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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 백서에 대한 신앙적 이해
차 례
Ⅰ. 서론
Ⅱ.황사영의 생애와 백서의 출현배경
Ⅲ.황사영백서의 해제와 내용분석
Ⅳ.황사영백서에 나타난 신앙적 특징
Ⅴ.결론
Ⅰ.서론
1.문제제기
그동안 백서에 대한 평가는 1930년 일본인 山口正之(야마구찌)의 『黃嗣永帛書の硏究』부터 시작하여 계속 이어져 왔다.황사영을 체포․처형한 조선조정은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한 그의 교회 재건책을 왕조(王朝) 전복으로 규정하여 그와 백서를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역적(逆賊)과 흉서(兇書)로 규정하였다.순조실록(純祖實錄)에는 백서를 삼조흉언(三條兇言)이 담긴 문서로 기술하고,추국(推鞫)시 작성한 「사학죄인황사영추안(邪學罪人黃嗣永等秋雁)」에서는 신앙자유 확보책을 '하늘과 땅을 다 찾아보고 만고(萬古)에 걸쳐 살펴보아도 듣거나 본 적이 없는 흉모음계(凶謀-陰計)'로 규정한 바 있다.황사영의 역적관은 위정자들에게 국한된 것만 아니라 천주교에 귀의하였던 정약용(1762-1835)과 순교자 정하상(1759-1839)도 황사영이 모색한 신앙자유 획득책은 외세-의존성을 비판해 그를 역적으로 혹평한 바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사의 저자 달레(Dallet,ClaudeCharles:1829-1887)는 “황사영(알렉시오)의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계획이 특히 그 시대에 있어서 비현실적이었음은 명백하다.그것은 무모하고 위험하였다.”고 평하였다.
그러나 그는 호교론적(護敎論的)입장에서는 “그가 바른 의향을 가지고 있었고 교우들의 해방과 외세에 대한 복음의 승리와 지옥에 대한 하느님의 승리를 특히 고려하였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것 같이 생각된다.”고 서술한다. 또한 조선교구장이었던 뮈텔(Mutel, Gustave Marie : 1854-1933)대주교도 1925년에 백서를 불어로 번역하여 홍콩에서 간행하면서 그 서문에 “이 역사적인 문서들은 두 개의 계획을 기록하고 있는데 세번째 대박청래(大舶請來)는 더욱 위태로운 것으로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이러한 계획은 공상적이고 위험하고 경솔한 것이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가 올바르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의 무모성은 비판했지만 그 목적의 정당성은 달레와 같이 옹호한 바 있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백서에 보이는 외세 의존성을 “순수한 신앙 고백으로서의 순교가치를 저하시킨 것”으로 보거나 천주교 본래의 초 국가주의적인 울트라몬타니즘(Ultramontanism :교황절대권론)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아 백서를 천주교의 몰민족적 행동양식이 결정에 이른 것이자 민족양심의 지탄을 받게 된 것으로 격하하는 한편 백서의 역사성을 일정 정도 옹호하는 견해도 나온 바 있다. 1980년대 이후 학계일각에서는 인권과 시민적 자유의 보장이란 현재적 관심에 입각하여, 보다 적극적으로 백서의 역사성을 옹호하는 견해를 제기하기도 하였다. 또한, 배은하 신부는 “글자 한 자 한 획에 배어 있는 순교자 황사영의 각고의 노력과 문맥에 넘쳐흐르는 복음화에 대한 갈구”4)에 대한 신앙적인 측면을 나타내고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백서는 1801년 10월 5일 황사영을 체포할 때 배론에서 압수되어 1894년 갑오경장(甲午更張)이 단행되면서 신자인 이건영(요셉)에 의해 뮈텔(Mutel)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주교는 1925년 7월 5일 순교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때 교황 바오로 11세께 전달하여 현재는 교황청 민속박물관 문서고에 보관 중이다. 본고는 황사영 백서에 대한 신앙적인 이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황사영 백서에 나타난 서간문 형식에 따른 분류를 종교주제별 보고서 형식으로 연구하여 백서가 갖고 있는 신앙적인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다.
2.연구사 검토
백서가 세상에 나온 후 백서에 대한 평가가 여러 차례 있었는데, 이에 대한 평가는 다음과 같다.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때 체포된 교회지도자 정하상(丁厦祥)(1795-1839)은 “황사영이 한 일을 어떻게 역적이라 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황사영의 속셈은 본래 나라를 망하게 하는 말을 논한 것이 아니라 문적(文蹟)에 남겼기 때문에 역적”이라고 하였다.
1835년 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신학교육을 받은 김대건 신부는 1845년 3월~4월 사이에 작성한 「조선순교사와 순교자들에 관한 보고서」에서 “거의 같은 시기에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황사영 알렉시오라는 고명한 철학가가 교황청에 교묘하게 편지를 써서 종교의 자유를 폭력으로 얻기 위하여 군함을 보내주도록 청하였다. 그러나 이 편지는 의주에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압수되었으나 편지를 뜯어보니 흰 종이 외에는 아무 글씨도 보이지 않았다. 모든 내용을 판관에게 보고하고, 그 편지를 전하려던 사람도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고 기록하였다. 1876년 달레는 백서에 대하여 평가하기를 “불행히도 너무도 유명하고 그 결과가 매우 유감스러웠던 이 사건은 이렇게 끝났다.황사영(알렉시오)의 흥분한 상상에서 나온 계획이 특히 그 시대에 있어서 비현실적이었음은 명백하다. 또 불행히도 근래에 실패한 여러 가지 개입 움직임이 정부의 시샘 많은 공포심을 더 확증하고 ,그 어느 때보다 더 많은 교우들의 피를 흐르게 하는 데밖에 소용되지 않는다.”고 평하고 있다.
한편,황사영 백서에 대한 연구는 일제 관학자인 야마구찌(山口正之)에 의해 집대성 되었는데, 야마구찌(山口正之)는 오다 쇼오고(小田省吾)의 제자로,그의 연구는 황사영 백서에 대한 기존 연구의 틀을 넘어서는 작업이었다. 이는 황사영 백서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긴 하지만, 민족 차별주의적인 관점에서 연구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계점을 가진다.
