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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심서 이전(吏典) 제5조 찰물(察物)
1. 수령은 외로이 있으니 자신이 앉은 자리 밖은 모두 속이는 자들 뿐이다. 눈을 사방에 밝히고 귀를 사방에 통하게 하는 일은 제왕(帝王)만이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다.
총명한 사람이 마음을 기울이어 잘 다스리기를 희구하여 9강(綱) 54조(條) - 진황(賑荒)은 계산에 들지 않는다. - 를 취해서 매사를 살피고 부지런히 힘쓴다면, 그 경내가 다스려지고 안 다스려지고는 물어 볼 필요도 없다. 아전들의 간계가 자연 쓰이지 못하게 되고 강호한 백성의 횡포도 저절로 자행되지 못할 것이니, 귀를 막고 눈을 가리고서 연못 속의 물고기를 살피지 말아서 만물이 느긋이 안락할 수 있게 함이 좋다.
그러나 아전과 향임(鄕任), 그리고 군교(軍校)들이 슬며시 수령의 동정을 엿보아서 그를 빙자하여 마구 농간 부리는 것은 염려하지 않을 수 없고, - 수령의 의중을 알아채고 그것을 취하여 제 공으로 삼는 일. - 조례(皁隷)와 저졸(邸卒) - 면주인(面主人)임. - 들이 몰래 민간에 가서 세금을 토색질하고 행패 부리는 것은 살피지 않을 수 없으며, 불효 불공하고 저자에서 마구 강탈하는 자는 금하지 않을 수 없고, 항간에서 세력을 부리며 강한 힘을 믿고 약한 이를 업신여기는 자는 단속하지 않을 수 없으니, 별도로 염탐하는 일은 없을 수 없다.
황패(黃霸)는 영천 태수(潁川太守)로 있을 때 일찍이 염탐할 아전을 내보낸 적이 있었는데, 내보낼 적에 주밀하게 하라고 당부했다. 그래서 그 아전은 나가서 감히 우정(郵亭)에서 묵지도 못하고 길가에서 밥을 먹었는데 까마귀가 그 아전이 먹던 고기를 나꿔채 갔다.
관아에 온 한 백성이 있어서 황패가 그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에, 그 백성은 까마귀가 고기 나꿔가던 일을 말하게 되었다. 얼마 후에 그 아전이 돌아와 황패를 뵈니 황패가 위로하기를,
“길가에서 매우 고생했더구나. 밥 먹다가 까마귀에게 고기까지 빼앗기고.”
하자 그 아전은 깜짝 놀랐다. 그러고는 묻는 말에 감히 털끝만큼도 숨기지 못하였다.
생각하건대, 까마귀가 고기를 나꿔채 간 것을 이용한 물음은 그 수법이 얄팍하므로 상례로 할 수 없다. 염찰(廉察)하는 중에도 정도를 잃지 않아야 좋다.
조광한(趙廣漢)이 영천 태수(潁川太守)로 있을 때 한번은 공문으로 호도정장(湖都亭長)을 불러들였다. 호도정장이 오는 길에 서쪽 계상(界上)에 이르니 계상정장(界上亭長)이 장난삼아 말하기를,
“관아에 이르거든 조군(趙君)에게 안부 좀 전해 주게나.”
하였다. 호도정장이 이르자, 조광한은 공무에 관한 일을 다 묻고 나서,
“계상정장이 내게 안부를 전하라 하였는데, 어째서 전해주지 않는가?”
하니, 호도정장은 머리를 조아리며 사실 그런 일이 있었음을 실토하였다.
북위(北魏)의 왕일(王逸)은 광주(廣州)를 다스릴 때 널리 정보망을 펴서 살폈으므로 그를 천리안(千里眼)이라 불렀다.
송나라 때 장등용(張登庸)은 양주(洋州)를 다스릴 때 사람들이 그를 수정등롱(水精燈籠)이라 불렀다.
전원균(田元均)은 성도부(成都府)를 다스릴 때 명성이 있었는데, 촉(蜀) 땅 사람들이 그를 조천납촉(照天蠟燭)이라 불렀다.
교지명(喬知明)은 융려(隆慮)를 다스릴 때 백성들이 그를 신군(神君)이라 불렀다.
북제(北齊)의 팽성왕(彭城王) 고유(高浟)는 창주 자사(滄州刺史)로 있으면서 엄하게 살펴 정사를 했으므로 관내가 숙연하였다. 그래서 수령ㆍ참좌(參佐)에서 아래로 서리(胥吏)에 이르기까지 나다닐 때에는 모두 식량을 싸 가지고 다녔다. 고유는 민간에서 일어난 일을 세세한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습옥현 주부(濕沃縣主簿) 장달(張達)이란 자가 일찍이 창주(滄州)에 와서 밤에 민가에 투숙하며 닭고기국을 얻어 먹은 일이 있었는데 고유가 이를 알고 수령들이 다 모이자 대중을 향해,
“닭고기국을 먹고는 왜 값을 주지 않았는가?”
하니 장달은 즉시 자복하게 되었고, 온 경내가 그를 신명(神明)이라 불렀다.
