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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의 이름
불교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을 믿고 행하는 종교이다. 석가모니는 불교의 교주다. 따라서 불교를 알기 이해서는 교주인 석가모니가 누구인지 부터 살펴보아야 한다. 일반 불자들 즉 불교신자들 가운데 상당 수는 석가모니를 절대 신으로 생각하고 믿는다. 그러나 석가모니는 신이 아니고, 우리와 같은 인간이다. 불교의 본질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진리를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런데 석가모니 후대에 들어서면서 석가모니는 물론 다른 부처들도 신으로 추앙되면서 어느새 불교도 신을 섬기는 종교로 둔갑되고 착각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불교는 이중적이다. 이런 경향은 다음에 설명할 대승불교의 발달과 함께 더 구체화 되었다.
그렇다면 석가모니는 누구인가? 석가모니의 실존에 대해 의구심이 있기도 하지만 싯다르타의 탄생지로 알려진 룸비니동산에서 아쇼카왕의 석주가 발견되고 이 명문(銘文)에 석가모니의 탄생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면서 역사적 실존인물로 인식되고 있다.
석가모니의 이름
석가모니의 원래 성명은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Gotama Siddhartha:瞿曇 悉達多)다. 고타마는 성(姓)이고 싯다르타는 원래의 이름이다. 고타마는 '우수한 소'라는 의미이고 싯다르타는 '목적을 달성한 사람' 또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 질 것' 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싯다르타라는 이름이 다른 사람들의 이름과 특별히 다른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나라도 한자 이름은 나름의 의미를 갖는 것과 유사할 것이다. 싯다르타의 이름은 초기성전의 오래된 부분에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아 후세에 와서 쓰이게 된 이름으로 보인다. 전설은 싯다르타의 이름을 현자들이 지었다고 기술한다. 즉 왕자가 태어난 지 닷새 째 되던 날, 왕은 여덟 명의 현자를 청하여 왕자의 앞날을 점쳐 달라고 부탁하자 현자들은 왕자에게 '목적을 달성한 사람'이란 뜻으로 '싯닷타(Siddhattha)'란 이름을 지어주고, 이 왕자가 왕위에 오르게 되면 전륜성왕(轉輪聖王: Cakravarti)이 되겠지만, 출가한다면 정등각자(正等覺者)가 되어 사람들을 무지에서 구해낼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것이다. 그 고타마 싯다르타는 출가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에 석가모니가 되었다 석가모니(sakyamuni)는 석가(sakya : 샤카)와 모니(muni 聖者)로서 '석가'는 고타마 싯다르타의 종족을 가리키며 '모니'는 침묵을 안사람, 성자를 뜻한다. 따라서 석가모니는 석가라고 하는 부족출신의 성자를 의미한다. 고타마 싯다르타라는 역사적으로 한시대에 존재했던 인물이 성도(成道)를 통해 석가모니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게 된 것이다. 이런 이름이나 칭호는 모두 당시의 언어였던 팔리어(Pali) 또는 산스크리트(Samskrta)어의 음역이다 (산스크리트어로는 Gautama Siddhartha, 팔리어로는 Gotama Siddhattha). 그리고 이를 한자로 석가세존(釋迦世尊)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줄여서 석존(釋尊) 또는 세존(世尊)이라고 한다.
석가모니를 우리는 불타(佛陀)· 불(佛)· 부도(浮屠)로 부르는데, 이것도 역시 산스크리트어의 붓다(Buddha)를 중국어로 음역한 것이다. 붓다(Buddha)는 원래 일반 수행자 모두를 지칭하던 '깨달음을 얻은 자'란 뜻의 일반명사였고, 불교뿐만 아니라 자이나교에서도 사용해, 쟈이나교의 창시자인 마하바라(Mahavira)도 붓다라는 칭호가 있었다. 종교사전에는 경전의 1,2차결집 즉 석가모니가 입멸한 후 100여년 까지도 석가모니에게 가장 넓게 붙여진 호칭은 "선생님(sastr)" 또는 "복스런 성자(bhagavat, bhagavan)"이었다. 따라서 싯다르타가 석가모니가 된 뒤에도 그에게 붓다라는 호칭이 붙여진 것은 그의 사후 100년의 일이며 이때 부터 고타마 싯다르타에게 불교의 교주 석가모니 개인에 대한 호칭으로서 붓다(Buddha:佛陀)라 불리게 된 것이다.
붓다는 다시 중국에 전하여져 불타(佛陀)· 불(佛)· 부도(浮屠) 등과 같이 한자의 음과 훈을 빌려 표기하게 되었다.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으로 본격적으로 전래되어 팔리어에서 산스크리트어로 정리된 불교의 경전이 한역된 것은 2세기 중반 즉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영제(靈帝) 때로 알려지고 있다. 불타(佛陀)와 부도(浮屠)는 붓다를 산스크리트에 맞도록 음역한 것으로 타(陀)는 어떤 의미를 갖기보다는 음에 맞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불타나 부도보다는 흔히 불(佛)로 표기하는 것은 불타의 줄임이라는 견해와 또 다른 음역이라는 견해로 갈린다. 전자의 견해는 산스크리트어 '붓다'의 음역인 불타가 먼저 이루어지고 나중에 이것을 '불'로 줄였다는 것이다. 후자의 견해는 인도불교가 중국으로 전래되는 과정이 중앙아시아를 거쳐가면서 중앙아시아의 토카라어에서 '붓(but)' 이 되고 이 '붓'이 '부도(浮圖)', '부도(浮屠)' '불(佛)' 등 다양한 음역으로 표현되다가 '불(佛)'로 정착되었다는 견해다.
'불타'라는 용어는 주로 상좌부(上座剖, Theravada, 테라바다)불교의 영향을 받은 서양에서 사용된다. 즉 영어로 부처는 Buddha를 사용하며 여기에 ist와 ism을 각각 첨가하여 Buddhist(불자), Buddhism(불교)로 사용한다.
