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적 언어의 특성
문학은 언어를 표현 수단으로 하는 예술이다. 한 개의 단어는 흔히 두 가지의 의미로 쓰인다. 하나는 지시적 의미指示的 意味 이고 다른 하나는 함축적 의미含蓄的 意味이다. 그러나 같은 함축적 의미를 사용한다고 해도 엄밀히 따지면 시, 소설, 희곡 그리고 수필에서 상용하는 언어는 동일하지 않다. 그들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점이 있다. 시적 언어는 압축과 생략을 생명으로 하는 ‘절규’하는 언어가 중심이고, 소설적 언어는 현장감이 넘치는 대화가 중심이 된다. 거기에 비해 수필의 언어는 독백적 언어가 중심이 된다. 수필은 산문으로 씌어진다. 그러나 같은 산문인 소설이나 희곡에 비해 운문적 성격이 강하다.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적 언어보다는 간결하고 여운이 있는 문장을 택한다.”“수필은 치고 빠지는 것”이라든가, “수필은 탕관에 넣고 끊이면 주옥같은 시가 되고, 가마솥에 넣고 삶으면 대하소설이 된다”고 하는 비유적 표현들은 모두 수필의 언어가 시, 소설, 희곡과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질펀하게 눌러 앉아 뭉그적거리는 언어가 아니라, 핵심을 때리고 다음 목표로 이동하는 순발력이 있는 언어이다. 수필의 언어는 “갈고-닦아-빛나게-가다듬어-선택한 언어, 다시 말해서 거친 언어가 아니라, 엘레강스한 언어이다”
<시, 소설, 희곡 예시 생략>
낮에는 마루에 누워 잠을 청해 본다. 야윈 잠결. 문득 지나가는 한줄기 소나기. 파초잎에 듣는 빗소리가 상쾌하다. 밤에는 가벼운 옷차림으로 물가를 거닌다. 달이 비친 수면은 고요한데, 이따금 물고기가 수면 위로 솟았다 떨어지면서 내는 투명한 소리. 그 투명한 음향이 밤의 정적을 지나 우리의 가슴에 가벼운 파문을 던진다. 살아 있다는 것은 언제나 이처럼 절실한 것을. 아지랑이 속으로 아득히 비상하던 종달새의 가슴 떨리는 소리는 언제나 꿈, 사랑, 희망과 같은 어휘로 우리의 가슴을 설레이게 한다. 상아빛 건반 위로 달려가는 피아노 소리는 오월의 사과꽃 향기 속으로 번지고, 이발사의 가위질 소리는 나른한 졸음에 금속의 상쾌함을 더한다. 이런 소리들은 초여름의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들을 때 더 아름답다. 손광성, <아름다운 소리들>
시적 언어는 절규하는 언어. 그런 의미에서 시는 ‘감탄사’란 말은 시적 언어의 특성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라 하겠다. 언어의 회화성에 주력하는 모더니즘 시에 이르면 이러한 절규가 침묵하고 말지만,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시적 언어의 특성이 절규임에는 틀림없다. 치밀한 배경 묘사와 인물 묘사 없이는 소설은 리얼리티를 얻지 못한다. 만약 수필에 이와 같이 치밀하고 장황한 언어를 쓴다면 어떻게 될까. 우선 수필의 길이는 한 없이 길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뚜렷한 갈등 구조나 파란만장한 스토리가 없는 수필은 곧 지루해질 것이며, 결국 독자들의 관심에서 멀어지고 말 것이다. 소설적 언어를 쓰면 문장의 탄력이 없다. 연극은 의지의 대립과 갈등을 통해서 극적 환상을 창조하는 데 있으므로, 희곡적 언어는 점잖은 문어체의 언어가 될 수가 없다. 간결하면서도 역동성이 넘치는 구어체의 언어여야 한다. 직접적이면서 첨예하게 대립각을 세우는 언어, 폭발적인 언어. 그것이 희곡적 언어이다.
수필은 치밀한 묘사나 장황한 서사에 의존하지 않는다. 작가의 시선은 이 대상에서 저 대상으로 순발력 있게 이동한다. 치고 빠지는 언어이다. 시처럼 비유에 지나치게 의존하지 않고 그렇다고 멀리하지도 않는다. 시적 언어가‘뜨거움’이라면 수필의 언어는‘절제’와 ‘차분’함이다. 희곡처럼 직설적이지도 않으며, 거칠지도 않다. 정제된 언어, 우아하게 잘 닦은 언어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나지막하게 속삭이는 언어, 그것이 수필적 언어이다. 낚시질은 손맛으로 한다. 수필은 말맛으로 쓰고 말맛으로 읽는다. 수필은 나직이 속삭인다. 아니면 혼자서 중얼거린다. 수필이 독자에게 은밀한 기쁨을 준다면 그 일부는 이런 수필적 언어에서 나온 결과일 수 있다. 이와 같이 언어적 특성은 수필이 다른 장르와 구분되는 차이점 중의 하나이다.
수필의 제재와 주제의 특성
수필의 특성을 알아내는 기준을‘구조의 기본 요소’에서 찾는 사람도 있다. “시의 기본 요소는 운율과 어조이고, 소설의 기본 요소는 인물과 사건이고, 수필의 기본 요소는 제재와 주제라는 주장이다.” 제재가 정해지면 수필은 7할이 완성된 것이나 다름 없다는 말은 수필에 있어서 제재와 주제의 역할이 그만큼 크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 “수필은 관조의 문학”이니, “자기 성찰의 문학”이니 하기도 하고, “에세이는 철학과 문학의 튀기”라 하기도 한다. “에세이스트는 학식 있는 시인ein Poeta Doctus”이란 말도 결국 수필의 이와 같은 특성을 의미하는 말이다. 물론 수필과 에세이가 동의어가 아니며, 현대 한국 수필에서는 이와 같은 철학성이 많이 약화되긴 했지만 다른 장르에 비해서 수필은 역시 철학적 성격이 강한 것은 사실이다. 수필이 수필다운 점은 시나 소설이나 희곡과는 달리 이런 지적, 관조적, 자성적 성격이 강하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문학적 정확성을 달성하면서 동시에 전체를 통찰하고, 보편성을 추구하는 문학”이라는 K.A 호스트의 주장은 다른 장르에 비해서 수필에서 상대적으로 주제와 제재의 비중이 크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수필에서도 주제를 표면에 들어내지 않고 상황 묘사나 서사로 끝내려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지나친 설교조의 교훈이나 관념의 표백을 현대 독자들은 기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제가 드러나지 않고, 묘사나 서사만으로 된 수필은 어딘가 알맹이가 빠진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수필은 제재와 주제 중심의 문학이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