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6
7월4일 [연중 제14주간 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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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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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p0vuTwxQk2Q (박남준 미카엘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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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죽음의 문화에 맞서>
완전히 죽었던 회당장 딸의 소생 사화는 예수님의 절친 라자로의 소생 사화와 더불어 몇 안 되는 ‘완전 소생 사화’ 중의 하나입니다.
이러한 소생 사화는 예수님께서 죽음의 세력조차 다스리는 전지전능하신 메시아이심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이 있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 주변을 돌아보면 여기저기 죽음의 문화가 창궐하고 있습니다.
어떤 청소년은 분명 숨을 쉬면서 살아있기는 한데 진정으로 살아있지 않습니다. 어떤 청년은 외관상으로 멀쩡히 살아있지만 이미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어떤 노인은 집에 누워있으나 산에 누워있으나 별반 다를 바 없는 죽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오직 하느님 손에 달린 너무나 고귀한 생명을 결정권도 없는 본인 스스로 좌지우지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가끔 저녁 산보 삼아 한강으로 나가는데 마포대교를 지나갈 때마다 얼마나 제 마음이 우울해지고 씁쓸해지는지 모릅니다.
최근 통계에 따르면 연간 약 1만5천여 명이 한강 위에 놓인 수많은 다리 위에서 투신한답니다. 그 가운데 천명 이상이 마포대교에서 뛰어내려 1위를 달리고 있답니다. 하도 많은 사람이 뛰어내리니 다리 밑에는 구조대원들이 상시 대기하고 있습니다.
한류 드라마에 매료된 수많은 외국인이 한국을 평생 한 번 꼭 와보고 싶은 나라, 정말 잘 사는 환상적인 나라로 부러워하고 있는데, 이런 우리나라에 삶의 중압감을 견디다 못한 적극적 자살 시도자가 하루에 70명이 넘습니다.
한 사람이 자살하거나 시도하면 본인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가족들이며 목격자들이며 구조대원들이며 의료인들이며 수많은 사람이 심각한 정신질환을 초래할 수 있는 충격을 입습니다.
세계보건기구는 자살의 원인에 대해서 무려 1000여 가지로 정리해 놓았습니다. 각 원인에 대해 다양하고 심도 깊은 연구와 조사가 있었는데 그 결과는 두 개의 원인으로 압축되었습니다.
바로 절망과 이분법적 사고입니다. 절망이란 도저히 희망이 없다는 극한의 좌절이며 이분법적 사고란 사느냐 죽느냐 흑백논리에 따른 극단적인 결론입니다.
우리가 꼭 기억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자살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우리와 다를 바 없이 자신의 인생을 사랑했으며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나름대로 희망도 있고 행복도 있었으며 소중한 가치들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더 이상 스스로의 해결책을 찾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회가 자신을 절대 구원해 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때 결국 자살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합심해서 이 거대한 죽음의 문화에 맞서야겠습니다. 극단적 물질만능주의와 천박한 자본주의, 성공지상주의와 배금주의의 결과인 죽음의 문화를 극복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디선가에서 세상에서 가장 외롭게 최후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찾아 나서야겠습니다. 살아있어도 진정 살아있지 못한 청소년들,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는 청년들이 어디 있는지 잘 살펴봐야겠습니다.
더 이상 사는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느끼는 노인들의 리스트를 작성해야겠습니다. 그분들도 너무나 소중한 우리들의 이웃이며, 주님 보시기에 너무나 사랑스런 자녀들이라는 것을 그분들에게 외쳐야겠습니다.
자신도 모르게 서서히 죽음의 세계로 건너가고 있는 그분들의 손을 잡고 다시 한 번 삶으로 건너오도록 일으켜 세워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부르시는 마지막 순간까지 힘들어도 삶을 견뎌내고 달릴 곳을 끝까지 잘 달릴 수 있도록 도와드려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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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저절로?
저희 집은 시골의 몇 채 안 되게 흩어져있는 집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또한, 우리 동네는 미군 비행장과 냇가 때문에 고립되어 있어서 제가 중학교 2학년 때까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밥을 하거나 방을 따뜻하게 하고, 혹은 따뜻한 물을 데우기 위해서는 군불을 때야만 했습니다. 연탄불을 갈기 위해서 방과 후에 시간 맞춰 돌아와야 했습니다. 무엇보다 부족함을 느꼈던 것은 텔레비전이었습니다. 학교에서는 온통 아이들이 텔레비전 본 이야기를 하는데 저희는 할 이야기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학교 갔다 왔더니 안테나가 설치되고 있었습니다. 우리 동네에서 우리 집이 가장 먼저 텔레비전을 사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기가 안 들어오는데 어떻게 텔레비전을 보느냐고요? 자동차 배터리로 연결해서 보았습니다. 지금은 찾아보기 힘든 크기인 9인치 TV였습니다.
텔레비전이 너무 커버리면 배터리 소비량이 많아서 오래 볼 수가 없어서 작은 것이 유리했습니다. 그때 재미있게 온 동네 사람들이 수박을 잘라놓고 모깃불을 피워놓고 마루에 앉아 9인치 TV에 머리를 들이밀고 수사반장이나 전설의 고향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큰 문제는 중요한 순간에 배터리가 다 떨어져 버릴 때입니다. 건전지가 다 끝나갈 즈음에 TV 화면이 아래위서부터 조금씩 검게 자신의 영역을 넓혀옵니다. 그러다가 배터리가 다 달아버리면 화면이 깨져버려 더 이상 볼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수사반장이나 전설의 고향을 하기 하루 이틀 전에 이러한 현상이 보이면 배터리가 조금 남아있더라도 그것을 자전거에 싣고 전지 충전하는 곳으로 가져가야 합니다. 물론 대부분 아버지가 충전해 오시지만, 아버지가 바쁠 때는 저희가 자전거로 충전해 와야 했습니다.