‘상좌(上座) 혹은 ’상좌부(上座部)는 팔리어 ‘테라바다(Tehravada)’의 한역(漢譯)으로, 테라바다의 ‘테라(thera)’는 절의 장로(長老) 즉 ‘상좌’를 의미하고, ‘바다(v��da)’는 ‘말씀’, ‘가르침’을 뜻한다. 상좌불교는 종종 소승불교(小乘佛敎)로 불려지는데, ‘소승’(小乘)은 ‘작은 수레’라는 뜻으로 대승불교 측에서 소승불교 측의 개인주의적인 구도 방식을 경멸하여 일방적으로 붙인 것으로 이제는 소승불교 대신에 초기불교, 원시불교, 또는 근본불교, 부파(部派)불교, 남방불교 등으로 불린다. 이에 관해서는 뒤에서 다시 기술할 것이다.
그러면 붓다를 음역하는데 하필이면 '불(佛)'자를 사용했을까?. 중국어로 '佛' 은 사람을 나타내는 '人'과 不(not)보다 강한 부정의 "결코 아니(never)"라는 것을 의미하는 '弗' 의 합성어로 어의상으로 보면 "사람이 결코 아니다"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아마 부처를 초월적인 존재 즉 신을 의미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한자는 각각의 의미를 갖는 여러 부수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는 뜻글자인 동시에 상형문자라는 점을 감안하면 '佛'은 단순히 "초인적 인 존재"라기 보다는 더 깊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즉 부처는 원래 고타마 싯다르타로서 한 인간이었다는 의미와 개달음을 얻은 후 즉 석가모니가 되면서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기 때문에 초월적 인간 즉 인간이 아닐 수 있다는 두 가지 의미를 모두 담고자 했을 가능성이다.
불교의 역사상 붓다란, 인간의 가장 이상적인 형상으로 표현되어졌기 때문에 실제로 많은 붓다가 신앙의 대상으로 되어 왔다. 그러므로 역사적 존재인 불교의 개조(開祖)를 다른 모든 부처로부터 구별하기 위하여 <고타마 붓다>라고 부르게 되었다. 후세에는 석가모니를 부르는 이름이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등장했는데 그 가운데 아래와 같은 10가지가 불교에서 중요한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를 여래10호(如來10號)라 한다.
●여래(如來, ththagata): '모든 부처들과 같은 길을 걸어 그와 같이 이 세상에 오신 분' 즉 진리를 따라서 이 세상에 와 진리를 보여주는 분'
●응공(應供, arahat): '온갖 번뇌를 끊어서 인간과 하늘 중생들로부터 공양을 받을 만한덕을 갖춘 사람'
●정변지(正徧知, samyak sam buddha) :다른 말로 정등각자(正等覺者)라고 하는 데, 우주와 인생의 모든 이치를 올바로, 그리고 샅샅이 깨쳤다는 뜻에서 불려진 이름 일반적으로 등정각(等正覺)·정등각(正等覺)·등각(等覺)·정각(正覺)이라고 의역하고 있는데, 부처는 일체의 모든 지혜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에 세계와 우주의 모든 물질과 마음의 현상에 대해서 다 아는, 즉 바르고 완전하게 진리를 깨달아 무엇이든지 모르는 것이 없다는 뜻
●명행족(明行足, vidya carana sampanna) : 산스크리트로 비드야(vidya)는 지(知) 또는 명(明)을 의미하고, 차라나(carana)는행(行)을 뜻하며 삼판나(sampanna)는 구족(具足) 내지는 성취를 일컫는다. 바로 지와 행이 완전한 자를 일컫어 명행족이라 하는 것이다.
●선서(善逝; Sugata) ; "잘 갔다"라는 뜻. 번뇌로 가득찬 이 세계를 뛰어넘어 피안(彼岸)의 저 언덕으로 잘 가서 다시는 생사의 고해에 빠지지 않는 다는 의미다.
●세간해(世間解, loka vid) : 세(世)는 시간이요 간(間)은 공간으로 부처는 참다운 깨달음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능히 세간의 모든 일 즉 인과법을 다 안다는 뜻이다.
●무상사(無上士; Anuttara - purusa); 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경지에 다다른, 일체 중생 가운데서 가장 높아서 위가 없는 분으로 번뇌가 다 끊어지고 다시 끊을 것이 없는 경지의 사람을 말한다.
●조어장부(調御丈夫, purusa damya sarathin) : 부처는 부드럽고, 간절한 말들로 중생들이 바른 길을 잃지 않도록 하는 분이고, 또한 자신의 모든 욕심과 몸의 움직임을 잘 다스리고 제어한 분으로, 여러 가지 법을 설해서 일체 중생을 조복(調伏)하고 제어해서 열반을 얻게 하는 위대한 분을 가리키기도 한다.
●천인사(天人師; Sasta - devamanuyanam); 하늘의 신들뿐만 아니라, 땅의 인간들을 인도하는 위대한 스승이라는 뜻이다.
●불세존(佛世尊, buddha bhagavat) : 깨달은 분을 말한다.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아서 중생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까닭에 '세상의 존경을 받을만한 분'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러한 호칭들은 석가모니에 대한 산스크리트어의 의미를 한역하여 붓다의 위상과 정체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부처에 대한 존칭 또는 경칭에 해당한다.
석가모니의 민족
석가모니 붓다가 석가족이라는 것은 이미 기술한바가 있다. 그러면 석가족은 어떤 인종인가? 즉 붓다가 유럽인인가 또는 아시아인인가?
인도의 역사는 북방대륙과의 끊임없는 교류로 이어졌는데 원래 인도에는 드라비다족((Dravidians)이 살고 있었다. 인도대륙의 원주민인 드라비다족은 인더스강 문명의 주역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중앙아시아에서 유래한 코카서스 원종의 아리안족(Aryans)이 침입하여 BC1500-1200년 사이에 인도대륙에 정착하게 되었다. 드라비다족은 인도반도 남부로 남하하게 되었고, 북방에 남아 있던 드라비다족은 아리아족과 혼혈되거나, 그 사회에 동화되었다.