해방 이후 남한의 역사학계에서도 황사영백서에 대한 연구는 거의 없다시피한 실정이다. 조광의 연구를 제외하면 근세까지 본격적인 연구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또한,1960년대 중반 이후 학계를 풍미하던 민족주의적 정서가 퍼지면서 황사영의 백서는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다’는 점을 이용한 부정적인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북한 역사학계 역시 황사영 백서를 남한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유물사관의 입장에서 평가하는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1990년대 이후 국가와 민족에 대한 명제가 전면 재검토 되면서, 황사영 백서 연구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이를 계기로 야마구찌(山口正之)의 연구 이후 국내에서도 최초로 이정린의 『황사영백서연구』(1999)가 단행본으로 출판되기에 이르렀다. 이정린은『황사영백서연구』(1999)에서 황사영을 “독실한 크리스천의 생각과 행동은 세속적인 관점에서 보면 매우 어리석고, 때로는 非애국적이라하여 멸시와 천대를 받고 탄압받기 쉽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수고하다가 급기야 자기 목숨까지 그리스도께 바친 황사영의 그 거룩한 순교행위에 대하여 모두 옷깃을 여미고 경건한 마음으로 추앙해야 한다고 하면서 백서를 덮어놓고 ‘흉서’라고 매도하거나 또는 이렇다 저렇다 비난하기에 앞서 먼저 백서에 대한 사상사적인 관점에서 냉철한 고찰이 요구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정린의 연구는 황사영 백서를 도덕적이고 민족적인 관점이 평가의 초점으로 설정되어 있어 결국 이분법적인 논의로 진행되고 말았다. 또한, 개인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 도외시되었기 때문에,황사영 개인사에 대한 직접적 관심은 거의 표현되지 않았다. 이는 최석우의 「帛書에 얼룩진 피 黃詞永」(1965)에서 다소 관심을 보이고 있지만, 일반 독자를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그의 생애가 너무 쉽고 간략하게 다루어진 것은 아쉬운 점으로 남는다. 또한 최근 하성래의 「황사영의 교회활동과 순교에 대한 연구」(1989)가 돋보이지만, 호교론적인 가톨릭의 입장이 강하게 반영되었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다. 이에 배은하는『역사의 땅, 배움의 땅 배론』(2002)에서 “오직 불타는 신앙심 하나만으로 종교의 자유를 구현시키려 한 황사영의 교회와 하느님에 대한 열정은 모든 신앙인의 표본이라 하고, 조선 후기의 정치사적인 문제를 도외시하고 백서 자체에 집착하여 책임소재를 규명하려 한다면 올바른 역사의 이해 방법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는 기존 연구의 문제점을 직시하고 있다는 데에 의의가 있으며, 아울러 신앙을 문제화하였다는 점은 높이 평가될 수 있다고 하겠다.
또한, 여진천은『황사영 백서의 원본과 이본에 관한 연구』(2005)에서 “황사영은 천주교를 종래의 유교적 전통의 틀을 벗어나서 이를 대체할 새로운 사유체제로 인식하였다. 그래서 그는 하느님의 가르침을 어기고 천주교를 박해하며 수렴청정으로 인한 대왕대비와 집권층의 사사로운 국정운영과 이로 인한 국정문란 및 민심이반 등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던 것이다. 또한 천주교 신앙이 국가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그는 당장 시급한 것이 박해를 멈추게 하는 것이고, 이미 순교한 이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교회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게 하려는 것이었다.”라고 평가한다.
본고에서는 지금까지 연구된 황사영 백서를 신앙적인 관점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백서의 내용을 대부분 서간문 형식으로 분류하는데, 전체 세 가지에서 다섯 가지 정도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중요한 것은 백서를 신앙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서간문 성격이지만 보고서 형식도 갖추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바탕으로 황사영 백서의 실증적 연구를 통해 다소 객관적인 인식 확보 및 새로운 시각을 마련할 수 있는 계기가 생길 것으로 기대한다.
황사영은 백서를 구성할 당시 교회의 당면 문제를 기술하는 방법을 보고서 형식으로 염두에 두고 구상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이런 짐작은 실제 백서의 내용을 신앙적인 주제별 분석의 틀의 시선으로 바라볼 때, 각 주제별 상황에 있어 “보고”가 우선하고 있다는 점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또한, 신앙적인 이해를 위해서는 백서를 종교 주제별로 분석하여 백서가 주고 있는 의미의 필요성을 찾아야 함이 우선일 것이다.아울러 백서의 신앙적 의미에 대한 근본적인 개념파악의 필요성도 느낀다. 지금까지 나온 백서는 교열본(校閱本)과 번역본 및 영인본으로 세 가지가 있다. 교열본으로는 일본인 야마구찌(山正口之)의 『黃嗣永帛書の硏究』가 있고,『경향잡지』22-24권(1928년 10월~1930년 1월)까지 연재된 번역본이 있다.이 번역본은 이후 김익진이 백서를 번역하여 『가톨릭청년』(19591월~11월호)에 연재하였다. 그 후 윤재영이 1975년에 정음사에서 『黃嗣永帛書外』를 출판하였고, 1998년도에는 김영수가 성황석두루가서원에서 『黃嗣永帛書』을 출판하였고, 1999년도에는 여진천이 기쁜 소식 출판사를 통하여 『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겠습니까?』를 출판하였다.
3.연구범위와 연구방향
본 연구의 범위는 시대적으로는 황사영의 활동시기를 기준으로 하며, 내용적으로는 조선 천주교회의 발생시점으로 하여 신유박해까지를 그 범위로 언급할 것이다. 황사영의 활동 내용으로 백서가 중심이 되어 논고가 진행될 예정이다. 본고의 연구목적과 범위를 기준으로 우선 백서의 내용파악에 있어서 백서에 대한 신앙적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신앙적인 주제를 선정하여 그 주제에 따른 신앙적인 관점 부분들을 연구할 예정이다. 하지만, 범위가 광범위한 신앙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백서에 나타나 있는 순교신앙부분에 한정하여 논의를 진행할 예정이다. 또한 백서의 출현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 조선 천주교회의 설립과 그 이후의 과정을 언급함으로써 백서의 의미와 신앙적 접근이 좀더 용이해질 것으로 판단된다.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본고에서는 몇 가지 단어들을 정리하고자 한다. 백서에 나타나있는 성교(聖敎)는 천주교로 표현되어지는데 본고에서는 “성교(聖敎)”라는 용어자체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또한 천주님, 구령, 치명이라는 용어는 백서에 나타난 그대로 사용하였다. 본 논문의 전개순서는 다음과 같다.
제Ⅰ장에서 황사영 백서와 관련된 기존의 선행연구에 대한 연구사를 검토 한 후 연구범위와 연구방법을 제시하고,설정된 범위의 역사적 흐름도 살펴 볼 것이다.
제Ⅱ장에서는 황사영의 생애와 백서 출현의 배경을 서술하는데,황사영의 생애와 신앙 활동에 관한 장에서는 당시에 천주교 입교과정과 신앙생활을 살펴보고, 백서출현의 시대적 배경으로는 18세기 사회적 사상적 동향과 조선 천주교회의 창설과 창설 이후의 변화에 대해 서술하고, 백서 작성 경위와 백서 작성 이후의 상황에 대하여 연구가 진행된다.
제Ⅲ장에서는 황사영 백서의 해제와 내용분석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된다.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분석해 보면, 서간문 형식이지만 보고서의 성격도 나타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보고서의 성격으로 볼 수 있음은 당시 교회가 처한 상황에 대하여 구베아 주교에게 일목요연하게 보고하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중요한 것은 서간문의 주제들은 모두 종교적인 사항과 당시의 정치적인 사항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종교적인 주제들을 구분하여 보면 크게 교회 내적인 주제와 교회 외적인 주제, 그리고 일반적인 주제로 나눌 수 있다.교회 내적인 주제로는 당시의 성교(聖敎)활동과 박해상황, 순교상황 및 배교상황으로 인하여 교회가 처하고 있는 절박감에 대한 대안으로 황사영은 다섯 가지의 선교정책을 구베아주교에게 제시하였다. 다섯 가지의 선교정책으로는, 첫째 재정적인 지원과 두 번째는 북경교구와 조선 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방안, 세 번째는 교황이 청나라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선교사를 받아들이도록 하는 방안, 네 번째는 조선을 영고탑에 소속 시킨 뒤 친왕(親王)으로 하여금 조선을 보호 감독하는 방안, 다섯 번째는 서양선박과 무기를 얻어 와서 조선 국왕에게 글을 보내 위협하여 선교사를 받아들이는 방안이다. 황사영은 교회 내적인 주제 중에 성교활동,박해상황,순교상황,선교정책에 대해서 당시의 상황에 대한 현황보고를 하고 있음이 백서에 나타나고 있다. 이를 황사영 백서의 내용을 통해 분석하고자 한다.
