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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령
아내가 화장실로 들어가자 도치씨는 엄지와 검지로 딱 소리를 냈다. 감탄했다.
도암의 처방이 어쩜 이렇게 섬세하고 정밀하며 정확할 수가 있을까? 사람을 한방에 죽이는 것이 아니고 90일에 나눠 서서히 조이다 마지막 날 일곱 알로 꼴까닥 가게 하는 것은 신의 경지가 아니면 불가능한 것이라 생각했다.
이 세상의 어떤 프로파일러도 단서 찾아 내지 못할 신기의 처방이라 생각했다.
일억 그 이상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처음엔 비싸다고 생각했지만 비싼 만큼 돈 가치를 한다고 생각했다.
싫증나거나 보기 싫으면 물건이야 바꾸면 되지만 사람의 인연은 그렇게 할 수 없는 것. 인연에 얽매이면 법적 도덕적 제약이 사람을 꼼짝달싹 못하게 하고, 그 인연에 원한이나 증오가 싹트면 고통스럽게 한다. 허지만 도암의 처방은 최소한의 부담감도 없고 안전하며 흔적도 남기지 않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에서 새삼 감동했다. 단점이라면 시간이 좀 오래 걸렸다는 것뿐이다. 명품살인이라 여겨졌다.
사람을 죽이고 감동할 수 있게 해주는 도암의 처방은 국제특허감이라는 창업 욕심마저 들었다.
도치씨는 거실의 벽시계를 초조하게 쳐다봤다.
아내가 화장실로 들어 간지 20분이 흘렀다.
원래 화장실 들어가면 시간이 좀 걸리는 아내지만 오늘은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거라 짐작했다.
평소의 처리보다 한 가지가 더 추가됐으니 당연한 일이다. 도치씨는 코딱지를 두 번 후벼 새끼손가락으로 탱 탱 튕겼다.
밤 10시 25분.
이제 1시간 35분 후 아내는 죽을 것이다.
죽음의 만찬 90번을 차리느라 고생했던 지난 시간이 기록동영상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감회가 새로웠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고 지루한 시간도 있었다.
두 계절을 맞문 한 계절을 소롯이 죽음의 만찬에 매달리긴 했지만 혜림과 우아영과 오진숙이 있어 버텼다.
가장 쉽게 생각했던 혜림에게 프러포즈하다 얻어터지고, 반신반의했던 우아영을 설득하는데 성공했지만. 이 과정에서 오진숙의 탱탱한 볼륨으로 마음이 옮겨갈 뻔 했던 사건은 아찔한 경험이었다. 여자는 벗겨봐야 안다지만 만져보고 터득한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이 세상거래에 반품 안 되는 것이 없는데 왜? 여자만은 반품이 안 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지만, 오진숙의 사기뽕브라 때문에 당하지 않은 것은 큰 행운이라 생각하며 도치씨는 만족한 미소를 지었다.
“끄으윽! 끄르륵!”
화장실에서 아내의 괴로운 인기척이 들렸지만 도치씨는 그럴 때마다 시간을 보며 무시했다. 그 정도야 참아야지.
“쏴아아.”
물내려가는 소리가 들리면 마음마저 뻥 뚫려 시원했다. 물내려가는 소리는 죽음을 향한 한고비, 한절차가 지나가는 증거 음이라고 믿었다. 몇 번 끄르륵거린 후, 변기통물소리가 들렸지만 그 후 신음소리가 없어 편안했다.
어떤 일에나 성질 급해 빨리빨리가 입에 밴 도치씨였지만 오늘밤은 느긋했다. 아내의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 지루하고 초조하긴 했지만 90일도 기다렸는데, 그렇게 위안했다. 그래서 오늘밤은 진짜 견딜만했다.
도치씨는 두 손바닥을 뒤통수에 받치고 허리를 쭉 폈다.
이른 새벽 산 공기를 흡입할 때보다 더 신선한 기운이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흘렀다.
도치씨는 일어나 CD를 틀었다.
문득 오늘밤 아내를 보내면서 해줄건 다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CD를 뒤져 아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골랐다.
쇼팽 OP66 즉흥환상곡.
도치씨는 잔잔하게 볼륨을 고정하고 소파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생각할수록 도암이 고마웠다.
사람 죽이는데 시간까지 예약하다니. 귀신도 곡할 일이다. 죽음의 마지막 약발이 제 시간 맞춰 위세를 들어내는 절묘하고 신기한 프로그램에 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역시 도암은 천재야. 아니 사신령死神靈이야.
고마운 사람.
허지만 잔금은 좀 깎아야 해! 절반으로 뚝 분질러야지. 일단 상황이 종료됐는데 지가 어쩔 거야? 받을 래? 말래? 갑과 을이 뒤바뀌면 당연히 을이 수용해야지. 아함 그래야지. 깎은 돈은 우아영과의 신혼여행 때 신혼의 질을 올리는데 아낌없이 투자하겠다고 다짐했다.