배터리는 매우 무거워서 그것을 아이들인 저희들이 자전거 뒤에 실으면 앞바퀴가 들릴 지경이 됩니다. 건전지를 충전하는 데는 하루 정도 걸리기 때문에 다음날 다시 찾으러 가야 합니다.
한 번은 추운 겨울에 충전된 배터리를 찾아오다가 눈길에 넘어져서 건전지가 깨져버린 일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 있는 액체들이 줄줄 새어나왔습니다. 혼날 줄 알았는데 다친 데 없느냐는 어머니의 말씀이 고마웠습니다.
그러던 중 드디어 마을에 전기가 들어온다는 소식이 있었고, 전봇대가 세워지고 각 방에 전기 콘센트라는 것이 만들어졌습니다. 아주 작은 백열등이 방에서 켜졌을 때 너무 밝아서 ‘이런 세상이 있구나!’ 하며 감탄을 연발했습니다.
다시 배터리를 충전시키러 갈 필요도 없었고, TV는 곧 컬러로 바뀌었습니다. 이런 충격들은 안 겪어본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그날 온 동네 사람이 돼지 한 마리를 잡아서 잔치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가장 먼저 전기밥솥을 사서 쌀을 넣고 물을 붓고 정말 밥이 되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함께 지켜보았습니다. 뚜껑의 작은 구멍 사이로 김이 솟아오를 때는 벅차오르는 감정을 짓누를 수 없었고, 다 되었다는 불이 들어오고 다 된 밥을 확인할 때 우리 가족 모두는 손뼉을 치며 감격해 하였습니다.
지금은 전기를 너무 편하고 당연하게 사용하는 것 같습니다. 너무도 당연해서 에너지가 저절로 생성되는 것처럼 낭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저의 어린 시절 경험은 저에게 어떤 에너지도 그 원천이 있음을 가르쳐주었습니다. 불을 때 방을 따뜻하게 하기 위해서는 논에서 짚을 걷어 와야 했고, 양초가 떨어져 밤에 불을 밝힐 수가 없을 때는 옆집에서 양초를 빌려오거나 한 시간을 걸어 나가서 가게에 가서 초를 사와야 했습니다.
물론 배터리를 충전시키려면 그것을 충전할 수 있는 곳에 가서 일정한 시간 동안 맡겨 두어야 충전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학교에서 배우면서는 결국 이 모든 에너지들이 태양 하나로부터 오고 있음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물론 온 우주에 존재하는 에너지의 한 원천이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과학자들은 이상한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에너지가 저절로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열역학 제1 법칙은 에너지의 보존법칙입니다. 에너지는 형태만 변화될 뿐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나무를 불에 태운다고 할 때, 나무 안에 있던 에너지는 빛의 에너지, 열의 에너지, 소리의 에너지 등으로 바뀝니다. 결국, 나무 안에 있던 에너지들이 그 형태만 바뀌는 것이지 에너지 자체는 늘어나거나 줄어들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에너지 보존의 법칙임에도 불구하고 세상이 시작될 때에 에너지가 저절로 생겨났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저절로 물질이 생겨났고, 저절로 에너지가 생겼고, 저절로 시간과 공간이 생겼고, 저절로 물질에서 생명체가 생겼고, 저절로 생명체가 진화해서 인간이 만들어졌다는 것입니다. 과학에서 ‘저절로’, 혹은 ‘우연히’가 빠지면 설명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어집니다.
저의 시골집에서 클 때의 경험으로도 에너지는 절대로 저절로 생겨날 수 없었습니다. 에너지의 원천에서 그것을 가져다 써야 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그 원천이 있어야 합당합니다. 에너지의 원천은 에너지 자체이고, 존재하는 것은 원천은 존재 자체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혈병 환자와 죽은 아이를 살려내십니다. 12년 동안 고생했던 하혈병 환자는 결국 예수님의 옷자락에 손을 댐으로써 병이 고쳐집니다. 피는 생명이고 에너지입니다. 그 에너지가 떨어졌을 때는 예수님께 가까이 가야 합니다. 배터리는 저절로 충전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살렸다고 말씀하십니다. 오직 그리스도로부터만 모든 에너지가 온다는 것을 믿어야 그분께 다가갈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야이로에게도 딸이 죽었지만 믿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다 방전된 밧데리도 다시 충전해 주실 수 있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모든 삶의 에너지가 그리스도로부터 온다는 것을 믿고 있을까요? 만약 진정으로 믿고 있다면, 평일미사에 빈자리가 없을 것이고 평상시에도 성체조배 하는 신자들로 성당에 사람이 들끓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도 집에 앉아있어도 삶의 에너지가 저절로 충전된다고 느끼는 것은 아닐까요?
며칠 전에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그 분은 큰 집에 살고 계시다가 아직 전셋집에서 사는 아들 집으로 3년 정도만 살기 위해서 들어가셨었습니다. 그런데 그 집 며느리는 어머니를 봉양하지 않고 밥도 제대로 안 해주고 교회에 가서 살거나 친구를 만나고 밤늦게나 들어왔습니다.
어머니가 생선을 좋아하시는 것을 알면서도 집에 냄새가 밴다고 해 주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건강이 매우 안 좋아지셔서 다시 살던 곳으로 돌아오셨습니다. 사실 그 할머니는 3년 동안 살고 그 아들에게 새집을 마련해 주려는 마음이 있었다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 마음이 없어지신 것입니다. 며느리는 굴러온 복을 차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이 복이 어디서 오는지 온전히 깨닫고 있지는 않을 수 있습니다. 만약 깨닫는다면 하혈병 여인과 같이 힘이 빠져나갈 때, 예수님께 바로 달려오고, 야이로처럼 집에 안 좋은 일이 있을 때 바로 예수님께 달려가서 매달릴 것입니다. 그러나 평상시 성당은 신자들은 많지만 비어있는 시간이 매우 많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인 오프라 윈프리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녀는 9살 때 사촌오빠에게 강간당하고, 14세에 미혼모가 되었고 그 아이까지 죽었으며, 결국엔 마약에 빠져 살다가 철창신세까지 졌던 여인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녀가 말 한 마디만 하면 몇 백억이 모이는 것은 일도 아닌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녀가 다시 삶의 희망을 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성경을 읽고 나서부터였습니다.