제Ⅳ장에서는 황사영 백서에 나타난 신앙적 특성을 살펴본다. 황사영은 조정에서 벌어 자고 있는 악의 실체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고통에 대하여 신앙적인 관점을 나타내고 있다. 자신의 고통 안에서는 하느님의 체험으로 기쁨과 감사를 나타내면서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죄와 벌(인과응보)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신앙적 특성으로는 영혼을 구하고 천주님을 섬기며 성사생활에 열심히 참여하는 구령(救靈)신앙적인 부분과 현세를 착하게 살다가 죽음으로써 영복을 누리는 내세 지향적 신앙, 당시의 순교자들의 순교신앙을 서술한다. 아울러 황사영이 갖고 있었던 국가관도 신앙적인 관점에서 연구하고자 한다.
제Ⅴ장 결론에서는 본론에서 다루어진 다양한 문제들은 종합적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Ⅱ.황사영의 생애와 백서의 출현배경
1.황사영의 생애와 신앙활동
가.황사영의 생애(1775-1801)
황사영(黃嗣永)의 자(字)는 덕소(德紹)본관은 창원이고, 다른 이름은 황시복(黃時福)이다.그는 1775년(乙未)부친 황석범(黃錫範1747-1775)과 모친 이윤혜(李允惠)사이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그는 1790년(庚戌,정조14)9월 사마시(司馬試)에 급제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는데 당시 정조는 황사영을 불러 치하하였다. 이에 대해 달레는 이때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왕이 그의 비상한 재능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불러들여 얼마동안 이야기를 나누고 크게 후대하여 친애하는 표로 손목을 잡기까지 하였으며 그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말하였다.‘네가 20세가 되거든 곧 나를 만나러 오너라.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네게 일을 시키고 싶다.’특히 왕이 아무도 만나지 않고 자기 가족이나 국사(國事)를 논하기 위하여 대신(大臣)들하고 밖에는 관계를 가지지 않으며,우리네 관습에서 허용되는 점잖고 고상한 그 친숙을 하나도 결코 하지 않는 이 나라에서 그것은 비상한 특전(特典)이다. 그러므로 알렉시오는 그때부터 왕의 손에 닿는 영광을 가진 이손을 보통 사람은 마구 만질 수 없다는 것을 표시하기 위하여 손목을 명주로 늘 감고 다녀야 하였다.”
황사영은 문무(文武)를 겸비한 명문거족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뛰어난 재간이 있어 1790년 16세의 어린 나이에 급제하였다. 정조의 주목을 받은 황사영은 출세가 보장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6세의 어린 나이로 진사가 되어 일찍 명성을 얻은 그는 다산(茶山)정약용의 큰형 약현(若鉉)의 큰딸 정난주(마리아)와 결혼을 하였는데, 정난주는 명련(命連)이라는 아명을 받았다. 정난주(마리아)는 1800년 아들 경한을 낳았다. 황사영은 1790년에 세례명 알렉시오로 천주교에 입교하였다. 그가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것은 처가 쪽의 영향이었다. 천주교에 입교한 후 전시(殿試)에 나갔지만 매번 백지를 제출함에, 정조는 황사영에 대하여 몹시 슬퍼하며 연민의 정을 나타냈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강권에도 불구하고 과거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천주교 서적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전교하며 그들을 격려하고 회개시키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 서소문 밖에서 대역부도죄인으로 능지처참된 뒤,그의 어머니 이윤혜(李允惠)는 거제부(巨濟府)의 노비로,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제주목(濟州牧)대정현(大靜縣)의 노비가 되었고, 2세 된 아들 경한(景漢)은 나이가 어려 교수형을 면하여 추자도로 종이 되어 떠났다. 그의 숙부 황석필은 경흥으로, 종 육손(六孫)은 갑산으로 여종 판례(判禮)는 위원(渭原)으로 뿔뿔이 흩어져 그의 집안은 풍비박산이 되었다.
나.황사영의 입교 및 신앙생활
평소 성학(聖學)이라 여겼던 주자학에 회의를 느끼다가 처삼촌 정약종이 들려준 천주학(天主學)에 심취하여 1791년 이승훈에게 천주교 서적을 얻어보았고,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신앙에 관하여 진지하게 토론 한 후 알렉시오(Alexius)라는 세례명으로 입교하였다.
“알렉시오 성인은 4세기 로마에서 귀족의 에우페미아노의 아들로 태어나서 경건한 부모 밑에 자라는데, 결혼 하던 그날 그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영화를 뒤로 하고 거지차림으로 집을 빠져 나갔다.그 후 17년 동안 타국에서 하느님의 사람으로 가난한 이들을 도우며 수행에 정진한다. 사람들이 그의 성덕을 칭송하자 다시 로마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아버지의 집에서 17년간을 구걸하며 자신을 하느님께 봉헌하였다.”
가톨릭교회의 전통에서는 그를 가난과 극기의 영성을 실천한 성인으로 기억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황사영(알렉시오)이 살아온 삶의 여정과 성인 알렉시오의 삶과의 유사성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가 20세에 이르렀을 때 보다 열성적이고 순수한 마음으로 천주교회의 신앙에 정진하면서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더 높은 야심에 불타있었던 만큼, 왕의 총애와 약속은 그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직후인 1795년(을묘년)에 최인길의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만난 후 전교 사업에 더욱 힘을 기울였다. 또한 성사를 받음으로써 그의 기쁨과 정성은 더욱 커졌으며 신부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가 조직한 명도회(明道會)의 주요회원이 되어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이재신 ,조신행 등과 함께 명도회의 하부조직인 육회(六會)중 하나를 구성하여 이를 인도하였는데 구성원 대부분이 양반이었다. 1796년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은 주문모 신부와 협의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바다를 통한 선교사의 파견을 요청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다.
1798년 이후 서울로 이전하여 애오개(현재 아현동),북촌 등에 살면서 신자 청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한문으로 된 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열중하였다.황사영은 자신의 집에서 7일마다 모여 신자들이 성사를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당시 사학징의(邪學懲義)에서 그의 전교로 천주교에 입교한 사람을 살펴보면,3촌 황석필, 이국승, 그의 동서 홍재영, 손경욱, 제관득 등이다.
그의 집에는 항시 지방에서 올라온 식객(食客)들이 있었는데, 그 식객들은 모두 교리를 배우기 위하여 온 사람들로 멀리 평양에서 올라온 이자현, 충주에서 올라온 이국승 당진에서 올라온 이순명 등이다. 이로 보아 황사영은 전국의 젊은 양반들에게 손을 뻗쳐 전교를 한 것으로 보인다. 황사영은 때로는 지방교회와의 연락을 위하여 직접 지방에 내려가기도 하였다. 당시 황사영의 집의 상황으로 보아 부인 정난주(마리아)는 시종(侍從)들과 함께 많은 식객들의 식사를 대접하는 내조를 하였을 것이다.
백서의 기록에 따르면 “경신년(1800)4월에 여러 교우들이 명도회에 가입한 후 신공을 부지런히 하였고, 회원 아닌 사람들도 역시 이 분위기를 따라 움직여 모두 남을 감화시키기에 힘썼으므로, 그해 가을과 겨울 사이에 무럭무럭 감화되어 하루하루 불어났는데, 부녀자가 삼분의 이요,무식한 천인이 삼분의 일이었습니다.양반집 자녀들은 세상의 화가 두려워서 믿고 따르는 자들이 극히 적었습니다.”라고 적고 있다.