현재의 인도인은 인종적으로는 북방의 아리안족(族)과 남방의 드라비다족((Dravidians)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아리안족은 게르만족의 분파로서, 키가 크고 피부는 백색에 가까우며 코가 높고 눈이 깊숙한 용모로 유럽인에 가깝다. 이들은 아마 카스피해의 카스피족으로부터 유래한 종족으로, 서유럽 쪽으로 진출하고 이란을 거쳐 동아시아에 들어온 것으로 추정된다. 일부에서는 게르만족이 아리안족의 후예라는 주장을 한다.
19세기 프랑스 민족학자인 고비노(Gobineau, 1816~1882)는 게르만족은 아리안족에서 가장 우수한 종족이라며, 아리안족의 우위를 주장했고, 이에 고무된 히틀러는 아라안족의 후예로서의 긍지로 자신의 나치 깃발문형을 아리안족의 문자인 산스크리트어에서 "卍"을 취해 사용하였다는 주장도 나온다.
한편 석가모니는 그동안 아라안족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으나 비아리안계 또는 몽고계인종이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불교의 배경이 되는 고대 인도문명은 동양문명과는 단절되고 서양문명과 동질적 인종, 언어의 구조 속에 있었다는 점에서 보면 석가가 동양인일 가능성은 희박하다. 아리안족은 BC 500년경 인더스강에서 간지스강역으로 대이동하면서 철기문명을 꽃피운다.
석가모니의 탄생
싯다르타는 약 2600 여년 전 현 네팔의 남부인 히말라야산 기슭, 지금의 네팔 타라이(Tarai) 지방에 석가족이 세운 몇 개의 작은 왕국(성)의 하나인 현재의 티베트 령인 카필라성(Kapilavatthu)에서 태어났다. 카필라성은 그 당시에 인도에서 강국이었던 코살라(Kosala)국에 복속되어 있었다. 카필라성은 네팔 고고학국이 1967년에 발굴한 결과 그 유적의 크기는 동서 400m 남북 500m 정도로 판명되었다. 이런 점에서 싯다르타가 대단히 호화로운 궁전에서 살았다는 것은 전기문학의 특성상 출가와 고행에 대해 극적인 대비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석가모니는 부처가 되기 이전에 이미 무수한 생애를 거쳐오면서, 끝없는 자기 희생의 공덕을 쌓았고, 그 결과 도솔천에 올라가서 신들을 교화하면서 지상에 내려올 시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내용 등의 전생 설화가 만들어졌다. 이런 설화에 따르면 붓다는 이 세상에 태어나기 전에 투시타(Tusita, 兜率天)에 있다가, 거기서 여섯 개의 이빨을 가진 코끼리를 타고 내려와 마야 부인의 태(胎)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이를 토대로 붓다 탄생에 관한 '강탄(降誕)'설화가 만들어 졌다. 또한 중부(中部,Majjhima Nikaya, 123.10)는 싯다르타의 잉태를 다음과 같이 신화적으로 묘사한다.
붓다께서 천상에서 내려와 그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야왕비의 태중으로 들어오셨을 때 어떠한 육욕적 생각도 일지 않았으며, 정욕을 품은 어떤 남자도 그에게 접근할 수 없었다.
싯다르타는 이 카필라성의 성주인 수도다나(Suddhodana, 淨飯王)와 그의 왕비 마야(Maya, 摩耶)사이에서 태어났다.
싯다르타를 잉태한 마야부인은 출산을 위해 당시의 습관대로 친정인 콜리(Koli)성으로 가던중 잠시 들른 룸비니(Lumbini) 정원에서 싯다르타를 출산했다. 룸비니동산은 현재 불교의 4대성지중의 하나다.
석가모니의 탄생에 관해서도 전형적인 전설이 따른다. 불전문학에는 마야왕비가 하얀 코끼리가 옆구리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지 10달 만에 룸비니정원의 아쇼카나무(Asoka, 無憂樹)아래에서 쉬는 도중에 나뭇가지를 손으로 잡는 순간 아기가 오른 쪽 엽구리로 태어났다는 이른바 우협탄생(右脇誕生)설화가 있다. 방광대장엄경(方廣大莊嚴經; Lalitavistara Sutra 3-7)에 따르면 붓다가 타어나자 하늘과 땅이 진동하며 꽃비가 내리고 청작이 날고 제석천과 범천이 공손히 양산을 밥치고 아홉 마리의 용이 나타나 물을 뿜어 태자를 목욕시켰다. 이것은 9룡(九龍)이라는 말로 널리 사용되며 부처 탄생일에 아기부처에 물을 부어 목욕하는 관불(灌佛)의식으로 이어지고 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동서남북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며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내가 가장 존귀하니, 온 세상의 괴로움을 내가 당연히 편안하게 하리라(天上天下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라고 외쳤고. 그가 걷는 발자국 마다 연꽃이 피어났다고 한다. 싯다르타가 외쳤다는 이 말을 탄생게(誕生偈)라고 한다. 그러나 불소행찬(佛所行讚) 권1에서는 "이 생을 부처의 생으로 하여 윤회의 마지막 삶이 되게 하리라, 내 오직 이번 삶 동안에 모든 중생을 제도하리라(此生爲佛生 則爲後邊生 我唯此一生 當度於一切)라고 기록되는 등 경전에 따라 다른 게송이 나타나 있다.
싯다르타가 태어나자마자 말을 하고 걸었다는 것은 물론 오늘날의 상식적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이런 게송은 석가모니의 업적을 역으로 거슬려 올려 문학적으로 작성된 설화일 것이다. 그러나 이 설화들은 싯다르타 탄생의 이유와 목적을 분명히 나타낸다. 이 가운데 천상천하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은 싯다르타가 보리수 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것을 함축적으로 전해주고 있다. 이 말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내용을 알리는 것으로서 "세상에서 자신만이 최고"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누구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귀한 존재"라는 의미이다. 이것은 인간의 노력과 그 에 따른 가능성 그리고 모든 인간의 평등성을 담고 있다.
어머니 마야부인은 싯다르터를 낳은 지 일주일만에 세상을 떠났고, 이모인 마하파자파티(Mahapajapati Gotami, 大愛道瞿曇彌)에 이해 양육되었다. 싯다르타의 탄생 년대에 대해서는 역사적 사실로 밝혀진 것은 없다.
