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인의 자기중심적인 삶의 모습
-임형락 신부-
찬미 예수님!
어떤 교수님이 쓰신 책에 이런 표현이 있었습니다. 멀쩡한 사람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정말 답답한데 의외로 세상에 이런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사소한 말다툼에도 끝까지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 사람, 물론 자존심이 상해서 우기는 경우는 이해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정말 이해가 안 되는 사람은 아무리 설명해도 못 알아듣고, 조금 지나면 처음에 했던 이야기를 다시 시작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의 대부분은 오히려 자신이 이해 못하겠다고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는 것입니다. 이를 경우 좋은 말로 융통성이 부족한 사람이라고 이해하고 그냥 넘어간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굳이 멀쩡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말귀는 다 알아듣는데, 다시 말해서 기본적인 의사소통은 되는데 함께하기 힘든 사람들이 더 많다고 생각됩니다. 아니 사람이라고 단정하기보다는 우리들의 일상적인 삶의 모습, 경향이라는 표현이 더 좋을 듯합니다. 예를 들면 외적으로 볼 때, 그것의 옳음을 알고는 있지만 쉽게 행하지 못하는 삶의 모습, 잘못을 시인하기는 하지만 개선의 노력을 등한시 하는 모습, 함께 사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하는 모습, 기득권을 결코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 끊임없이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합리화를 시켜나가는 모습 등입니다.
그리고 내적으로 본다면 어떤 문제의 원인을 내안에서 찾기보다는 밖에서 찾으려는 경향들이 더 강합니다. 주변의 변화, 타인의 변화는 바라면서 자기 자신의 변화는 거부하는 경향들, 그리고 언제나 자기 자신의 경험, 앎을 절대화시키려드는 경향들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런 삶의 모습들은 근본적으로 우리가 함께 살아가면서 각자가 자기중심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가지게 된 것입니다. 그 때문에 우리가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자주하게 되는 일상적인 말이 “네 말이 맞기는 맞는데....., 네 마음은 이해하는데...”라는 표현들이라 생각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고향 나자렛의 회당에서 해방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들의 삶을 속박하고 있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주님이 함께하심으로써 해방됨을 알리신 것입니다. “그러자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카 4,22)”고 합니다.
그런데 고향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면서 말귀는 알아들었지만 자신들이 잘 알고 있는 예수가 예언자, 자신들의 구세주임 거부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죽이려 듭니다.
그들은 자신들과 똑같은 평범한 사람에게서 특별한 것이 나올 리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들의 선입견, 편견, 자기중심적인 삶의 모습들이 함께하려는 그분을 거부한 것입니다. 오늘날 스스로를 그리스도인, 신앙인이라 여기면서 살아가는 우리 역시 2천년 전의 예수님의 고향사람들과 닮은 삶을 살고 있지는 않나 반성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새삼 우리 모두에게 ‘하느님의 힘으로, 주님이 함께하심으로써’의 해방의 삶을 선포하셨습니다. 따라서 지금 우리의 신앙은 당연히 그 해방과 자유의 삶, 하느님 나라의 삶을 지향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우리들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둔 것’인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참으로 주님, 구세주로 고백하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새벽을 열며
제가 전에 교구청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사실 좀 게으릅니다. 그러다보니 귀찮다 싶으면 아예 하지 않는 모습을 보일 때가 너무나 많아요. 특히 청소가 그렇지요. 제 방은 항상 어수선 그리고 지저분 그 자체입니다. 아무튼 이런 제 모습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수차례 했지만 생각보다 변화되기란 쉽지가 않더군요.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제가 아는 분이 아주 예쁜 화분에 담긴 꽃나무를 하나 선물해주셨습니다. 이 꽃나무를 보면서 생각했지요.
‘내가 게을러서 이런 꽃나무 하나 제대로 키우지 못했는데, 이번에 이것만큼은 정말로 잘 키워봐야지.’
사실 이제까지 저의 게으름으로 죽은 꽃나무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게을러서 물을 주지 않았거든요. 따라서 이 꽃나무만큼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꼭 물을 주자고 다짐했습니다. 일어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이 이 꽃나무에 물을 주는 것이었고, 일로 인해서 방에 들어올 수 없는 상황이면 전날에 미리 물을 흠뻑 주었지요. 그런데 이상한 현상이 일어났어요. 처음에 싱싱했던 그 꽃나무가 점점 힘이 없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 꽃나무도 죽고 말았습니다. 저는 너무나 이상했습니다. 이제까지 어떤 꽃나무에도 이런 사랑을 보인 적이 없었는데, 왜 죽고 말았을까요?
얼마 뒤, 그 화분을 주신 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이 이야기를 말씀드렸지요.
“제가 이번만큼은 잘 키워보려고 매일 물을 주었는데도, 이 꽃나무가 죽어버리고 말았어요. 아마 저하고 식물은 잘 맞지 않나봐요. 저 생각해서 주셨는데, 정말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깜짝 놀라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시네요.
“신부님, 매일 물을 주셨어요? 제가 화분에 메모해서 적어놨는데……. 그 꽃나무는 일주일에 한 번씩만 물을 주는거에요.”
메모는 제가 그냥 휴지조각인줄 알고 버렸던 것이지요. 그리고 매일 물을 줬기 때문에 그 꽃나무는 썩어버린 것이었습니다.
