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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熱河)의 땅, ‘伊塞克湖=Issyk Kul’ 주변일대(周邊一帶)[2편]
2023년 08월 25일
○ “제1편”에서는, “열하(熱河) 땅은, 타안위(朶顏衛) 땅에 있었다”는 것을 설명(說明)하였다.
더불어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 땅에 삼위(三衛)를 설치(設置)한 것은,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2년’이라고 하였는데, 이때가 서력(西曆) 1,389년이라고 전해진다.
‘고황제(高皇帝)’가 누구냐? 하는 문제(問題)에 있어 조선사(朝鮮史)는 ‘이성계(李成桂)’라고 논리(論理)를 편다. 왜냐하면 “고황제(高皇帝)”는 바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를 지칭(指稱)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 1. [承政院日記 : 高宗 39년 임인(1902) 2월 20일(신해, 양력 3월 29일) : 기로소에서 성상의 춘추가 51세가 되는 예를 행할 것을 청하는 완평군 이승응의 상소 : “耆老所之設, 自我太祖高皇帝始 : 기로소(耆老所)의 설치는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로부터 시작되었으니… …”]하였다.
➨ 2. [承政院日記 : 高宗 39년 임인(1902) 3월 24일(갑신, 양력 5월 1일) : 서경(西京)에 이궁을 세우자는 의견을 진달하는 궁내부 특진관 김규홍의 상소 : “粵我太祖高皇帝, 旣定鼎于漢陽, 間復還都開城者, 亦存兩京之意 : 우리 태조 고황제(太祖高皇帝)께서 한양(漢陽)에 수도를 세운 뒤에 간혹 다시 개성(開城)으로 돌아가 머물렀던 것도 두 개의 수도를 두고자 했던 것인데… …”]하였다. 고황제(高皇帝)는, 오늘의 주제(主題)가 아니므로 일단(一旦) 접어두기로 하자.
역사통설(歷史通說)【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친일사관(親日史觀)】논자(論者)들의 해설(解說)에 따른다면 : 이곳에 등장(登場)하는 “고황제(高皇帝)”가 “태조(太祖) 주원장(朱元璋)”을 칭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 당시(當時)의 “명(明)”나라는 “한반도(韓半島) 국가(國家)였다”는 결론(結論)에 다다를 수밖에 없다. 과연(果然) 그런가?
○ “제2편”에서는 “열하(熱河)”는 무엇을 의미(意味)하며, 오늘날의 어디에 있었는가에 대한 설명(說明)을 이어가기로 하자.
(4) 열해(熱海) · 설해(雪海)
新唐書 [43下.志第33下.地理7下.羈縻州.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 :《烏孫所治赤山城也.又三十里渡真珠河,又西北度乏驛嶺,五十里渡雪海,又三十里至碎卜戍,傍碎卜水五十里至熱海. : 오손(烏孫)이 이 땅을 다스리는 적산성(赤山城)이다. 또 30리의 진주하(眞珠河)를 건넌다. 또 서북(西北)으로 역령(驛嶺)을 못 미쳐, 50리에 설해(雪海)를 건너고, 또 30리에 쇄복수(碎卜戍)에 다다른다. 쇄복수(碎卜水)에 기대어 50리를 가면 열해(熱海)에 닿는다.》라고 하였다.
【新唐書43下.志第33下.地理7下.羈縻州.入四夷之路與關戍走集 / 原文本文 [3-1] :《安西西出柘厥關,渡白馬河,百八十里西入俱毗羅磧.經苦井,百二十里至俱毗羅城.又六十里 至阿悉言城.又六十里至撥換城,一曰威戎城,曰姑墨州,南臨思渾河. 乃西北渡撥換河,中河,距思渾河百二十里,至小石城.又二十里至于闐境之胡蘆河.又六十里至大石城,一曰于祝,曰溫肅州.又西北三十里至粟樓烽.又四十里度拔達嶺.又五十里至頓多城,烏孫所治赤山城也.又三十里渡真珠河,又西北度乏驛嶺,五十里渡雪海,又三十里至碎卜戍,傍碎卜水五十里至熱海.又四十里至凍城,又百一十里至賀獵城,又三十里至葉支城,出谷至碎葉川口,八十里至裴羅將軍城.又西二十里至碎葉城,城北有碎葉水,水北四十里有羯丹山,十姓可汗每立君長於此.自碎葉西十里至米國城,又三十里至新城,又六十里至頓建城,又五十里至阿史不來城,又七十里至俱蘭城,又十里至稅建城,又五十里至怛羅斯城.】
➊ 『열해(熱海)』 : 《[伊塞克湖 : 亦吉里寬 : Issyk Kul]를 말하는 것이고, 주요유입하천(主要流入河川)은, 빙천(冰川)이다. 주요(主要) 수원(水源)은 높은 산에 쌓여있는 빙설(氷雪)과 빙하(氷河)에서 녹아 흘러내리는 물이다. 이곳은 기후(氣候)가 온난(溫暖) 건조(乾燥)하며, 1월 평균기온(平均氣溫)은 영하(零下) 6도, 여름철인 7월의 평균기온(平均氣溫)은 15-25도 사이다. 【主要水源是高山泉水和積雪融水, 氣候溫和乾燥, 1月平均氣溫-6℃,7月平均氣溫15~25℃.】》라고 설명(說明)하고 있다.
