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많은 연주자들이 축제 기념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무대에 들어선다. 언뜻 보면 스태프인줄.
공연장 근처 까페에서는 악기를 멘 연주자들이 무리지어 수다를 떨고 있다.
해마다 7월이 되면 평소에는 한적한 인구 8천의 작은 마을, 사람보다 나무와 곰과 여우가 더 많을 것 같은 이 곳이 젊은 연주자들과 관객들이 뿜어내는 활기로 새로운 정체성을 뿜어낸다.
7월 27일. 아침부터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는다. 이른 아침 기차를 타야 하는데 콜택시가 제 때 오지 않아 기차를 놓쳐버린 것. 핀란드 서남부 끝에 자리잡은 뚜르꾸 (Turku)에서 핀란드의 오른편 허리에 해당하는 러시아 쪽 국경과 인접한 꾸흐모(Kuhmo) 까지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여정의 교통편이 좋지 않다. 기차와 버스를 갈아타고 10시간을 꼬박 이동해야 닿을 수 있는 마을. 투덜거리며 2시간 후에 출발하는 다음 기차표를 샀다.
꾸흐모에 도착하자마자 캐리어를 달달 끌고 공연장으로 향했다. 내가 보려는 공연이 펼쳐지는 곳은 학교 체육관이다. 1970년에 시작하여 이제 국제적으로 이름난 실내악 축제로 성장한 꾸흐모 페스티벌의 역사를 함께한 유서깊은 곳이다. 강당 무대에 반짝반짝 빛나는 초대형 스타인웨이 피아노가 올라가 있는 모습은 겉으로는 소박해 보이지만 속이 꽉 찬 이 축제의 특성과 실용성을 추구하는 핀란드인들의 성향을 함축하고 있는 것 같다.
플루트 연주자가 숨을 내쉬고 운지하는 미묘한 소리까지 귀에 전달된다. 실내악을 듣는 묘미란 이런 게 아닐까 싶다. 베토벤의 피아노 오중주도 인상적이었다. 연주자들이 견고하게 쌓아올려 치밀한 조화를 이루는 앙상블이 올여름 이 북유럽까지 찾아온 이상고온의 더위를 가시게 해주었다.
Shall we dance?
7월 28일. 춤곡 공연을 골랐다. 연주자들 중에 피아니스트 김다솔 씨와 오보이스트 함경 씨의 이름도 있어서 기대가 되었다. 공연은 생상의 죽음의 무도로 시작한다. 피아니스트의 타건과 페달링이 잘 보이는 자리를 일부러 골라 앉았다. 악보와 유튜브에 의지해서 피아노를 연습하다보니 페달링은 어떻게 해야 할 지 의문이 들 때가 많았는데, 특히 오늘 연주된 Eric Satie 의 Je te veux 를 연습할때마다 소리가 지저분한 느낌 때문에 늘 찝찝했는데 오늘 김다솔 피아니스트의 페달링을 보면서 여러 가지를 배웠다.
드뷔시의 Danse sacrée et profane. 드뷔시는 피아노 뿐만 아니라 하프라는 악기에도 천착했던 작곡가였던 것 같다. 그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온음계 화성이 하프의 선명한 퉁김 소리와 번지는 아르페지오에 실려 나를 성스러움과 세속스러움을 넘나드는 세계로 이끈다. 몽환적인, 좀 더 까놓고 말하자면 약을 한 것 같은 느낌을 표현하는데 도가 튼 작곡가가 드뷔시가 아닐까. 나도 하프 선율에 잠시 정신을 놓아본다. 한국 전통 민요의 5음 음계 같기도 하고 그레고리안 성가의 선법같이 들리기도 하는 온음계 화성법에 대해서는 언제 기회가 된다면 우리 까페의 회원들께서 해주시는 강연을 통해 좀 더 알고 싶다는 마음이 든다.
Fast, Faster, Fastest
저녁 공연은 바르톡과 브람스의 동유럽 춤곡으로 시동이 걸린다. 내가 좋아하는 브람스의 헝가리 무곡 1번이 흥겨운 듯 구슬프게 울려퍼진다. 피아노의 김다솔과 바이올린의 니키다 보리소-글렙스키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춤곡 시리즈의 엔딩을 마무리하는 순간 관객들의 흐뭇한 박수가 쏟아진다. 이후 레퍼토리에서는 점점 템포가 빨라지더니 마지막 프로그램인 리게티의 사교춤곡으로 절정에 다다른다. 수년 전 학생 신분으로 이 축제에 입문해서 이제 자신의 분야에서 이름난 연주자로 성장하고 있는 그들이다. 공연 후 로비에서 만난 오보이스트 함경 씨도 8년째 이 축제에 참가하고 있다고 한다. 자전거를 타고 공연장과 공연장 사이를 돌아다니는 그의 모습이 마치 현지인 마냥 자연스러워 보인다. 참, 다가오는 가을 시즌부터 암스테르담에서 헬싱키로, 핀란드 라디오 심포니 오케스트라로 옮겨 오보에 수석으로 활동을 하시게 된다고 해서 축하의 인사를 건넸다. 18-19 시즌에서 핀란드 방송교향악단이 도전하는 말러 사이클 뿐만 아니라 그가 오보에 솔로 페시지를 연주하는 모습 또한 기대해본다.
곰의 마을에서 인간계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Starry night.
7월초 부천필 공연에서 잠깐이었지만 만나뵙고 인사드릴 수 있어 반가웠고 좀 더 길게 얘기 나누지 못해 아쉬웠습니다. 다들 무더위에 건강 잘 챙기시고 여름 잘 보내세요.
첫댓글 리뷰 잘 읽었습니다.
마치 내가 현장에 있는 듯 상세하고 따듯한 느낌이 드는 글이네요.
꾸흐모 페스티벌, 인구 1만도 안되는 작은 도시에서
저 정도 규모의 멋진 공연을 만들어내다니 부럽기만 합니다.
고맙습니다.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작은 동네이지만 축제의 주공연장으로 쓰였던 문화예술회관의 연주홀도 그렇고 교회의 파이프 오르간 등.. 있을 건 다 있었어요.^^ 축제 기간 동안 마을 주민들이 자원봉사자로도 활동하고 홈스테이 숙소도 운영했는데 성수기인 여름철에 아침식사까지 포함된 아주 착한 가격에 잘 지내다 왔어요.
@starry night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느껴집니다.
저도 기회을 만들어서 꼭 가보고 싶네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