현재 학계에서 쓰이고 있는 붓다의 재세 연대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BC 560-480년과 BC 460-380년 설이다. 여기에는 100년의 차이가 있지만 당시 고대의 인도사회의 상황을 비추어 볼 때 100년의 차이는 큰 오랜 기간이라고 할 수는 없다. 탄생년도가 불명확하기 때문에 탄생일도 확인될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에서는 싯다르타의 탄생일을 4월 8일로 기념하고 있다. 하지만 남방의 불교국에서는 베사카(Vesakha, Vaisakha, 인도력의 2월로서 태양력으로는 4-5월에 해당함) 월의 만월일(滿月日)을 붓다의 탄생·성도·열반일로 기념하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인도와 중국의 역법(曆法)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붓다의 탄생지에 관해서는 역사적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기원전 268(혹은 269년))년에 즉위하여 233년(혹은 232년)에 사망한 아쇼카(Asoka)왕이 룸비니에 세운 거대한 석주가 1986년 영국의 고고학자 커닝엄(Cunningham)에 의해 발굴되고, 그 비문에 “석가족의 성자, 부처님, 여기에서 탄생하심(hida budhe jate Sakyamuni)"라는 구절이 들어있어 실존 인물로서의 싯다르타의 탄생배경을 역사적으로 입증해주고 있는 것이다.
싯다르타의 성장과 출가수행 그리고 성도
싯다르타의 성장 및 출가의 과정도 역사적 사실성과는 별개로 극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싯다르타는 어머니 마야부인이 자신을 난지 7일 만 세상을 떠나면서 마야부인의 동생 즉 이모인 파자파티(Pajapati)에 의해 자랐다. 아버지는 그를 위해 호화로운 궁전에 이른바 삼시전(三時殿) 즉 겨울과 여름에는 추위와 더위를 피하고 봄과 가을에 지내기 알맞은 환경을 제공했다.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다.
불전문학으로 사실처럼 전해지는 그의 성장 및 출가 과정은 그이 출가동기를 아주 분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가 7세가 되던 해애 부친과 함께 한해의 농사를 시작하며 풍작을 비는 농경제(農耕祭)에 새로운 것을 보았다. 즉 새가 흙덩이 속의 벌레를 보고 약육강식의 현실에 고뇌했다. 또한 땀 흘리며 힘겹게 일하는 농부와 그의 채찍에 맞아가며 힘들게 밭갈이 하는 소, 반면에 편하게 배불리 먹고 사는 사람들을 보면서 염부수(閻浮樹)라는 나무아래에서 사색에 잠겼다. 이 일을 “염부수 아래의 정관”이라고 부른다.
태자의 번민은 계속되었다. 어느 날 성의 동문으로 나갔다가 백발의 노인을 보고 인간은 누구나 늙는 다는 것을 실감했고, 남문 밖에서는 고통으로 신음하는 병자를 보고 병마의 괴로움을 절실하게 느꼈다. 서문에서는 상여행렬을 보고 세상에 태어난 자는 누구나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런데 북문밖에서는 출가하여 나무아래에 앉아 수행하는 사문을 만났다 그로부터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의 속박에서 벗어나 진정한 행복의 길을 찾기 위해 출가했다‘는 말을 듣고 궁으로 돌아온 태자는 늙고 병들고 죽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고뇌하다 출가를 결심하게 되었다. 불전문학에서는 이것을 사문유관(四門遊觀)이라고 부른다.
왕은 갖은 방법으로 이를 막으려 했다. 태자의 마음을 사로잡으려고 매일 아름다운 여인을 동원하여 쾌락에 탐닉하도록 했다. 그러나 태자의 결심을 꺽지 못한 채 결국 결혼하여 후사를 본위에 출가하는 것으로 허락을 받았다.
그는 석가족의 콜리(Loli) 성주의 공주인 야소다라(Yasodhara, 耶輸陀羅)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라훌라(Rahula, 羅睺羅)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장애’ ‘속박’이라는 의미이다. 싯다르타는 드디어 29세에 출가했는데, 그의 극적인 출가장면을 묘사한 것이 유성출가(踰城出家)의 이야기이다. 중아함경(中阿含經) 권56에는 싯다르타가 자신의 출가 동기를 술회한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타나 있다.
“내가 출가한 것은 병듦이 없고, 늙음이 없고, 죽음이 엇고, 근심 걱정 번뇌가 없고, 지저분함이 없는 가장 안온한 행복의 삶을 얻기 위해서 였다“
궁을 떠난 싯다르타는 아노마(Anoma)라는 강을 건너 말라(Malla)국경으로 들어가 왕족 복장과 장신구 등을 시자인 찬타카에게 주고 스스로 삭발하고 수행에 들어가, 출가 수행자 즉 사문(samana, 沙門)이 되었는데 사문 고타마(Gotama)라고 부른다. 2월 8일이다. 사문은 부지런히 공덕을 닦고 악덕을 저지르지 않는다는 의미로, 바라문교도를 제외한 인도의 모든 자유수자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여기에는 불교 수행승을 비롯한 외도(外道)들도 사문이라고 불렀다. 현재는 불고 수행승을 가리킨다.
당시에 인도에는 당시 인도의 4성(姓)계급중에서 최고의 지위를 차지하는 종족으로, 베다(veda)를 경전으로 하고 있던 바라문(婆羅門, brahmana)교를 비롯해 바라문들의 권위에 대항하는 여러 유형의 수행자들이 있었다. 이들 가운데는 불교에서 육사외도(六師外道)라고 부르는 6명의 사상가가 대표적인 수행자들이었다. 이 6명의 사상가들은 쾌락주의자, 회의주의자, 상대주의자, 고행주의자 등이 있었다. 싯다르타는 2명의 유명한 수행자를 만났는데, 최초로 만난 사람은 무소유자인 카말라(Alara Kalama)였고, 다음은 웃다카. 라마풋다(Uddaka-Ramaputta)로 잡념을 버리고 이어 잡념뿐만 아니라 순수사상에 도달했다는 것도 떨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도달해서는 이 염상(念想)을 부정한 비상(非相)의 상태, 그리고 이 비상을 역시 부정한 비비상(非非相)의 경지를 추구하는 정신통일의 수행자로 수정주의로 분류된다.
