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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내 희망의 순례
데살로니가전서 1:2-7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성탄 후 제1주일이다. 오늘은 송년주일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며 누구나 한마디 감회가 없을 수 없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참 힘든 한 해였다.
흔히 연말을 맞으면 ‘우여곡절, 간난고초, 전화위복, 새옹지마’와 같은 사자성어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성취감 보다는 아쉬움이 크기 때문이다. 돌아보면 잘한 일 보다 미련이 더 많이 남는다.
올해 여러 가지 칼럼을 썼는데 그중에서 지난 2월 2일에 쓴 ‘우한짜요~’가 기억에 남는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코로나19의 위험이 심각하게 느껴지지 않았던 시절인데, 당시 중국 우한 시는 1천만 명이 폐쇄되어 공포로 가득하였다. 사람들은 서로를 향해 이렇게 외쳤다고 한다. “우한 짜요!”
한자로 ‘짜요’(加油)는 기름을 더하다란 의미인데 중국어로 ‘힘내라!’라는 뜻이다. 사람들은 비록 고립되었지만, 아직 탈출하지 못했지만, 다시 창문을 활짝 열고 푸른 하늘을 향해 희망의 숨을 들이 마실 때가 올 것을 믿었다. 이런 응원은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 “대한민국 짜요!”
중국어는 약간의 한자 지식이 있는 우리에게 재미있다. 중국어로 ‘한 해 수고 많이 하셨다’는 인사를 ‘매울 신’(辛), ‘쓸 고’(苦), ‘마칠 료’(了)를 합하여 ‘씽꼴라’라고 한단다. ‘맵고 쓴 고달픈 수고를 이제 마쳤다’는 뜻이다. 우리나, 세계어느 나라 사람이든, 올해 간단치 않은 삶을 살았다. “씽꼴라!”
서로 웃으면서 덕담하고 격려하면 그 간의 고생도 보람이 있다. 이번 주간 연말연시 일주일 동안은 그런 덕담과 축복의 말로 자녀, 가족, 공동체 식구, 동료, 친지, 이웃, 두루두루 격려하는 시간을 갖기 바란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추어주고, 격려하라.
1)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한 해를 결산하는 원리를 가르쳐준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원리이다.
먼저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칭찬하며, 이렇게 부른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4).
데살로니가는 그리스 북부의 이방인교회였고, 그 구성원은 ‘이방인+나그네’의 공동체였다. 그들을 향해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이라고 부른 바울의 인사말은 대단히 특별하다. 하나님의 선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최고의 명예가 이제 이방인들에게 까지 확장된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세 가지로 칭찬한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3).
이 구절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세 가지 특징 믿음, 사랑, 소망이 모두 등장한다. ‘믿음의 역사,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는 진정으로 그리스도인 삶의 특징이며, 신앙공동체의 덕목이다.
올해 색동교회는 특별한 해였다. 믿음의 길 10년을 함께 축하하고 기쁨을 나누었다. 여전히 색동교회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진행형 신앙공동체이다.
흔히 교회를 하나님의 구원열차로 비유한다. 우리는 서로 다른 고향(故鄕)에서 자랐지만, 같은 본향(本鄕)을 향해 달려간다. 마치 경부선 무궁화호를 타고 부산으로 간다고 생각해보자. 서울, 영등포, 수원, 오산, 평택, 대전, 대구 어디에서 누가 먼저 탔든 모두 목적지인 종착역을 향해 간다.
우리가 공동체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를 향한 같은 목적지의 동행자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소망의 목적을 계속 나눌 수 있도록, 서로 힘을 나누어야 한다. “색동교회 짜요!”
앞으로 우리 인생은 누구나 예외없이 한해를 마감하듯, 긴 순례길을 마치고 하나님 앞으로 귀향할 것이다.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구도자 혹은 순례자라고 부르는 이유이다. 그 때까지 사랑과 희망으로 살아갈 믿음과 힘을 주시길 바란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 3:6).