어쩌면 사랑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즉 알아야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내 쪽에서만 사랑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사랑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들은 내 기준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이렇게 사랑을 베풀었는데,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자기 기준에서 이루어지는 사랑은 상대방과의 간격을 더욱 더 멀게 만들 뿐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고향을 찾아가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기분이 몹시 언짢으신 것 같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이 자신의 기준으로만 예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은 알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 볼 수 있게 됩니다.
남을 섣불리 판단하지 맙시다.
빠다킹신부
참 제자의 척도
-최혜영 수녀-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대해 특별히 관심을 두고 있는 루카 복음서에서는 예수님께서 공생활 첫머리에 나자렛에서의 설교 말씀을 싣습니다.
당신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일목요연하게 선포하신 셈입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18-19절).
하느님의 왕정은 세상의 세력가들이 통치하는 지배 구조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느님께는 손주가 없다”는 말처럼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고 사랑스런 자녀들일 뿐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이상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참 제자인가 하는 척도는 우리의 가난 정신에서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가난한 이들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균형 있는 발전, 정의로운 분배를 위해 힘쓴다면 세상은 분명 달라질 것입니다.
“하느님의 나라가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도록 우리의 기도와 행동방식에 일치를 이뤄가야 할 것입니다.
무엇으로 사람을 판단하는가?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
-한만옥 신부-
◆누군가를 평가할 때 그 사람의 됨됨이보다 출신이나 가문·재산 등을 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배우자를 고를 때 그런 현상이 심하다. 물론 그런 것들이 그 사람을 평가하는 데 하나의 자료가 될 수는 있다. 문제는 그런 것에 너무 의존하는 데 있다.
집안을 잘 알고 그의 성장 과정도 잘 알고 있다면 그것으로 나름대로 판단을 한다. 그러나 때로 그것이 올바른 판단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어떠한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고 말씀하셨으리라.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첫 반응은 그분을 좋게 말하고 그분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한 것이다. 그러다가 그분이 요셉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서 분위기는 사뭇 달라진다. 요셉은 목수이고 당시 세속적인 안목으로 볼 때 별볼일 없는 집안이었을 것이다. 그런 집안의 아들이 많은 사람 앞에서 그렇게 놀라운 은총의 말씀을 거침없이 하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분위기는 점점 더 험악해진다. 예수께서 하느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선민의식에 찬물을 끼얹으셨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화가 나서 예수님을 벼랑에 떨어뜨리려고 한다. 나도 세속적인 생각에 사로잡혀 사람을 평가하고 판단하지는 않는가?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시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양승국신부-
<세상이 날더러>
한동안 형제들과 함께 자연 속에 푹 파묻혀 지내다 돌아왔습니다. 낮에는 별로 느끼지 못했는데, 해가 떨어지고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일제히 ‘자연의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더군요.
소리를 찾아 길을 나서면 그 ‘소리’의 출처는 더욱 확연해져만 갑니다. 잡풀들 사이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 뒷산에서 들려오는 소쩍새 소리, 건너편 마을에서 건너오는 개 짖는 소리, 해변을 부드럽게 감싸 안는 파도소리...
그 누군가의 표현대로 세상은 날더러 더 빨리 움직이라고, 더 빨리 서두르라고 채근하는데, 밤 별들이 총총하게 하늘을 메운 시골의 밤은 세월이 멈춘 듯합니다. 너무도 느긋하게 천천히 깊어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충고하는군요.
“뭘 그렇게 바삐 서두르는가? 천천히, 더 천천히 주변 경치도 구경하면서 천천히 가게!”
도시에서와는 달리 시간이 아주 천천히 흐르는 시골에서 한 며칠 지내면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떨쳐버리기가 힘들었던 부질없는 욕심들이 떠올랐습니다. 부초처럼 허망했던 것들을 대단한 것이라 여기며 이리저리 방황했던 지난날도 떠올랐습니다. ‘나’라는 감옥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어 그리도 몸부림쳤던 지난 세월도 떠올랐습니다.
좀 더 자유로워지고 싶어서 그렇게 죽기 살기로 기를 써도 족쇄처럼 채워져 있는 ‘나’를 떨쳐버리지 못해 고생하는 제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얼마나 감사한 말씀인지요.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예수님께서 회당에 가셔서 봉독하신 이사야 예언서의 말씀은 예수님 당신 사명의 핵심을 정확하게 제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를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육화하신 이유는 바로 우리 인간을 해방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죄와 죽음, 거듭되는 악습, 철저한 나약함, 부족함, 끝도 없는 방황에서 우리를 풀어주시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세월의 흐름에 따라 점점 자유로워져야하는데, 생각과는 반대로 몸과 마음이 부자연스럽습니다. 한 마디로 ‘깝깝’합니다. 나만 답답하면 좋은데, 나로 인해 이웃들도 힘들게 만듭니다.
억눌린 사람들, 갇혀있는 사람들, 죄와 죽음의 올가미에 얽힌 사람들의 해방자로 오신 예수님을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삶의 노선을 수정해봐야겠습니다.
혹시라도 우리는 이웃들을 내 의도와 각본대로 잘 짜인 내 틀에 가두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시라도 나란 존재는 나도 가두고 이웃도 가두는 ‘감옥’과 같은 존재가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사랑은 이웃들에게 자유를 주는 사랑입니다. 참사랑은 이웃의 인생에 날개를 달아주는 사랑입니다. 결국 참사랑은 부담스럽지 않습니다. 참사랑은 자기중심주의를 탈피합니다. 참사랑은 나도 살고 그도 살게 합니다.