2.황사영 백서 출현의 시대적 배경
가.18세기 사회변동과 사상적 동향
(1)정치 사회 경제적 동향
당시의 사회개혁사상은 토지제도,조세제도,교육제도,과거제도,관리임용제도,군현제,국방체제 등 체제 전반에 걸치는 것이었다.그 중 가장 관심이 큰 것은 토지 문제였다.당시 토지가 모두 권세 있는 양반들의 수중으로 들어가 농민들은 송곳 하나 세울 땅이 없어서 비참한 처지를 스스로 목격한 상태에서 토지제도 개혁이야말로 모든 정치에 우선하는 급선무라고 보았다.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의 비리 속에 광범한 인재등용의 길이 막혀있고, 집권당인 노론벽파가 아니면 등용될 수가 없었다. 이러한 시기에 봉건적인 체제를 수습하고 강력한 국가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은 봉건지배층의 일반적인 생각이었다.
조선은 17-18세기중엽까지 대청,대일 중개무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은화가 축적되었는데, 일본은 해로를 통하여 중국과 직접 통교하고 무역함으로써 대일,대청 중개무역의 융성이 퇴조하고 있을 때, 북학파는 이를 다시 회복하고자 하는 상업계의 움직임도 있었다. 17세기부터는 봉건적 신분 질서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시기였다. 따라서 18-19세기의 지식인들과 17세기를 같이 평가해서는 안 될 것이다.이와 같이 정통주자학이 북벌론과 결합하여 지배적인 지위를 확립해 가는 이면에는 새로운 사상의 조류가 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17세기 이후 청나라로부터 들어오기 시작한 서학이다.
(2)사상적 동향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두 개의 큰 기둥의 하나는 과거제도이고, 또 하나는 주자학으로 이 둘은 서로 상호 보완의 관계에 있었다. 조선시대 과거제도 중 초시(初試)의 경우 지방수령의 조흘강(照訖講)을 거쳐야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는데 응시자가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중에서 임의로 암송할 수 있는지 없는지를 배송을 통해서 시험받는 제도였다. 따라서 사서의 암송이 없이는 과거시험에 응시할 수조차 없었다. 주자학의 기본 경전인 사서만 암송하면 오륜의 질서가 철두철미하게 체계화되는 터이므로 조선왕조를 지탱하는 이념과 제대로 맞는 사상체계가 되어, 그러한 사상주입을 제도적 장치로서 한층 강화한 것이 과거제도인 셈이다.
당시 조선의 사상계를 살펴보면 봉건 지배층의 주자학은 더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오히려 봉건사회를 지탱하는 기능을 하였다. 기존의 주자학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는 한편, 농업생산력 증대, 지주제 개혁의 문제 등 사회전반에 걸친 개혁구상이 일부 학자들에 의해 제시되고 있었다. 이른바 실학(實學)이다. 시대적, 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방편으로, 또한 서구 근대화에 대한 호기심으로 서학에 대한 관심은 더욱 깊어져 갔다. 즉, 서학에 대한 조선사회의 반향은 조선사회가 갖고 있는 내재적인 환경자체가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실학자들에게는 농업 생산력의 증대라는 생산력 문제가 가장 많이 제기 되었다.더 나아가 실학자 일부가 주자학 체계에서 벗어나 새로운 세계관과 인간관을 기반으로 한 사상체계를 수립하려는 모색의 과정에서 서학(천주교)이 지목되었다. 그러한 현상은 성호의 제자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나게 되었고, 점차 신앙적 차원으로 나아갔다.그 대표로 이벽을 들 수 있다. 천주교의 신앙전파는 정조 중반에 이르러 더욱 치열해지고, 서울의 사대부 층과 심지어 유림의 본고장인 경상도까지 퍼져갔다. 단순히 교리의 차원을 벗어나 신앙 실천운동으로까지 발전하였다. 이러한 신앙 실천운동의 주체는 실학파학자 등으로 양반층 중심에서 벗어나 일반 하층민들까지 포함하는, 이른 바 보유론(保儒論)차원에서 벗어난 동향이었다.
나.조선 천주교회 창설과 이후의 변화
(1)조선천주교회의 창설
1783년 10월 14일(음)이승훈이 북경 남당(南堂)천주교회에 가서 양동재(梁棟材deGrammont)신부로부터 베드로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귀국한 것이 1784년(정조8년 甲辰)3월 24일(음)이었다. 이승훈은 십자고상과 상본 그리고, 7성사에 관한 해설서와 교리문답, 복음 성서의 주해, 그날그날의 성인행적, 기도서 등을 가지고 귀국하여, 가지고 온 서적들을 이벽에게 빌려 주었고 이벽은 오랫동안 연구한 뒤 스승 권철신과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형제를 비롯하여 이가환, 정약전 ,정약용 형제들을 만나 천주신앙을 일깨워 주기 위해 노력하였다.
새로운 신앙을 받아들이겠다는 동료들이 나타나게 되자 이승훈과 이벽은 세례식에 대하여 협의한 뒤,1784년 겨울에는 수표교 인근의 이벽의 집에서 이승훈의 주도로 첫 번째 세례식이 거행되었는데 이것이 곧 ‘한국 천주교회의 창설’이다. 당시 이승훈에게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이벽과 권일신, 정약용이었다. 동시에 그들은 친지에게 교리를 전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홍낙민(루가),최창현(요한),김범우(토마스)등이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권철신을 비롯하여 충청도의 이존창(루도비코),전라도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도 영세를 받았다. 천주교의 종교운동은 이승훈과 이벽의 주도 아래 빠르게 정착되어 갔고, 김범우가 명례방에 있던 자신의 집을 집회장소로 제공해 줌으로써 초기 신앙의 공동체는 수표교에서 명례방으로 이전되었다.
이전의 주된 원인은 1785년 봄 명례방에 있던 집회가 형조들에 의하여 발각되어 이승훈을 비롯한 권일신, 이벽, 정약종, 이윤하 등이 체포되었다가 풀려나고 김범우가 단양으로 유배된 추조적발사건(秋曹摘發事件,명례방사건)때문이었다. 1786년 봄에는 동료들과 가성직자단(暇聖職者團)을 조직하여 이승훈, 홍낙민, 권일신, 정약전이 신부로 임명되고, 최창현은 교회의 총회장이 되었다. 또 이존창, 유항검도 신부로 임명되었던 것 같다. 이후 1787년 정약전이 그 오류를 지적함으로써 해체되었고 이승훈과 지도층은 성직자 영입 운동을 추진하게 되었다.
(2)조선 천주교회 창설 이후의 변화
1787년 유학의 본산(本山)인 성균관에서 정미반회사건(丁未伴會事件)으로 인하여 천주교가 조정에 알려지게 되어 남인계의 인물들이 전면 등장하고 친서계 인물들과 대립하게 되는데 이것이 척사운동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 후 1790년 북경에 파견된 밀사(密使)윤유일편에 북경주교로부터 통보된 조상제사금지령(祖上祭祀禁止令)은 조선교회에 커다란 충격과 갈등을 갖게 하였다.1791년 5월 전라도 양반 중에 교인 윤지충의 조상제사폐지사건(祖上祭祀廢止事件)곧, 진산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상황으로는 정치적으로나 문화적으로 독립성을 유지하지 못하고 중국에 예속된 상태로 천주교를 받아들이게 되었다.북경 구베아 주교는 조선 신자들에게 사목교서를 통해 제사금지령을 시달한 경위를 이렇게 말하고 있다.“1790년 조선교회에서 나에게 제시한 문제 가운데 ‘조상의 신주를 모시거나 이미 모셔놓은 신주를 보존해도 괜찮느냐’는 사항이 있습니다. 나는 교황 베네딕도 14세의 회칙과 클레멘스 11세의 회칙에 나타난 교황청의 명백한 결정에 따라 부정적으로 답하였습니다.”