즉(卽) 『이곳 땅은 겨울(冬節期)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15도 ∼ 25도 사이이며, 흐르는 물은 차갑고, 건조(乾燥)하기 때문에 하절기(夏節期) 피서지(避暑地)로 유명(有名)한 곳이다』라는 이야기다. 이런 곳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었다면 자연(自然)의 이치(理致)다.
➨ 이식쿨호[Issyk Kul=열해(熱海)-키르기스스탄[Kyrgyzstan]] :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식쿨호, 이식쾰호 또는 이스쿨호[키르기스어: Ысыккөл, 러시아어: Иссык-Куль]는 키르기스스탄[Kyrgyzstan] 동(東)쪽에 위치한 호수(湖水)로, 유역 길이는 6236 km2 이며, 유역 면적은 1738 km3 이다. 호수(湖水) 이름은 ‘따뜻한 호수’를 의미하는 키르기스어다.
➨ “열해(熱海)”에 대한 기록(記錄)을 찾아보면 : 이 기록(記錄) 속에는 이곳 땅의 동(東)쪽에는 삼한(三韓)이 있었다는 놀라운 기록(記錄)이 있다. [전회(前回)에 우리 카페(Cafe)에 게재(揭載)한 바 있다]
➋ 열해(熱海) : 婆羅門 六首 [作者:耶律鑄, 元, 上雲樂 / 本作品收錄於䨇溪醉隠集(四庫全書本) 卷2 和 雙溪醉隱集 卷2] : 熱海氣蒸為喜雨,凍城寒結就愁隂。中心甚欲期真宰,教使人知造物心。[註釋 : 安西都䕶境內有熱海去熱海四十里有凍城唐新史同 : 안서도호(安西都護) 경내(境內)에 열해(熱海)가 있는데, 열해(熱海)로부터 40리 떨어져 동성[凍城 :凍 / 얼 동(凍)]이 있다. 당(唐) 신사(新史)와 같다.]
唐詩 [岑參] 熱海行送崔侍御還京 : 側聞陰山胡兒語,西頭熱海水如煮。海上衆鳥不敢飛,中有鯉魚長且肥。岸傍青草常不歇,空中白雪遙旋滅。蒸沙爍石燃虜雲,沸浪炎波煎漢月。陰火潛燒天地鑪,何事偏烘西一隅。勢吞月窟侵太白,氣連赤坂通單于。送君一醉天山郭,正見夕陽海邊落.柏臺霜威寒逼人.熱海炎氣爲之薄。
➨ 《당(唐) 잠삼(岑參)의 熱海行送崔侍御還京 / 側聞陰山胡兒語,西頭熱海水如煮 : 음산(陰山)의 오랑캐 아이(胡兒)들의 말을 어렴풋이 들으니, 서쪽 머리 열해(熱海)의 물은 삶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여기서 알 수 있는 것은 「음산(陰山)은 천산산맥(天山山脈)의 큰 봉우리」고, 「그 서(西)쪽에 열해(熱海)가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 1. 연행록(燕行錄) : 燕途紀行 上【麟坪大君 ; 이요(李㴭)】에서 이르기를 : 《孟冬。余扈今上孝廟潛邸時.曁昭顯.從淸人獵於建州之牛毛嶺. : 10월에, 나는 금상(今上) 【효종(孝宗)이 잠저(潛邸)에 있을 때】과 소현세자【昭顯世子 : 인조(仁祖)의 장남(長男)】를 호종(扈從), 청인(淸人)을 좇아 건주(建州) 우모령(牛毛嶺)에서 사냥(獵)을 했다. 嶺卽渡遼時吾東營將金應河死節地. : 이 고개(嶺)는 곧 요동(遼東)을 건너갈 때, 우리나라 영장(營將) 김응하(金應河)가 절사(節死)한 곳이다. 陰山大獵.縱云壯觀.露宿霜雪.驅馳氷路.喫盡苦狀.還到瀋陽。: “음산(陰山)”에서 하는 큰 사냥이 비록 장관이라고는 하나, 서리와 눈 위에서 노숙(露宿)하며 얼음길을 달려 다니노라니 고생이 심하였다.》라고 하였다.
즉(卽), 「건주(建州) 우모령(牛毛嶺)은 곧 음산(陰山)에 있다」라는 뜻이다. 반도(半島) 북방(北方) 땅과는 전혀 관계없는 일만(一萬) 리(里) 서(西)쪽 땅의 이야기다. 즉(卽) “청(淸)=후금(後金)”은, 한반도(韓半島) 북방지대(北方地帶)가 아닌 “일만(一萬) 리(里) 서(西)쪽 땅의 호인(胡人)이었다”라는 것이다.