싯다르타는 이들의 사상을 단기간에 깨우쳤으나 만족하지 목하고 수정주의 대신에 고행주의의 수행에 들어갔다. 고타마는 당시 저명한 수행자들이 추구하는 하늘에 태어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선정주의적인 수행이 아니라 정신의 자유를 얻기 위한 육체적 고행을 택한 것이다. 선정주의는 육체의 활동을 정지시키고 정신적 세계에 들어가 정신적 자유를 얻는 방법인데 정신통일의 상태에 들기 위해서는 항상 정신통일의 경지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수단이 목적이 되는 모순이 생기게 된다. 고행수행은 단신, 감식, 호흡조절 등 여러 신체적 활동의 제한을 통해서 정신을 수수하게 하는 방법이다. 고행은 여러 종류가 있는데 최장 단식이 5년 2개월 28이란 것이다. 이 기간은 하루에 겨자씨 한 알 정도의 음식과 물 한컵으로 지탱하는 것이다.
싯다르타는 고행을 위해 마가다(Magadha)국 왕사성 북쪽에 있는 우루웰라(Uruvela)마을의 네란자라(Neranjara)강 근처의 숲속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현재의 보드가야(Bodhgaya) 동쪽으로 고행림(苦行林)으로 불린다. 고행림은 의역으로 원래는 범어의 시타바나(Sitavana)를 음역하여 시다림(尸陀林)으로 부르는데 ‘차가운(寒)’이라는 의미다. 산스크리트어 바나(vana)는 숲(林)이라는 뜻이라서 한림(寒林)이라고 번역하기도 한다. 시다림은 우리나라의 공동묘지와 같지만 대신 시신이 매장되지 않고 그대로 놓인다는 것이 다르다. 당시 인도는 매장이 아니라 조장(鳥葬) 풍습이라서 시신을 버렸기 때문에 시다림에는 사람의 시신으로 가득했다.
이 당시 싯다르타는 아버지가 아들을 염려하여 보낸 5명과 함께 수행을 하고 있었다. 출가해서 거의 6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5년 이상을 고행한 것이다. 싯다르타는 성을 나올 때 수행했던 5명의 시자와 몸이 수척하고 마음이 피로할 정도로 수행에 정진했으나 해탈의 목적을 이울 수가 없었다. 이에 고타마는 독창적인 수행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중도(中道主義)다. 중도수행법은 진리가 극단에 편중되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극단적 수행에서 찾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심신의 허탈상태에서 강물에서 목욕을 하고 소를 몰고 그곳을 지나던 마을의 수자타(Sujata)라는 처녀가 준 우유죽을 먹고 기력을 회복했다. 함께 수행하던 5명의 수행자들은 이를 보고 고타마에게 실망하여 그의 곁을 떠나 바라나시(Varanasi)라는 도시를 향해 떠났다. 수행자가 강물에 목욕을 하고 여인으로부터 우유죽까지 받아먹는 것은 그들에게는 타락이었다. 그러나 고행주의는 욕심의 근본을 육체로 보고 이를 벗어나기 위해 육체적 고행을 하는 것이었는데, 그렇게 되면 육체의 소멸 즉 죽음이 아니고서는 정신적 자유가 불가능하다는 모순이 따른다. 따라서 고타마는 당시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에 입각한 물심이원론(物心二元論)적 입장이었는데, 고타마는 이러한 수행방법과 우주론적인 종교관도 버리고 독자적인 수행에 들어갔다.
그는 네란자라강 건너 서쪽 언덕의 핍팔라(pippala, 菩提樹)나무아래에서 독자 수행에 들어갔다. 이때부터 사문 고타마를 보살이라고 부른다. 여기에서 그는 모든 만물이 하나의 예외도 없이 형성될 수 있는 조건(因緣)에 의해 이루어 진다는 연기(緣起)의 이치를 찾았다. 또한 인간들이 끝없이 고통 속에 살아가는 것은 인간의 마음 깊이 깃들어 있는 번뇌의 뿌리로부터 비롯된다는 것과 현세의 집착을 버릴 때 번뇌를 벗어나 윤회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현세의 모든 괴로움은 이러한 진리를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알았다. 이제 수행자 고타마는 29살의 나이에 출가하여 6년간의 고행 끝에 그이 나이 35살에 부처(Buddha) 즉 깨달은 자가 된 것이다.
이러한 수행과정에서 악마의 왕(Mara papiyas 魔王 波旬)으로부터 갖가지 유혹과 협박을 받았지만 오히려 오른 손으로 땅을 가리키자 대지가 크게 진동하였고 마왕의 무리들이 사라졌다. 보살이 오른 손으로 땅을 가리키는 모습은 석가모니의 대표적 모습으로 정해졌다.
석가모니는 자신의 깨들음을 전해주기 위해 전에 함게 수행했던 5명을 찾아 바라나시(Baranasi)의 녹야원(鹿野苑)으로 가서 그들을 상대로 최초의 설법을 시작했는데 이를 초전법륜(初轉法輪)으로 부른다. 석가모니는 이들에게 고(苦)와 낙(樂)의 양극단을 떠나 중도(中道)를 취할 것과 고(苦), 집(集), 멸(滅), 도(道)의 4성제(四聖諦)의 법문으로 그들을 깨우쳤다.
초전법륜이 중요한 것은 최초의 설법행위 즉 석가모니가 설법을 하지 않았다면 불교는 이 세상에 자취가 없었을 것이며 우리가 불교와 접할 수 있는 기회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초전법륜은 탄생, 성도, 입멸과 함께 불교의 4대 근 사건이며 초전법륜이 행해졌던 녹야원은 석가모니가 태어난 룸비니동산, 성도한 보드가야 그리고 열반한 쿠쉬나가라(Kusinagara)와 함께 불교의 4대 유적지(성지) 중의 하나이다.