참 사랑은 결국 내 안에 참 자유이신 하느님의 자리를 마련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예수를 칭찬하였고 그가 하시는 은총의 말씀에 탄복하며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 하고 수군거렸다.(루가 4,22)
<칭찬받지 않기>
-오상선신부-
살아가노라면
참으로 우리는 남으로부터 칭찬받고 인정받고자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를
보게된다.
자식은 부모의 사랑과 칭찬과 인정을 받고자 애쓰고
부모 또한 훌륭한 부모라는 세평을 받고자 한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이다.
"참 열심히 사는 사람이다.
참 신앙이 깊은 사람이다.
참 좋은 사람이다.
참 훌륭한 사람이다.
참 훌륭한 사제이다.
참 거룩한 수도자이다.
참 강론을 잘하는 사제이다.
참 영적지도를 잘하는 사제이다.
참 봉사활동을 많이하는 자매이다."
세인들로부터 이러한 평가와 칭찬을 받을 때
나도 모르게 우쭐해지고 기분 좋아진다.
그런데 그 반대상황이 되면
나는 속상하고 기분이 언짢게 되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을 싫어하고 미워하기도 한다.
이 얼마나 어처구니 없는 일인가?
사실 세인들의 평가란
나에 대해 정확히 모르고 외적인 결과만을 가지고 평가하기에
정확한 평가가 될 수 없다.
하느님의 평가라면 모를까
세인들의 평가 때문에 내 기분이 좌우된다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지 않은가?
오늘 예수님을 극구 칭찬하던 나자렛 사람들을 보라!
예수님을 극구 칭찬하고 그분의 말씀에 탄복하던 그들이 아닌가!
그런데 어찌되었는가?
바로 그들이 예수를 벼랑에 떨어뜨려 죽이려고 하지 않았던가!
자기들에게 거슬리는 소리를 했다고 해서 모두 화가 나서
그렇게 칭찬했던 예수를 동네 밖으로 끌어내어 죽이려 하지 않았던가!
세인들의 평가란 이런 것이다.
자기들에게 좀 이로운 소리가 되면 극구 칭찬하고
약한 불편한 소리가 되면 분노하여 저주하게 된다.
그러니 이러한 평가에 연연해 하는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고 불쌍한가?
오늘 사도 바오로도 이러한 관점에서
고린토인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을 찾아갔을 때에 나는 유식한 말이나
지혜를 가지고 하느님의 그 심오한 진리를 전하려고 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나는 여러분에게 갔을 때 약하였고 두려워서 몹시 떨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말을 하거나 설교를 할 때에도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을
쓰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의 성령과 그의 능력만을 드러내려고 하였습니다.>
세인들의 평가 때문에 두렵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그 평가에 연연해 하며 칭찬받을 궁리만을 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다.
내가 칭찬받게 되면 하느님의 영광이 그만큼 줄어들기 때문이다.
아니, 어쩌면 하느님의 영광을 내가 도둑질하기 때문이다.
칭찬은 받지말고 칭찬을 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다.
남을 칭찬해 주는 데는 아무리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반대로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남을 칭찬하는 데는 인색하고
나는 칭찬받으려 애쓰니 말이다.
우리의 영적 성장이 더딘 이유가 바로 이게 아니겠는가!
어느 TV 프로그램에 그런 것이 있었던가?
<칭찬합시다!>
그렇다!
칭찬받으려 하지 말고 칭찬하는 것,
여기에 영적 성장의 비결이 있다.
자, 오늘은 <칭찬합시다!>
말씀에 순종하는 삶
-강영구신부-
예수께서는 “너희는 필경 ‘의사여, 네 병이나 고쳐라.’하는 속담을 들어 나더러 가파르나움에서 했다는 일을 네 고장인 여기에서도 해 보라고 하고 싶을 것이다.”하시고는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실 어떤 예언자도 자기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지 못한다.”(루가 4,23-24)
사랑하는 예수님, 당신은 고향 나자렛 사람들로부터 환영받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권력자가 되거나 재벌이 되어서 금의환향錦衣還鄕 하지 않았습니다.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 더 날카로운 하느님의 말씀(히브리4,12)을 가슴에 품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당신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복음이 되고, 묶인 사람들에게 해방이 되며,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는’(이사야 61,1-2) 하느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고향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당신을 가장 잘 알고, 가장 가깝게 지내던 이웃들이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습니다. 당신을 환영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고향 사람들에게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닐 뿐 아니라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었습니다.
구약시대에 예언자 엘리야의 말씀에 순종했던 사렙다 마을의 과부는 삼 년 반 동안이나 계속된 기근 속에서도 살아남았습니다. 말씀이 생명의 양식이라는 메시지입니다.
시리아 사람 나아만도 예언자 엘리사의 말씀에 순종하여 요르단 강에서 일곱 번 몸을 씻고 나병으로부터 깨끗하게 나음을 받았습니다. 요르단 강물이 영험해서가 아니라 말씀에 순종했기 때문에 나아만은 자신을 사로잡고 있는 나병의 고통에서 해방되었습니다.
