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급시험을 본 꽃회원들과 천리포 수목원으로 야외수업을 다녀 왔다.
잎 떨어진 가지는 꽃꽂이의 선을 배우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새싹이 돋기 전에 한번은 다녀 올 일이다.
출근하는 남편을 챙겨 보내고 서둘러 출발해서 남당항에서 요즘 한창인 새조개 샤브샤브를 먹었다.
헌신적인 어느 회원 남편이 점심값을 후원했다.
세상엔 참 배려심 깊은 남편도 많다.
꼬불꼬불한 시골길을 따라 달리며 겨울 안에 봄이 숨쉬는 걸 만끽했다.
차 창문을 열고 불어오는 바람이 차갑지 않다.
심지어는 바닷가로 난 문을 열고 식사를 하기도 했다.
고소하고 시원한 국물이 바다냄새를 담았다.

천리포 수목원엔 봄 준비가 한창이었다.
겨울의 을씨년함을 가리기 위해 베어내지 않았던 아이리스잎들도 잘라내고
말끔하게 가지치기된 뜨락엔 꽃눈, 잎눈이 가을 알곡처럼 부풀어 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 지나면 톡 터지겠지.
그 안에 봄을 담아 팝콘처럼 터질 꽃이며 잎은 마음의 눈을 열어 본다.
어디선가 향기가 바람결 따라 감돈다.
돌아보니 납매다.
모르고 지나쳤으면 산수유인가 싶었겠지만 향기가 그럴 수 없다.
이른 봄 꽃을 기대하지도 못했는데 희귀한 꽃을 모아둔 천리포 수목원답게
결코 실망시키는 법이 없다.
회원들에게 가자고 권하기를 잘했지 싶다.

이길 저길로 옛 골목길 찾듯 돌아 걸을 때마다 색깔도 별나고
모양도 귀한 나무들이 구석구석 숨어 있다.
복수초와 설강화가 피었다는 안내를 입구에서 받은 터라
우리는 별로 크지 않은 수목원을 두 바퀴나 돌았다.
무심코 지나칠 뻔한 골목에서 호랑가시나무 열매를 반가이 보았다.
나뭇잎 아래 복수초가 노랗게 피었다.
우리 마당 복수초는 아직도 꽁꽁 얼굴을 숨겼다.
난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지 않고 기다림을 배운다.
기다림은 희망과 설레임이라는 씨앗을 품고 있다.

열매가 달달한 호랑가시열매는 새들이 좋아해서 몇 개 달리면 금세 따먹는다던데
이곳엔 나를 기다림인가 참 오지게도 많다.
우린 그 곁에서 사진도 찍고 수다도 떨며 여유로운 산보를 했다.
미처 못 발견한 하얀싸래기 같은 설강화까지 찾아다니며 기어이 눈인사 하고
바다가 보이는 솔숲 사이를 걸었다.
점심때 먹은 새조개 샤브샤브의 시원한 맛이 오버랩되며 이래저래 은총받은 느낌?

용인에 오는 길에는 개심사 입구에 들러 저수지 가에서 석양빛을 바라보기도 하고
녹두전을 고소하게 부치는 인생의 맛을 아는 개심사 아래 마을 아줌마의 웃기는 인생철학을 듣기도 하고
누룽지 막걸리로 하루의 행복을 건배로 나눴다.
사는 게 이런 맛이지 싶어 마음이 들떴다.
그때가지만 해도 난 여유롭고 느긋한 행복감에 들떠 있었다.

그러나 집에 들어선 순간 차가운 느낌이 든다.
부엌도 찬 기운, 거실도 찬 기운.
남편이 차가운 모습으로 댕그마니 거실 의자에 앉아 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식사 하셨어요?"
그는 무표정으로
"응, 빵 먹었어. "
난 큰 죄 지은 사람처럼 조용히 씻는다.
'아니, 내가 퇴근 전에 저녁 준비 못한다 말했는데... 도대체 왜 불만인데....
이럴 땐 친구나 직원들과 저녁좀 먹으면 안되나?'
그러나 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곁에 앉았다.
하루 뒤에 침대에서 물었다.
"당신, 내게 불만 없어요?"
"어제 같은 날!"
난 그날 밤도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속으론
'아이구 속 터져!'
주일엔 남편 친구 부부와 운동을 했다.
함께 저녁을 먹는데 친구분이 불쑥
"나 이제 회사 그만 둬도 돼?"
아내에게 물었다.
"아직은 다녀야지. "
"쉰 다섯까지만 다니면 된댔잖아. "
"근데 전에 젊을 땐 한 달에 하루 이틀 정도 저녁을 함께 했는데
요즘 나이 드니 당신 일주일에 삼일 정도 일찍 퇴근해서 저녁 하려면 난 이게 뭔가 싶어. "
친구분
"나 요즘 아침에 사과 하나 먹고 출근해. "
"좋다며!"
"아니지, 아침 준비 안해서 어쩔 수 없이 사과 먹고
그거 하나 먹어도 든든하게 견딜만하다 했더니 매일 사과를 주네."
이때다.
난
"우리 남편, 지난 수요일 하루 저녁 준비 안했다고 삐쳤어요.
자기가 일곱시 땡 하면 예외없이 일찍 온다고 완전 모범 남편인 줄 알거든요.
매일 일찍 귀가하는 남편을 맞는 아내는 행복에 겨울 거라고 믿죠.
당신, 반성하세요. "
집에 돌아 오는 길에
"지난 수요일에 나 정말 앞이 막막하게 답답했어.
올해 라이온스 지역 부총재 해야 하는데
집에서 남편이 밥 안해 준다고 바가지 긁는 상황에서 일년을 어찌 보내나 심란해서
당신 화난 거 이상으로 나도 속으로 화가 났어.
당신 성실함이 내 삶에 족쇄처럼 여겨지는 순간이거든.
별 일 없으면 물론 늘 성실하겠지만
때론 우리 둘이서 말고 당신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연습도 했으면 좋겠어. "
그의 성실함은 내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이기도 하고
삶에 윤기가 도는 이유임을 안다.
고요하게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그와
지역사회에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고 믿는 나는
자신의 일을 상대에게 불편이 없도록 해 놓고 난 후 하자는 면에서 동의하지만
하루의 라이프 싸이클이 어긋나면 이렇게 아슬아슬하기도 하다.
나이 들면 참 세련된 부부싸움을 한다.
결코 언성을 높히지 않고 순간순간 위기를 참아 넘긴다.
남의 삶을 볼 기회가 왔을 때 스스로 자신을 돌아 보기도 하는 걸 아니까.
남편은 집에 오면서
"당신 하고 싶은 일 부담 갖지 말고 해. "
"지난번처럼 삐치면 되니까? 칫!
당신 친구 자주 눈치밥 먹겠더라.
성실한 남편이 삼식이라 불리는 요즘 세태 실감나죠?
남편 밥 해주는 걸 역사적 사명이라 여기는 저 만난 거 은총인 줄 알아요!"
무엇보다 하느님의 사랑은 의지적이라는 걸 안다.
나는 그분 졸개로 그분 닮아 가려면 의지적으로 남편을 사랑해야 한다.
그분이 옳건 그르건 가리지 않고 나를 사랑하듯
그분을 닮으려면 시비 가리지 말고 남편 사랑해야 하니
이쯤 했으면 입 닫고 또 하루 사랑의 삶을 살아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