고려의 박유저(朴惟氐)가 안동(安東) 수령으로 있을 때 자신이 행하는 정사가 유석(庾碩)보다 못하지 않으리라고 스스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하루는 홀로 관아에 앉아 있다가 질박하고 신중한 한 아전을 보고,
“지척도 울타리로 막으면 보고 들을 수가 없거늘, 하물며 한 당(堂)에 앉아서 사경(四境) 안을 살피려 하니 또한 어렵지 아니한가? 지금 간사한 아전이 법을 농간하여 곤궁한 백성이 원한을 품는 일은 없는가?”
라고 물어 보았다. 아전은 말하기를,
“사또께서 부임해 오신 이래로 백성들이 아전을 보지 못하니 아전이 법을 농간하는 일이 있는지 없는지는 미처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백성들이 원한을 품는 일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 박유저는 다시,
“백성들이 나를 유석 사또와 비교해서 어떻다고 생각하는가?”
라고 물으니 아전은 말하기를,
“백성들이 유석 사또를 칭송하고 틈이 있으면〔有間〕 - 유간(有間)이란 여가(餘暇)의 말로 말한다는 뜻이다. - 사또에 대해서도 말을 합니다.”
라고 하니, 박유저는 부끄러워하였다.
[주-D001] 9강(綱) 54조(條) : 《목민심서》의 율기(律己)ㆍ봉공(奉公)ㆍ애민(愛民)ㆍ이전(吏典)ㆍ호전(戶典)ㆍ예전(禮典)ㆍ병전(兵典)ㆍ형전(刑典)ㆍ공전(工典)의 9강과 각 강이 각각 6조이니, 6×9=54조를 가리킨 것인데, 고공(考功) 조에 자세히 보인다.
[주-D002] 연못 …… 말아서 : 아랫사람의 사소한 잘못을 너무 밝히지 말라는 뜻으로 《사기(史記)》 권106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과 《열자(列子)》 〈설부(說符)〉에 보인다.
[주-D003] 취하여 : 원문의 수(受) 자는 손리장본에 의해 취(取) 자로 바로잡아 번역하였다.
[주-D004] 황패(黃霸) : 한(漢)나라 때 양하(陽夏) 사람으로 자는 차공(次公), 시호는 정(定)이다. 특히 율령(律令)에 밝았으며, 시랑알자(侍郞謁者)ㆍ하남 태수승(河南太守丞)ㆍ정위정(廷尉正)ㆍ영천 태수(潁川太守) 등을 거쳐 승상(丞相)에 이르고, 건성후(建成侯)에 봉해졌는데, 한대(漢代)에서 치민리(治民吏)를 말할 때는 반드시 황패를 첫째로 쳤다. 《史記 卷96》 《漢書 卷89》
[주-D005] 우정(郵亭) : 문서 전달할 때 쉬어가는 곳. 5리에 우(郵)가 설치되고 10리에 정(亭)이 설치되었다.
[주-D006] 조광한(趙廣漢) : 한(漢)나라 때 탁군(涿郡) 사람으로 자는 자도(子都)이다. 영천 태수를 거쳐 선제(宣帝) 때 경조윤(京兆尹)이 되었다. 그는 농간을 캐내고 부정을 적발하는 데 귀신처럼 밝았다 한다. 《漢書 卷76》
[주-D007] 왕일(王逸) : 《위서(魏書)》와 《북사(北史)》에 왕일은 없고 양일(楊逸)이 있는데 그 행적이 이 인용문과 같은 것으로 보아, 왕일은 양일의 오기인 듯하다. 양일은 자가 준도(遵道)로 재주가 탁월하였고, 원외산기 시랑(員外散騎侍郞)ㆍ급사황문 시랑(給事黃門侍郞)ㆍ이부 낭중(吏部郞中) 등을 거쳐 광주 자사(光州刺史)에 이르렀다. 그가 광주 자사로 있을 때의 일이 그의 전기에 있는데 “이목을 널리 두어 살폈으므로 아전들이 밖에 나가서도 부정을 하지 못했다. 당시 사람들이 모두 ‘양사군(楊使君)이 천리안(千里眼)을 가졌는데 어떻게 속일 수 있겠는가.’ 했다.”라고 적혀 있다. 《魏書 卷58》 《北史 卷41》
[주-D008] 광주(廣州) : 왕일이 양일의 오기라면 광주(廣州)는 광주(光州)의 잘못이다.
[주-D009] 천리안(千里眼) : 능히 천리 밖을 내다볼 수 있는 눈이란 뜻이다.
[주-D010] 장등용(張登庸) : 미상. 《중문대사전(中文大辭典)》 등에 “東齋記事 張中庸爲杭州 民號爲水精燈籠”라고 한 것을 보면, 혹 장중용(張中庸)의 오기인지도 모르겠다.
