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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스님,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에서 석유환국(昔有桓國)의 환국을 자신이 주석을 달면서 ‘위제석야(謂帝釋也)’라 하여 환인천제의 환국을 불교의 제석환국으로 바꾸고,
또한 환웅천황이 내려오신 태백산(백두산)을 지금의 묘향산이라 하고 단군 왕검의 도읍지인 아사달(阿斯達)을 지금의 평양이라고 하는 등 배달국, 고조선의 광활한 영역을 반도 안으로 축소하였다.
당나라 때 사마정의 '사기색은(史記索隱)'은 “기자의 묘가 하남성 몽현[蒙縣: 현재의 상구현(商邱縣)]에 있다”고 썼다. 최남선도 “평양의 기자묘는 고려 중기 이후 견강부회하여 만들어진 것이고 기자조선설은 “중국인이 이민족을 동화하는 정책의 산물”이라고 했다.
고려 때 송(宋)나라 사신이 기자묘(箕子墓)가 어디 있는가’라고 묻자 그 때 한 사람도 알지 못한다고 하자, 고려 숙종 7년(1102) 예부상서 정문(鄭文)이 주인없는 무덤, 무주고총(無主古塚)을 하나 찾아 임금께 청하여 서경(평양)에 가짜 기자묘(箕子墓)와 기자 사당을 만들었다.
또한 서경의 반듯한 도로 흔적들을 기자(箕子)가 만들었다는 정전제(井田制)의 증거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1960년대 기자 정전터와 평양 을밀대 북쪽에 있던 기자묘를 조사하면서 그 허구가 밝혀졌다. 기자 정전터는 고구려시대 도시 구획 흔적이었고 기자묘에서는 사기 파편과 벽돌조각만 나왔다.
기자에 관한 진실을 말하자면, 그는 무왕에 의해 풀려난 후 상나라 유민을 이끌고 당시 고조선(번조선)의 국경지역인 산서성 태원(太原)으로 이주하였다. 망명지 조선 땅에서 6년 정도 살다가 고향 서화(지금의 하남성 서화현)로 돌아가 생을 마감하였다.(산동성 조현에서 서남쪽으로 약 15km 왕성두촌이라는 작은 마을의 들판에 작고 초라한 모습의 기자묘가 있다.)
1963년 6월28일 주은래 총리는 조선과학원 대표단 접견시 중국과 조선 관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조선민족은 조선반도와 동북대륙에 진출한 이후 오랫동안 거기서 살아왔다. 요하(遼河), 송화강(松花江)유역에는 모두 조선민족의 발자취가 남아있다.
이것은 요하와 송화강 유역, 도문강(圖們江) 유역에서 발굴된 문물, 비문 등에서 증명되고 있으며 수많은 조선문헌에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우리 중국 역사학자들은 어떤 때는 고대사를 왜곡했고, 심지어 여러분들의 머리위에 조선족은 "기자자손(箕子之后)" 이라는 말을 억지로 덧씌우고, 평양에서 그 유적을 찾아 증명하려는 무리한 시도를 하기도 했다. 이것은 역사왜곡이다. 어떻게 이렇게 될 수가 있단 말인가? ......... 이하 생략
왜곡 조작된 기자조선의 실체
‘원래 은나라에 기자, 비자, 미자라는 세 분의 어진 현인이 있었는데, 은나라가 망하자 그 중 한 사람인 기자가 동방으로 가서 조선의 왕이 되었다’는 것이다.
『사기史記』의 「송미자세가宋微子世家」에서 “봉기자어조선封箕子於朝鮮”이라고 하여, 주나라를 연 무왕이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임명했다고 했다.
하지만 본래 기자는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이복형제로서 ‘기’라는 땅의 제후였다. 그는 은나라가 망한 뒤 벼슬을 않겠다 하고서 옛 고국으로 내려간 사람이다. 그런 그가 무슨 왕이 되었단 말인가. 사마천이 붓대를 갖고 그렇게 조작을 한 것이다.
‘단군조선’이란 말은 전혀 없고, 약 3,100년 전에 기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고, 그런 거짓말 역사를 쓰고 있다. 이는 이 땅의 역사가 중국의 제후국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매도하기 위한 것이다.
대만학자 노간(勞幹)은 중국문화론집(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에서 “우리들은 동방사람들을 동이(東夷)라고 부른다. 이(夷)자와 인(仁)자는 통용된다. 인(仁)자와 인(人)자 또한 한 근원에서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에 있어서 인(人)자를 일컫는 것은 그 근원이 동방에서 나왔으며, 만약 동이족이 문화적으로 선진이고, 후대에 와서 서방사람들이 이를 빌어 쓴 것이다.” 俄們常常把 東方的稱爲東夷 而夷字和人字是通用的仁字和人字也是出於一源 那魔漢語中 ‘人’的稱謂 支於還有出於東方的可能…. 假若夷人先成文化的先進 夷人先用了‘人’字作爲全人類的名類 西方候起的部族 可能再爲借用的(中國文化論集(2), 中韓關係論略).
일본 학자 고꾜 야스히꼬(오향청언, 吾鄕淸彦, こきょうきやひこ)는“사마천의 《사기(史記)》25권은, 단군 조선이 중원 대륙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 가지고, 마치 중국이 단군 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 엠 부찐도 그의 저서《고조선(古朝鮮)》에서 "한대(漢代) 이전에 현토와 낙랑 지역에 이르렀던 조선의 영역은 한 번도 중국의 제후국(諸侯國)이 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연(燕)나라나 주(周)나라에 예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기자조선(箕子朝鮮) 설은 주왕(周王)이 자신의 지배 하에 있지 않은 영토를 마치 통치한 것처럼 꾸민 전형적인 예라고 말하고 있다.
