聖人之十條 述如來成道記窮釋迦之八相 先生之文 亦類是矣今此四碑撰銘 大浮屠行業 內典外書雜糅成文 而對偶甚妙 引事甚廣 無一字 無來歷 其賸膏殘馥 沾丐後人多矣 宜乎桑門之徒 藏弃而雋永也或以專尙騈儷 體格卑弱 無韓柳之雄渾 詭奇少之 余曰韓柳之文 優於先生 固是先生之此格 韓柳不若也 今益上人 傳寫一卷 謁余文題其卷首余何敢以不潔 汚佛頭 而但退陶公彈駮之後 無一人扶起者 余故特敷演而申明之 使千載之下 知先生之志之所在也 其庶幾乎所謂朝暮遇之者歟
『연담대사임하록』 蓮潭大師林下錄卷之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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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文集卷之二 / 碑 / 無染和尙碑銘 竝序奉敎撰下同
其詞曰。
可道爲常道。道經註。無用之體。卽非常道。 如穿艸上露。卽佛爲眞佛。馬祖說法。卽心卽佛爲眞佛。 如攬水中月。道常得佛眞。海東金上人。本枝根聖骨。瑞蓮資報身。脩臂授蓮。 五百年擇地。十三歲離塵 出家。 雜花引鵬路。授花嚴于浮石。 窽木浮鯨津。隻板至劒山島事。 觀光堯日下 中原。 巨筏悉能捨。指徹公化去後浪遊。 先達皆嘆云。苦行無及者。如滿言 沙之復汰之。東流是天假。會昌年間。仍戒賢僧沙汰佛法之事。 心珠瑩麻谷。目鏡燭桃野。商受本記。東海桃索山。有大桃樹。根盤五千里。東西南北枝長各三千里。是以東土謂之桃也。 旣得鳳來儀。衆翼爭追隨。試觀龍變化。凡情那測知。仁方示方便。聖住強住持。松門遍掛錫。巖徑難容錐。我非待三顧。我非迎七步。北齊文宣王謁僧稠。稠趺坐不迎。其徒有勸迎者。稠曰。昔賓頭廬尊者迎阿育王。起行七步。致王失國七年。貧道雖寡德。冀王獲福。 時行則且行。爲緣付囑故。二王拜下風。一國滋甘露。鶴出洞天秋 出山。雲歸海山暮 入山。來貴乎業龍。西遊記。涇河龍王。夢見唐太宗曰。陛下是眞龍。小臣是業龍。以罪業故。爲龍行雨。 去高乎冥鴻。冥。空也。色斯之鴻。 渡水陿巢父。堯讓天下。許由洗耳。巢父飮犢上流。比師入京則反陿也。 入谷超朗公。釋僧朗。常在京洛。乞飯饍。未嘗入山。今師則還山。故超也。 一從歸島外。自中原返東國。 三返遊壺中。費長房爲汝南市椽。見賣藥翁。市罷。入壺中。長房隨入。則別有天地。 群迷謾臧否。至極何異同。是道澹無味。然須強飮食 去聲。他酌不吾醉。他飧不吾飽。誡衆點心何。糠名復粃利。勸俗飾身何。甲仁復胄義。汲引無棄遺。其實天人師。昔在世間時。擧國成琉璃。自寂滅歸後。觸地生蒺莉。西域記。莊法師到摩竭陀國菩薩金剛座上。荊棘匝地云。 泥洹一何早。通載。老子至流沙。嘆曰。吾生一何晩。泥洹一何早。不見釋迦文。中心空懊惱。又黃庭經註。丹中眞火。自尾閭上升。過夾脊,玉京,髓海。入浘洹宮中。則昇天。如佛之涅槃也。 今古所共悲。甃石復刊石。藏形且顯跡。鵠塔點靑山。龜碑撑翠壁。是豈向來心。徒勞文字覛。音麥。相視貌。 欲使後知今。猶如今視昔。君恩千載深。師化萬人欽。誰持有柯斧。元曉詩。誰許沒柯斧。以作撑天柱。 誰倚無絃琴。喩大師無生說法也。 禪境雖沒守。客塵寧許侵。鷄峯待彌勒。付法持應與迦梨入鷄足山。三峯合爲一峰。乃至彌勒出世。 長在東鷄林。始林有鷄異。故改名鷄林。詳見東史。
명(銘)을 짓노니,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가도가 상도가 된다고 함은 / 可道爲常道
풀 위의 이슬을 꿰는 것과 같고 / 如穿草上露
즉불이 진불이 된다고 함은 / 卽佛爲眞佛
물속의 달을 잡는 것과 같은데 / 如攬水中月
상도요 진불을 얻은 것은 / 道常得佛眞
해동의 김 상인이시로다 / 海東金上人
본래 가지는 성골이 뿌리로서 / 本枝根聖骨
상서로운 연꽃의 태몽을 받았나니 / 瑞蓮資報身
오백년 운세에 맞춰 이 땅에 태어나서 / 五百年擇地
십삼 세에 속세 떠나 출가한 뒤에 / 十三歲離塵
화엄이 대붕의 길을 이끌어 / 雜花引鵬路
험한 바다 위에 배를 띄웠어라 / 窽木浮鯨津
요 임금의 태양 아래 관광하고서 / 觀光堯日下
큰 뗏목을 모두 버릴 수 있었나니 / 巨筏悉能捨
선배들 모두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 先達皆嘆云
고행으로 따라갈 자가 없다 했다네 / 苦行無及者
불교를 탄압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 沙之復汰之
동방으로 귀국하니 하늘의 복이라 / 東流是天假
마음의 구슬은 마곡 보철(麻谷寶徹)을 비추었고 / 心珠瑩麻谷
눈의 거울은 도야를 밝혔다오 / 目鏡燭桃野
봉황이 날아와서 자태를 드러냄에 / 旣得鳳來儀
뭇 새들이 다투어 뒤를 따랐는데 / 衆翼爭追隨
천변만화하는 용을 한번 보시게나 / 試觀龍變化
범상한 생각으로 어찌 헤아리겠는가 / 凡情那測知
인방에서 방편을 드러내 보이면서 / 仁方示方便
성주사에 억지로 주지하였는데 / 聖住強住持
송문에 석장을 머물 때마다 / 松門遍掛錫
산길은 송곳 세우기도 어려웠다오 / 巖徑難容錐
대사는 삼고를 기다리지도 않았고 / 我非待三顧
칠보로 영접하려 하지도 않았지만 / 我非迎七步
나가야 할 때에는 잠깐 나갔나니 / 時行則且行
부처가 불법의 유통을 부촉한 일 때문이었네 / 爲緣付囑故
두 임금이 아래에서 절을 하였고 / 二王拜下風
한 나라가 감로에 흠뻑 젖었건만 / 一國滋甘露
동천의 가을날에 학처럼 나왔다가 / 鶴出洞天秋
해산의 저물녘에 구름처럼 돌아갔다오 / 雲歸海山暮