석가모니와 이 5명의 제자들을 토대로 하여 최초의 불교의 출가교단인 승가(僧伽)가 성립되어 부처(佛)와 진리(法) 출가수행자의 공동체인 승가라는 불교교단을 구성하는 3가지 보배 즉 3보(三寶)가 갖추어져 불교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승가(僧迦)는 산스크리트어의 상가(संघ, saṃgha)의 음역으로서 중(衆)·화합중(和合衆)으로 화합(和合: 조화롭다 · 함께 한다)이라는 뜻이다. 위키백과사전에 따르면 승가는 본래 가나(gana)라고도 하며, 집단이라는 뜻으로 석존 당시에는 동업조합(同業組合)으로서의 길드(guild)와 경제 단체나 어떤 종류의 종교 단체를 가리킨 것이었으며, 동일 목적으로 모인 사람들의 공동체로서, 그 성원은 평등하며 동일한 규범에 복종하고 그 가맹은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다. 영문판 위키피디아(http://en.wikipedia.org/wiki/Ratana_Sutta)s,s는 승가를 성스런 ‘성자공동체(the noble Community (ariya sangha)“로 정의한다. 이러한 상가는 초기에는 비구 즉, 걸식하는 승려들의 승단(僧團)을 의미했다. 또한 이 상가는 붓다로부터 내려져 결집과정에서 율장으로 성립된 계율을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붓다는 생존 시에 상가의 지도자였지만 상가의 안내자는 계율이었다. 이러한 상가가 현재는 비구와 비구니 증 승려들의 집단으로 이어진 것이다. 이 상가는 미얀마, 태국, 스리랑카, 캄보디아, 라오스 그리고 치타공(벵갈) 등에서 그 원래의 형태대로 지금도 존재하고 있다.
불교가 탄생하면서 녹야원 근처에서 인생을 비관하고 번민하던 야사(Yasa, 耶舍)라는 청년과 야사의 권유로 그의 부모와 아내가 석가모니에게 귀의했는데 이들이 최초의 남자신도인 우바새(upasaka優婆塞)와 우바이(upasika, 優婆夷)다. 산스크리트 upāsaka는 “가까이서 모시는 남자라는 뜻이고 upāsikā는 “가까이서 모시는 여자라는 의미로 각각 남성 불교신자와 여성신자를 의미한다. 또한 야사의 친구 50여명도 제자로 들어와 60여명으로 불었고 석가모니는 이들에게 진리를 세상에 전하기 위해 전도의 길을 떠나도록 권하는 전도선언을 하였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전도를 권한 후에 당시 인도문화의 중심지인 마가다(Magadha)국의 왕사성(Rajagrha, 王舍城)으로 가는 도중에 마가다국 빔비사라(Bimbisara)왕의 존경을 받던 바라문 가섭(Kassapa, 伽葉) 3형제와 그의 1000명의 제자들을 받게 되었다. 이로부터 불교는 왕사성을 중심으로 교세가 크게 확장하게 되었고, 마가다국왕도 신하들과 함께 재가신자가 되었으며 부처가 머물면서 가르칠 수 있는 사원(寺院)을 지어 증정했는데 이것이 불교사원의 시초가 되는 죽림정사(竹林精舍)다. 왕사성에서 석가모니는 가섭형제와 함께 사리불(Sariputta, 舍利佛)과 목건련(Moggallana, 目楗連)등 뛰어난 10대 제자들을 얻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이어 고향인 카필라성으로 가서 부왕을 비롯한 친척과 아우 난다(Nanda), 외아들 라훌라, 사촌동생 아난다(Ananda), 데바다타(Devadatta), 아누롯다(Anuruddha)와 석가족 사람들이 불자가 되었다. 또한 이모 마하빠자빠띠와 부인 아쇼다라를 비롯한 사카족 여인들이 출가하여 비구니(bhikkuni 比丘尼)승단이 이루어 지게 되었다.
비구니는 팔리어 비크슈니(bhiksuni), 비쿠니(bhikkhuni)의 음역으로 걸사(乞士) 또는 번뇌(煩惱)를 깬 사람으로 번역된다. 출가득도하여 구족계(具足戒) 348계를 받은 여승(女僧)을 뜻한다. 비구(比丘)는 팔리어 비쿠(bhikkhu)의 음역으로서, 250계를 받은 남승(男僧)을 뜻한다. 산스크리트어로 비구(比丘)는 빅쿠(bhiksu)의 음역, 비구니(比丘尼)는 빅쿠니(bhiksuni)를 음역한 말이기도 한다. 또한 남자 재가불자(在家佛子)는 우바새(優婆塞)로 산스크리트어 파사카(upasaka)를 우바이(優婆夷)는 역시 산스크리트어 우파시카(upasika)를 음역한 말로 여자 재가불자를 가리킨다.
한편 코살라국의 수도인 사위성(Savatthi, 舍衛城)의 큰 부호 수다타(Sudatta, 須達多)가 기원정사(祇園精舍)를 지어 승단에 기증해 석가모니는 죽림정사와 기원정사를 중심으로 교화활동을 널리 펼 수 있었다. 이를 계기로 다른 교단들에서는 차별하던 여성들도 불문에 들어와 비구니교단이 탄생하게 되었다. 석가모니에게는 여성뿐만 아니라 당시 인도의 4성계급 가운데 비천한 노비신분도 평등하게 대우했다. 예를 들면 아난다가 우물가에서 물을 깃던 노비신분의 마탕가(matanga, 摩登伽)족 처녀에 물을 요청하자, 그녀가 "비천한 노비의 신분이기 때문에 어렵다"고 하자, 아난다는 “인간은 모두 평등하다. 신분이 귀천을 만들었지 본래 사람에게는 귀천이 없다. 부처님의 법은 귀천과 상하를 구별하지 않는다.”고 답했다. 이에 감복한 마탕가는 기원정사로 달려가 석가모니로부터 출가의 허락을 받고 신성한 사제가 되었다.