성경의 모세처럼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모세도 우여곡절 끝에 80세가 되어서야 자신의 소명을 깨닫습니다. 그녀도 과거는 미래의 소명을 위한 것이라 생각하고 자신의 소명을 살아보겠다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죽음에 생명을, 절망에 희망을, 무기력증에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저절로 생겨나는 에너지는 없습니다. 내 배터리가 방전되어간다고 느낀다면 빨리 충전하러 그리스도께로 오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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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9,18-26 : 예수의 옷에 손을 댄 여자, 살아난 회당장의 딸
오늘 복음에서는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는 것과 12년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던 부인의 치유 기적의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다. 죽은 이에게는 생명이 돌아오고 아픈 사람은 온전하게 된다. 회당장이 예수님께 청하고 있다. 회당장은 율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백성, 그 딸을 위해 기도한다. 율법과 예언서는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들을 양육하였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소녀를 살리신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18절) 회당장은 갑자기 예수님께 나타나 예수님께서 곧 가 주실 것과 딸에게 손을 얹어주실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시리아인 나아만이 엘리사 예언자에 대해 “나는 당연히 그가 나에게 나와 서서, 주 그의 하느님의 이름을 부르며 병든 곳 위에 손을 흔들어 이 나병을 고쳐 주려니 생각하였다.”(2열왕 5,11) 하였다. 신앙이 없는 사람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법이다.
이때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주님께서 걸어가실 때 그분께 다가간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소녀에게 가시는 길에 또 한 여인을 치유하셨다. 여자는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러나 떳떳하게 주님께 다가가지 못하였다. 모세의 율법에 따르면 여인의 지속적인 하혈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레위 15,25 참조) 그래서 여인은 자신을 감추었다. 여인은 모습을 숨긴 채 있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22절)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길이 여인에게 가도록 여인을 내세우신다. 주님께서는 그 여인에게서 두려움을 없애주셨고, 그 여인의 믿음을 모든 이에게 본보기로 세우신다. 그러시면서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셨다. 이렇게 이스라엘을 위해 준비된 것을 이제는 평범한 이민족 사람들이 그것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회당장의 딸은 유대 민족을 상징하고, 여인은 다른 민족들의 교회를 상징한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24절) 예수님께서는 회당장의 집에 가셔서 죽은 소녀를 보신다. 믿음 없는 마음을 믿음으로 데려오시기 위해, 회당장의 딸이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님을 비웃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유대의 지도자들과 구경꾼들을 본다. 그들은 이 위대한 은총이신 주님까지도 비웃고 무시했다.
소녀는 예수님께서 살려 주신다. 이 소녀의 모습은 우리 구원의 신비 전체를 예시한다고 보아야 한다. 루카 복음에는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리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인이 성령을 받아 생명으로 돌아올 때, 주님께서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않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않으면, 너희는 생명을 얻지 못한다.”(요한 6,53)고 하신 거룩한 빵을 먹어야 한다는 가르침도 받게 되어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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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야이로’ 라는 어떤 회당장의 딸을 살리시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를 고치신 이야기는, “예수님은 인간에 대한 생살여탈권을 가지고 계신 분, 즉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고, 병이라는 것을 지배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이고,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권한’이라는 것은 무엇인가를 할 권한과 하지 않을 권한을 모두 포함합니다. 그래서 “주님을 믿고 간절하게 청하면 반드시 주님께서 들어 주신다.”라는 말은 옳지 않고,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말이 들어가야 합니다. “우리가 주님에 대한 믿음을 갖고서 어떤 일을 간절하게 청할 때, 주님께서도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원하신다면, 그 일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나는 간절하게 원하지만, 주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이라면? 반대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인데 내가 원하지 않는다면? 바오로 사도는 평생 어떤 불치병을 앓았습니다.(2코린 12,7) 그는 그 병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하게 청했습니다.(2코린 12,8) (바오로 사도의 믿음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바오로 사도의 간청을 들어주기를 거절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너는 내 은총을 넉넉히 받았다. 나의 힘은 약한 데에서 완전히 드러난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 (바오로 사도가 신체적으로 건강했다면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간적인 생각일 뿐입니다. ‘주님의 뜻’은 인간의 생각을 초월합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서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했을 때, 성모님께서는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 이 말씀은, “주님께서 저를 통해서 이루기를 원하시는 그 일이 이루어지기를 저도 원합니다. 그래서 마치 종이 주인의 뜻을 따르는 것처럼 주님의 뜻에 순종하겠습니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나도 원한다.”가 핵심입니다.) 성모님의 응답과 순종은 ‘자유의지’로, 성모님 자신이 ‘원해서’ 한 일입니다. 만일에 성모님이 원하지 않았다면? ‘메시아 강생’이라는 새 역사는 하느님의 원하심과 성모님의 원하심이 합해져서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의 뜻과 계획은 생각하지 않고, 인간 쪽의 간절함과 믿음만 말하는 것은 ‘기복신앙’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평생 완치가 안 되는, 그냥 현상 유지만으로 만족해야 하는 병을 앓고 있는 병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래도 가끔은 기적이 일어나긴 합니다. 그러나 무턱대고 그 병자들에게 마치 강요하는 것처럼 간절함과 믿음만 말하는 것은, 또 간절함과 믿음이 부족하다고 꾸짖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너무 잔인한 일입니다. 사실 가장 간절한 사람은 병자 자신이고, 절실하게 믿음의 힘을 찾는 사람도 병자 자신입니다. 병자의 심정은 병자가 잘 압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마태 9,18-19)