또한 본래의 연경(燕京) 또한 “일만(一萬) 리(里) 서(西)쪽 땅의 호인(胡人) 땅에 있었다”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북경(北京)은, 연경(燕京)을 모방(模倣)한 모조품(模造品)이었을 뿐이다.
➨ 2. 일록(日錄) 서(序) : 《粤惟丁丑之兵.邦運不幸.乘輿去邠.江都淪沒.萬姓魚肉. : 생각하면, 정축년[1637, 인조 15] 병란(兵亂) 때는 나라의 운수가 불행해서 임금이 수레를 타고 도성을 떠났으며, 강도【江都 강화(江華)】까지 함락되어 모든 백성은 어육(魚肉)이 되었다. 于是時也.余奉今上.久在虜陣.宗社安危。間不容髮。: 이때에 나는 금상(今上)을 모시고 오랫동안 오랑캐의 진영(陣營)에 있었는데, 종묘사직의 안위(安危)는 숨 쉴 사이도 없이 다급했었다. 及夫南漢議和.靑丘賴安.而今上曁昭顯世子.竟未免沙磧之行. : 남한산성에서 화친이 맺어짐에 이르러는 우리나라가 편안할 수 있었으나, 금상과 소현세자(昭顯世子)는 마침내 청나라 사막(沙漠)에 가는 것을 면치 못했다. 余獨扈駕還都.北望遼山.只切飮泣之情 : 나는 홀로 임금을 모시고 서울로 돌아와서 북쪽으로 요산(遼山)을 바라보니, 오직 눈물 흘리는 정이 간절할 뿐이었다.》라고 하였다.
곧 당시(當時)의 “후금(後金)의 건주(建州)는 사막지대(沙漠地帶)를 통과(通過)해야 갈 수 있다”는 뜻이다. 딱 맞는 이야기다.
“호인(胡人)”이란 : ‘서방종족(西方種族) 및 북호(北胡)’를 말하는 것으로, 한반도(韓半島)의 북방지대(北方地帶)와는 전혀 관계없는 종족(種族)이자, 부족(部族)들이다.
그런데도 조선사(朝鮮史)에서 “호인(胡人)”들이 나오는 것은, 조선왕조(朝鮮王朝)가 한반도(韓半島) 땅이 아닌, 대륙(大陸)의 요충지(要衝地) 땅에 있었다는 증거(證據)다.
➌ 열해(熱海) : 碎葉國 / 碎葉國從安西西北千餘里。有秋達嶺。嶺南是大唐北界,嶺北是突騎施南界。西南至葱嶺二千餘里。其水嶺南流者,盡過中國而歸東海。嶺北流者,盡經胡境,而入北海。又北行數日,度雪海。其海在山中,春夏常雨雪,故曰雪海。中有細道,道傍往往有水孔,嵌空萬仞,輒墮者莫知所在。㪍達嶺北行千餘里,至碎葉川。其川東頭有熱海,茲地寒而不凍,故曰熱海。又有碎葉城。天寶七年,北庭節度使王正見薄伐。城壁摧毀,邑居零落。昔交河公主所居止之處,建大雲寺猶存。其川西接石國。約長千餘里。川中有異姓部落。有異姓突厥。各有兵馬數萬,城堡間雜,日尋干戈,凡是農人,皆擐甲冑,專相虜掠,以為奴婢。其川西頭,有城名怛邏斯。石國大鎮。即天寶十年高仙芝軍敗之地。從此至西海以東,自三月至九月,天無雲雨,皆以雪水種田,宜大麥、小麥、稻禾、豌豆、畢豆。飲蒲萄酒、糜酒、醋乳。
➍ 쇄엽(碎葉) : 新唐書 卷221 列傳 第146上·下 西域 : 《有碎葉者, 出安西西北千里所, 得勃達嶺, 南抵中國, 北突騎施南鄙也, 西南直葱嶺贏二千里. : 쇄엽(碎葉)이 있는데, 안서(安西)를 나와 서북으로 1천리(千里) 되는 곳이며, 발달령(勃達嶺)을 끼고 있어, 남(南)으로는 중국(中國)에 닿고, 북(北)으로는 돌기시(突騎施)에 닿아 그 남부 변방을 이루며, 서남(西南)으로는 곧바로 총령(葱嶺)까지 2천여 리이다. 水南流者經中國入于海, 北流者經胡入于海. : 남(南)쪽으로 흐르는 강물은 중국(中國)을 거쳐 바다로 들어가고, 북(北)쪽으로 흐르는 것은 오랑캐(胡) 땅을 거쳐 바다로 들어간다. 北三日行度雪海, 春夏常雨雪. : 북(北)쪽으로 3일을 가면 설해(雪海)를 넘는데, 봄과 여름에 항상 비와 눈이 온다. 繇勃達嶺北行贏千里, 得細葉川. : 발달령에서 북(北)쪽으로 천여(千餘) 리 가면 세엽천(細葉川)을 만난다. 東曰熱海, 地寒不凍; 西有碎葉城, 天寶七載, 北庭節度使王正見伐安西, 毀之. : 동(東)쪽에는 열해(熱海)라고 하는데 땅(地)은 차가우나 얼지 않는다. 서(西)쪽에는 쇄엽성(碎葉城)이 있는데, 천보 7년(AD 748) 북정절도사(北庭節度使) 왕정견(王正見)이 안서(安西)를 정벌하고 그곳을 파괴하였다. 川長千里, 有異姓突厥兵數萬, 耕者皆擐甲, 相掠爲奴婢. : 강(江)의 길이는 천리(千里)이다. 서로 다른 성(姓)을 가진 돌궐(突厥)의 병력(兵力)이 수만(數萬)이 있으며, 농사짓는 사람들은 모두 갑옷을 입고, 서로 약탈하여 노비(奴婢)로 삼는다. 西屬怛邏斯城, 石常分兵鎮之. : 서(西)쪽으로 달라사성(怛邏斯城)에 속하는데, 석국(石國)이 항상 그곳에 병력을 나누어 주둔시키고 있다. 自此抵西海矣. 三月訖九月, 未嘗雨, 人以雪水溉田. : 이곳에서 가면 서해(西海)에 도달한다. 3월에서 9월까지 비가 오지 않으며, 사람은 눈(雪) 녹은 물[雪水]로 밭은 관개한다.