석가모니는 그러나 만년에 몇 가지 불행한 일을 겪어야 했다. 첫째는 코살라국의 쁘라세나지뜨왕의 아들 비두답바(Vidudabba)가 즉위하자 자신이 왕자시절에 사카족으로부터 받은 수모를 갚기위해 카필라국을 침공해 카필라국이 멸망한 것이다. 이에 3 번까지는 석가모니가 길에서 앉아있자 회군했으나 4번째는 석가모니도 인과응보로 생각하고 군대가 지나는 길에 나가지 않았다. 둘째는 사촌동생인 데바다타(Devadatta)가 교단을 분열시킨 일이다. 데바다타는 마가다국의 아자타사투루(Ajatasatru)를 부추겨 부왕인 빔비사라를 추출케 하였고 자신이 불교교단의 제1인자가 되려고 계획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수행자는 평생 누더기 옷을 입고 걸식을 하면서 고기를 먹지 말고 숲에서 살면서 나무아래 앉아서 수행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석가모니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석가모니를 위해하려하고 배반했던 것이다. 셋째는 아들인 라훌라와 두 제자인 사리불과 목건련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석가모니는 어느날 " ...지금 여래의 몸은 온통 주름 투성이다. ...지금 여래의 나이는 80이 넘었구나(증일아함경 제18권)라고 시자 아난에게 말했고 그해 입멸한 것이다. 석가모니는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유훈을 남겼다.
아난다여, 나는 이제 늘고 지쳤다. 인생의 기나긴 길을 걸어와 노령에 이르렀다. 여든이 되니 이 몸을 움직이는 것이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끈의 도움으로 간신히 움직이는 것과 같구나. 세상은 이처럼 덧없는 것이다.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 自燈明 法燈明
스스로에 의지하고 진리에 의지하라 自歸依 法歸依 (대반열반경)
그러면 석가모니는 임종에 앞서 최후로 무슨 말을 유훈으로 남겼을까?
"모든 것은 변하여 간다 . 게으르지 말고 힘써 정진해 나아가라".(장아함경)
석가모니는 80세에 라즈기르(Rajgir, 王舍城)에서 바이사리(Vaisali)를 거쳐 이미 코살라국에 멸망해버린 고향 카필라 바투스쪽으로 가던중 파바(Pava)에 도착해 춘다(Cunda)라는 대장장이의 공양을 받고 식중동에 걸려 쿠시나가라(Kusinagara)국의 살라(Sala)나무 숲으로 가서 사라쌍수(沙羅雙樹)아래에서 제자들에게 유훈을 남긴 후에 눈을 감았다. 불전에서는 이것을 반열반(般涅槃, )이라고 하는데 완전한 열반에 든다는 뜻이며 우리나라에서는 그냥 열반이라고 한다. 涅槃은 산스크리트어의 니르바나(nirvāṇa, 팔리어는 nibbāna)를 음역한 것으로 본래 뜻은 '소멸' 또는 '불어 끔'인데, 여기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진(滅盡)하여 깨달음의 지혜인 보리(菩提)를 완성한 경지'를 의미하게 되었다.
석가모니는 성도한지 45년이 되는 80세에 중인도 각지를 순회 여행하던 중 자신의 수명이 다 되었음을 자각하고 태어난 고향을 향해 최후의 여행을 떠나 가던중 한 신자의 공양을 받고 이것은 위대한 죽음이라는 의미이다. 석가모니의 마지막 유훈은 "모든 것은 덧없이 변해간다. 게으름피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라" 그리고 석가모니는 선정에 든 채로 열반에 들었다. BC 485년 2월 15일이었다. 석가모니의 입멸연대에 대해서도 여러 주장들이 있다. 남방불교국가에서는 기원전 543년으로 보는가 하면 기원전 486, 386, 혹은 483년 등 다양한데 우리나라와 인도는 기원전 544년을 잡는다.
석가모니가 입멸하자 제자들이 유체(遺體)를 인도의 장법에 따라 다비(茶毘, 화장)했고, 이때 나온 유골이 사리(舍利)이다. 이를 진신사리(眞身舍利) 또는 육신사리(肉身舍利)라고 한다. 사리는 산스크리트어 Sarira의 음역으로 원래는 신체라는 뜻이나 불교에서는 석존의 신골을 뜻하며 불교도들에게 가장 성스러운 예배대상이 된다. 사리는 불사리(佛舍利)와 법사리(法舍利)로 나뉘는데, 우리나라는 현재 승려의 화장골까지도 합하여 넓은 의미에서 사리라고 통칭한다. 법사리란 석존의 정신적 유산인 불경(佛經)을 비롯하여 치아(佛齒), 손톱(佛爪), 머리카락(佛髮), 석존 재세시에 사용한 옷, 바리때(鉢), 지팡이들도 포함하여 부르는 말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자의 사리를 봉안하고 예배하기 위해 건립된 축조물이 탑)이다. 탑파는 산스크리트어 스투파(stupa)를 음역하여 솔도파(塔婆, 줄여서 탑) 또는 팔리어 투파(thupa)를 음역한 것이다.
가장 오래된 사리용기는 피프라봐(Piprahwa)탑과 바이사리(Vaisali)의 옛 탑지에서 발견된 사리용기인데, 둥근 공모양의 합(盒)이며 뚜껑의 꼭대기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피프라봐탑의 사리용기는 영국인 펫페(W.Peppe)가 1898년 발굴조사한 탑지에서 발견된 것과 1972년 인도 고고국(考古局)이 발굴한 2개의 사리용기를 더하여 탑 안의 상, 중, 하 3단에서 물고기 모양의 손잡이가 달린 사리용기까지 합쳐 총 8개의 사리용기가 발견되었다. 그 가운데 중단의 것은 큰 석관(石棺) 속에 5개가 나란히 안치되어 있었는데 그 중의 한 개에는 석가족의 불(세존)의 유골임을 새긴 브라후미(Brahmi)문자로 된 각명(刻銘)이 있으며, 이들은 불사리용기의 원조형(元祖形)을 고찰하는데 많은 시사를 주고 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태국왕에게도 전해지고 일부는 일본에 분여되어 나고야의 각왕산(覺王山) 일태사(日泰寺)에 봉안되어 있다.