사렙다 마을의 과부나 시리아 사람 나아만은 이방인들입니다. 혈연血緣, 지연地緣, 학연學緣 따위의 인연因緣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신분은 구원에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열린 가슴으로 말씀을 받아들이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과 행복을 보장해줍니다.
예수님, 성직자나 수도자 혹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이 우리에게 구원을 보장해주지 않습니다. 말씀이신(요한1,1) 당신께 온전히 귀의歸依하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이 구원을 보장합니다.
오늘도 마리아처럼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지금 말씀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가1,38)하고 응답하는 하루가 되도록 살겠습니다.(一明)
뒤섞이지 않는 힘과 용기
-상지종신부-
예수님과 고향 사람들이 벼랑 끝에서 맞섭니다.
예수님을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적대자가 되어 예수님을 벼랑에서 밀어 떨어뜨리려 합니다. 절대절명의 위기입니다. 과연 예수님께서는 어떻게 이 위기를 헤쳐나올 수 있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복음 속을 들여다 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한가운데를...
자기의 갈 길을 가셨다...
자기의 갈 길을...
예수님의 발걸음에 함께 해 봅니다. 예수님을 넋놓고 바라보고 있는 예수님의 적대자들,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의 눈으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은 예수님을 그저 그렇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구차하게 도망치려 했다면, 끝까지 쫓아가서 붙잡아 기어이 벼랑에서 떨어뜨렸을텐데... 자신들의 한가운데를 가르며 걸어가시는 예수님을 차마 붙잡을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힘입니다. 예수님께 내리신 성령의 권능입니다. 감히 어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위엄입니다.
대화와 타협의 가치를 평가절하하는 것은 아니지만, 대화와 타협이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받아들여지고, 섞일 수 없는, 섞여서는 안되는 것들이 마구 뒤엉켜버리는 경우를 보면서 씁쓸함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일례로 현재 자본주의 정치경제체제를 들 수 있습니다.
"...동물들에게 땅이나 자연물이 자신의 것이라는 소유의식은 없다. 매매나 양도 등의 개념은 오로지 인간에게만 존재할 뿐이다. 본래 내 땅이라든가 내 소유의 강물, 내 소유의 산이라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인간만이 갖는 관념일 뿐이다. 인간이 소유의식을 갖기 시작했고 동시에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러한 소유의식의 확대가 필연적으로 타인과의 대립과 분쟁, 투쟁과 패배의식을 갖게 한 원인이었다. 과거부터 전쟁의 원인은 영토 확보와 관련되었다. 폭력의 원인도 또한 소유의 확대를 추구하기 위한 투쟁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오늘날 상품의 생산은 모두 자연물의 가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동산 투기와 같은 부도덕한 매매형태가 오늘날 자본주의를 타락하게 만들고 있다. 이것은 투기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본주의라는 산업주의 그 자체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천주교 서울대교구 한마음한몸운동 헌미헌금부 발행 '9월 헌미헌금 봉헌의 달 자료' 중 강론 참고자료에서 인용)
마치 자본주의 자체를 공기와 같이 우리의 삶에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입니다. 극복해야 할 현실에 오히려 적당히 타협하면서 안일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 특히 예수님의 뒤를 따라야 할 신앙인을 다시금 일깨우는 비판입니다.
생명의 위협 앞에서 타협하지 않았던 예수님을 생각합니다. 당당하게 당신의 길을 걸어가신 타협하지 않는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결국 예수님의 이 비타협적인 삶이 십자가의 죽음을 초래할 수밖에 없었지만, 바로 이 십자가가 있었기에 부활이 있고, 지금의 교회가 있음을 생각합니다.
분명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세상과 타협할 수 없는,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십자가, 정의를 위한 몸부림, 가난한 이들과 함께함... 절대로 포기할 수없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 시간 타협해서는 안되는 것들과 타협하지 않는 용기,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을 포기하지 않는 용기를, 적대자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당신의 길을 당당하게 걸어가신 예수님께 청합니다.
"세상을 이기는 승리의 길은 곧 우리의 믿음입니다."(1요한 5,4)
루가에 의한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
- 박상대신부-
우리는 지난 연중 제10주간 월요일부터 제21주간 토요일까지 마태오복음(5,1-25,30)을 평일미사의 복음으로 묵상하였다. 오늘 연중 제22주간 월요일부터 연중 마지막 주간인 34주간 토요일까지는 루가복음(4,16-21,36)을 평일미사 복음으로 듣게 된다. 내용상 많은 부분은 마태오복음과 같지만 루가복음사가만의 특수사료도 적지 않다.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직후, 예수 사건(이야기)은 예수의 직접 목격자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구전(口傳)된다. 구전된 자료를 모아 대략 50-60년경 처음으로 기록된 것을 ‘예수어록’(Q자료)이라 한다. 시기적으로 가장 먼저 집필된 마르코복음은 60~70년경 구전과 예수어록을 토대로 기록되었다. 마태오복음과 루가복음은 대략 같은 시기인 80~90년경에 집필된 복음으로서 구전과 예수어록과 마르코복음을 참고하여 가감수정 하였고, 상당부분 각기 수집한 특수사료를 첨가하였다. 그래서 이 세 복음서를 공관복음서라고 한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리는 서문(序文)이다. 이 서문에 예수님 공생활의 목적과 방향이 담겨있다. 공생활의 목적은 인류구원으로서 이미 하느님께서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예고하신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 주께서 나를 보내시어 묶인 사람들에게는 해방을 알려 주고 눈먼 사람들은 보게 하고, 억눌린 사람들에게는 자유를 주며 주님의 은총의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이사 61,1; 58,6-7; 61,2 참조)는 말씀이다. 예수님 공생활의 방향은 목적이 지향하는 대상에 대한 우선적인 관심이다.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복음이 사회의 지극히 소외된 자(가난한 자, 묶인 자, 눈먼 자, 억눌린 자)를 우선적으로 향하고 있다는 말이다. 예수님의 도래(到來)로 말미암아 이 땅에는 새로운 ‘은총의 해’(희년: 레위 25,8-13)가 선포되었다. 따라서 예언서에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은 예수님을 통하여 ‘오늘 너희가 들은 이 자리에서’(21절) 바로 이루어지게 된다. 누구든지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지금’(nun), 그리고 ‘여기서’(hic) 구원의 성취를 보며, 또한 구원을 선취(先取)하게 되는 것이다
삶의 제자리(중심)와 궤도
-이수철신부-
오늘 말씀 묵상 중 어제 어느 자매님의 고백이 생각났습니다.