➨ 여기서 “쇄엽(碎葉)=쇄엽성(碎葉城)=수야브[Suyab]”란 : ‘Suyab’을 번역(飜譯)한 말로,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Kyrgyzstan]의 톡막[Tokmak]을 가리키는 말이라고 한다. 비슈케크[Bishkek]에서 동(東)쪽으로 약 50km, 현재 키르기스스탄의 ‘추[Chu : 초하(楚河)]’강 계곡(溪谷)에 있는 ‘톡막[Tokmak]’에서 남서(南西)쪽으로 8km 떨어진 ‘고대 실크로드 도시’라고 전해진다. 이건 21세기 역사통설(歷史通說) 논자(論者)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碎葉城 [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 碎葉城(吉爾吉斯語:Суяб / Suyab;波斯語:سوی آب),或譯爲「素葉」、「睢合」,即今阿克·貝希姆遺址(Ak-Beshim),位於今吉爾吉斯楚河州托克馬克市西南8公里處[1],楚河南岸。碎葉城的誕生與古老的絲綢之路息息相關。早在5世紀~6世紀,此地便因沿著絲綢之路的粟特商人而興起。玄奘法師於629年在該地區旅行時也曾記錄早期的碎葉城。
現存遺蹟可追溯至唐高宗調露元年(679年)由唐將王方翼所修築城池,用以取代焉耆鎮,是西域所設之重鎮。此城乃是中國歷代以來,在西部地區設防最遠的一座邊陲城市。碎葉(或焉耆)與龜茲、疏勒、于闐並稱為唐代「安西四鎮」。碎葉城本為西突厥屬地,貞觀三年(629年),玄奘在素葉水城(碎葉)見西突厥統葉護。玄奘在《大唐西域記》記述:「自凌山行四百餘里至大清池……清池西北行五百餘里至素葉水城,城周六七里,諸國商胡雜居也。」考古學家們在此城的寺廟廢墟內撿到四枚唐代錢幣,上面有「開元通寶」和「大曆通寶」字樣,由此可見,碎葉在唐代也是座重要的商鎮。尤其自建立安西都護府以來,碎葉城的地位日漸顯耀。[2][3]
李白 : 郭沫若等人認為,唐代大詩人李白就出生在碎葉城內一個富商之家[4]。該觀點認為,李白在碎葉一直長到五歲,幼小時,其父就在這裏教他讀司馬相如的辭賦。但也有觀點認為李白出生於四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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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쇄엽천(碎葉川)=楚河”[維基百科,自由的百科全書] :(吉爾吉斯語:Чүй,羅馬化:Čüy;哈薩克語:Шу,羅馬化:Šuw[1];俄語:Чу),又名碎葉川(吉爾吉斯語:Суйаб өзөнү,羅馬化:Suyab özönü),位於中亞地區,是吉爾吉斯斯坦、哈薩克斯坦著名的河流。楚河源出位於泰爾斯凱山脈和吉爾吉斯阿拉套的瓊阿雷克河和科奇科爾河,兩源皆源出位於吉爾吉斯境內的天山山脈,兩源流匯合後向東北流,1950年代以前有支流名叫庫捷馬爾迪河(Ketmaldy )連通伊塞克湖,現在僅在洪水期才有水排入該湖,楚河流經該湖附近後轉向西北流,成為吉爾吉斯斯坦與哈薩克斯坦的界河,並在比什凱克西北50km處進入哈薩克斯坦境內,繼而橫穿穆雲庫姆沙漠,最後匯入阿克扎伊肯湖。河流全長1067km,流域面積6.25萬km2,多年平均流量61m3/s ,徑流量19.2億m3。
楚河不是東干人的發源地。當年東干人逃脫清朝的追兵之後,來到碎葉川流域。由於這裡土地肥沃,所以他們在這裡定居下來,並生長繁衍下去。被稱為碎葉城的阿克·貝希姆遺址和八剌沙袞(Balasagun)也在附近。
名稱 : 廣傳Čüy、Šuw等突厥語名稱來自藏語「曲」(藏語:ཆུ,藏語拼音:qu,注意qu不是qü之省略,其元音是u)或漢語「水」。Е. Койчубаев則認為該河名源自名為чу, чуе, шу或шуй的古代突厥語部落。[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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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열해(熱海)”란 “이식쿨 호수(湖水)”를 말하고, ‘Issyk’이란 투르크[Turk] 말로 ‘뜨겁다’는 의미(意味)라고 한다.