마태오복음에는 ‘죽은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코복음과 루카복음에는 ‘죽어가는 딸’을 살려 달라고 간청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5,23; 루카 8,42) 그래도 예수님께서 ‘죽은 소녀’를 살리셨다는 것은 같습니다. 아마도 마태오는 결과에만 초점을 맞추어서 세부사항은 간략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어떻든 회당장의 간청에는 ‘주님께서 원하시면’이라는 뜻이 들어 있고, 예수님께서 일어나셔서 그의 집으로 가신 것은 그의 딸을 고치는 일은 예수님께서도 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마태 9,20-22)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점은, 예수님의 옷자락 술이 여자의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여자의 병을 고쳐 주셨다는 점입니다. 만일에 예수님을 보지 않고 예수님의 옷자락 술만 본다면 그것은 미신입니다. (사실 미신을 믿는 사람들도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잘못되어 있긴 하지만 그 믿음이 대단할 때도 많습니다. 그러니 간절함과 믿음만을 강조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 나오는 여자는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믿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직접 간청할 용기는 없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말은, “간청하는 말을 직접 하지 않고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예수님께서는 내 사정을 알아차리고 나를 고쳐 주시겠지.”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라는 예수님 말씀은, 여자의 믿음을 칭찬하시는 말씀인데, 여자의 믿음이 그 자신의 병을 고쳤다는 뜻은 아닙니다. 병을 고친 것은 예수님의 자비와 권능입니다.
죽었다가 예수님 덕분에 살아난 사람은 ‘세 명’뿐입니다. ‘야이로’라는 회당장의 딸, ‘나인’이라는 고을의 어떤 과부의 외아들(루카 7,15), 마르타와 마리아의 오빠 라자로.(요한 11,44) 그들이 살아난 일은 ‘부활’이 아니라, 수명이 조금 더 연장된 일이고, ‘예수님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이라는 것을 증언해 주는 일입니다. 신앙생활의 목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지 수명을 조금 더 연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원한 생명은 ‘생명의 주인’이신 분만이 주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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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병원 예약이 있어서 지하철을 탔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모두 내려서 옆에 있는 지하철로 옮겨갔습니다. 저도 덩달아 옆에 있는 지하철로 갔습니다. 나중에 보니 옮겨 탄 지하철은 급행이었습니다. 맨해튼까지 빨리 가려는 사람들은 당연히 급행으로 옮겨 탔습니다. 그런데 제가 가려는 병원은 완행 노선에 있었습니다. 저는 제가 내려할 역을 놓치고 6정거장 더 간 후에 다시 완행으로 바꿔 타고 병원으로 갔습니다. 제가 가야할 곳을 지나치는 것은 급행이라도 제게는 소용이 없었습니다. 돌아보면 ‘부화뇌동’한 적이 많았습니다. 필요 없는 지출을 한 적도 있습니다. 아까운 시간을 허비한 적도 있습니다. 지나친 음주로 다음 날 힘들었던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군자는 화합하지만 부화뇌동하지 않고, 소인은 부화뇌동하지만 화합하지 않는다.”
성서에 보면 부화뇌동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세가 하느님께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입니다. 사람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었고 그 앞에 절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사람들에게 바른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고함쳤던 군중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저 사람들은 자기들이 무엇을 하는지 모르고 그랬습니다.” 부화뇌동하지 않고 화이부동 했던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따랐던 아리마태아 사람 요셉은 당당하게 빌라도에게 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시신을 아무도 사용하지 않았던 무덤에 모셨습니다. 막달라 여자 마리아는 두려움에 떨며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이 묻혀있던 무덤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보았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가장 먼저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손을 내미는 사람들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습니다. 따뜻하게 잡아 주셨습니다. 자비를 청하였던 소경이 볼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들것에 실려 온 중풍병자가 일어나서 걸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방인 여인의 간청을 들어 주셨고 그 여인의 딸을 고쳐주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하혈하던 여인은 단지 예수님의 옷을 만졌습니다. 그것만으로도 하혈이 멈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근심과 걱정이 있다면 주님의 옷자락을 만졌던 여인처럼 주님께 의탁하면 좋겠습니다.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면 자비를 청했던 소경처럼 주님께 자비를 청하면 좋겠습니다. 우리들 또한 우리의 도움을 청하는 이들의 손을 따뜻하게 잡아주면 좋겠습니다. 밤하늘이 별들이 있기에 아름다운 것처럼 세상은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아름답습니다.
“주님은 너그럽고 자비하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넘치시네. 주님은 모두에게 좋으시며, 그 자비 모든 조물 위에 내리시네. 주님이 말씀하신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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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손’이라는 단어에 주목해 봅니다.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예수님께서 ……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우리에게 두 가지의 손을 소개합니다.
하나는 ‘사람의 손’입니다. 간절함과 믿음으로 ‘손’을 내미는 데에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합니다. 자신의 아픔을 인정하는 동시에 스스로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한계를 인정하기에 그렇습니다.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열두 해’가 그 손을 만들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손’으로 사람을 살리는 손입니다. 성전에서 솟아나는 물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살아나듯(에제 47,9 참조), 예수님의 손이 닿은 소녀가 살아납니다. 예수님의 손에서 사람을 창조하신 ‘하느님의 손’이 보입니다. 단순히 건강을 회복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고 하신(창세 1,31 참조) 새로운 창조가 오늘 예수님의 손에서 시작됩니다.