나오는 것은 섭룡보다 귀하였고 / 來貴乎葉龍
떠나는 것은 명홍보다 높았나니 / 去高乎冥鴻
물 건너면서는 소보를 좁게 여기다가 / 渡水陿巢父
골에 들면 낭공보다도 뛰어났어라 / 入谷超朗公
한번 도외에서 돌아온 뒤로 / 一從歸島外
세 번 호중에서 노닐었나니 / 三返遊壺中
사람들이 제멋대로 시비를 논하지만 / 群迷漫臧否
궁극적으로 무슨 차이가 있다 하리오 / 至極何異同
이 도는 담박해서 맛이 없으나 / 是道澹無味
억지로라도 마시고 먹어야 하리니 / 然須強飮食
남이 마신 술은 나를 취하게 못하고 / 他酌不吾醉
남이 먹은 밥은 나를 배부르게 못한다네 / 他飧不吾飽
대중에게 훈계하여 사심을 버리게 하되 / 誡衆黜心何
명예와 이익을 겨와 쭉정이로 여기라 하고 / 糠名復粃利
세속에 권면하여 몸을 단속하게 하되 / 勸俗飾身何
인과 의를 갑옷과 투구로 여기라 했네 / 甲仁復胄義
계도하며 버리는 일이 없었나니 / 汲引無棄遺
그야말로 천인사라 칭할 분이라 / 其實天人師
옛날 세간에 계실 때에는 / 昔在世間時
온 나라가 유리처럼 환하였는데 / 擧國成琉璃
적멸하여 돌아가신 뒤로는 / 自寂滅歸後
밟는 곳마다 가시풀이 돋는구나 / 觸地生蒺莉
어찌 그리 일찌감치 열반에 드셨는고 / 泥洹一何早
고금에 걸쳐 누구나 슬퍼할 일이로다 / 今古所共悲
사리탑을 쌓고 다시 비석에 새겨 / 甃石復刊石
유골을 보관하고 자취를 드러냈나니 / 藏形且顯跡
고니 같은 흰 탑은 청산에 점을 찍었고 / 鵠塔點靑山
거북 등의 비석은 취벽을 버티고 섰도다 / 龜碑撑翠壁
이것이 어찌 본래의 마음이리오 / 是豈向來心
문자만 살피는 것은 헛수고일 뿐 / 徒勞文字覛
그저 후세에 지금을 알게 하려 함이니 / 欲使後知今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은 것이로다 / 猶如今視昔
천년토록 스며들 임금의 은혜요 / 君恩千載深
만대토록 흠앙할 스승의 교화로다 / 師化萬代欽
누가 자루 있는 도끼를 잡을 것이며 / 誰持有柯斧
누가 줄 없는 거문고를 탈 것인가 / 誰倚無絃琴
선의 경지를 지킬 사람이 없다 해도 / 禪境雖沒守
객진이 어찌 침노하게야 놔두리오 / 客塵寧許侵
계봉에 미륵불이 출현할 때까지 / 雞峯待彌勒
길이 동쪽 계림에 건재하리라 / 長在東雞林
[주-D127] 가도(可道)가 …… 함은 : 《노자(老子)》 1장에 “도라고 명명할 수 있는 도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도가 아니요, 이름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름이라면 그것은 항상 불변하는 이름이 아니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라는 말이 나온다.[주-D128] 즉불(卽佛)이 …… 함은 : 어떤 승려가 마조 선사(馬祖禪師)에게 “화상은 어찌하여 즉심즉불(卽心卽佛)이라고 설하십니까?”라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어린아이의 울음을 그치게 하기 위해서.〔爲止小兒啼〕”라고 하였고, 울음을 그치면 어떻게 하느냐고 다시 묻자, 대답하기를 “비심비불(非心非佛)”이라고 했다는 이야기가 《오등전서(五燈全書)》 권5 〈마조도일선사(馬祖道一禪師)〉에 나온다.[주-D129] 요 임금의 …… 있었나니 : 중국에 건너가 고승들을 역방(歷訪)하며 불법을 구한 끝에 마음으로 크게 깨닫고 나서는 그동안에 방편으로 이용했던 것들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뗏목은 물을 건너기 위한 것인 만큼 일단 건너고 나면 필요없다는 뜻으로, 불교에서 방편의 뜻으로 많이 쓰인다. 관광(觀光)은 《주역》 〈관괘(觀卦) 육사(六四)〉의 “나라의 휘황한 빛을 봄이니, 왕에게 나아가 손님이 되는 것이 이롭다.〔觀國之光 利用賓于王〕”라는 말에서 나온 것으로, 선진 문물을 접하여 견식을 넓힌다는 의미로 통용된다.[주-D130] 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치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주-D131] 인방(仁方) : 동방(東方)을 뜻한다. 인(仁)은 오행(五行) 중 목(木)에 소속되는데, 방위로 볼 때 동쪽에 해당한다.[주-D132] 삼고(三顧) : 후한(後漢) 말에 제갈량(諸葛亮)이 남양(南陽) 융중(隆中) 땅에서 초옥(草屋)을 짓고 농사지으며 은거하고 있다가, 세 번이나 그곳을 찾아온 유비(劉備)의 정성에 감동되어 세상에 나왔던 이른바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를 말한다. 《三國志 卷35 蜀書 諸葛亮傳》[주-D133] 칠보(七步)로 …… 않았지만 : 북제 문선제(北齊文宣帝)가 승조(僧稠)를 만나러 왔을 때 영접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자 제자들이 의아해하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승조가 “옛날 빈두로 존자가 아육왕(阿育王)을 영접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일곱 걸음을 걸은 탓으로 7년 동안 나라가 잘못되게 하였다.