유교적인 삶의 바탕이 되는 조상제사를 금지한 것은 전통문화와 질서에 대한 전면적인 부정과 파괴로 인식되었다. 당시 달레의 표현대로 이는 “모든 계층의 눈동자를 찌른 격”이었다. 이로 인하여 신해박해가 발생하게 된다. 천주교는 신해박해로 인하여 첫째 보유론적(補儒論的)신앙의 한계를 극복하고 참 천주 신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구 베아 주교의 사목서한을 통하여 천주교가 유교와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어 일부 신자들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키다가 박해를 당하게 되었다. 두 번째는 교회 내 중인 이하의 신자들이 차지하는 역할과 비중이 매우 커졌다. 그 이전에는 양반이 지도자로서 큰 비중을 차지했으나 그 후 입교한 인물들은 평민이 대중을 이루었다. 세 번째는 박해로 인하여 신앙의 태도가 내세 지향적으로 바뀌었다.
박해 전에는 개혁에 관심이 많은 양반들이 현실사회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데, 천주교가 유교와 다르다는 사실이 확연히 드러남에 따라 현실적으로 참여가 어려워진 양반계층의 신앙 형태도 내세 지향적으로 바뀌게 되었다. 네 번째는 공서파가 박해할 마땅한 명분을 갖게 되었다는 점이다. 조상숭배를 국교와도 같이 받들던 전통유교사회에서 신주를 없앤 진산사건은 금수(禽獸)만도 못한 비인륜적 패륜행위로 받아들여졌다. 이 논리는 100년을 두고 천주교 박해의 원인으로 십분 활용되었다. 다섯 번째는 박해결과 서양의 과학기술까지 배척이 되었다. 성리학자들은 진산사건으로 천주교는 어버이도 임금님도 안중에 없는 행동을 하는 종교로 배척하면서 서양의 발달된 기술까지 거부하게 되었다.이로 인해 근대화의 기회도 놓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다.신유박해(辛酉迫害)의 전개와 의의
신유박해가 발생하게 된 요인으로는 신해박해(辛亥迫害1791년)가 계기가 되었고, 이로 인해 지배층인 양반 유학자들에게 천주교는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로 인식되어 양반중심의 신분질서를 위협하는 것으로 비춰졌다. 따라서 양반 유학자들은 천주교에 대한 탄압을 거듭 주장하였으나 정조는 성리학이 크게 밝혀지면 사설(邪說)은 스스로 꺾이고 말 것이라는 온건한 벽이단(闢異端)정책을 유지하였다. 벽이단 정책으로 인하여 천주교는 확산되는 계기가 만들어졌다. 1794년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여 신유박해가 일어날 때까지 교세는 만여 명으로 늘어났다. 정치세력들 간의 대립과 갈등도 박해의 한 배경이 되었다. 남인들은 채제공 일파와 채홍리 일파, 신서파와 공서파로 나누어 서로 대립하였다. 채제공의 세력으로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등은 신서파에 참여하고, 공서파는 홍낙안, 이기경, 목만중 등으로 천주교를 공격하였을 때 채제공은 자파의 피해를 우려하여 공서파를 핍박하였다.
신유박해의 전개는 1800년(정조24)6월 28일(음)정조가 승하하자 모든 정세는 천주교와 남인에게 불리해졌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섭정(攝政)으로 모든 정사를 마음대로 하게 된 대왕대비 김씨는 본래 노론 벽파에 속했는데 집권하자마자 천주교 신자들과 남인 시파를 일망타진하려고 하였다. 국상(國喪)이 끝나기만 기다리던 대왕대비 김씨는 11월 하순(음)선왕(先王)의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시파의 사람들을 모조리 몰아내고 벽파의 사람들로 채워서 천주교를 박해할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였다. 대왕대비는 1월 10일 공식적으로 박해령을 내렸다. 신유박해의 의의는 첫째 조선천주교회가 매우 큰 타격을 받았다는 것이다. 최초로 가해진 대대적이고, 전면적인 박해로 교회가 거의 폐허화되었고, 어렵게 영입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함으로써 1834년(순조34)유 파치피코(여항덕,余恒德)신부가 입국 때까지 목자 없는 교회로 이어졌다. 지도층의 신자들이 거의 순교 또는 유배당하여 교회는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매국노’,‘불효’,‘마술자’,‘풍속 안녕 질서의 문란자’,‘방탕’등으로 규정한 반교문의 반포로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에 따라 다시 교회를 재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되었다.
두 번째는 박해를 계기로 천주교 신앙이 보다 넓은 지역으로 전파되었다. 살아남은 신자들은 박해를 피해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경상도 등의 산간 지방으로 숨어 계속 복음을 전하였다. 결국 교회는 일시적으로는 타격을 받았지만 궁극적으로는 천주교가 더욱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 번째는 박해를 거치면서 민중 신앙으로서의 자리를 굳히게 되었다. 양반의 지위를 포기한 민중적 양반이나 중인 이하의 신분층이 교회구성원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네 번째는 박해를 겪으면서 서양의 발달된 과학기술을 탐구하기가 어려워졌고 서양군함을 요청하여 신교의 자유를 얻고자하는 황사영 백서로 인하여 무군무부(無父無君)의 패륜적인 종교라는 인식과 반국가적인 종교라는 인식이 더하게 되었다.
다섯 번째는 박해로 인하여 세도정권이 수립되었다. 대왕대비 김씨를 비롯한 벽파는 천주교 배척의 명분으로 채제공의 남인 일파와 노론 시파를 제거하고 세도 정권의 발판을 구축했다.