[주-D011] 수정등롱(水精燈籠) : 수정으로 만든 등롱이니, 곧 두뇌가 명석한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D012] 전원균(田元均) : 송나라 때 사람으로 이름은 황(況), 원균은 그의 자(字)이다. 비서성 저작좌랑(秘書省著作佐郞)ㆍ용도각 직학사(龍圖閣直學士)ㆍ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 등을 거쳐 태자소부(太子少傅)에 이르렀다. 시호는 선간(宣簡)이다. 《宋史 卷292》
[주-D013] 조천납촉(照天蠟燭) : 하늘을 비추는 촛불이란 뜻이니, 곧 밝게 살피는 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주-D014] 전원균(田元均)은 …… 불렀다 : 이 말이 본전에는 없고 《담원(談苑)》에 보인다.
[주-D015] 교지명(喬知明) : 전조(前趙) 때 선비(鮮卑) 사람으로 자는 원달(元達)이다. 진(晉)나라 성도왕(成都王) 영(穎)의 밑에서 보국장군(輔國將軍)과 융려현령(隆慮縣令) 등을 지냈다. 《晉書 卷90》
[주-D016] 고유(高浟) : 환(歡)의 다섯째 아들로 자는 자심(子深)이다. 동위(東魏)의 효정제(孝靜帝) 무정(武定, 543~549) 연간에 정주 자사(定州刺史)가 되고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 천보(天保, 550~558) 초에 팽성왕(彭城王)에 봉해지고, 북주(北周)의 효명제(孝明帝)가 즉위한 뒤에 태사(太師)가 되었는데, 세무(世務)에 밝고 결단성이 있었으며, 특히 일의 실정을 살피는 데 밝았다. 시호는 경사(景思)이다. 《北齊書 卷10》
[주-D017] 참좌(參佐) : 모든 요속(僚屬)을 가리킨다.
[주-D018] 박유저(朴惟氐) : 《고려사》에 전기가 없으므로 자세한 사적을 알 수가 없다.
[주-D019] 유석(庾碩) : ? ~1250. 본관은 무송(茂松)으로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ㆍ충청주도 안찰사(忠淸州道按察使)ㆍ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副使)ㆍ동북면 병마사(東北面兵馬使) 등을 거쳐 지형부사(知刑部事)에 이르렀다. 그는 특히 동북면 병마사로 있을 때 선정(善政)을 베풀어 임기가 끝났으나 백성들의 간청으로 다시 3년을 더 유임한 일도 있다.
[주-D020] 박유저(朴惟氐)는 부끄러워하였다 : 이 말은 《고려사》 〈유석전(庾碩傳)〉에 보인다.
牧孑然孤立。一榻之外。皆欺我者也。明四目。達四聰。不唯帝王然也。
綜明之人。盡心求治。取九綱五十四條。賑荒不在計。 件件審察。勉勉力行。則四境之內。治與不治。不必問也。吏姦自不能售。民豪自不能逞。塞耳蔽聰。不察淵魚。使萬物怡怡然安樂可也。然吏鄕軍校。密覘動靜。藉賣簸弄者。不可以不慮也。揣知官意。受以爲己功。 皁隷邸卒。面主人。 潛出民間。誅求行惡者。不可以不察也。不孝不悌。墟市橫奪者。不可以不禁也。武斷鄕曲。恃強凌弱者。不可以不制也。則別岐廉問。所不可無也。
黃霸爲穎川太守。嘗遣廉吏。遣行。屬令周密。吏出不敢舍郵亭。食於道a285_382b旁。烏攫其肉。民有詣府者。霸與語道此。後日吏還謁霸。霸勞之曰。甚苦食於道旁。乃爲烏所盜肉。吏大驚。所問毫釐不敢有所隱。
〇按此烏攫之問。其術淺短。不可以常廉察之中。不失其正焉可也。
趙廣漢爲穎川太守。嘗記召湖都亭長。湖都亭長西至界上。界上亭長戲曰。至府。多謝問趙君。亭長旣至。廣漢問事畢。謂曰界上亭長。寄聲謝我。何以不爲致問。亭長叩頭服實有之。
北魏王逸爲廣州。廣設耳目。號千里眼。
〇宋張登庸知洋州。號爲水精燈籠。
〇田元均治成都有聲。人號爲照天蠟燭。
〇喬知明守隆慮。民號爲神君。
北齊彭城王高浟爲滄州刺史。爲政嚴察。部內肅然。守令參佐。下及胥吏。行游往來。皆自齎糧食。浟纖芥知人間事。有濕沃縣主簿張達。嘗詣州。夜投人舍。食雞羹。浟察知之。守令畢集。浟對衆曰。食雞羹。何不還他價直也。達卽伏罪。合境號爲神明。
高麗朴惟氐守安東。自謂爲政。不下於庾碩。嘗獨坐郡齋。見一小吏質愼者。語曰。咫尺之地。障以藩籬。耳目莫得見聞。況處一堂。欲察四境之內。不亦難哉。今得無奸吏弄法。窮民飮恨者乎。小吏曰。自官之來。民不見吏。吏之弄法。有不及知。民之飮恨。未之聞也。惟氐又語曰。民以我何如庾碩使君。小吏曰。民稱庾碩使君。有間然後。語亦及之。惟氐慙服。有間謂以餘暇語及之。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