〔昔賓頭盧迎王七步 致七年失國〕”라고 대답한 고사가 전한다. 《續高僧傳 卷16 僧稠傳》[주-D134] 나오는 …… 귀하였고 : 대사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 무척 드물었다는 말이다. 섭룡(葉龍)은 섭공(葉公)에게 나타난 용이라는 뜻이다. 섭공자고(葉公子高)라는 사람이 너무도 용을 좋아해서 집안 이곳저곳에 용을 새겨 장식해 놓자 진짜 용이 내려와서 머리를 내밀고 꼬리를 서렸는데, 섭공이 이를 보고는 대경실색하여 달아났다는 섭공호룡(葉公好龍)의 이야기가 한(漢)나라 유향(劉向)의 《신서(新序)》 〈잡사(雜事) 5〉에 나온다.[주-D135] 떠나는 …… 높았나니 : 대사가 세속에 잠깐 머물다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에는 훌훌 떨치고 미련 없이 떠나갔다는 말이다. 명홍(冥鴻)은 까마득히 하늘 위로 치솟아 사라지는 기러기라는 뜻이다.[주-D136] 물 …… 여기다가 : 세상에 나와야 할 때에는 편협하게 은거만을 고수하지 않고 과감하게 나와서 행동했다는 말이다. 진(晉)나라 고승 혜원(慧遠)이 동림사(東林寺)에 거주하면서 호계(虎溪)라는 시냇물을 결코 건너지 않았는데, 도잠(陶潛)과 육수정(陸修靜)을 배웅할 때에는 자신도 모르게 그 물을 건넜으므로, 세 사람이 모두 큰 소리로 웃었다는 일화가 전한다. 《蓮社高賢傳 百二十三人傳》 또 허유(許由)와 소보(巢父)가 기산(箕山) 영수(潁水)에 숨어 살았는데, 요(堯) 임금이 제위를 맡기려 하자 허유가 이를 거절하고서 귀를 씻었고, 이 말을 들은 소보는 귀를 씻은 더러운 물을 마시게 할 수 없다고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올라가서 물을 먹였다는 전설이 전한다.[주-D137] 골에 …… 뛰어났어라 : 일단 산중에 들어가서는 철저하게 사원의 청규(淸規)를 지키며 엄격하게 수행했다는 말이다. 전진(前秦) 때의 고승 승랑(僧朗)이 금여곡(金輿谷)에서 수도하면서 승단(僧團)을 엄격하게 이끌었으므로, 그곳을 낭공곡(朗公谷)이라고 일컬었다는 고사가 전한다. 《高僧傳 卷5 僧朗傳》[주-D138] 도외(島外) : 동해 삼신산(三神山)이 있는 섬의 밖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중국을 가리킨다.[주-D139] 호중(壺中) : 호리병 속의 선경(仙境)이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궁중을 가리킨다. 후한(後漢)의 술사(術士)인 비장방(費長房)이 선인(仙人) 호공(壺公)의 총애를 받아 그의 호리병 속에 들어가서 선경의 낙을 즐겼다는 전설이 있다. 《後漢書 卷82下 方術列傳下 費長房》[주-D140] 천인사(天人師) : 하늘과 사람의 스승이라는 뜻으로, 불(佛)의 10호(號) 중의 하나이다.[주-D141] 그저 …… 것이로다 : 진(晉)나라 왕희지(王羲之)의 〈난정기(蘭亭記)〉에 “후세에 지금을 보는 것이 또한 지금 과거를 돌아보는 것과 같을 것이니, 슬픈 일이다.〔後之視今 亦猶今之視昔 悲夫〕”라는 말이 나온다.[주-D142] 계봉(雞峯)에 …… 건재하리라 : 미래불(未來佛)인 미륵(彌勒)이 이 세상에 나올 때까지 이 비석은 건재할 것이라는 말이다. 계봉은 계족산(雞足山)으로 곧 영취산(靈鷲山)을 가리킨다. 부처의 수제자인 가섭(迦葉)이 여래(如來)의 의발(衣鉢)을 전수받고는 이를 부처의 부촉에 따라 미륵에게 전하기 위해 계족산에 가서 선정에 든 뒤에 가부좌하고 입멸하자 계족산 세 봉우리가 하나의 산으로 합쳐졌는데, 장차 미륵불이 하생(下生)하여 손가락으로 튕기면 그 산이 다시 열리면서 가섭이 선정에서 깨어나 의발을 전하게 된다는 불교 설화가 전해 온다. 《佛祖統記 卷5 始祖摩訶迦葉尊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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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文集卷之二 / 碑 / 眞監和尙碑銘 並序
謹札銘云。札。櫛也。編之如櫛齒相比。
杜口禪那。歸心佛陀。禪那。靜慮。佛陀。覺也。 根熟菩薩。弘之靡他。猛探虎窟。遠泛鯨波。去傳秘印。來化斯羅。新羅之一稱。 尋幽選勝。卜築巖磴。水月澄懷。雲泉奇興。山與性寂。谷與梵應。觸境無閡。息機是證。道贊五朝。憲德,興德,僖康,神武,文聖。威摧衆妖。默垂慈蔭。顯拒嘉招。海自飄蕩。山何動搖。無思無慮。匪斲匪雕。食不兼味。服不必備。風雨如晦。始終一致。慧柯方秀。法棟俄墜。洞壑凄涼。烟蘿憔悴。人亡道存。終不可諼。上士陳願。大君流恩。燈傳海裔。塔聳雲根。天衣拂石。永耀松門。天衣拂石。取久遠之意。大劫頌云。有石長廣四萬里。長壽天人過百年。六銖袈裟磨鍊盡。是則名爲一大劫。
삼가 다음과 같이 명(銘)하는 바이다.