2)
믿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알파와 오메가다. 이것 없다면 사랑도, 소망도 의미를 잃는다.
그 믿음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마디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다.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은 성탄이며, 임마누엘의 본질이다. 성탄은 믿음의 시작이다. 이 믿음으로 의로우신 하나님과 죄인인 나의 관계가 회복되었다. 이제 나는 하나님의 사랑의 관계에 속해있다. 약속의 자녀가 되었다.
믿음을 지닌 사람은 주님한테서 오는 능력을 체험하면서 살기 때문에 이 세상의 어려움을 이기며 산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과 능력으로 남다른 기쁨과 새로운 생활을 도모한다. 나는 이러한 믿음을 가졌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람은 누구나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간다. 긍휼, 동정, 자비, 나눔, 희생, 애정, 공감, 연민은 사랑의 다른 표현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 모든 것들의 종합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 사랑의 절정이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교의 핵심은 사랑이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 15:12)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시고, 그의 사랑이 우리 안에 온전히 이루어지”게 된다(요일 4:12).
고린도전서 13장 13절에서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고 하였는데 왜 사랑을 가장 높이 평가하였을까?
바로 현재형이기 때문이다. 믿음과 같은 과거의 언어가 아니고, 소망과 같은 미래의 언어가 아니라, 당장 우리에게 요구되는 현재진행형의 언어이기 때문이 아닐까?
소망은 무엇인가? 왜 소망에는 인내가 필요한가? 여기에서 소망의 인내는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께 삶의 초점을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은 소망이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신앙생활은 구체적인 생활에서 믿음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으로 가꾸고, 소망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일상생활에서 하나님을 체험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이다.
3)
색동교회는 ‘믿음, 사랑, 소망’의 공동체이다. 우리 역시 데살로니가교회처럼 다양한 구성원이 모였다. 예외없이 이방인의 모임이요, 나그네의 모임이다. 우리 중에 터줏대감은 없다. 모두 처음에는 손님으로 참여하여 나중에는 주인이 되는 과정에 있다.
우리가 지향하는 본이 되는 건강한 교회는 무엇일까? 사실 그 모델은 지상에 없다. 대단한 교회들도 모두 부분적인 모델일 뿐이다. 건강한 교회는 제도와 비전과 사역의 내용이나 이벤트의 효과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다.
건강한 교회는 무엇일까? 바로 ‘나 자신’이 좋은 믿음의 사람이냐, 아니냐에 달려있다. 리차드 포스터는 “이 시대에 필요한 사람은 잘난 사람도 아니고, 힘있는 사람도 아니라 깊이 있는 사람이다”라고 하였다.
믿음은 형식주의, 절대주의에 빠질 수 없는 겸허함이 요구된다. 역사를 살펴보면 그 위대한 신앙인들의 모범은 ‘자기부인’과 ‘겸손’과 ‘순종’과 ‘전적인 의존’에서 나타났다. 나는 색동교회가 그런 아름다운 본보기 중의 하나가 되길 소원한다.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7).
이를 위해 내 주장보다 하늘의 뜻을, 자신의 고집보다 하늘의 은혜를 사모하는 색동교회가 되길 바란다.
독일 복흠교회에 서재기 장로란 분이 있다. 그는 내가 독일에서 목회하는 동안 만년 복흠교회 대표집사였다. 지금도 한 달에 한 번씩 내게 전화가 온다. 그래서 아무 왕래 없이 살아도 난 복흠교회 공동체 사정을 소상히 알고 지낸다.