석가모니는 당시뿐만 아니라 현재 전 인류의 성자로 추앙되고 있다. 석가모니가 직접 작성하거나 그의 말을 직접 받아서 기록한 것은 없다. 그의 말이라고 전해지는 것은 그의 사후에 제자들의 암송을 토대로 정리된 것들이다. 그렇다면 석가모니의 존재와 그의 말이 어느 정도의 역사성을 갖는가. 캐리덜스(M. Carrithers)는 "탄생, 성장, 출가, 수행, 깨달음과 해탈, 설법, 열반은 사실임에 틀림없다" 고 말한바 있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이에 동의하는 것처럼 석가모니의 유골의 발견과 과학적 고증은 석가모니의 역사적 사실성을 확인해주고 있다. 반면에 앙드레 바로우(Andre Bareau)와 같은 학자들은 팔리어, 티베트어, 한문을 된 초기불교경전에 나타난 동일한 이야기에 대한 다른 판본(板本)들을 비교 연구한 결과 붓다 전기에서 잘 알려진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진실성에 대해 회의적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까지 살펴본 석가모니의 전기의 모든 내용을 역사적 사실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비현실적이고 신화적 부분은 당연히 석가모니를 신격화하여 문학적으로 윤색한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편할 것이다. 그렇다고 현실적인 내용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현실적 내용이라도 과장되고 각색되었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영웅이나 성자로 추앙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그런 특성들을 갖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가모니의 이야기는 현실적 또는 사실적 이야기와 허구적 또는 전설적 내용을 구별하기가 쉽다. 불교에서 스스로 이를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기독교가 주장하는 예수이야기와 다른 점이다. 석가모니를 신격화한 이야기들은 석가모니의 신적인 위치까지 부각시켜 그에 대한 믿음의 효과를 상승시키려는 의도나 또는 그러한 이야기를 만든 사람의 불심에 의한 소산일 것이다.
예를 들면 석가모니의 생애 중에서 도솔천에서 내려온 것과 마야부인의 모태 속으로 들어간 것, 탄생, 출가, 마왕제압, 성도, 설법, 열반의 8가지 특징들은 특히 신화적요소가 섞여 있다. 따라서 역사적 사실도 추정적인 것이 많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구성은 석가모니가 이 세상에 태어난 배경을 통해 불교정신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여덟가지 사건을 8개 장면으로 압축·묘사한 그림을 팔상도(八相圖)라고 하는데 아래와 같다.
1.도솔내의상(兜率來儀相) :도솔천에서 흰 코끼리를 타고 북인도 카필라궁을 향하는 모습
2.비람강생상(毘藍降生相) : 룸비니동산에서 마야부인의 몸을 통해 태어나는 모습, 오른쪽 엽구리로 출생
3.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 : 싯다르타 태자가 성문을 나가 노인과 병자, 시체를 보고 북문에서 출가한 사문을 만나 출가를 결심하는 모습
4.유성출가상(諭城出家相) : 29세에 한밤중에 카필라밧투성을 떠나 출가하는 모습
5.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 : 출가수행자로 히말라야 산속에서 6년간 공행 한뒤에 qekrkdi의 보리수 아래에서 선정에 드는 모습
6.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 용맹전정진하여 보리수 아래서 마구니의 항복을 받고 큰 깨달음의 경지에 드는 모습
7.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 성불한 뒤에 500리쯤 떨어진 녹야원으로 가서 처음으로 5명의 수행자에게 설법하여 그들을 귀의 시키는 모습
8.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 제행무상과 용맹정진할 것을 당부하고 사라쌍수 아래에서 열반에 드는 모습
기독교는 구약의 하나님을 비롯한 여러 내용들과 예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나님의 영감 또는 계시라면서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 단정한다. 또한 예수에 관해서도 성령에 의한 동정녀 잉태, 부활, 그리고 예수가 행했다는 기적 등 비현실적인 내용을 사실로 믿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불교는 비현실적인 이야기는 물론 현실적이라도 개연성이 약한 이야기에 대해 융통적으로 대한다. 이런 점에서 불교는 어떤 내용의 틀에 우리의 사고와 이해를 마자추어야 하는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러나 신화적인 이야기들이 사실처럼 전파되고 반박되면서 사실과 신화가 뒤엉키고, 또한 본질이 변화되면서 석가모니가 아닌 스님들이 불교의 주인이 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3보에 관한 것이다.
우리나라 불교의 모든 의식에서 빠지지 않는 것이 삼보 즉 불(부처), 법(다르마), 승(승가)에 귀의(歸依)의례로 삼귀의(三歸依)라는 것이 있다. 불법승 삼보에 헌신을 다짐 하는 이 의식에서 우리나라만 유독 “스님(僧)에 대한 귀의”를 나타내면서 “거룩한 스님께 귀의 합니다”라고 말한다. “귀의한다” 는 팔리어 ‘사라나 가마나(sarana-gamana)’에서 온 의미다. 귀의의 사전적 의미는 돌아와 섬겨 따르고, 순종하면서 의지하고 맡긴다는 뜻이다.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이라면 이미 열반에 든 부처에 대해, 그리고 그가 깨달아 가르친 진리에 대한 귀의는 당연한 일이다. 그
러나 귀의의 대상이 현존하는 “사람”이라면 웬지 이상하다. 즉 그 대상이 스님이라면 스님에게 돌아가 스님을 따르고 순종하면서 의지하고 자신을 맡긴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현재 우리나라 불교는 바로 귀의 대상을 스님으로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불교예절에서 상황에 따라 스님에게 반배에서 3배까지의 예를 올리도록 하고 있다. 물론 “예”는 소중하다. 그러나 그 예가 인위적이고 과도하면 의도적이고 조작적이다. 특히 불교의 기본 의식중의 하나가 불교의 본질을 이탈하면서 왜곡된다면 불교의 훼손이다. “3귀의”의 승은 살아있는 현재 존재하는 스님이 아니라 스님 또는 신자들의 화합공동체로서 귀의한다는 것은 바로 우리 각자도 이 공동체의 가치와 계율 즉 부처임의 르침에 따라 수행하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존하는 스님들에 귀하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분명하다. 한국불교에서 스님들이 이 부분을 명확히 하지 않는다면 모든 수행이나 강론이 석가모니의 정신과 가르침을 나타내기는 어려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