라.백서 작성경위
(1)황사영의 배론 도착경위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교회의 지도자들이 거의 모두 체포되었고 이들의 추국에서 황사영의 이름이 자주 나왔기 때문에 대왕대비 김씨는 황사영에 대한 체포독촉 교서와 함께 체포령을 내렸다. 황사영은 2월 초순 계동 용호동 안의 한 군사의 집에 피신했지만,2월11일 포졸들이 들이닥쳤다는 주인 할머니의 말을 듣고 삼청동 산으로 피해 석정동의 권상술을 찾아갔다가 밤에 동대문 안에서 책 겉장 마름꽃의 모양을 목판 조각하는 송재기의 집에서 3일간 묵었다. 이 집에서 우연히 김의호를 만나 이후 계획을 의논하고 발각되지 않기 위해 길게 기른 수염을 자르고, 여자교우 최설애가 만들어준 상복(喪服)을 입고, 처숙부 정약종의 행랑에 살던 김한빈의 주선으로 평구, 여주를 거쳐 제천 배론의 김귀동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김귀동은 같은 해 2월 초순 박해를 피해 배론에서 옹기점을 하고 있었다. 황사영은 자기 이름을 서울 이씨로 바꾸고, 자칭 경중 이상인(京中李喪人)이라 불렀다. 동네에 있던 신자들도 오랫동안 알지를 못하였고, 집주인 김귀동과 그의 아내, 그리고 강 그레고리오의 어머니만 알고 있었을 뿐이다. 황사영은 신변의 위험을 느껴 김한빈과 김귀동이 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을 파서 이곳에 숨어 있었다. 황사영은 배론에 도착한 후 3월 그믐께 김한빈을 서울로 보내 서울의 박해 상황을 살피게 하였는데 그는 사옥(史獄)이 이제 한창 벌어지고 있으며,이미 여섯 명이 참수되었다고 전했다. 황사영은 신유박해의 초기의 양상을 자신이 보고 들은 대로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또 김한빈은 6월 2일 제천 읍내에 나갔다가 포졸들에게 불심검문에 잡혀 서울로 압송 중에 원주에서 도망쳐 배론으로 다시 돌아왔다. 황사영은 배론에 있으면서 김한빈, 황심, 송재기로부터 박해의 진행사항을 들어 알았고, 교회 재건의 방안을 생각하거나 글 쓰는 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8월 23일 황심이 서울에 있으면서 주문모 신부의 순교 소식을 전하였다. 이때부터 황사영은 박해의 경과와 교회재건에 관한 자신의 의견을 비단에 적어 북경주교에게 전달할 보고서의 계획을 세우고 백서를 작성하기 시작하였다. 백서 작성이유에 대해서 황사영은 추국(推鞫1801년 10월 7일)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몸이 볼 때 나라와 백성에게는 해가 없는데 다만 王家에서만 금교 하므로 이 몸이 힘을 다하여 서학을 금하지 못하게 할 계교로 한 짓이올시다.” “이 몸은 다만 양학(洋學)을 국내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생각한 짓이고,이외에는 더 아뢰올 말이 없으니 관대한 처분을 바랍니다.”
그러나 이것은 신문과정에서 나온 말이고 실제로 백서에서는 이렇게 기록된다.
현재 교우 중에 지식이 있고 의지가 굳은 사람이 몇 안 되어 우매한 이들과 부녀자와 아이들을 대충 합하여 수천 명에도 이르지 않는 이들을 지도할 사람이 없어서 떨치고 일어날 방법이 없습니다.이런 형편으로야 어찌 오래 갈 수 있겠습니까?10년이 못가서 비록 정부의 박해가 없더라도 저절로 소멸하고 말 것입니다.아 참으로 슬픈 일이옵니다.죽기 전에 성교가 끊어져 없어지는 것을 어떻게 차마 보겠습니까?
이처럼 신유박해가 일어나 조선교회가 위태롭게 되자 그 실상을 구베아 주교에게 알리고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으로 백서를 작성하였음을 확인 할 수 있다.
(2)백서작성의 영향
황사영은 백서를 작성할 때 주문모 신부와 현계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
먼저 주문모 신부는 강소성 소주(蘇州)의 곤산현(崑山縣)출신으로 북경교구 신학교를 졸업하고,1792년 4월 12일자로 조선포교지의 지도를 위임받았다. 황사영은 1795년(乙卯) 최인길 집에서 주문모 신부를 처음 만나 깊이 신뢰하며 천주교를 믿는 서양을 이상적인 국가로 여기면서 주문모신부에 대해서는 추국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문모 신부는 참으로 德行이 정수(精粹)한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 제자가 되기를 원하였고 잠시도 그 곁을 떠나고 싶지 않았지만 1년에 불과 두세 차례밖에 만나지 못해 그 집에 머물며 자주 뵙지 못한 것이 지극히 한스러우며, 양인이 살고 있는 곳에 가보지 못한 것이 한이올시다. 사옥(史獄)이 벌어진 후에 이 몸은 줄곧 숨어 살면서 신부를 보호하지 못한 것이 원통합니다.
주문모 신부는 입국한 후 박해가 심하여 북경 구베아 주교께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신부를 맞아들인 후 나라의 금령이 아주 엄하여 작은 나라 안에서 편안히 거처 할 길이 전혀 없고, 성교 또한 따라 행하기가 어렵습니다. 청컨대 서양의 큰 배를 나오게 하여 일장판결한 뒤에야 신부도 편안할 수 있을 것이고 聖學또한 행해질 수 있습니다.중국은 예로부터 利瑪竇(마테오 리치),閣老(徐光啓),大宗伯,(李之燥)같은 사람이 성교를 존중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이 학문을 사랑하고 공경하는 사람들이 한미한 사람이 많고 조정에서 벼슬하는 사람이 혹은 있지만 믿을 만한 사람이 못되니 어찌 슬프고 슬프지 않겠습니까? 만일 서양의 큰 배를 불러온다면 나라의 금령이 반드시 누그러질 것이고 우리의 천주교가 찬양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건대,우리나라의 임금에게 부탁하여 망원경 등과 같은 물건과 많은 비단을 준비하여 보내되,반드시 우리나라에 편지를 보내 언제나 귀국의 풍습과 명성을 흠모하였지만 설교가 없는 것이 한탄스러웠습니다. 우리나라에서 聖學에 독실한 사람으로 하여금 배를 태워 보내니 반드시 聖敎가 크게 행해져 외롭지 않게 해주시기를 멀리서 바라옵니다. 라는 말을 해 주십시오”
황사영 백서의 내용과 많은 부분이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황사영도 자신의 백서에서 주문모 신부의 영향을 받아 양박(洋舶)을 요구함을 볼 수 있다. 주문모 신부는 북경주교에게 연례보고서를 매번 보냈었다. 연례보고서를 보낸 시기가 1797년부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와 함께 연례보고서를 작성하여 바다를 통한 선교의 내용을 구베아 주교에게 보냈다.
두 번째로 황사영은 현계흠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사료된다.백서에 “군함의 척수와 인원수에 대하여(중략)”(백서 112行)의 군함에 대해 1797년 9월(정조21)에 동래(東來)용당포에 내항한 영국인 부루톤(Broughton)의 북태평양 탐험선이 입항했을 때 교우인 현계흠이 그 배에 올라 자세히 돌아보고 와서 황사영에게 알려주었다.즉 현계흠의 洋舶에 대한 이야기를 황사영의 백서 작성의 한 부분으로 추측할 수 있다.
(3)백서 발각 이후
백서 전달 예정자는 옥천희(玉千禧,요한)이다. 옥천희는 세 번이나 마부로 북경을 왕래하면서 북경의 남당 주교좌성당의 구베아 주교한테 천주교를 배워 요한이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황사영은 1800년 10월에 옥천희를 현계흠의 집에서 만난 적이 있었고, 그래서 황사영은 완성된 백서를 황심에게 전하고 이것을 다시 옥천희가 이를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예정이었다. 백서의 발신자는 황사영으로 하지 않고 황심(黃沁,토마스 :多黙)으로 하였는데 그 이유는 황심으로부터 자신이 서울을 떠나 올 때의 정세와 김한빈이 전해준 상황 보고를 들으면서, 주문모 신부가 순교한 후 중국에 있는 선교사의 이름으로 북경에 간 적이 있는 사람은 황심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발신자를 그의 세레명인 토마스(多黙)으로 하자고 제안했고 황심도 순순히 승낙하였다.