처음에 나는 그분 때문에 자주 놀랐다. 늘 시작은 ‘목사님, 큰일 났어요’로 말을 꺼내기 때문이다. 그때마다 나는 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런데 사정을 자세히 듣고 보면 큰일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너무 오버가 심한 것 아닌가 싶었다. 그분의 과장이 심해 판단에 혼란이 왔다. 그런데 점점 느끼는 것은 그의 입이 가벼워서가 아니더라. 그만큼 남의 일을 무겁고 소중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귀국한 지 20년이 다 되어 가지만, 지금도 내가 마치 독일에 사는 사람처럼 자주 독일이야기를 말하는 것은 여전히 나를 독일목회의 현장에 있는 사람처럼 대해주는 서 장로님 덕분이다.
궁금한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잊혀질만한 사람인데 왜 아직도 전화를 해 그런저런 소소한 일을 다 말하려고 할까? 문득 결론을 내렸다. 나를 평생 자기들 인생에 개입하는 길동무임을 인정해 주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코 가볍게 여길 수 없다.
평생 나를 돌아보면 세상에서 나눈 일보다 세상의 사랑을 더 많이 받으며 살았구나, 싶다. 기도하다 보면 내가 받은 은혜가 얼마나 많은지 감사의 눈물이 절로 나온다. 그래서 더 그 분들을 기억하고 기도하게 된다. 그래서 바울도 편지 머리에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우리가 너희 모두로 말미암아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기도할 때에 너희를 기억함은”(2).
어느새 새해를 준비한다. 사람들은 모두 나이를 먹고, 인생을 살지만 저 마다 삶의 방식은 다 다르다. 여러분의 경우는 어떤지 생각해 보자.
키에르케고로는 사람을 세 가지 인간형으로 나누어 풍자한다. 거미형, 개미형, 나비형이다.
나이가 든 기성세대는 대체로 ‘거미형’이다. 이미 손에 넣은 기득권, 자기 생각과 고집을 거미줄처럼 늘어놓고 거기에 걸리는 것을 먹고 산다. 그에게는 유지한다는 이상의 목적은 없다.
중간세대는 ‘개미형’이다. 여전히 부지런히 활동하며 모아둔다. 그의 안중에는 모든 일하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하다.
젊은 세대는 ‘나비형’이라고 부른다. 어디 오래 머물거나, 모아 두려는 데 관심이 없다. 마치 나비처럼 계속 새것을 찾아 이동하면서 자기를 형성해나간다.
기성세대는 대체로 보수적이요, 중간세대는 활동은 많으나 꿈이 없는 현실주의요, 젊은 세대는 잃어버릴 것이 없으니 낡은 것을 버리고 새 것으로 향해 나갈 용기가 있다.
새해에는 한 해 더 젊게 살았으면 좋겠다. 나이 값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럴수록 마음부터 늙지 말라는 것이다.
때로 우리에게는 고난과 아픔과 걱정거리 등 반갑지 않은 손님이 찾아온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그 일 때문에 감사해야 할 것이다. 그로인해 기도하게 되었다면 은혜요, 감사이다.
올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 가운데 여러분과 더불어 아름다운 이야기를 만들어 온 것을 감사드린다.
여러분과 같이 착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너그러운 마음과 좋은 생각을 품은 분들을 만나, 행복한 색동교회를 이루게 된 것을 감사드린다. 정말 내게는 축복이고, 우리 서로에게 은혜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길동무도 많고, 꿈 동무도 많더라. 다가 올 새해에 여러분이 걷는 길 위에서 누구보다 늘 예수님과 동행하기를 바란다. 예수님은 평생 내 길동무요, 꿈 동무가 되신다.
그동안 선물로 주신 시간들을 고백하고, 앞으로 선물처럼 다가올 시간들을 기대하자. 늘 주님과 동행하면서 은혜와 축복을, 위로와 사랑을, 용기와 도전을 경험하길 바란다.
하나님께서 내 인생이 희망의 순례를 잘 하도록 범사에 이끌어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첫댓글 믿음은 과거, 소망은 미래를 향한 것, 그러나 사랑은 현재를 의미한다고 하신 말씀에 공감합니다. 지금 여기에서 사랑을 나누며 실천하는 한 주간 되기를 기도합니다.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