여인의 간절함과 믿음은 그가 예수님의 옷을 만지게 하고, 회당장의 간절함과 믿음은 예수님의 손을 움직이게 합니다. 오늘 저마다 삶의 자리에서 겸손과 용기의 손으로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 그분을 만지고, 하느님의 손이 내 삶에 닿아 새로운 창조가 일어나기를 청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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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손 살림>
마태오 9,18-26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하혈하는 부인을 고치시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고 계실 때, 한 회당장이 와서 예수님께 엎드려 절하며,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그를 따라가셨다. 그때에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가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대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셨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바로 그때에 그 부인은 구원을 받았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집에 이르시어 피리를 부는 이들과 소란을 피우는 군중을 보시고,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비웃었다. 군중이 쫓겨난 뒤에 예수님께서 안으로 들어가시어 소녀의 손을 잡으셨다.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 그 소문이 그 지방에 두루 퍼졌다.
<손 살림>
내미는 이의
손을 받아들이는
살림
받아들이는 이에게
손을 내미는
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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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마태9,18)
<간절한 두 믿음!>
하나는 한 회당장이 보여준 믿음입니다. 회당장은 예수님께서 죽은 자기 딸을 살려내실 수 있는 분으로 믿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믿음입니다. "물러들 가거라. 저 소녀는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다."(마태9,24) 소녀의 죽음을 확인한 사람들은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듣고 비웃었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주시며 죽었던 소녀를 살리십니다. 회당장의 큰 믿음이 가져온 구원입니다.
또 하나의 큰 믿음은 열두 해 동안이나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자가 보여준 믿음입니다. 그는 속으로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마태9,21) 라고 생각하면서, 용기를 내어 예수님 뒤로 가서 그분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댑니다.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 여자를 보시며 이르십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복음 환호송)
회당장과 여자가 믿은 예수님을 우리도 믿고 있습니다. 구원자이신 예수님, 나를 살리시는 예수님께 대한 우리의 믿음, 나의 믿음은 어떠한가? 구원받은 그 두 사람처럼 큰 믿음, 곧 예수님께 대한 전폭적인 신뢰를 드러내고 있는가?
오늘 독서는 호세아 예언자가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호세2,21.22) 호세아 예언자는 기원전(B.C.) 722년에 북이스라엘이 멸망할 때 활동했던 예언자입니다.
오늘 독서는 이런 이스라엘에게 전하는 희망의 말씀입니다. 크고 작은 힘듦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희망을 잃지 말고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믿음(신뢰)를 두고 다시 살아나는 우리였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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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어느 한 수도원이 있는 깊은 산속에 한 은수자가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수도원의 원장이 그를 찾아왔습니다. 그 이유는 한창 번성하였던 수도원이 쇠퇴의 길로 들어섰기 때문입니다.
원장은 수도원을 어떻게 다시 일으킬 수 있을까 은수자에게 조언을 구하였습니다. 그랬더니 은수자는 “죄송합니다. 저는 아무런 조언도 드릴 게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 것은 당신들 가운데 구세주가 계시다는 것입니다.”
수도원장은 이 수수께끼 같은 말의 의미를 도무지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겨우 다섯 명 남은 수도원에 “구세주가 계시다”는 은수자의 말을 모두가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우리 중에 구세주가? 구세주가 있다고?’ 다섯 중에 누가 구세주란 말인가? 그날부터 수도자들은 구세주일지도 모르는 서로를 깊은 존경심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이 수도원의 분위기는 전과는 사뭇 다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점차 많은 사람이 그 수도원을 찾아와 그 수도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고 수도자가 되겠다고 지원하는 젊은이들도 많아져 옛날처럼 번창한 수도원이 되었답니다. 서로를 인정하고 이웃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알아볼 수 있는 눈이 열렸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내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개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당신의 옷자락에 손을 댄 것을 아시고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마태9,22). 하고 이르시며 구원을 허락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불치병을 낫게 하셨지만 ‘내가 너를 낫게 하였다.’고 하지 않으시고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고 하셨습니다. 병을 낫게 하는 육적인 치유도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것은 주님을 통해 구원을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의 완성에는 인간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물론 우리의 공로를 통해서 구원을 얻는 것은 아니지만 자유의지에 의한 협력을 기다리십니다. 여인은 감히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당시의 율법으로는 부정을 탄 여인이 그렇게 할 수 없는 처지입니다. 그러나 그는 용기를 내어 믿음을 표현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과거에 매여 있지 않고 새로운 구원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주님의 능력의 손길에 협력하면서 ‘내 믿음이 나를 구원 하였다.’고 하지 않고, ‘주님께서 저를 구원해 주셨습니다.’하고 말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결코 인간을 무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인간의 협력을 간절히 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께 대한 믿음은 새로운 나로 살게 합니다.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상을 체험케 합니다. 인간은 끝이라고 생각할 때 하느님께서는 시작하십니다. 사람들은 회당장의 딸이 죽었다고 소란을 피웠지만,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이 곧 하느님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몰아내시고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어 놓으십니다. 그러나 그 주변에는 믿음을 가진 사람도 있었지만 그를 비웃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마음이 한번 비딱해지면 기적을 보고도 또 비웃을 것이며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리게 됩니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 이웃 안에 계신 주님을 섬기고 사랑할 수 있는 마음이 가득한 오늘이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 회당장의 딸의 손을 잡아 주셨듯이 우리의 손을 잡아 주시고 일으켜 주십니다. 우리도 누군가의 손을 잡아 줄 수 있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
예수님의 자비는 단순히 어떤 감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주고 인간을 다시 살리는 힘입니다! 하느님의 자비는 인간에게 생명을 줍니다. 그리고 그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냅니다.