“쇄엽천(碎葉川)은 초하(楚河)”라고 하는데, “초(楚)나라의 초하(楚河)”가 멀리 원정(遠征)을 떠나신 건가? 【초(楚)는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의 나라로 진(秦)의 시황(始皇)에게 소멸(消滅)되었다.】
➎ 열해(熱海) : 《讀史方輿紀要 山西 : 咽麵亦敕勒種,居得嶷海.唐咸亨四年.弓月部北招咽麵,連兵以叛,既而復降. : 인면(咽麵) : 인면(咽麵)은 또한 칙륵(勅勒)의 종류(種類)이며, 억해(嶷海)를 얻어 산다. 당(唐) 함형(咸亨) 4년, 궁월부(弓月部) 북(北)쪽의 “인면(咽麵)”이 부르자, 연병(連兵)하여 배반하였으나, 이미 다시 항복하였다. 永淳初,西突厥阿史那車薄叛,圍弓月城,咽麵復與車薄合,安西都護王方翼擊破之於熱海.唐志:有咽麵州,寄於北庭府界內. : 영순(永淳)초에, 서돌궐(西突闕) ‘아사나거박’이 배반하여, 궁월성(弓月城)을 포위하자, 인면(咽麵)은 다시 ‘거박(車薄)’과 함께 합쳤으나, 안서도호(安西都護) ‘왕방익’이 ‘열해(熱海)’에서 격파(擊破)하였다. 당지(唐志) : 인면주(咽麵州)가 있는데, 북정부(北庭府) 경내(境內)에 붙였다.》
➏ 달라사성(怛羅斯城) :《怛邏斯城在故石國東北.杜佑曰:碎葉川長千餘里,東頭有熱海,西頭有怛邏斯城. : 달라사성(怛羅斯城)은 옛 석국(石國)의 동북(東北)에 있다. 두우(杜佑)가 이르기를 : 쇄엽천(碎葉川)은 길이가 천여(千餘) 리인데, 동쪽의 꼭대기엔 열해(熱海)가 있고, 서쪽 꼭대기엔 달라사성(怛羅斯城)이 있다. 중략(中略). 天寶十載,高仙芝自安西討大食,大敗於怛邏斯城,是也. : 천보(天寶) 10년, 고선지(高仙芝)가 안서(安西)를 토벌(討伐)할 때, 대식(大食)에게, 달라사성(怛羅斯城)에서 크게 패하였다. 이곳이다. 》
〈열해(熱海)는, 이식쿨호[Issyk Kul]를 말하는 것이다.〉
※ 필자(筆者) 주(注) : 《달라사성(怛羅斯城)은, 바로 탈라스[怛羅斯, Talas]를 말하는 것이며, 고선지(高仙芝) 장군(將軍)의 7만 군대(軍隊)【3차 원정대(遠征隊)】와 서역(西域) 각국(各國)의 연합군(聯合軍)이, 탈라스[怛羅斯 : Talas]의 대평원(大平原)에서 격돌(激突)하였는데, 갈라록(葛邏祿 : Karluk)이 배후(背後)을 공격(攻擊)하는 바람에, 고선지(高仙芝) 부대(部隊)는 패배(敗北), 후퇴(後退)하였는데, 이것이 유명(有名)한 “탈라스(怛羅斯) 전투(戰鬪)”이다.》
※ 필자(筆者) 주(注) : 갈라록(葛邏祿) : 《葛邏祿國在漠北,近故庭州境.唐紀:在北庭西北金山之西,亦突厥諸種也.一名哥邏祿,有三族:一謀落,亦作謀剌.二熾俟,亦作婆匐.三踏實力. : 갈라록 국(葛邏祿國)은 막북(漠北)에 있다. 예전의 정주【庭州 : 필자(筆者) 주(注) : 신강성(新疆省) 적화부(迪化府)이며, 옛 고창(高昌)이며, 한(漢)때의 거사후왕정(車師侯王庭)의 땅이다】지경에 가깝다. 당기(唐紀)에 : 북정(北庭) 서북(西北)의 금산(金山)의 서(西)쪽에 있는데【필자(筆者) 주(注) : 금산(金山)의 서(西)쪽이라면, 현(現) 카자흐스탄의 ‘카라간다’ 및 ‘아스타나’ 지방이다.】, 모두 돌궐(突闕)의 여러 종류(種類)이다. 일명 ‘가라록’이며,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모락(謀落)이며, 또한 모랄(謀剌)이다. 둘째는 치사(熾俟)이며 또한 파복(婆匐)이다. 셋째는 답 실력(踏實力)이다.》라고 하였다.
