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어제 복음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고자 하는 젊은이에게 너의 재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서 나를 따라오라고 하시자 그 젊은이가 풀이 죽어 예수님을 따라 가는 것을 포기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재물에 대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 가기가 어렵다. 거듭 말하지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가는 것보다는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쉬울 것이다.”(마태 19, 23-24)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분명 부자는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부자’라고 하는 이 단어의 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겠습니까? 단순히 얼마 이상의 액수를 가진 사람은 부자이고, 그 이하를 가진 사람은 모두 가난하다고 규정짓기란 불가능한 일이요, 내가 생각할 때는 저만큼 가진 이가 부자이지만, 상대방은 자신은 가난하다고 여길 수도 있으며 그 반대로 상대방은 그를 가난하다고 하지만 본인은 자신이 가질 만큼 가지고 남는 부자라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부자’라는 말이 물질에 양에 의해 명명되는 것이 아니라 상태로 인해 규정되어져야 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즉, 내가 가지고 있는 물질을 소유의 개념으로 볼 것이냐, 관리의 모습으로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올바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물질에 대한 공공선이 전제되어져야 합니다. 예를 들어 지금 내가 소유하는 것들을 한 번 되돌아 봅시다. 신발, 옷, 가방 등의 작은 물건에서 자동차, 집 등 고액의 물건까지 내가 생활에 필요한 수많은 물건들은 나 자신, 혼자만의 힘만으로 만들어 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모든 것들은 세상을 사는 수많은 이름모를 사람들의 손과 땀을 거쳐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부라고 불리는 정도의 재물을 쌓는 것이 나 혼자만의 땀과 노력만으로도 이루어졌다고 자부하고 오만하기 보다는 사람들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존재의 도움으로 인해 나의 것으로 이룰 수 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직접적으로 돈을 보태거나 어떤 행동으로 도움을 주는 것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돌아오는 모든 것들이 나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명백한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말하는 부자라면 그 정도의 재물을 가지게 되고 모으기 위해 더 수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노력으로 이루어졌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소유의 눈으로 보면 오늘 복음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어려운 부자의 모습은 많은 것을 소유한 사람으로 비추어 질 수 있고 외형적으로 아무리 재물이 많아도 그 재물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라 세상의 모든 사람들을 위한 것, 곧 하느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관리자의 모습으로 본다면 부자는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보여 질 수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방송매체를 통하여 보도되는 아름다운 미담들을 보고 있습니다. 시장에서 평생 동안 장사를 하시면서 모은 돈 수억원을 선뜻 장학기금으로 전달하신 할머님, 사업을 하면서 평생을 모은 수백억원을 사회에 기부한 사업가의 이야기들은 우리에게 재물이 선한 가치대로 쓰여질 때의 좋은 모습들을 보여 줍니다. 재물이 악하고 더럽게 보이는 것은 재물을 모으기 위해 남에게 해를 가하고 가족과 이웃을 저버리는 악한 행실 때문에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르려고 제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백 배의 상을 받을 것이며, 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다.”(마태 19,29)
여기서 형제, 자매, 부모가 의미하는 뜻은 바로 나와 가장 가까운 혈육을 의미하며, 이것은 곧 바로 나 자신을 버리라는 의미입니다. 이들을 버리라는 것은 책임감 없이 돌보지 않고 내팽겨치라는 것이 아니라 가장 우선적으로 주님을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죽기를 원하는 자 살 것이고, 살기를 원하는 자 죽음을 면치 못한다는 세상 속담처럼 주님을 우선적으로 의지하고 믿고 따르면 자기가 버렸다고 생각하는 형제, 자매, 부모님도 주님께서 올바로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미워하거나 우리에게 일부러 고통을 주기 위하여 자기 것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며 무조건적인 희생을 요구하신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시기에 자신의 것을 버리라고 역설적으로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참된 길을 애써 가르쳐 주시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우애 좋은 형제가 길가를 우연히 지나가다가 주운 금 두덩어리 때문에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이 생기자 배편에서 그 금을 버렸다는 이야기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많은 교훈을 줍니다. 우리가 살면서 정말 중요한 순간에 선택할 때 그 긴박한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살아가면서 무엇이 참된 길인지, 무엇이 더 소중한지, 무엇이 예수님을 따르고 믿는 자의 몫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끊임없이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당부하시는 첫째였다가 골찌가 되고 골찌였다가 첫째가 된다는 말씀을 되새기며 하루를 생활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