주님은 항상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십니다. 그분은 자비로이 우리를 바라보시며 기다리신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그리고 그분께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맙시다! 그분은 자비로 가득한 마음을 갖고 계십니다! 우리가 우리의 내적 상처들과 우리 죄들을 그분께 보여드릴 때 그분은 우리를 항상 용서하십니다. 그분은 정녕 온전한 자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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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자기 삶에 대해 100% 만족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아마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변화가 필요하다고 늘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변화는 과연 쉬울까요? 어려울까요? 거의 모든 이가 어렵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변화라는 것은 늘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변화가 어렵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변화를 가능하게 만드는 사람은 사실 특별한 사람이 아닙니다. 특별한 능력과 재주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합니다. 그보다 고도의 집중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닐까요? ‘아무리 어려워도 나는 반드시 해낸다’라는 생각을 무의식 속에 설정해놓고 집중하는 사람만이 변화를 가능한 것으로 이루게 됩니다.
할 수 없다는 부정적 생각으로는 자신의 원하는 것을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상상만 해서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구체화해 나갈 때 조금 더 변화에 가까워지게 될 것입니다.
자기의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그런데 우리는 그런 마음보다는 의심과 불신이라는 부정적인 감정으로 자기 변화에서 더 멀어질 때가 많습니다.
이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믿음을 갖춘 사람이 아닐까요? 실제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주님께서 대한 긍정적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의심과 불신으로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사람이었습니다.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딸이 죽었는데, 와서 손을 얹으시면 살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다인들은 종종 다른 이의 머리에 양손을 얹을 때가 있었습니다. 이 경우 보통 ‘손’이 복수로 쓰입니다. (양손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는 복수가 아닌 단수로 쓰입니다. 단수로 사용할 때는 예수님의 카리스마적인 행동과 능력을 가리키는 것이 됩니다. 즉, 회당장이 손을 얹어 달라는 것은 단순히 의식적인 행위가 아닌,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의 놀라운 은총이 주어져서 살아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믿음을 통해 회당장의 딸은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자 역시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하여도 구원을 받겠지.’라는 믿음이 그의 병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됩니다.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단순히 입으로 믿는다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또 생각만으로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복음에 나오는 회당장과 같이 예수님을 찾아가야 하며, 혈루증을 앓던 여자처럼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려는 용기가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믿음을 통해 진짜 자기 변화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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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거룩한 꽃자리>
-腐敗인생이 아닌 醱酵인생을 삽시다-
어제 저녁식사에서 노인들에 관한 대화중 한 형제의 7월은 노인성월老人聖月이었으면 좋겠다는 기발한 제안에 공감했습니다. 사실 7-8월은 영적 방학처럼 성월이란 명칭이 없는데 7월 노인성월이 그럴 듯 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황님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부모 성 요아킴과 성녀 안나 기념일’(7.26)이 속해 있는 7월의 기도지향을 ‘노인들을 위하여(For the elderly)’로 택했습니다.
이렇게 노인들이 많기로는 인류역사상 초유일 것입니다. 기도지향중 네 주요내용입니다. ‘1.부드러움의 교사들, 2.백성들의 지혜, 3.노년의 고독, 4.노인들에게 가까이 있는 교회’ 등 적절한 내용이었습니다. 참으로 이상적인 노년의 삶이라면 거룩한 고독의 꽃자리에서 날로 주님과 가까이, 부드럽고 지혜로운 교사로 사는 것이겠습니다.
말 그대로 치열한 분투奮鬪의 노력努力을 다했을 때 주님 은총과 더불어 악취 惡臭 나는 부패腐敗 인생이 아닌 향기香氣로운 발효醱酵 인생이겠습니다. 마침 며칠전 왜관수도원에서 온 ‘수도서원 50주년 금경축’을 맞이한 세분 수도형제들의 상본을 보면서도 “참 아름답다!”라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모두가 70대 후반의 미소띤 후덕한 얼굴들이었습니다. 서품상본 사진 아래 경력들은 그대로 순명의 발자취처럼 보였습니다. 평생 순명의 삶, 발효인생을 산 아름다운 수도형제들이었습니다.
마침 어제 도반사제로부터 노모와 함께 활짝 웃으며 찍은 사진과 더불어 기도를 청하는 메시지도 받았습니다. 평생 두 아들을 홀로 키워낸 어머니인데 끝까지 모시다가 결국은 치매 요양원에 입원하게 됐다는 것입니다.
“신부님, 저희 모친께서 월요일 치매 요양원에 입원하십니다. 신부님의 기도중에 기억해 주시길 청합니다.”
장수長壽 시대, 누구나의 미래가 노년 시기와 죽음입니다. 의지와 상관없이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 치매입니다. 기도와 더불어 거룩한 꽃자리에서 발효 인생을 살도록 하루하루 분투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구상 시인의 “꽃자리”란 시가 생각납니다.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나는 내가 지은 감옥 속에 갇혀 있다
너는 네가 만든 쇠사슬에 매여 있다
그는 그가 엮은 동아줄에 엮여 있다
우리는 저마다 스스로의
굴레에서 벗어났을 때
그제사 세상이 바로 보이고
삶의 보람과 기쁨을 맛본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주님과 만남의 자리가 바로 치유와 구원의 꽃자리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전례에 참석하고 있는 이 성전자리가 거룩한 꽃자리입니다. 한두 번 주님과 만남이 아니라 살아있는 그 날까지 날마다 주님과 만날 때 내 삶의 자리는 거룩한 꽃자리가 됩니다. 바로 오늘 말씀의 주제와도 일치합니다.
제1독서 호세아서의 하느님 ‘남편’과 하느님 백성 ‘아내’가 만나는 광야의 자리가 상징하는바 주님과 우리가 만나는 오늘 지금 여기의 거룩한 꽃자리입니다.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나를 알게 되리라.”