➐ 《熱海在碎葉城東.雖寒不凍.唐永淳初,王方翼敗西突厥叛部於伊麗河. : 열해(熱海)는 쇄엽성(碎葉城) 동쪽에 있다. 비록 추워도 얼지 않는다. 당(唐) 영순(永淳)초에, 왕방익이 배반한 돌궐(突闕)에게 이려하(伊麗河)에서 패하였다. 既而三姓咽面與西突厥合兵拒方翼,方翼又敗之於熱海,是也. : 삼성(三姓)의 인면(咽面)과 서돌궐(西突闕)의 연합병(聯合兵)이 이미 왕방익 군에게 대항하니, 왕방익은 열해(熱海)에서 패하였다. 이곳이다. 杜佑曰:碎葉川長千里,東頭有熱海,西頭有怛羅城.又有雪海,亦在碎葉城北數百里,春夏常雨雪. : 두우가 이르기를 : 쇄엽천(碎葉川)은 길이가 천리(千里) 인데, 동쪽 꼭대기에 열해(熱海)가 있고, 서쪽 꼭대기에 달라성(怛羅城)이 있다. 또 설해(雪海)가, 또한 쇄엽성(碎葉城) 북쪽 수백(數百) 리에 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상시 비와 눈이 내린다》라고 하였다.
➤➤➤ “쇄엽천(碎葉川)”의 동쪽 상류(上流)측에 “열해(熱海)”가 있다는 말이며, 이곳은 아무리 추워도 얼지 않는 온화(溫和)한 곳이란 이야기다. 또 “쇄엽성(碎葉城) 북(北)쪽 수백(數百) 리에는 설해(雪海)”가 있어 하절기(夏節期)에는 피서지(避暑地)가 된다는 뜻이다.
즉(卽), 쇄엽성(碎葉城) 북(北)쪽 수백(數百) 리에 설해(雪海)가 있는데, 봄과 여름에도 비와 눈이 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곳에 황제(皇帝)들이 더운 날씨를 피해 행재소(行在所)를 설치(設置), 정무(政務)를 보는 곳이 곧 ‘피서산장(避暑山莊)’이란 것이다.
또한 ‘열해(熱海)’도 마찬가지다. 하절기(夏節期)에도 평균기온(平均氣溫)이 15∼25도 사이라면 인간(人間)이 살아가기엔 최적기온(最適氣溫)이다. 이러한 곳에 하절기(夏節期)마다 황제(皇帝)들이 더위를 피해 정무(政務)를 보던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있었다고 하면 그 이름은, 명불허전(名不虛傳)일 것 같다.
➑ 설해(雪海) : 婆羅門 六首 [作者:耶律鑄, 元, 上雲樂 / 本作品收錄於䨇溪醉隠集(四庫全書本) 卷2 和 雙溪醉隱集 卷2] : 《雪海迤延窮地界,雪山迢逓際天涯。但為日月光臨處,終一曾偏照一家。[雪海在安西都䕶境唐新史同雪山在其東鄙 : 설해(雪海)는 안서도호(安西都護) 지경에 있는데, 당(唐) 신사(新史)와 같다. 설산(雪山)은 그 동비(東鄙)에 있다.]》고 하였다.
‘열해(熱海)’ · ‘설해(雪海)’
○ 『열하(熱河)와 열해(熱海)』는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글자다. 『열해(熱海)는 열하(熱河)가 될 수 있으며, 열하(熱河)는 열해(熱海)가 될 수 있다』는 뜻이다.
『열하(熱河)의 땅』은 : 〈설해(雪海)【피서산장(避暑山莊) : 고산지대(高山地帶)의 적설(積雪)이 흐르는 땅】가 있어야 하고, 열해(熱海)【온천(溫泉) : 기온(氣溫)이 온화(溫和)한 땅】가 있어야 하며, 이곳은 “타안위(朶顏衛)의 땅”이어야 하는 조건(條件)을 충족(充足)시켜야 한다〉
➀ 즉(卽) 온천(溫泉)과 온화(溫和)한 땅인 ’열해(熱海)=열하(熱河)‘가 있어야 하고,
➁ 여기에 하절기(夏節期)에 피서산장(避暑山莊)이 생길 수 있는 설해(雪海) 또는 열해(熱海)가 있어야 함은 너무도 당연지사(當然之事)다.