입 다물고 선정 닦으며 / 杜口禪那
마음으로 불타에 귀의했나니 / 歸心佛陀
근기(根機)가 성숙한 보살의 차원에서 / 根熟菩薩
도를 넓힐 뿐 다른 뜻이 없었다오 / 弘之靡他
용감하게 호랑이 굴을 더듬고 / 猛探虎窟
고래 물결에 멀리 배를 띄워 / 遠泛鯨波
가서는 의발(衣鉢)을 전수받고 / 去傳祕印
와서는 신라를 교화했다오 / 來化斯羅
그윽한 곳 찾아 승경을 가려 / 尋幽選勝
바위 벼랑에 터 잡고 쌓은 뒤에 / 卜築巖磴
물과 달을 보며 심회를 맑게 하고 / 水月澄懷
구름과 샘물에 감흥을 부쳤다오 / 雲泉奇興
산은 성과 더불어 적연부동(寂然不動)하고 / 山與性寂
골에는 범패(梵唄) 소리 메아리치는 가운데 / 谷與梵應
부딪치는 경계마다 걸림이 없었나니 / 觸境無碍
기심(機心)을 쉬는 이것이 증입(證入)이라 / 息機是證
도로써 다섯 조정 협찬을 하고 / 道贊五朝
위엄으로 뭇 요괴를 꺾으면서 / 威摧衆妖
묵묵히 자비의 그늘 드리웠을 뿐 / 默垂慈蔭
임금님의 초빙은 한사코 거절하였다오 / 顯拒嘉招
바다야 원래 표탕하는 법이지만 / 海自飄蕩
산이야 언제 동요한 적 있었으리 / 山何動搖
어떤 생각이나 염려도 하지 않고 / 無思無慮
깎거나 새겨 꾸미지도 않았다오 / 匪斲匪雕
먹는 것도 두 가지 음식이 없었고 / 食不兼味
입는 것도 꼭 구비하지 않았으며 / 服不必備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 風雨如晦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았다오 / 始終一致
지혜의 가지가 바야흐로 벋어 나는데 / 慧柯方秀
불법의 동량이 느닷없이 쓰러지니 / 法棟俄墜
동천(洞天)의 골짜기는 처량해지고 / 洞壑凄涼
연하(煙霞)의 등라(藤蘿)는 초췌해졌도다 / 煙蘿憔悴
사람은 없어도 도는 그대로 / 人亡道存
가신 님 끝내 잊을 수 없어 / 終不可諼
상사가 위에 탄원서를 올리니 / 上士陳願
임금님이 은총을 베풀었다네 / 大君流恩
해외에 불법의 등불 전하며 / 燈傳海裔
운근 위에 우뚝 솟은 탑이여 / 塔聳雲根
천인의 옷자락에 반석이 다 닳도록 / 天衣拂石
산사(山寺)에 영원히 빛나리로다 / 永耀松門
[주-D062] 어떤 …… 않고 : 《장자》 〈지북유(知北遊)〉에 “어떤 생각이나 어떤 염려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알게 된다. 어떤 곳에도 머물지 말고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아야 비로소 도에 편히 머물게 된다. 어떤 것도 따르지 않고 어떤 방법도 쓰지 않아야 비로소 도를 얻게 된다.〔無思無慮始知道 無處無服始安道 無從無道始得道〕”라는 말이 나온다.[주-D063] 비바람 …… 한결같았다오 : 《시경》 〈풍우(風雨)〉는 난세에도 절조(節操)를 변하지 않는 군자를 그리워하는 시인데, 그중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는 말이 나온다.[주-D064] 운근(雲根) : 산 위의 바위를 뜻하는 시어이다. 두보(杜甫)의 시에 “충주 고을은 삼협의 안에 있는지라, 마을 인가가 운근 아래 모여 있네.〔忠州三峽內 井邑聚雲根〕”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그 주(註)에 “오악(五岳)의 구름이 바위에 부딪쳐 일어나기 때문에, 구름의 뿌리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杜少陵詩集 卷14 題忠州龍興寺所居院壁》[주-D065] 천인(天人)의 …… 닳도록 : 가로세로 높이가 각각 40리 되는 반석(磐石)을 천인이 100년에 한 번씩 옷자락으로 스쳐서 다 닳아 없어지는 기간을 소겁(小劫)이라 하고, 8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중겁(中劫), 800리 되는 반석이 닳는 기간을 대아승지겁(大阿僧祇劫) 즉 무량겁(無量劫)이라고 한다는 이야기가 《보살영락본업경(菩薩瓔珞本業經)》 권하 〈불모품(佛母品)〉에 나온다. 그 반석은 겁석(劫石)이라고 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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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文集卷之三 / 碑 / 智證和尙碑銘 並序