“‘십자가의 길’ 기도를 바치면서,
바로 십자가의 길은 내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내 십자가를 지고 걸어가다가 넘어지고,
다시 일어나 걸어가고,
또 걸어가다가
십자가를 져주는 시몬 같은 이웃이나 형제자매들을 만나면서
위로와 힘을 얻고,
또 걸어가다가
마침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고 땅에 묻히고...
너무나 평범하고 현실적인 나의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저 역시 자매님의 고백에 즉시 공감했습니다.
환상 속에 마음 들떠 제자리를 잃고 헤맬 때
내 삶의 제자리를 깨닫고 궤도를 찾게 해 주는 참 좋은 기도가
‘십자가의 길’입니다.
다음 고백을 통해서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바로 바오로 사도에게도 제자리였음을 깨닫습니다.
“나는 여러분 가운데 있으면서
예수 그리스도 곧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제자리를 잡을 때
온갖 환상은 걷히고 삶의 본질은 명료히 드러납니다.
예수님의 제자리 역시 다음 복음 서두 대목에서 뚜렷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자라신 나자렛으로 가시어,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안식일마다 늘 회당 예배에 참석하시어
말씀을 묵상하시며 제자리를 확인하셨던 예수님이셨음을 봅니다.
어제 미사 도중 저 역시 순간 제자리를 깨달았습니다.
“아, 제대를 떠날 수 없는, 주님께 사로잡힌 이 몸이로구나.
제대가 나의 제자리이구나.”
깨달음과 더불어 한없는 평화와 자유를 느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수도자들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제자리를 찾게 해주는 것은 방편은 무엇일까요?
매일 지키는 일과표입니다.
일과표에 따른 삶의 궤도가
우리 삶의 제자리인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해 줍니다.
마음 불안하여 들떠 있을 때
일과표의 궤도에 들어가 함께 미사와 기도, 노동의
규칙적 리듬에 맞춰갈 때 주님을 만남으로
내적 질서와 더불어 평화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 불안하여 들떠 있는 분들에게
늘 다음과 같은 충고를 드립니다.
“마음 따라, 기분 따라, 감정 따라 가지 말고,
꾹 인내하면서 일과표의 규칙적인 궤도 따라 가십시오.
궤도에 충실하다 보면
곧 떠났던 마음은 되돌아오고 불안했던 정서도 안정이 됩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우리는 우리 삶의 제자리와 궤도를 새로이 확인하는 시간입니다.
아멘.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루가 4,16-30)
-유광수 신부-
모든 복음서가 다 전해져야할 복음서이고 또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에 대한 가르침이 있지만 특히 루가 복음서 전체는 복음 선포자의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즉 복음을 어떻게 전하는지, 무엇을 전하는 것인지, 누구에게 전하는 것인지 등 복음 선포자의 자세와 사명을 중점적으로 전해주는 복음서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이사야 두루마리를 펴시고 거기에 적혀있는 말씀을 읽고 자리에 앉으시자 사람들이 "모두 그분을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였다."고 하였다. 나는 성서를 펴서 읽을 때마다 어떤 마음으로 읽는가? 나에게도 성서의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오는가? 나도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 말씀은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며 놀라워하는가? 그렇다. 성서의 말씀은 매번 읽을 때마다 은총의 말씀이요, 은혜를 주는 말씀이요, 하느님이 나에게 주시는 은혜로운 선물이다.
왜 은총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내 마음이 기뻐지고, 묶여 있던 것들에게서 해방되고, 보지 못했던 것들을 보는 눈이 뜨이고, 억압받고 있던 모든 스트레스를 날려보내어 자유로움을 맛보게 되기 때문이다.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는다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성서를 읽을 때마다 이런 은혜를 받아야 한다.
언제 이 은혜를 받는가?
"오늘 이 성서의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라고 말씀하신 대로 이 은혜는 내일도 아니고 앞으로 받을 것도 아니고 바로 오늘 말씀을 듣는 이에게 주어지는 은총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기는 바로 이런 엄청난 기적이 일어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과거처럼 말씀이 이루워지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대가 아니라 말씀을 들으면 그 말씀이 듣는 이 가운데에서 이루워지는 시기에 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은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르1, 15)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느님의 나라가 와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다.