➂ 더구나 “열하(熱河)의 땅”이 바로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의 땅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중국(中國) 역사해설(歷史解說)에서도 ’올량합(올良哈)=오량해(烏梁海)‘ 부족(部族)들은 본래(本來) 서백리아(西伯利亞)【西 Siberia 盆地】의 돌궐(突厥)계 종족(種族)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이들 ’올량합(兀良哈)=오량해(烏梁海)‘들이 이동(移動)했다고 했을 때, 가능한 곳은, ’남(南)쪽과 동남(東南)‘뿐이다. 곧 「알타이(Altai)산 주변과 발하슈호(Balkhash, 湖)【서(西) 호수(湖水)는 담호(淡湖), 동(東)은 염호(鹽湖)】남(南)쪽 땅」이다.
역사적(歷史的)으로, 지리적(地理的)으로, “열하특별구역(熱河特別區域)”이 설치(設置)될 수 있는 곳은 어디일까? 위의 글 “(1)+(2)”에서는 이미 “타안위(朶顏衛)”의 땅에 대해서는 결론(結論)을 내놓고 있다.
즉(卽), 이식쿨호[Issyk Kul=열해(熱海)] : [키르기스스탄(Kyrgyzstan)] : 좌표: 북위 42° 30′ 동경 77° 00′][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이식쿨호, 이식쾰호 또는 이스쿨호[키르기스어: Ысыккөл, 러시아어: Иссык-Куль]는 키르기스스탄[Kyrgyzstan] 동(東)쪽에 위치한 호수로, 유역 길이는 6236 km2 이며, 유역 면적은 1738 km3 이다. 호수 이름은 ‘따뜻한 호수’를 의미하는 키르기스어다.》에 유입(流入)되는 지류(支流) 일대(一帶)의 땅을 말하는 것이다.
➨ 이곳 일대(一帶)의 ‘동(東)’쪽에는 바로 옛 ‘삼한(三韓)=조선왕조(朝鮮王朝)’가 수천년(數千年) 영욕(榮辱)의 세월(歲月)을 버티며 대제국(大帝國)을 형성(形成)하고 있었다. 이건 필자(筆者)가 홀로 주장(主張)하는 것이 아니다. 옛 고전(古典) 원전(原典) 속에서 기록(記錄)을 찾아내고, 그것을 고증(考證)하고, 논리(論理)를 펴고, 주장(主張)하는 것이다.
『東 臨 三 韓』
○ 婆羅門 六首 [婆羅門〈六首〉/ 作者:耶律鑄, 元] : 파라문(婆羅門) 6수(首)는 원(元) 때의 야율 주(耶律 鑄)의 작품(作品)인데, 4번째 시문(詩文)의 주석(注釋) 편에 “삼한(三韓)”에 대한 이야기가 기술(記述)되어 있다.
【婆羅門 六首 / 著者 : “耶律鑄[1221年—1285年], 字成仲。契丹族人,耶律楚材之子,遼太祖耶律阿保機 十世孫”이라고 전해지는 인물(人物)이다.】
4. 黃草泊圍青草甸,白楊河繞緑楊堤。/ 依然名是叅天道,誰使唯聞戰馬嘶。〈北庭都䕶境內有白楊及黃草泊唐新史同國朝所設驛傳東臨三韓西抵濛汜黃草泊白楊河皆正驛路也〉
곧《北庭都䕶境內有白楊及黃草泊唐新史同國朝所設驛傳東臨三韓西抵濛汜黃草泊白楊河皆正驛路也 : ‘북정도호(北庭都護) 경내(境內)’에, 백양(白楊), 황초박(黃草泊)이 있는데, 신당서(新唐書)와 같다. 나라 조정(國朝)에서 역참(驛站)을 설치(設置)한 바 전하기를, 동(東)으로는 삼한(三韓)에 임하며, 서(西)쪽으로는 몽사(蒙汜), 황초박(黃草泊), 백양하(白楊河) 모두에 이르는데, 잘 갖춰진 역로(驛路)이다.》라고 하였다.
북정도호(北庭都護)는, 북정도호부(北庭都護府)를 말하는 것으로, “오늘날의 신강성(新疆省) 우루무치【오노목제 : 烏魯木齊】경내(境內)에 있었다”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설명(說明)하는 구절(句節)에서 1만 리(萬里) 떨어져 있는 동(東)쪽의 반도(半島) 땅 삼한(三韓)을 말하며, “동림삼한(東臨三韓)”이라는 말을 서술(敍述)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동림삼한(東臨三韓)’이란 말로 표현(表現)할 수 있다면 「북정도호(北庭都護)의 경내(境內)를 벗어나면 그 동(東)쪽으로는 삼한(三韓)이다.」 라는 말과 같다.