其詞曰。
麟聖依仁乃據德。孔子未生時。有麒麟吐玉書闕里人家曰。水精之子。繼衰周而素王天下。孔母徵在。以繡紱係其角。及後獲麟。孔子解紱而泣。絶春秋之筆。 鹿仙知白能守黑。燉煌實錄云。老子父姓韓名虔。夜夢日精敷野。而仙人駕鹿入室。與上洋朱氏特猪婢子合孕而生。故曰鹿仙。 二敎從稱天下式。螺髻眞人難确力。佛髻如螺形。 十萬里外鏡西域。成光子曰。自長安至中印度境。五萬八千里。西至那拘遮國。五萬八千里。一千年後燭東國。鷄林地在鰲山側。儒仙自古多奇特。可憐曦仲不曠職。羲和。堯時主四時之官。賓日餞日者也。 更迎佛日辨空色。敎門從此分階墄。言路因之理溝洫。田間水道也。身依兔窟心難息。兔有三穴。以避外禍。 足躡羊歧眼還惑。羊腸山有九曲險路。上四句言敎路多端。 法海安流眞叵測。心傳眼詖包眞極。得之得類罔象得。春池失珠。覓之不得。罔象無心而得之。出莊子。 嘿之嘿異寒蟬嘿。蟬之不鳴者雄也。不鳴是嘿。大師則具說。故異於常嘿。 北山義與南岳陟。垂鵠翅與展鵬翼。鵠鵬。皆言遠遊中原。 海外時來道難抑。遠派禪河無擁塞。蓬托麻中能自直。珠探衣內體傍貣。音惕。借也。 湛若賢溪善知識。十二因緣非虛飾。六是六異也。 何用攀絚兼拊杙。攀絚。渡流沙之事。拊杙。越蔥嶺之事。言在此而得道。 何用砥筆及含墨。言不假文字而得道。 彼旣遠學來匍匐。指上義與陟也 我能靜坐降魔賊。指大師。 莫抱意樹設栽植。莫苞情田枉稼穡。莫抱恒沙論萬億。莫抱閒雲定南北。此四句。戒辭。前二句。戒守嘿之癡禪。次二句。戒參尋之愚僧。 德馨四遠聞薝蔔。梔子花 慧化一方安社稷。土穀之神。有德者配食焉。共工氏之子句龍氏食於社。厲山氏之子柱食於稷。乃王者崇奉神明。以報天地之功用。是國家安危所在之所。 面奉天花飄縷𧙢。音克。衣裾也。 心憑水月呈禪栻。上句。入王城時事。此句。答王問心之事。 霍副 人名。疑古之貧者。往錦誰入棘。或云。挾繞壞衣也。然諸解多端。未詳孰是。 腐儒玄杖慚㰅埴。盲者以杖探路之狀也。玄杖。筆也。言以儒記佛。如盲人之不知去路。 跡燿寶幢 指塔也 名可勒。才輸錦頌文難織。囂腹欲飫禪悅食。來向山中看篆刻。
명(銘)은 다음과 같다.
공자(孔子)는 인에 의지하고 덕에 의거하였으며 / 麟聖依仁乃據德
노자(老子)는 백을 알면서도 흑을 잘 지켰다네 / 鹿仙知白能守黑
두 종교만이 천하의 법도로 일컬어졌으므로 / 二敎徒稱天下式
석가(釋迦)의 가르침은 경쟁하기 어려웠다네 / 螺髻眞人難确力
그래서 십만 리 밖에서 서역의 거울이 되었다가 / 十萬里外鏡西域
일천 년 후에야 동국의 촛불이 되었다오 / 一千年後燭東國
계림은 땅이 오산의 옆에 있는지라 / 鷄林地在鼇山側
예로부터 도교와 유교에 기특한 자가 많았다네 / 仙儒自古多奇特
어여쁘게도 희중이 직분에 충실하여 / 可憐羲仲不曠職
다시 불일을 맞아 공색을 분변하였다오 / 更迎佛日辨空色
종교의 문이 이로부터 단계별로 나뉘고 / 敎門從此分階墄
말의 물길이 특색 있게 각자 퍼져 나갔다네 / 言路因之理溝洫
몸은 토굴에 의지해도 마음은 쉬기 어려운 법 / 身依兎窟心難息
발이 양기를 밟으니 눈이 또 현혹될 수밖에 / 足躡羊岐眼還惑
불법의 바다로 순항할지 그 누가 헤아리랴 / 法海安流眞叵測
마음과 눈으로 통해야만 진극을 안으리라 / 心傳眼訣苞眞極
증득 속의 증득은 상망의 얻음과 비슷하고 / 得之得類象罔得
침묵 속의 침묵은 한선의 침묵과 다르다오 / 默之默異寒蟬默
북산의 도의(道義)와 남악의 홍척(洪陟)이여 / 北山義與南岳陟
홍곡의 날개 드리우고 대붕의 날개 펼쳤도다 / 垂鵠翅與展鵬翼
해외에서 제때에 돌아와서 도를 한껏 떨쳤나니 / 海外時來道難抑
멀리 뻗는 선의 물줄기 막힘이 없었어라 / 遠派禪河無擁塞
삼대 밭 속의 쑥은 절로 곧게 자라는 법 / 蓬托麻中能自直
구슬이 옷 속에 있는데 옆 사람에게 빌리리오 / 珠探衣內休傍貣
담연하여라 현계산의 선지식이여 / 湛若賢溪善知識
육이(六異)와 육시(六是)의 인연이 허식이 아니도다 / 十二因緣非虛飾
무엇하러 사막을 건너고 산맥을 넘을 것이며 / 何用攀絚兼拊杙
무엇하러 붓끝을 빨며 먹물을 먹일 것인가 / 何用砥筆及含墨