또 "중국의 역사가들은 연나라가 중국의 동북쪽 변방에 있었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연나라의 역할을 과장해서 표현해 왔다." 그러며, 당시 국력으로 보아 연나라가 조양에서 양평에 이르는 장성(長城)을 쌓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서량지(徐亮之) 교수는《중국사전사화(中國史前史話)》(1943년 10월 초판) 에서 이렇게 썼다. “4,000 여 년 전 한족(漢族)이 중국 땅에 들어오기 전에, 중원(中原)의 북부 및 남부를 이미 묘족(苗族:東夷)이 점령하여 경영하고 있었다. 한족이 중국에 들어온 뒤에 점점 서로 더불어 접촉하였다.” "은(殷)과 주(周) 이전과, 은나라 주나라 대에도 동이의 활동무대가 실로 오늘날의 산동, 하북, 발해 연안, 하남, 강소, 안휘, 호북지방, 요동반도, 조선반도의 광대한 지역을 모두 포괄하였는데「산동반도」가 그 중심지였다."
“중국의 책력법(冊曆法)은 동이(東夷)에서 시작되었다. 책력을 만든 사람은 희화자(羲和子)이다. 그의 혈통은 은(殷)나라, 상(商)나라의 동이족(東夷族) 조상이다. 동이가 달력을 만든 사실은 실로 의문의 여지가 없다.” “역법(曆法)은 사실 동이(東夷)가 창시자이며, 소호(小昊) 이전에 이미 발명되었다.” -曆法實倉始於東夷 而且小 以前便已發明.
한글재단 이사장인 한갑수(韓甲洙) 선생이 미국 공군지휘 참모대학에 입교했을 때, 같은 입학생인 중국학자 서량지(徐亮之)교수가 한 박사를 찾아와 이렇게 말했다. "귀국은 우리 중국보다 더 오래된 역사를 가진 위대한 민족인데, 우리 중국인이 한민족의 역사가 기록된 포박자(抱朴子)를 감추고 중국역사를 조작하는 큰 잘못을 저질렀으므로 본인(서량지)이 학자적 양심으로 중국인으로서 사죄하는 의미로 절을 하렵니다. 받아주십시오." 그리고 큰 절을 올렸다 한다.
중국 역사학자인 왕동령(王棟齡)은《중국사(中國史)》에서 “한족(漢族)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현재의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 등 지방은 본래「苗族(東夷)의 영속지였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이(九夷)인데 임금은 치우(蚩尤)였다.” 묘족(苗族)은 오늘날 양자강을 중심으로 한, 호북 호남성 등지에 분포되어 있는 소수민족이며, 위의 기록에 따르면 이들도 고대에는 동이족의 한 지류였음을 알 수 있다. 구려(句麗)는 구려(九黎), 구이(九夷)를 말하는 것으로, 이 구이의 군주가 치우(蚩尤)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黎東夷國名也 九黎君號蚩尤是也 蚩尤古天子 三苗在江淮荊州 (史記, 五帝本紀).
“4천년 전 (…) 현재의 호북성, 호남성, 강서성 등지를 이미 묘족(苗族)이 점령하고 있었으며, 중국의 한족(漢族)이 들어오면서 차츰 이들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민족의 나라 이름은 구려(九麗)이며, 군주는 치우(蚩尤)이다.”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
소련의 역사학자요 인류학자인 시로코고르프(シロコゴルフ)는 《중국사》에서 "주전 3,000년경 동이족(東夷族)은 이미 황하 양자강(揚子江) 서강의 중류이동(中流以東)의 중간 지역에 살았으며, 지나족(支那族)은 이보다 1,500~2,000년 후에 동방천자 치우(蚩尤)가 다스리는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인 강회(江淮)지방에 진출하였다."고 하였다.
일제의 대륙침략에 따라 중칭(重慶)으로 후퇴한 장개석(蔣介石) 총통은 함께 피난 온 상해임시정부의 김구 주석 일행을 위로하기 위해 만찬에 초대했었다고 한다. 이때 장 총통은 자기 고향이 옛 백제 땅이었다는 사실을 밝히면서 우의를 다졌다고 한다.
장 총통은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지적 입장에서 이런 역사인식을 말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를 들은 김구 주석은 충격과 함께 자괴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고 뒷날 술회한 바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백제가 중국 땅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김구 주석은 전혀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장개석의 고향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절강성(浙江省)이므로 옛 백제는 양자강 이남지역까지 지배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서량지나 임혜상 같은 양심있는 중국사학자들은 중국역사의 상고사는 한민족의 역사라고 말한다. 그리하여 가시마 노보루같은 일인학자는 한(漢)족은 기껏해야 한(韓)을 흉내내어 이름붙인 것이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식자층은 양자강 유역이 전통적으로 동이 9족의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장개석은 이 사실을 너무 잘알고 있었기 때문에 상해 임시 정부의 이시영 부통령에게 역사는 제대로 알고 독립운동하시는가 하고 물었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의 역사교과서에는 어느 한구석에도 이런 기록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역사 기록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심하게 왜곡되었음을 반증해 주는 하나의 예증에 불과하다.
고대역사를 다룬 사서 삼국사기,삼국유사 두 책은 중국이나 일제는 굳이 수거하지 않아도 될만큼 주체성을 상실한 책이었기에 이 두 책만은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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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역사에 관한 글 잘 보고 갑니다
네, 반갑습니다.
친일파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많은 것 같습니다
글 잘 보고 갑니다.
네, 그렇습니다. 대표적인 곳이 역사학계입니다. 친일청산에 실패했기 때문입니다.
역사글 잘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 합니다.
네, 반갑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