즉(卽) 국조(國朝)에서는, 북정도호(北庭都護)의 경내(境內)의 서(西)쪽으로 몽사(蒙汜), 황초박(黃草泊), 백양하(白楊河)에 닿는데 모두 역로(驛路)가 잘 만들어져 있으며, 또한 동(東)쪽으로는 삼한(三韓)에 임하는데, 역시 역참(驛站)이 잘 갖춰져 있다는 이야기다.
이게 ‘일만(一萬) 리’도 넘게 떨어져 있어, 사막(沙漠), 하천(河川), 산맥(山脈), 호수(湖水), 바다(海)를 건너야 갈 수 있는 ‘반도(半島) 땅 삼한(三韓)’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위 시(詩)에서 말하는 것은, ‘북정도호(北庭都護) 주변일대(周邊一帶) 곧 경내(境內)’를 설명(說明)하는 것이다. 그 아래 구절(句節)을 보면 “천산(天山)과 한해(瀚海) 및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의 설해(雪海)”등과 관계(關係)있는 지명(地名)과 하천(河川)과 호수(湖水)들을 설명(說明)하고 있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 1. 곧, 「‘북정도호(北庭都護)의 경내(境內)’를 벗어난 곳의 동(東)쪽 땅에는 삼한(三韓)과 임(臨)하였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즉(卽)「삼한(三韓)은 이때 북정도호(北庭都護)의 경외(境外)에 있었다」는 것으로 해석(解釋)될 수 있다.
➨ 2. 또 하나는 : 興復哈密國王記 [作者:馬文升 明]에 기록(記錄)되어 있는 본문(本文) 중에서 : 《報 至, 朝 野 頗 驚. : [朝 野 頗 驚], “野” 原 作 “鮮”,據 明 朱 當 㴐 國 朝 典 故 本 改.] : 보고(報告)에 이르자, 조야(朝野)가 놀라 두려워하였다. : [朝 ‘野’ 頗 驚 의 글자 중에서 “야(野)”는 원작(原作)에는 “선(鮮)”으로 되어 있으나, ‘국조전(國朝典)’의 고본(故本)에 의거 고쳤다[改].》라고 하였다.
➊ 본래(本來) 원문(原文)에는 : 〈報 至, 朝 鮮 頗 驚 : 보고에 이르자, 조선(朝鮮)은 놀라 두려워하였다.〉는 이야기가 된다.
➋ 조야(朝野) : 조정(朝廷)과 민간(民間)을 뜻하는 말이고, ➨ ‘조선(朝鮮)’ : 나라 이름(國名)을 뜻하는 것이므로, 곧 조선왕조(朝鮮王朝)를 뜻하는 말이 되며, 〈당시(當時) 합밀(哈密)의 동(東)쪽에는 “명(明)”나라가 아닌 “조선(朝鮮)”이 있었다〉라는 것을 확인(確認), 증거(證據)해주는 귀중(貴重)한 사료(史料)다.
○ 『연경(燕京) 동북(東北) 420리에 열하(熱河)가 있다.』
『쇄엽성(碎葉城) 북방(北方) 수백(數百) 리에 설해(雪海)가 있다. 또 그 동(東)쪽에 열해(熱海)가 있다. 이러한 곳에 하절기(夏節期) 피서산장(避暑山莊)을 두고, ‘여진족(女眞族) 청(淸) 황제(皇帝)’가 정무(政務)를 보았다는 것이고, 그 남(南)쪽의 온천(溫泉)에서 휴식(休息)을 취(取)했다고 하면 아주 멋진 황제(皇帝)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을 것이다.
옛 고전(古典)인 “산해경(山海經)에서, 회남자(淮南子)” 등에서는, “숙신(肅愼)=여진족(女眞族)들의 본거지(本據地)는 서(西)쪽과 북(北)쪽에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런 기록(記錄)은 수천년(數千年)에 걸쳐 이어져 왔다는 것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쇄엽성(碎葉城)’은, ‘당(唐) 이백(李白)의 고향(故鄕)’이라고도 전해지고 있다.
2023년 08월 25일 [글쓴이 : 문무(文武)]
첫댓글 다음 회의 주제로는 "만산군"과 관계되는 것을 주제로 할 예정입니다.
만산군이란 : 홍건적에게 포로된 고려인, 또는 호란(胡亂)때 끌려간 조선인, 군정을 피하고자 도주한 조선인 등등 그 설명이 통일된 것이 없는 중구난망식인데, 특히 이들을 "胡人(호인)"이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고려인이나 조선인이 호인(되놈)이었다는 말일까요?
참 알 수 없는 한국사 해설입니다. 여기에... ...
오늘의 이 나라에는 "옛 왜구"와 같은 자들이 활개를 치며, 이 나라를 좀벌레가 갊아먹듯 이 나라를 분열시키며, 국민들을 갈라치고 있습니다. 이러한 시기에 "오직 국민들만이 이 난국을 타개해 나갈 수 있는 힘입니다"
두 눈을 부릎뜨고 이들을 감시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 나라의 주인으로써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