남들은 혹 멀리 유학하여 고생하며 돌아왔지만 / 彼或遠學來匍匐
나는 가만히 앉아 마적을 항복받을 수 있었다오 / 我能靜坐降魔賊
의념(意念)의 나무를 잘못 심어 기르지 말 것이요 / 莫把意樹誤栽植
정욕의 밭을 잘못 가꿔 거두지 말 것이다 / 莫把情田枉稼穡
항하(恒河)의 모래에 만억을 논하지 말 것이요 / 莫把恒沙論萬億
외로운 구름에 남북을 정하지 말 것이다 / 莫把孤雲定南北
덕의 향기는 사방 멀리 치자꽃처럼 번져 가고 / 德馨四遠聞薝蔔
지혜의 교화는 일방의 사직을 안정시켰도다 / 慧化一方安社稷
천화를 직접 받들면서 누더기 옷자락 휘날렸고 / 面奉天花飄縷栻
수월에 마음을 비유하며 선풍(禪風)을 드날렸어라 / 心憑水月呈禪栻
부잣집 이을 후계자 누가 가시밭길에 들어서랴 / 家嗣佳錦誰入棘
유자(儒者)의 눈먼 지팡이로 더듬는 것이 부끄럽네 / 腐儒玄杖慙擿埴
자취가 보당에 빛나니 그 이름 새길 만한데 / 跡耀寶幢名可勒
재주는 금송에 뒤져서 글을 짜내기 어렵도다 / 才輸錦頌文難織
선열에 굶주려서 실컷 맛보고 싶은 이는 / 囂腹欲飫禪悅食
이 산중에 와서 전각을 한번 볼지어다 / 來向山中看篆刻
[주-D109] 공자(孔子)는 …… 의거하였으며 : 《논어》 〈술이(述而)〉에 “도에 뜻을 두고, 덕에 의거하고, 인에 의지하고, 예에 노닐어야 한다.〔志於道 據於德 依於仁 游於藝〕”라는 공자의 말이 나온다.[주-D110] 노자(老子)는 …… 지켰다네 : 《노자》 28장에 “수컷의 강함을 알면서도 암컷의 약함을 지킬 줄 알면 모든 시내가 모여드는 천하의 계곡이 되고, 분명하게 알면서도 모르는 것처럼 자신을 지키면 천하의 법도가 된다.〔知其雄 守其雌 爲天下谿 知其白 守其黑 爲天下式〕”라는 말이 나온다.[주-D111] 오산(鼇山) : 자라가 등 위에 받치고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동해에 있다는 삼신산(三神山)을 가리킨다.[주-D112] 희중(羲仲) : 해 뜨는 동쪽 바닷가에서 봄 농사를 관장한 요(堯) 임금의 신하 이름인데, 여기서는 신라의 임금을 비유하는 말로 쓰였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주-D113] 토굴(兎窟) : 토끼가 위험한 상황을 감안하여 미리 세 개의 굴을 뚫어 놓는다는 교토 삼굴(狡兎三窟)의 준말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여 퇴로를 미리 확보해 놓는 것을 비유하는 표현이다.[주-D114] 양기(羊岐) : 양을 찾으러 나갔다가 만난 갈림길이라는 말이다. 도망친 양을 잡으려고 쫓아 가다가 ‘갈림길 속에 또 갈림길이 있어서〔岐路之中 又有岐焉〕’ 끝내는 양을 잃어버리고 말았다는 망양지탄(亡羊之歎)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다. 《列子 說符》[주-D115] 상망(象罔) : 무심(無心)을 뜻한다. 황제(黃帝)가 적수(赤水)에서 노닐고 돌아오는 도중에 현주(玄珠)를 잃어버렸는데, 아무도 찾지 못하다가 무심한 상망이 찾았다는 이야기가 《장자》 〈천지(天地)〉에 나온다.[주-D116] 한선(寒蟬) : 추운 가을날 울지 못하는 매미를 말하는데, 흔히 말해야 할 때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표현이다.[주-D117] 삼대 …… 법 : 《순자》 〈권학(勸學)〉에 “꾸불꾸불 자라는 쑥도 삼대 밭 속에서 크면 붙들어 주지 않아도 곧게 된다.〔蓬生麻中 不扶而直〕”라는 말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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孤雲先生文集卷之三 / 碑 / 大嵩福寺碑銘 並序
獻銘曰。