갑자기 화장실 소음이 죽었다.
소파에서 상체를 일으킨 도치씨는 귀를 화장실소음에 집중했다.
3분이 지나도록 잠잠했다.
시계를 봤다.
밤 10시51분.
도치씨는 살금살금 화장실 문 앞까지 까치발로 걸어가 귀를 댔다.
화장실 안은 쥐죽은 듯 고요했다. 적막감마저 느껴졌다.
좀 더 밀착해서 화장실 안의 소음을 청취하기 위해 귀를 붙이는 순간이었다.
“쿵!”
둔탁한 음향이 도치씨의 이마에서 들렸다. 도어록에 오지게 이마를 찍히며 도치씨는 뒤로 벌렁 나자빠졌다.
화장실 문을 연 아내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자기야 안 다쳤어? 왜 여기 있다 받치고 그래요?”
나자빠진 몸을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하고 도치씨가 황급히 말했다.
“난 괜찮아! 괜찮아?”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셨구나. 좀 어지럽긴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냉수샤워 했더니 한결 견딜만해졌어요. 그나저나 안 다쳤어요?”
“나 다치는 게 문제야? 이상 있으면 당신이 문제지.”
“고마워요. 항상 날 그토록 생각해주는 당신이 있어 난 정말 행복한 여자야.”
아내가 손을 내밀었다.
아내의 손을 잡고 바닥에서 일어서며 도치씨가 말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지만 걱정 안할 수 있어? 오바이트는? 안했지?”
“올라와도 삼켰어요. 당신이 어떻게 만든 건데 내가 어찌 쏟아요? 독약이라도 삼켰을 텐데? 어머? 이거 혹 아녜요?”
아내가 짠한 표정으로 빨갛게 볼록 튀어 오른 도치씨의 이마를 어루만졌다.
“많이 아프겠네? 어쩌지? 연고 발라야겠는데요?”
“난 이마가 박살나도 괜찮아. 당신만 괜찮다면.”
도치씨가 아내에게 ‘당신만 괜찮다면’ 이라 말한 것은 아내가 약을 토했을까 걱정한 말이었지만 아내는 그 말을 사소한 일에도 자신을 걱정해주고 아껴주는 순수한 남편의 사랑으로 받아 들였다.
밤 11시35분.
아내는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비틀거리면서도 괜찮다고 말하는 아내가 침대 속으로 파고 들자 도치씨는 아내가 편히 잠들도록 거실로 나왔다. 차마 아내가 죽어가는 모습은 지켜 볼 수 없었다.
거실 유리창 넘어 건너 아파트 전경을 내다봤다.
몇 집 빼고 거의 불이 꺼진 건너 아파트들이 썰렁하고 을씨년스러웠다. 유리창에 맺혀 굴러 떨어지는 물방울들 때문이었다.
도치씨는 베란다로 나갔다.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창문을 열고 손을 내밀어 가을비를 잡았다.
바로 그때였다.
“부우웅. 부우웅.”
스마트폰이 심하게 몸을 떨었다.
도치씨는 얼른 거실로 들어가 스마트폰을 집어들었다.
옥황상제.
전화번호에 입력한 글자가 선명했다. 도암이다.
도치씨는 민첩하게 베란다로 다시 나와, 베란다와 거실을 가로지르는 이중 유리문을 닫았다.
아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말했다.
“여보세요. 저 도칩니다.”
“아? 도치선새앵?”
“네. 말씀하세요.”
“옥황상제는 칼인디 지금 상황이 어떤겨라? 가만있자.”
“네. 지금 11시47분입니다.”
“호메. 내 시계도 13분 남았네이?”
“근데 웬일이세요? 이 밤중에?”
“호미. 내가 책임진 일인디 AS정신에 입각하야 확인하는 거이 당연하지. 안 그렇소?”
“네. 그렇긴하네요.”
“근디 지금 어디 있소?”
“베란다에요. 비 오는 거 보고 있습니다.”
“홈메! 머씨라? 사람이 그라몬 몬쓴거이요. 한번 뿐인 사망인디 임종은 지켜줘야재? 안 그라요?”
“네 그렇긴하네요.”
“얼른 들어가시오. 자정 땡 지나면 자리 뜨시오. 세상이치가 생물일 때 지, 죽으면 가치가 없는 거이요. 그렁께 살아 있을 때는 지켜 주는 거이 예법이요. 옥황상제님은 단 1초도 어김없응께 사망시간까지는 지키시오. 알았쏘?”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요.”
“뭔가? 또?”
“혹시 시간에 조금 유도리가 있을 수 있나요? 그러니까 12시에 딱 안 죽고.”
“데끼! 이놈!”
“네엡?”
“옥황상제한테 딱! 걸렸는디 워찌 변동이 있어야? 옥황상제한테 딱 걸리면 어떤 년 놈이라도 고 시간에 딱 사망이여. 별 지랄다혀도 못 빠져나가지라! 딱 걸린 고 순간 끝이여! 몰랐능가?”