주님을 만나 주님을 알아 닮아갈수록 정의와 공정, 신의와 자비, 진실의 사람이 되어 저절로 치유와 구원이요, 거룩한 꽃자리의 발효 인생이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바로 우리의 거룩한 꽃자리는 그리스도 예수님입니다. 복음 환호송 말씀이 그대로 진리입니다.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은 죽음을 없애시고, 복음으로 생명을 환히 보여 주셨네.”
오늘 복음이 그대로 입증합니다. 구원의 꽃자리인 주님을 찾아 만나 간절한 믿음의 기도를 바치는 회당장입니다.
“제 딸이 방금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셔서 아이에게 손을 얹으시면 살아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어나시어 제자들과 함께 회당장의 집을 찾아 소녀의 손을 잡으시니 소녀는 살아 일어납니다. 거룩한 꽃자리 주님을 만나 살아 난 회당장 딸입니다. 복음 중반부 회당장의 딸을 살리기전 등장하는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여자의 치유의 구원 사건도 감동적입니다. 주님의 옷자락 술에 손을 댄 간절한 믿음의 여자에 대한 주님의 구원선언입니다.
“딸아,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그대로 거룩한 꽃자리 미사전례에 참석한 우리 모두에 대한 치유의 구원 선언 같습니다. 마침내 거룩한 꽃자리 주님을 만나 치유의 구원을 받은 혈루증을 앓던 여자입니다. 회당장과 그 딸, 그리고 혈루병을 치유받은 여자는 평생 주님과 만남의 구원의 추억을 생생히 간직하고 늘 거룩한 꽃자리를 살았으리라 생각됩니다. 새삼 주님과 만나는 거룩한 꽃자리가, 치유와 구원의 꽃자리가 되기 위해 우리의 간절하고 한결같은 기도와 믿음이 얼마나 결정적인지 깨닫습니다.
어제 처음으로 수도원 정원 뜨락에 핀 백합꽃을 발견했습니다. 1년 꼬박 기다렸다가 거기 그 자리 꽃자리에서 피어난 ‘순결과 한결같은 사랑’의 꽃말을 지닌 백합꽃입니다. 그대로 우리 정주의 그 자리가 바로 거룩한 꽃자리임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기다린 날 수에 비해 폈다지는 날수는 비할 수 없이 짧을 것입니다. 참으로 짧게 폈다지는 꽃같은 파스카 선물 인생임을 깨닫습니다.
“자랑하지 않는다
뽐내지 않는다
때되면
고요히 폈다 질 뿐이다
누가
알아주든 말든
보아주든 말든
그분 안에서 폈다 지는 꽃이다”
정주의 거룩한 꽃자리에서 꽃처럼 살라는 가르침을 주는, 늘 거기 그 자리에서 때되면 폈다지는 다양한 꽃들입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발효인생을 살게 하시며, 정주의 거룩한 꽃자리에서 ‘파스카의 꽃’으로 치유와 구원의 아름다운 삶을 살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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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대교구 이정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죽은 딸의 소생을 바란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갑니다. 그는 예수님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사회적 권위와 덕망을 갖춘 사람으로서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고 찾아갈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딸의 죽음 앞에서 더는 자신의 권위 속에 안주하고만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에서 만나신 혈루증을 앓는 여자는 자신의 병 때문에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여자도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자신의 병을 고칠 마지막 기회라는 절박함에 예수님 뒤로 다가가 그분의 옷에 손을 대고 치유를 받습니다.
간절함은 타인의 마음을 움직이고, 하느님의 마음도 움직이게 합니다. 우리는 날마다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어려움에 부딪히지만, 그 어려움이나 질병이 크면 클수록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집니다.
자신의 힘으로 이 어려움들을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낄 때 간절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게 되고, 진정으로 하느님의 은총에 의지하게 됩니다.
아직 하느님의 은총을 깊이 깨닫지 못했다면, 반대로 그만큼 인생에서 한계에 이르는 어려움을 겪지 못했다는 뜻도 됩니다. 인생에서 고통은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하느님께 우리를 인도하는 초대장이기도 합니다.
그 고통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발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시는 치유는 바로 하느님 나라를 맛보고 깨닫게 하는 은총의 표징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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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김구노 구노 신부님]
<하지만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두건의 기적을 보게 됩니다. 하나는 하혈하던 여인이 치유되는 기적이고 또 다른 하나는 죽었던 회당장의 딸이 살아나는 것을 봅니다.
두 기적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두 기적이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행하시는 거의 모든 기적의 공통점입니다. 뭘까요? 바로 사람의 믿음, 포기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입니다.
먼저 회당장은 자기의 딸이 죽어가게 되었음에도, 예수님이시라면 그 아이를 살릴 것이라고 믿습니다. 도중에 그 아이가 죽었지만, 그래도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잃지 않습니다.
그리고 회당장의 집으로 가는 길에 12년간이나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저분의 옷에 손을 대기만해도 자신이 구원받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결국 병을 앓던 여인, 그리고 병으로 죽었던 한 소녀는 예수님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얻습니다. 그것은 바로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손을 잡고 일으키는 행위,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 술을 만지는 행위가
기적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면 자신을 치유해 줄 것이라고 확신했던 여인의 믿음, 예수님이라면 죽은 자신의 딸을 살릴 수 있다는 믿음이 바로 오늘 기적을 가능케 한 것입니다. 사람의 믿음이 있었고,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저 사람들이 믿고 바라는 것을 베푸실 뿐이었습니다.
마태복음 17장 20절에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있으면 이 산더러 여기서 저기로 옮겨가라 하더라도 그대로 옮겨갈 것이다. 너희가 못 할 일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예수님은 믿음으로 못할 일은 하나도 없다고 하십니다. 과연 믿음이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주는 것일까요?