迦衛慈王。迦衛。具云迦維衛。此云赤津。 嵎夷太陽。嵎夷。日出處。 現于西土。出自東方。無遠不照。有緣者昌。功嵩淨刹 寺也。福蔭冥藏 陵也。烈烈英祖 元聖王。德符命禹指大舜。納于大麓。用舜典語。 奄有下土。保我子孫。爲民父母。根深桃野。派遠桑浦。都桃,扶桑。皆在東海。 蜃紼龍輴。山園保眞。幽堂闢隧 治陵。聳塔遷隣 移寺。萬歲哀禮。千生淨因。金田厚利。玉葉長春。孝孫淵懿。昭感天地。鳳翥龍躍。金圭合瑞。此二句。言子孫英傑。世世顯榮。金圭。諸侯所執之信圭。上圓下方。瑞。信也。五等諸侯。各有所執。公執桓圭。侯執信圭。伯執躬圭。子執穀璧。男執蒲璧也。言以王之金圭。符合于天子之冒。周禮。天子執冒以朝諸侯。冒。鎭圭也。以德覆冒天下。包靈不昧。徼福斯至。欲報之德。先祖之德。 克隆法事。妙選邦傑。俗三良。邦二傑。 嚴敦國工。工匠也。 伺農之隙。成佛之宮。彩檻攢鳳。雕樑架虹。繚墉雲矗。繢壁霞融。盤基爽塏。觸境蕭灑。藍岫交聳。蘭泉逬瀉。花媚春巖。月高秋夜。雖居海外。獨秀天下。陳稱報德。陳後主爲高宗。創報德寺。 隋號興國。隋文帝創興國寺。 孰與家福。金元良。 興之國力。景文移建。獻康改榜。 堂聒妙音。廚豐淨食。嗣君 定康王 遺化。萬劫無極。於 嘆美辭 鑠盛也 媧后。指眞聖女主也。 情敦孝友。致㜫雁行。愼徽 美也 龍首 陵也。詞恧 音六。媿也。 腐毫 自謙也。書慚掣 引也 肘。臂節也。說苑。魯君使宓子賤爲單父宰。子賤恐魯君聽讒而不得便其政。遂請魯君之近吏善書者。俱與至官。使之書。傍坐掣其肘。書醜則怒。更欲善書則又掣之。書者歸告于君。君不會其意。問於孔子。孔子曰。不齊。君子也。意者以此爲諫乎。君悟而從之。單父大治。不齊。子賤之名。○先生此書中諷諫之語。實不媿於掣肘之意。而其如君不能悟何哉。鰌壑雖渴。鰌音秋。長千餘丈。入穴則潮進。出穴則潮退。壑指其所居之海。 龜珉不朽。珉。美石。卽龜上所豎之碑也。世傳言。龍生九子。不成龍而各有所好。一曰贔屭。形似龍而好負重。故碑下趺是也。二曰螭吻。形似獸。性好望。故今之屋上獸頭是也。三曰蒲牢。形似龍而始吼。今之鍾上紐是也。四曰狴犴。形似虎。有威力。故立于獄門是也。五曰饕餮。性好飮食。故立于鼎盖是也。六曰𧉢𧏡。性好水。故立于橋頭是也。七曰睚䀝。性好殺。故立于刀環是也。八曰金猊。形似獅。性好烟。故立于香罏是也。九曰椒圖。形似螺蚌。性好閉。故立于門鋪首是也。
명은 다음과 같다.
가위의 자비로운 부처님 / 迦衛慈王
우이의 밝은 태양 / 嵎夷太陽
서토에 출현하고 / 現于西土
동방에서 돋았도다 / 出自東方
멀어도 보살피지 않음이 없어 / 無遠不照
인연이 있으면 번창하였나니 / 有緣者昌
사원의 공이 드높고 / 功崇淨刹
왕릉의 복이 깊었도다 / 福蔭冥藏
열렬한 우리 영조는 / 烈烈英祖
덕이 명우에 부합하여 / 德符命禹
큰 산 속에 들어간 뒤에 / 納于大麓
이윽고 하토를 차지했도다 / 奄有下土
우리 자손을 보호하고 / 保我子孫
백성의 부모가 되어 / 爲民父母
도야에 깊이 뿌리내리고 / 根深桃野
상포에 멀리 나뉘어 흘렀도다 / 派遠桑浦
상여 줄 잡고 영구차 끌고 / 蜃紼龍輴
명당인 능에 새로 모시려고 / 山園保眞
유당의 묘도(墓道)를 개설하고 / 幽堂闢隧
옛 절을 이웃으로 옮겼도다 / 聳塔遷隣
만세토록 애모할 예제(禮制)가 되고 / 萬歲哀禮
천생토록 청정한 인연이 되리니 / 千生淨因
사원은 이로움이 많을 것이요 / 金田厚利
왕손은 길이 봄빛을 누리리라 / 玉葉長春
효손의 깊고 아름다운 덕이 / 孝孫淵懿
천지를 밝게 감동시킨지라 / 昭感天地
봉황이 날고 용이 뛰는 가운데 / 鳳翥龍躍
금규의 상서에 맞게 되었도다 / 金圭合瑞
훤히 살피는 신령에게 요청하여 / 乞靈不昧
복을 구하자 곧장 이르렀나니 / 徼福斯至
선조의 그 은덕 보답하고자 / 欲報之德
불사(佛事)를 성대히 일으켰도다 / 克隆法事
나라의 인재를 가려서 뽑고 / 妙選邦傑
나라의 기술자를 독려하면서 / 嚴敦國工
농사일 한가한 틈을 이용하여 / 伺農之隙
부처의 집을 완성하였도다 / 成佛之宮
채색 난간에는 봉황이 모여들고 / 彩檻攢鳳
아로새긴 들보에는 무지개가 걸리고 / 雕樑架虹
둘러친 담장에선 구름이 일어나고 / 繚墉雲矗
단청 벽에는 노을이 한데 녹았도다 / 繢壁霞融
자리한 터전은 앞이 툭 트이고 / 盤基爽塏
접하는 경치도 모두 소쇄하나니 / 觸境蕭灑
쫑긋쫑긋 서 있는 푸른 봉우리요 / 藍岫交聳
퐁퐁 솟아나는 감미로운 샘이로다 / 蘭泉逬瀉
꽃은 봄날 동산에 교태 부리고 / 花媚春巖
달은 가을밤에 높이 떴으니 / 月高秋夜
비록 해외에 있다 해도 / 雖居海外
홀로 천하에 빼어났도다 / 獨秀天下
진은 보덕이라 하고 / 陳稱報德
수는 흥국이라 했다지만 / 隋號興國
왕실의 복이 국력에서 나오는 / 孰與家福
우리의 이 사원만 하겠는가 / 興之國力