도치씨가 스마트폰을 들고 허리를 굽실거렸다.
“네에, 딱 걸리면 딱 가는 거. 죽었다 깨도 믿습니다.”
“음. 그래야재. 그런데 말이여. 자세가 왜 그렁가?”
베란다 창틀에 비딱하게 팔꿈치를 대고 있던 도치씨가 꼿꼿하게 차렷 자세로 몸을 세우며 대답했다. 가슴이 다듬이질 했다. ‘아하! 도암도사님은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보고 있었구나!’
“네. 말씀하세요!”
“사람 가는 자리에서 이런 말해서 뭣한디 말이여.”
“괜찮습니다.”
“우리가 이무로웅께 그럼 단도직입으로 말할라요. 옥황상제가 말이여.”
“네, 옥황상제님이요.”
“그 어른이 말이여. 그 머시냐? 삼일 이내로 정리하라는 독촉장이 왔당께라.”
“네에? 그게 무슨 말씀이죠?”
“잔금 말이여. 오천!”
“아 그거요?”
“내가 도암아닙뎌? 책임지고 천천히 받아 드린다는디 디럭 화를 내시네? 거래는 그런거이 아니람시로. 주고받는 것은 자로 잰 듯 반듯해야 한당께, 내가 추가 말도 못 붙였소. 원체 셍께. 부채 앞에는 의리고 나발이고 소용없어뿌러.”
“당연히 드려야죠.”
“오미! 그래 주겄소?”
도치씨가 손을 꼽아봤다.
“오늘이 10월12일이니까,”
“호메! 고로코롬 속결이요?”
“그게 아니구요. 제가요. 11월7일 결혼하거든요.”
“머시? 결혼이라고라?”
“네.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신혼여행 갔다 와서 지불하면 안 될까요?”
도암이 얼른 대답하지 않았다.
잠시후 도암이 딱 잘라 말했다.
“안된다요! 거래상 그런 법은 없다요!”
“네에? 옥황상제님이요?”
“삼일내로 안되면 지금 취소한다는디 지금 시간이 11시51분잉께 시간이 촉박한디. 큰일이어야? 어쩔꺼이여?”
이번엔 도치씨가 얼른 대답 하지 못했다.
도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긍께. 머시냐? 곧 결혼할거이면 또 거래할지 모르는디, 한 닷새만 봐달라부탁해볼거나?”
도치씨가 단호하게 말했다.
“또 부탁할 일은 죽었다 깨도 없구요.”
“그람 워쩔까이? 취소해달라혀? 무효말이여.”
계산을 바닥에 깔아 놓고 도치씨가 서운한 듯 말했다. 지금은 아냐. 일단 아내의 죽음이 종료된 후 타협하는 것이 갑의 위치를 고수하는 길이라고 판단했다.
“알았습니다. 12시 지나서 확인하고 삼일이내 송금하겠습니다.”
“허어! 옥황상제님 입장에서는 무효가 훨씬 남는 일인디. 어쩔 수 없구만이라. 다행잉께 일이나 잘 보소.”
“무슨 일요?”
“사망! 긍께 임종말이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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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도암의 약발이 좋은건가 ?
도치 아네가 이상해 젓나보내요..
그러나 몇분 안남았으니 지켜 봐야 알겠지요..
숨을 죽이면서 제미있게 잘보았슴니다 호기심 100%~ㅎㅎ
ㅎ
돈이 일억인데 약발 안들으면 사기로 들어갈텐데요....ㅋㅋㅋㅋ
오늘도 행복한날되십시오
도암이 귀신 멋따먹는식으로 알기는 잘아네요..
마누리 죽어가는 앞에서 5천만원 깎아보자는 속샘이었는데
미리알고 돈독촉을 하는 도암 앞에서 앞뒷발 다들어야 하겠슴니다.
도암도 돈벌자고 하는 짓인데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ㅋㅋ
멋진 가을날 되세요
도치 아네가 죽을려고 깨끗이 샤워하고 누워 있군요..
도치씨 너무 잔인해 보입니다.
아내가 바람피운 댓가니까요
죽어도 싸죠.....ㅋㅋ
고운밤되세요
과연 아내가 죽을까요?? 넘 궁금해요
ㅎ글쎄요.
죽을 사람은 죽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은데.....글쎄요.
내일 마지막 편 기다려 보시죠...ㅋ
아내가 초를 다투고 죽어가는데, 아영이와 결혼 생각만 하고
있으니 이게 남자들의 싸가지없는 생각일까?
나도 남자지만 도치에게 환멸를 느끼네요..
아네가 죽어도 도치가 그냥 순조롭게 살아가지 못할것 같아요..
천일염민 단단히 화나셨네요
의리의 사나이 화나면 무서운데....ㅋㅋㅋㅋ
오늘밤은 편히 쉬세요..화푸시구요.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