황심은 윤유일 이후 조선교회와 북경교회를 잇는 유일한 연락원으로 종을 가장하여 주문모 신부와 신자들의 편지를 북경교회에 전하였을 뿐 아니라 북경에서 영세를 받은 인물이다. 황사영은 북경주교를 직접 만난 적이 없어 생소했지만, 황심은 북경주교로부터 신심이 깊고 열심한 양반인데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비천한 종노릇을 한 것으로 알려져 깊은 신뢰를 받고 있었다. 옥천희(요한)는 1801년 3월에 사은사(謝恩使)일행으로 북경에 갔다가 돌아오던 6월에 책문에서 체포되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황심도 9월 15일에 춘천에서 체포되고 9월 26일 황사영이 숨어 있는 곳을 자백했는데, 그 이유는 그는 옥중에서 황사영이 이미 다른 곳으로 피신했다고 전해 들었고,박해로 인하여 서울과 지방이 떠들썩함을 자신의 자백으로 중단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으로 황사영의 거처를 알려 준 것이었다.
배론에 들이닥친 포졸들은 9월 26일 황사영을 체포하고 백서도 압수하였다.10월 5일 심환지는 황사영을 체포할 때 현장에서 지극히 흉악한 문서를 압수하였다고 보고하였고, 좌포장 임율(任嵂)과 우포장 신응주는 이 때 압수한 백서를 조정으로 올려 대왕대비 및 임금이 이를 살펴본 후 국청(鞫聽)을 내렸다. 이 후 백서는 의금부에 보관되어오다가 1894년 갑오경장이 단행되면서 의금부의 옛 문서들을 파기․정리 하는 과정에서 개화관료이며 신자인 이건영(요셉)에 의해 교구장인 뮈텔(Mutel)주교에게 전달되었다. 뮈텔 주교는 1925년 7월 5일 조선순교 복자 79위 시복식(諡福式)이 로마에서 거행되던 중 6월 25일 교황청 VanRossum추기경을 만나 백서를 전달하였고, 이를 7월 4일 교황 비오 11세(1857-1939)을 알현할 때 드려 교황은 자리에서 일어나 우리와 함께 “비단에 쓴 편지(백서)”를 펼쳐 놓고 마음의 감동을 받았다고 전한다.
교황 11세에게 전달된 백서는 같은 해 로마에서 열린 세계 포교 박람회에 전시되다가 교황청 민속박물관 문서고로 옮겨져 지금까지 그곳에 보관해 오고 있다. 지금까지 나온 백서 중 필사본을 1924년 뮈텔 주교는 백서를 교황청에 보내기에 앞서 원본을 콜로타이프판에 붙여 실물 크기와 똑같이 제작을 하였다.또한 뮈텔 주교는 1924년 3월 정남규(요한)로 하여금 원본백서와 「辛酉冬陳奏使膽本帛書」의 원문을 필사하게 하여 현재 절두산 순교 기념관에 보관하고 있다.
Ⅲ.황사영백서의 해제와 내용분석
1.황사영 백서 해제
백서(帛書)는 비단에 씌어진 글을 뜻하는 명사이다. 백(帛)은 비단을, 서(書)는 ‘바른 손으로 붓(筆)을 잡고 글씨를 쓰는 것(著)’를 뜻한다.1801년 당시 천주교회의 박해현황과 그에 대한 대책 등을 북경의 주교에게 보고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압수당한 비밀문서이다. 황사영 백서의 원본은 가로 62cmm 세로 38cmm의 흰 명주에 바른 해서(楷書)로 또박또박 씌어졌다. 모두 122행으로 되어있고, 각 행의 글자 수는 96-124자이며 본문 13,264자, 세주 120자,도합 13,384자(이외 ㄴ표시가 44개있음)에 달하는 장문으로 되어있으며, 원본을 볼 수가 없어 확인할 길 없으나 몇 부분의 가필한 흔적이 있다. 발신자는 황심(토마스)으로 되어 있고, 북경주교에게 백서를 전달하기로 예정된 사람은 옥천희(요한)이었다.
수신인은 다만 북경교구장으로 프란치스코 회원인 포루투칼의 구베아(Alexandrede Gouvea,1751-1808)주교이다. 백서가 작성된 곳은 배론에 사는 신자 김귀동의 집 토굴이었다. 황사영은 김귀동과 김한빈이 함께 판옹기굴을 가장한 토굴에서 8개월간 (1801년2~9월)은신해 있으면서 백서를 작성 하였다.배론 도착 시점인 2월 보름 전의 일에 대해서는 자신이 보고 들은 사항들을 정리하였고, 그 이후 일들은 김한빈과 황심을 통해 정리하여 백서는 시몬 타데오 축일 다음 날인 9월 22일 완성되었다. 그는 같은 해 10월 동지사편에 북경에 가기로 되어 있는 옥천희에게 백서를 전해 줄 황심이 9월 그믐날 전에 오기로 한 약속을 상기하면서 완성된 백서를 넘겨주려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황사영은 9월 26일 황심의 고발로 인하여 9월 29일 배론에서 체포되고 또한 백서도 압수 되었다.
한편 조정에서는 황사영의 체포로 압수한 백서 중에 교회와 비밀 연락이 누차 있었던 것을 알게 되자 주문모신부의 처형과 관련하여 중국과의 외교문제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여 1801년 11월 25일 청나라로 가는 사신 동지사(冬至使)를 진주사(陳奏使)를 겸하게 하여 작성한 황사영 백서의 축약본인, 토사주문(討邪奏文)29)과 함께 중국에 보내게 된다. 이는 조선 조정에 유리한 부분만을 발췌하여 원본백서와 똑같은 규격으로 흰 비단에 16행 923자로 만들었다. 그 내용은 서양선박의 청래(請來)와 국경을 넘는데 연락방법에 대하여 두 가지만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중국에서는 1802년 1월 30일 토사주복(討邪奏覆)을 조윤대가 받아왔는데 중국에서의 서양 사람들은 중국내에서 힘써 일하고 법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라고 하여 정보의 비대칭성이 나타났다.30) 또한 이 이본 백서(토사주문)가 황사영 백서의 정당한 평가를 하는데 장애물이 되었다. 이 축약된 이본 백서도 원본이 입수 될 때 함께 뮈텔주교에게 입수되어 1931년 일반에 공개되었다.
2.주제별 내용분석
지금까지 백서 연구자들의 내용분석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하성래는 백서를 편지의 서간문 형식으로 규정하고 첫째 서두(序頭),둘째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발단과 그 진행,셋째 순교자의 활동과 그 순교 사적,넷째 신부영입과 신앙의 자유 획득책,다섯째 말미(末尾)로 분석하였다.
여진천은 첫째 인사말 둘째 신유박해(辛酉迫害)의 발단과 그 진행, 셋째주문모 신부를 포함한 순교자들의 열전, 넷째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 다섯째 대,소재의 관면요청과 맺음말로 분석하였다.
배은하는 첫째 서론, 둘째 본론, 셋째 교회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5가지 방안으로 분석하였다.
방상근은 첫째 서론 부분으로 박해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함께 서한을 보내는 이유,둘째 본론 부분으로 신유박해의 전말과 신부를 포함한 순교자 행적,셋째 결론 부분으로 조선교회재건을 위한 다섯 가지 방안으로 분석하였다.
山口正之(야마구찌)는 첫째 순조원년(1801년)의 소위 신유박해(辛酉迫害)에서의 순교자들의 내력 둘째 천주교박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서의 당쟁의 새로운 전개 셋째 조선천주교회 재건책으로 분석하였다.
연구자들마다 차이는 있지만 대부분의 백서는 세 부분에서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황사영 백서는 서간문의 보고서 형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종교 주제별 형식에 의한 분석에 더욱 자세한 접근을 이룰 수 있으며,백서에 대한 의미 파악을 더 잘할 수가 있다.