불당에는 요란해라 범패 소리 / 堂聒妙音
주방에는 풍성해라 정결한 음식 / 廚豐淨食
정강대왕이 끼치신 교화 / 嗣君遺化
만겁토록 무궁하리로다 / 萬劫無極
아 거룩해라 우리 여왕님은 / 於鑠媧后
효우의 정이 돈독하신 분 / 情敦孝友
형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 致㜫雁行
삼가 용수를 아름답게 하였다오 / 愼徽龍首
나의 문사는 몽당붓이라 부끄럽고 / 詞恧腐毫
나의 글씨는 철주하듯 민망하나 / 書慙掣肘
고래가 사는 바다는 마를지언정 / 鰌壑雖渴
귀부 위의 이 비석은 영원하리라 / 龜珉不朽
[주-D120] 가위(迦衛) : 가비라위(迦毗羅衛)의 준말로, 석가(釋迦)가 생장한 왕성(王城)의 이름이다. 《장아함경(長阿含經)》 권1에 “나의 부친은 이름이 정반으로 찰리 왕족이요, 모친은 이름이 대청정묘이며, 부왕이 다스린 성의 이름은 가비라위이다.〔我父名淨飯 刹利王種 母名大清淨妙 王所治城名迦毗羅衛〕”라는 말이 나온다.[주-D121] 우이(嵎夷) : 해 뜨는 동쪽 바닷가를 가리킨다. 《서경》 〈요전(堯典)〉에 “희중에게 따로 명하여 동쪽 바닷가에 살게 하니 그곳이 바로 해 뜨는 양곡인데, 해가 떠오를 때 공손히 맞이하여 봄 농사를 고르게 다스리도록 하였다.〔分命羲仲 宅嵎夷 曰暘谷 寅賓出日 平秩東作〕”라는 말이 나온다.[주-D122] 열렬한 …… 차지했도다 : 경문왕(景文王)이 순(舜) 임금과 같은 성군이 될 자질을 지녔으므로 헌안왕에게 인정을 받아 맏사위로서 왕위를 계승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명우(命禹)는 순 임금을 가리킨다. 《논어》 〈요왈(堯曰)〉의 “순 임금도 요 임금에게 받은 가르침을 가지고 우 임금에게 명하였다.〔舜亦以命禹〕”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이다. 또 요 임금이 신하인 순에게 국정을 맡기기 전에 그를 시험해 볼 목적으로 큰 산속으로 들여보냈는데〔納于大麓〕, 사나운 바람과 뇌우(雷雨)에도 방향을 잃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서경》 〈순전(舜典)〉에 실려 있다.[주-D123] 도야(桃野) : 도도(桃都)의 들판이라는 말로, 동방 즉 신라를 뜻한다. 중국 동남쪽에 하늘 높이 치솟은 도도라는 이름의 거목(巨木)이 있고, 그 위에 천계(天雞)라는 닭이 서식하는데, 해가 떠오르면서 이 나무를 비추면 천계가 바로 울고, 그러면 천하의 닭들이 모두 뒤따라 울기 시작한다는 전설이 있다. 《述異記 卷下》[주-D124] 상포(桑浦) : 부상(扶桑)의 바다라는 말로, 동해를 가리킨다.[주-D125] 보덕(報德) : 진 문제(陳文帝) 천가(天嘉) 1년(560)에 세운 사찰 이름으로, 절강(浙江) 장흥현(長興縣)의 치소(治所)에서 서북쪽으로 1리(里) 지점에 있으며, 진(陳)나라 주홍(周弘)과 서릉(徐陵)이 각각 지은 보덕사 비(碑)와 탑명(塔銘)이 유명하다.[주-D126] 흥국(興國) : 수 문제(隋文帝)가 불법(佛法)을 크게 일으킬 때, 45주(州)에 각각 대흥국사(大興國寺)를 세우게 하였는데, 그중에서 문제가 출생한 곳인 섬서(陝西) 대려현(大荔縣)의 사원이 지금도 보존되고 있다 한다.[주-D127] 용수(龍首) : 장안(長安)에 있는 산 이름인데, 한(漢)나라 소하(蕭何)가 여기에 미앙궁(未央宮)을 지었으므로 왕궁 혹은 왕실의 뜻으로 쓰이기도 한다.[주-D128] 나의 …… 민망하나 : 옆에서 팔을 잡아끌며 방해하는 것처럼 글씨가 엉망으로 되었다는 말의 겸사이다. 복자천(宓子賤)이 선보령(單父令)이 되었을 때, 관리에게 글씨를 쓰게 하고는 옆에서 자꾸 팔을 잡아당겨〔掣肘〕 글씨가 삐뚤어질 때마다 화를 냄으로써, 참언(讒言)을 잘 듣는 노군(魯君)을 풍자했던 고사가 전한다. 《呂氏春秋 具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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