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순탄치 않다. 그 누구도 태어나고 싶어 태어나지 않았고, 원하는 삶을 살 수 없다. 때로는 원치 않은 일에 휘말리기도 하며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영화 프랑켄슈타인 속 크리처는 딱 그런 존재였다.
그는 탄생부터 잘못된 존재였다. 크리처는 영화 속 주인공이자 그의 창조주인 빅터 프랑켄슈타인의 실험으로 탄생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빅터는 어릴 때 출산 직후 죽어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죽음을 극복하기로 마음먹었다. 그의 목표와 맞물려 크리처는 죽음을 극복한 존재로 태어났다. 전쟁터에서 죽은 군인들의 시체를 이어 붙여 탄생한 그는 괴물이라 불릴 만큼 기괴한 외모를 가지게 되었다. 크리처는 죽지 않으며 인간을 초월하는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지능 또한 인간과 비슷하거나 더 뛰어나 언어를 매우 빠르게 배우는 등 굉장히 뛰어난 생명체로 성장해 갔다. 하지만 그 때문이었을까, 크리처를 만든 빅터는 그를 두려워하게 되었고, 지하실에 감금하고 학대하는 동시에 자신의 살인까지 뒤집어씌운다. 결국 빅터는 자신의 실험실에 크리처를 가두고 불을 지르는 일을 저질렀고, 크리처는 죽지 않은 채 바다로 탈출하게 된다. 이후 크리처는 자신의 삶의 이유를 찾아 떠나는 길에서 다양한 사건을 마주하게 된다. 프랑켄슈타인은 우리에게 다양한 메시지와 생각할 거리를 던지며 우리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첫 번째로, 인간의 가장 큰 오만은 창조자가 되고자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전한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자가 되고자 하면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특히 인간보다 더 뛰어난 존재를 만들고자 한다면, 더 이상 그것을 통제할 수 없는 창조자도 피조물도 아닌 애매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실제로 영화 속 빅터는 자신이 만든 크리처를 통제하지 못하며, 결국에는 크리처에게 살해당하기까지 한다. 이는 인간은 자연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야 하며, 피조물인 존재가 창조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일깨운다.
두 번째로, 인간은 과연 크리처를 괴물이라고 부를 자격이 있는지 묻는다. 작품 속에서 크리처의 탄생 초기 모습은 매우 순수하고 선한 존재로 묘사된다. 그러나 빅터의 학대와 고문뿐만 아니라 사람들에게 거부당하면서 점점 폭력적인 성격을 갖게 되었고, 그의 신체 능력과 결합되어 결국 괴물이 되어 간다. 이는 크리처가 처음부터 괴물이었던 것이 아니라, 한 인간과 사회가 그를 괴물로 만들어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모습은 현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도덕 시간에 ‘학교의 눈물’이라는 다큐멘터리를 보았다. 그곳에는 일주일간 친구를 감금하고 상해를 입힌 청소년이 등장한다. 우리는 과연 그에게 무조건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그는 태어날 때부터 범죄를 저지를 사람이 아니었다. 전교 상위권에 드는 모범생이었고, 중학생 시절까지 학교폭력 피해자였다. 단지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이유로 괴롭힘을 당했고, 믿었던 친구에게 배신당한 끝에 범죄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되기까지 사회는 방관자였고,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했다. 처음부터 괴물인 사람은 없다. 사회가 이를 만들어낼 뿐이다.
마지막으로 프랑켄슈타인은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다. 크리처는 죽을 수 없다. 애초에 그는 죽음을 극복하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삶에서 그는 괴물이 되어 버린 자신을 혐오하며 고독하게 살아갈 것이다. 이러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삶의 목표를 찾기란 쉽지 않으며, 결국 스스로를 통제하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죽음이 생명체에게 내려진 저주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온전히 살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하나의 해방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