2000년전 나자렛에서 완성된 말씀은 그 때부터 완성된 말씀으로 선포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어느 곳에서 어디에서든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면, 듣고 받아들인 그 사람에게 말씀이 가져다 주는 은총을 받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할 일은 선포되는 말씀에 순명하는 것이다. 즉 성모님처럼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워지기를 바랍니다."(루가 1,38)라고 받아들이고 생활하는 것이다. 보라, 성모님은 당신이 말씀하신대로 받아들이고 순명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잉태하게 되었고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셨으며 "여자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신 분."이라고 부르는 우리 모두의 어머니, 은총의 어머니가 되시지 않았는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특별히 주목할 점은 "오늘 이 성서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씀이다. 성서는 바로 오늘의 이야기이고 오늘 완성되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서를 읽는 사람에게 있어서 말씀은 들은 말씀대로 오늘 완성되어야 한다. 말씀이 완성될 때가 바로 오늘이다. 그러나 말씀을 듣는 사람의 자세에 따라서 말씀이 이루어지는 시간은 바로 오늘이 될 수도 있고 아니면 미래에 이루워질 수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들은 말씀 그 자체는 오늘 이루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말씀이다. 다만 그 말씀을 듣는 사람에게만, 그것도 말씀을 듣는 자세에 따라 일어날 수 있는 기적이다. 따라서 우리가 복음을 읽을 때 과거의 이야기로 아니면 앞으로 일어날 지도 모르는 이야기로 아니면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읽는다면 한번도 말씀이 내 안에서 오늘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읽는 말씀은 바로 오늘 나에게 말씀대로 이루워지게 하는 은총의 말씀이라는 믿음으로 읽고 들어야 한다. 아무리 놀라운 은총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그 말씀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은총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은총의 말씀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우리는 성서를 펼칠 때마다 은총의 말씀, 은혜를 받게 하는 말씀이라는 마음으로 읽어야 한다.
아마도 말씀이 은총의 말씀으로 느껴지고 받아들이기까지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한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내가 읽고 들은 말씀이 그대로 나에게 이루어지기 위해서 아직 내 안에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거나 아니면 오늘 이루어질 수 없는 많은 장애물이 놓여 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어떻게 하면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는가?
"그분의 말씀을 오늘 듣게 되거든, 너희 마음을 무디게 가지지 말라."(시편 95,7)고 말씀하신 대로 나의 마음이 말씀 앞에서 활짝 열려져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닫혀져 있으면 안 된다. 귀, 눈, 지성 등 나의 존재 전부가 말씀 앞에서 열려 있어야 한다.
우리가 복음을 들을 때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의 눈이 예수님을 주시하였다."라고 하였듯이 우리의 모든 인격이 열려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서 내가 말씀을 온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나의 존재 자체가 모두 눈이 되어야 하고 온통 귀가 되어야 한다. 영성적이라 할 수 있는 나의 존재의 모든 모공(毛孔)이 열려 있어야 한다. 온 대양을 흡수하기 위해서 열려 있는 스펀지의 모공처럼 말이다. 우리의 영적 감각이 모두 열려 있을 때 오늘 내가 읽은 말씀이 내 안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어려운 주문인가?
말씀이 오늘 내 안에서 은총의 말씀으로 다가왔을 때 내 안에서 일어나는 첫 번째 반응은 무엇인가?
놀라움이다. 즉 누구보다도 내 자신이 놀란다. 그리고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바로 은총임을 깨닫게 된다. 그 때부터 말씀은 진 꿀보다 더 달기 시작한다. 즉 비로소 말씀의 맛을 느끼기 시작하는 것이다. 말씀을 은총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는 사람이 될 수 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은혜를 전한다는 것이다. 은혜는 은혜를 받은 사람만이 전할 수 있다. 은혜 없이 전하는 모든 말씀은 공허할 뿐이다. 또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새벽을 열며
하루 일과를 곰곰이 살펴보세요. 습관적이고 기계적인 일상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살아갈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자명종 소리에 일어나고(물론 스스로 일어나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뉴스에 깜짝 놀랍니다. 나쁜 도로의 사정에 화를 내며, 시간을 분단위로 쪼개어 계산하면서 좀 더 시간 활용을 잘 하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또한 휴대전화를 늘 손에 쥐고 있으며, 컴퓨터 자동차 그리고 그 밖의 기계들을 사용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습니다.
이렇게 습관적이며, 기계들과 함께 기계적인 일상을 살아가는 우리들. 그러다보니 자신이 누구인지,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시간조차도 없어 보입니다. 그래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우리들에게 주님께서는 오늘 이사야 예언자의 이러한 말씀을 하시며 다가오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이 말씀이 바로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고 하십니다. 즉, 과거의 말씀이지만, 이 말씀이 지금 이 순간 현재화되어 우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기계적이고 습관적인 모습이 바로 기쁜 소식을 듣고 기쁘게 살아가는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인의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 역시 과거의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불신과 의심을 가지고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밀어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러한 모습 안에서 예수님께서는 함께 하시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거부하는 사람들을 가로질러 떠나시듯이, 예수님을 부정하고 의심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가로질러 떠나실 것입니다.