우리를 슈퍼맨으로 만들어 산을 옮기게 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믿음이 우리에게 놀라운 힘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믿음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도움을, 그리고 그분의 능력을 전해줍니다.
우리가 하느님과 함께 살아갈 수 있게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보듯이 사람의 믿음이 바로 예수님의 놀라운 기적, 그분의 능력을 이끌어내는 힘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믿음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의지합니다. 하지만 말뿐인 믿음이 너무도 많은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치면 예수님께 도움을 청하기보다는 여전히 사람에게 더 많은 도움을 청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도저히 안 될 때, 그때도 예수님께 청하기보다는 그냥 포기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예수님이 계십니다. 이제는 우리에게 힘들고 어려운 일이 닥칠 때, 예수님께 좀 청해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을 필요로 하는 회당장의 요청에 기꺼이 발걸음을 옮기셨던 것처럼,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필요로 하는 우리의 요청에 기꺼이 우리에게 오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요청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청하는데 필요한 것은 단지 겨자씨 한 알만큼이라도 모든 것을 예수님께 맡길 수 있는 확고한 믿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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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김준철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오늘 복음을 보면, 숨을 거둔 회당장의 딸이 일어나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 치유됩니다. 당시 회당장이 예수님을 찾아와 부탁한다는 것은 큰 사건이었지요. 다른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거짓 예언자 취급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청을 드린다는 것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한다는 뜻이 아닙니까? 반면 지금까지 지녀 온 신념이 틀렸음을 깨달았어도 체면 때문에, 자신이 받을 불이익 때문에 억지로 외면하는 경우도 흔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진리 앞에 자신의 명예를 포기해 버리는 회당장의 믿음과 용기를 높이 사야만 합니다.
한편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경우도 극적이지요. 여인의 병은 당시에는 고치기 어려운 병이었습니다. 오랜 기간 모든 방법을 다 써 보았던 그 여인은 그래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그 여인 역시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치유되리라는 믿음이 있지 않았습니까?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용기를 내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중대한 의미를 지닙니다. 바로 병을 낫게 하는 능력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이 은총은 하느님에 대한 믿음으로만 받을 수 있기 때문이지요. 믿음은 인간의 힘으로 도저히 이룰 수 없는 일을 가능하게 만듭니다. 아울러 믿음에는 행동이 따라야 한다는 점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따라서 실천하는 신앙, 다른 이들을 진심으로 배려하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의 믿음은 큰 힘을 발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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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나는 너를 영원히 아내로 삼으리라. 정의와 공정으로써 신의와 자비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라. 또 진실로써 너를 아내로 삼으리니 그러면 네가 주님을 알게 되리라."
지금껏 저는 호세아서의 말씀으로 나눔을 하지 않았습니다. 의도적으로 이 말씀 묵상을 회피해 왔습니다.
주님께서 그저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은 좋고, 이해되지만 나를 당신의 아내로 삼으신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이해도 되지 않고 그 제의 그러니까 청혼과 결혼이 그다지 좋지도 황홀하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제가 주님의 아내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빼도박도 못하게 매이는 것으로, 구속이나 속박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겁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회피하지 않고 그 뜻을 생각해보기로 했는데 그러면 주님의 아내가 되는 것이 진정 구속이나 속박일까요? 주님께서 우리를 어디 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러니까 당신 옆에 묶어두기 위해서 당신 아내로 삼으시는 걸까요?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런 거라면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니고, 설사 사랑이라 할지라도 진정한 사랑이라고 할 수 없을 겁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당신에게 묶어두실 요량이었으면 애초에 우리 인간에게 자유 의지를 주지 않으셨을 겁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이 당신을 배반할 자유도 주셨고 떠날 자유도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당신 아내 삼으심은 속박이 아닌데 그렇다면 뭡니까?
묶어두시겠다는 것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으시겠다는 뜻일 겁니다. 호세아서 전체에서 볼 때 아내로 삼은 이스라엘은 바람난 아내인데 그런데도 당신 사랑을 포기하거나 이혼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그 뜻이 바로 "영원히 나의 아내로 삼으리라."는 표현에 있습니다. 이것은 어미의 자식 사랑보다도 더 숭고한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어미는 자식이 어떤 죄를 지어도 당신 사랑에서 배제하지 않습니다. 아니, 당신에게서 나왔고, 당신의 분신이기에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선택한 사랑이고 그래서 포기할 수 있는 관계입니다. 이런 관계는 좋아서 선택했는데 싫어서 버릴 수 있는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역설적으로 주님은 우리가 좋아서 선택한 것이 아닌 것이고, 사랑으로 선택하신 것이요 영원히 포기하지 않는 선택을 하신 겁니다.
따지면 이런 것인데도 저는 여전히 저를 당신 아내 삼으시겠다는 주님의 말씀이 내키지 않고 부담스러우니 이게 무엇입니까?
겸손입니까? 사랑 없음입니까?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주님의 청혼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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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k8rfmz87gK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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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러자 소녀가 일어났다.”(마태 9, 25)
모든 치유의
시작에는
소통이 있다.
먼저 손을
내미시는
예수님이시다.
소통하는 법을
자녀들에게
보여주신다.
믿음은
소통의
본질이다.
성장할 때마다
예수님을 향한
믿음이 필요하다.
믿음이 믿음을
지켜주고 있다.
아버지의
올바른 믿음은
딸 이야기를
제대로 듣는
경청이다.
죽은 것이
아니라
자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소녀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신다.
간절함과
간절함의
만남이 참된
치유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보다
더 간절하시다.
예수님의
간절함은
관점의 변화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관점의 변화가
치유이다.
믿음에 눈뜨는
시간이다.
믿음과 치유는
시점을 바꾸는
우리들 관계의
새로운 시도이다.
자고 있는
우리를
깨우시는
예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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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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