항상 똑같은 일상처럼 보이는 날들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조금 더 의미를 찾으려고 한다면 하루하루가 아주 특별한 은총의 날들임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부정하고 의심한다면, 예수님께서 우리 곁을 떠나시기에 당연히 그 특별한 은총을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와 함께 하시는 주님을 느껴보세요. 감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빠다킹신부
어떤 형제님이 계셨는데, 이 분께서는 자신의 아내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나 어려웠습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답변을 하지 않는 아내를 보면서 ‘혹시 아내의 귀가 잘못된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을 갖게 되었지요. 그래서 아내 몰래 이를 시험해 보기로 했습니다.
어느 날 그는 방 한쪽 구석에 돌아앉았고, 부인은 반대편 구석에 돌아앉게 했지요. 그리고는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로 “여보, 내 말이 들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습니다. 좀 더 가까이 가서 물었지요. 그래도 답이 없었습니다. 더 바짝 다가가서 같은 말을 물었지만 여전히 대답이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는 아내의 바로 등 뒤로 가서는 “여보, 이제 내 말이 들려?”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아주 귀찮다는 듯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네. 벌써 네 번째 대답이에요.”
이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내에게 청각 장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남편 자신에게 청각 장애가 있었던 것이지요. 즉, 자신이 잘 듣지 못한 것을 가지고서, 아내가 답변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청각 장애로 착각했던 것입니다.
이는 주님과 우리의 관계에서도 똑같이 드러나는 것 같습니다. 주님께서 내 기도의 응답을 해 주지 않는다고 얼마나 많이 원망하고 있나요? 그래서 귀머거리 하느님이라고 이야기할 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내 귀가 닫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시고 응답해 주시지만, 나만을 바라보는 생각 때문에 또한 나 자신만을 위한 욕심 때문에 주님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입니다.
마치 내 자신이 빨간 안경을 쓰고 있으면서도 “왜 세상이 이렇게 붉으냐?”고 불평하는 것과 같지요. 그래서 자신에게 잘못이 있음을 깨닫지 못한 채, 계속해서 죄로 기울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당신의 고향에서 구원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시는 장면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고향 사람들의 반응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예수님에 대해 모두 좋게 말하며 그분의 입에서 나오는 은총의 말씀에 놀라워하지만, 예수님을 잘 아는 고향 사람들은 “저 사람은 요셉의 아들이 아닌가?”라는 의심을 하면서 주님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이렇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합니다. 그리고 제대로 듣지 못하기 때문에, 과거 고향사람들처럼 예수님을 벼랑 끝으로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는 불경을 감히 저지르게 됩니다.
이제 이러한 불경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제대로 듣고 제대로 판단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들은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신 것만으로도 감사하며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방이 잘 듣지 못한다고 판단하기 전에, 내가 잘 듣고 있는지 봅시다.
오늘
-서북원 신부-
예수님께서 나자렛에서 희년을 선포하신 이 말씀은 사회교리의 근간이 되는
말씀입니다. 세상 안에 존재하는 교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에 대해
정확하게 제시해주십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교회는 대사회적인 문제에 대해
관찰하고 방향을 설정해 나아갑니다. 만약 교회가 교회 내의 문제에만
국한해서 세상을 살아간다면 예수님의 말씀과는 위배되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간혹 신자들 중에는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직자는 예수님께서 그러하셨듯 복음적인
식별을 통해 예언직에 충실하면서 사회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는 복음 말씀대로 사회적인 문제를
나중에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복음의 시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다가오는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해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어떤 것이 조금이라도 더 하느님 뜻에 가까운지
제시해주어야 합니다. 그럴 때 비로소 교회는 2천 년 전 예수님 말씀을
오늘날 살아 있는 역동적인 말씀으로 전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보아야 할 것
-이종진 신부-
가끔 시각장애를 가진 교우들과 미사를 봉헌할 때가 있다. 그때마다 새삼 ‘본다는 것’의 의미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6년 전 이분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는 ‘앞을 못 보는 것처럼 답답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시력은 아직도 멀쩡하니 참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분들의 경건한 신앙을 접하면서 내 멀쩡한 시력이 부끄러울 때가 있었다. 과연 나 자신을 포함해서 정상 시력을 가진 사람들은 사물의 진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 것일까?
어느 시인의 말처럼,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당나귀를 근사한 말로, 다른 사람의 근사한 말을 당나귀로 간주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언급하신 ‘눈먼 이’란 누구보다도 ‘보면서도 보지 못하는 눈 뜬 장님’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탐욕스런 눈으로 돈과 권력과 쾌락만을 쫓아가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좌파니 우파니 하는 낡은 이념적 이분법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도 있다. 종교적인 광신은 또 어떠한가? 하느님의 빛에 눈이 멀어 자기와 같은 신앙을 고백하지 않는 사람들은 모두 사악한 악마로 보는 종교인들도 있다. 광신에 눈먼 종교인은 결국 자신을 숭배하는 사람이다. 내가 자신의 의로움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한 나 또한 눈먼 상태에 있는 셈이다.
아마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음의 눈이 열린 사람이 맨 먼저 보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스러움과 비참함’일 것이다. 오직 이렇게 자신을 제대로 보는 사람만이 진정으로 하느님의 구원을 갈망하지 않겠는가? 철학자 비트겐슈타인은 눈이 열린 신앙인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기들이 불완전하다기보다는 병들어 있다고 믿는 그만큼 사람들은 종교적이다. 반쯤이라도 분별이 있는 사람들은 자신이 지극히 불완전하다고 믿는다. 그러나 종교적인 사람은 자신이 가련하다고 믿는다.”
말할 입도, 들을 귀도
-김찬선신부-
“내가 여러분에게 갔을 때에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선포하려고 가지 않았습니다.”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매일 강론을 하고 강의를 하는 사람에게 이 말은
참으로 가볍게 들어 넘길 수 없는 말씀입니다.
자칫하면, 그리고 실제로 많은 경우
하느님의 신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기보다
자기의 주장을 펼치고
자기의 유식함과 지혜로움을 펼치기 쉽기 때문입니다.
신부 되고 처음 본당에 나가 미사를 드릴 때
저는 나름대로 강론 준비를 많이 하고
당시에는 평일 미사 강론을 보통 하지 않을 때인데도
저는 매일 미사 강론을 하였습니다.
몇 달이 지난 어느 주일,
미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시는 신자 분들에게 인사를 드리는데
그날따라 많은 분들이 오늘 강론 참 좋았다고 인사를 하였습니다.
저는 역시 열심히 준비를 하였더니 반응이 좋구나 하고
속으로 흐뭇해했습니다.
마지막 분도 마찬가지 인사를 하기에 어떤 점이 좋았냐고 물었습니다.
대답인 즉 이러이러한 내용이 좋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애써 얘기하고자 한 얘기가 아닌데......
미리 생각하고 준비한 것도 아니고 지나가다 한 얘기인데.....
그때 깨달았습니다.
성령께서 각 사람에게 필요한 것을
저를 도구로 하여 말씀하시는 것이지
제가 잘 나서
제가 좋은 말을 해서 사람들에게 좋은 말,
필요한 말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입니다.
바오로 사도에게도 비슷한 체험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 바오로는 지금 편지를 쓰는 코린토로 가기 전에
그리스 수도인 아테네에서 선교를 하였는데
거기서 그는 그리스 철학자들과 토론도 하고
철학적인 말로 아레오파고스에서 그 유명한 설교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명 설교요 제가 좋아하는 설교이지만)
그런데 그때의 반응은 시큰둥한 것이었습니다.
“저 떠버리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가?”
“이방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인 것 같군.”(사도 17,16-34)
이때의 실패 때문에 코린토에 갔을 때는
뛰어난 말이나 지혜로 하느님의 신비를 전하려 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하며
성령에 의지하여 선포를 합니다.
말할 입을 주시는 분도 성령이시고
들을 귀를 주시는 분도 성령이십니다.
<독서> : 십자가상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바울로
-경규봉 신부-
바울로 사도는 인간적인 지혜나 꾀에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느님께 의지하여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는 그리스도만을 의지하는 믿음으로, 성령께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시어 복음을 전하시도록 인간적인 능력을 의지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로 하여금 인간적인 능력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능력에 의지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하였다. 그는 오직 성령의 도구로서 성령께서 일하시도록 자신을 성령께 맡겼던 것이다.
사도 바울로가 선포한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지극히 비참하고 불행한 일이다. 바울로는 그렇게 불행하고 처참한 그리스도를 선포했다. 그는 사람들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 현세적 어려움과 아픔을 해결해주고, 현세의 축복을 주는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았다.
만일 그가 현세적이며 물질적 축복을 주는 그리스도를 전했다면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믿었겠지만, 그는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어가는 그리스도를 전했다. 그가 그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전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인간적으로 사람들로부터 인기나 영예를 얻고자 하지 않았다. 사람들에게 받아들이기 좋은 말을 함으로써 사람들이 쉽게 그리스도를 믿도록 하지 않았다. 오히려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함으로써 소수의 사람일지라도 참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했다.
사람들은 신앙을 통해서 현세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얻고자 한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는 현세적 축복과는 정반대이다. 현세적으로는 오히려 고통이요 불행이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현세적 축복을 얻기보다는 오히려 영원한 행복을 구하도록 선포했던 것이다.
이 세상의 것에만 얽매이지 않도록 하고, 보이는 것을 구하기보다 영원한 하느님 나라를 구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십자가의 비참함과 고통을 이겨냄으로써 영원한 행복을 구하는 신앙인이 되도록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전했다.
우리는 빵을 원한다. 빵이 없어서 문제가 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빵과 고통이 문제인 것처럼 생각하지만 그것이 문제가 아니다. 그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생명력과 힘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내 안에 힘이 되고 생명력이 되면 그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양식이 없어 배고픈 것이 아니요,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야훼의 말씀을 들을 수 없어 굶주린 것이다.”(아모 8,11)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리라”(마태 4,4)고 말씀하셨다.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요한 6,27) 하고 말씀하셨다.
현세적인 축복은 나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현세적인 것은 모두가 지나가 버리고 없어진다. 우리가 가야할 곳은 하느님 나라이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의 종착역이다. 때문에 우리가 매달려야 할 것은 현세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이며,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곳은 이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이다. 그 나라는 십자가의 신비를 통해서만 들어가는 나라이다.
오늘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자.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아가자. 사도 바울로처럼 십자가에 달리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 신앙인이 되자......◆
첫댓글 감사합니다~♥
이 많은 말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