종교 주제별의 항목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첫째 교회 내적 주제와 둘째 교회 외적 주제 그리고 셋째로는 일반적인 주제로 구분한다. 교회내적 주제는 문안, 보고, 성교(聖敎)활동,순교,배교,박해,선교정책,관면으로 구분되고, 교회외적 주제로는 정치로 구분한다.36)주제별 분석을 자세히 보면,황사영은 각 주제별로 보고서 작성 시 주제에 따른 당시의 현황을 자세히 서술하였다는 점이 특징이라 하겠다.
주제의 비중으로 보면 가장 많은 부분이 교회 내적인 주제로는 당시의 성교(聖敎)활동이고,다음으로 선교정책 제시이고,다음으로 순교와 박해에 대한 사항이었고 그 다음은 교회 외적인 상황으로 정치적인 사항을 보고하였다.성교활동 중에서는 교우들의 성교활동 상황을 가장 많은 비중을 갖고 나타난 것으로 보아 당시의 긴박한 상황을 전하여 교회재건과 신부영입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볼 수 있다.아울러 순교와 배교,박해에 대한 상황도 자세하게 나타내고 있다.
가.일반적 주제
저희 토마스등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 주교님께 호소합니다. 주교님께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으로 영육간에 건강하시고 주님의 도우심으로 나날이 융성하시기에 우러러 사모하는 마음이 간절하며 기뻐하여 축하를 드리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백서의 발신자를 자신을 밝히지 않고 황심으로 한 것은 당시 북경교회와의 유일한 연락원인 황심이 당시 종으로 가장하여 주문모 신부의 편지를 북경에 전달하였는데 구베아 주교로부터 신심이 깊은 양반이 사명을 다하기 위해 비천한 종노릇한 것으로 알려져 깊은 신뢰를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교회 내적 주제
(1)교회현황보고
“저희 죄인들은 위로는 죄악이 깊고 무거워 주님의 노여움을 샀으며,아래로는 재주와 지혜가 얕고 짧아서 다른 사람들을 헤아려 줌을 잃었습니다. 이런 까닭으로 박해가 크게 일어나 그 화(禍)가 신부40)에게 미쳤습니다. 죄인들은 이 위기에 처하여서도 스승과 함께 목숨을 버려 주님께 보답하지도 못하였으니,무슨 면목으로 감히 붓을 들어 우러러 호소하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성교(聖敎)가 전복될 위험에 처하여 있고, 백성들은 물에 빠져죽는 고통 속에서도 어지신 아버지를 잃어, 붙들고 호소할 데가 없으며, 진실한 형제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서로 의논하고 일할 사람이 없습니다.”
(2)성교 활동
① 성교(聖敎)현황 보고
“오늘날 성교가 온 세상에 널리 퍼져 모든 나라 사람들이 성덕을 노래하고 주님의 교화에 북을 치며 춤추지 않은 이가 없습니다. 우리나라(左海)의 백성들을 돌아보건대 어느 누가 주님의 赤字아닌 이가 있겠습니까마는 지역이 멀고 궁벽하여 가장 늦게 성교를 들었고 또 기질이 잔약하여 고통을 견디기가 어려워 10년 풍파에 늘 눈물과 근심 가운데 있었는데, 금년(1801)의 잔혹한 박해는 꿈에도 생각할 수 없이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실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생이 어찌 이토록 극단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이 난이 비록 끝난다 하더라도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동쪽 땅에서 영원히 사라질 것입니다. 말과 생각이 이쯤 미치고 보니 간장(肝腸)이 갈기갈기 찢어집니다. 중국과 서양교우님들이 이 위태롭고 괴로운 사정을 듣는다면 어찌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까?”
② 교우들의 성교(聖敎)활동
이중배(마르티노)는 경신년(1800)부활 축일에는 개를 잡고 술을 빚어 한마을 교우들이 길가에 모여 앉아 큰소리로 희락경을 외우고 바가지와 술통을 두드려 장단을 맞추며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그날 원수진의 밀고로 열한 명45)의 교우들과 함께 체포되어 관청으로 끌려갔다. 이중배는 본래 의술을 알고 있었으나 그다지 깊이 알지는 못하였는데 옥에 갇힌 후 혹 병에 대하여 문의하는 사람이 있으면 먼저 주님의 도우심을 구한 다음 침을 놓고 약을 처방하였는데 낫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명성이 크게 퍼져서 멀고 가까운 각처에서 사람들이 몰려와 옥문 밖은 늘 장날 같았다.
하루는 옥리(獄吏)가 와서 의서(醫書)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은 없소 다만 천주를 공경할 뿐이오.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주님을 믿으시오”라고 하였다.그러자 옥리가 “책들을 다 불태워버렸는데 어찌 배울 수가 있단 말이오.”하고 묻자 이중배는 웃으면서 “내 가슴속에 있는 불태워 버리지 못하는 책으로 충분히 남을 가르쳐서 교를 받들게 할 수 있소.”하고 대답하였다. 이중배는 옥중에서도 늘 책을 베끼고 경문을 외우며 진리를 설명하여 사람들을 권유하였는데 옥졸 한사람이 감화되어 교를 믿었다.
권철신은 경기도 양근에 살고 있었는데, 그는 원래 경학과 예학으로 세상에 이름난 유학자이었는데 성교가 이 나라에 들어오자 온 가족이 믿고 따랐다. 본래 이름난 집안이라 남들의 비방도 대단하였는데. 그의 아우 일신48)이 신해박해 때 죽고 나서부터는 감히 드러내놓고 신앙을 지키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원수같이 여기고 시기하는 자들의 미움과 원망은 점점 심해갔다. 기미년(1799)여름 그를 터무니없는 일을 꾸며 관가에 고발하였는데 마침 그 고을 군수가 현명하게 조정하고 정당하게 밝혀내어 간악한 모함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서울에 있는 간악한 관리는 그들과 결탁하여 경신년(1800)5월에 선왕을 직접 뵙고 “양근 온 고을에 사학이 한창 성행하니 이 군수를 마땅히 징계해야 한다”고 아뢰었다. 선왕이 그 보고를 듣고는 옳다고 판단하여 양근 군수를 인책하여 사임시켰다.
총회장 최창현(요한)은 중인으로 천주교가 우리나라에 들어오자 남보다 먼저 입교하였고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20년을 하루같이 지냈다. 교우들 중에서 덕망이 제일 높아 그를 사랑하고 신뢰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신유년(1801)1월 5일 몸이 불편하여 부득이 자기 집으로 돌아와서 몸조리를 하였는데 9일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다.
10여일 후 치도곤 열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에는 기절하여 죽어 쓰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그의 죄목을 셀 때에는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10계명을 강론하여 밝혔다. 관리가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물으니 그는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에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가 없지 아니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라고 대답하였고 이에 대답을 못한 관리가 그를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는 한글로 ‘주교요지’ 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그 책은 한 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다. 또한 그는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광범하고도 방대하여 책 이름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주려고 하였으나, 책의 초고가 절반도 이루어지지 못한 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가자 관리가 국왕의 명을 거슬렀음을 문책하니 정약종56)은 성교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고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관리가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변박했다고 해서 대역부도의 죄로 논하였다. 그는 옥에 끌려 나와 수레위에 올라 처형장으로 갈 때에도 큰 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음은 당연한 일이오. 공심판 때 우리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당신들은 서로 웃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라고 말했다.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다시 엎드렸다.이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58)은 젊어서 진사에 올랐고 만년에는 경학을 좋아하였는데 그의 딸이 정약종의 아들에게 시집가고부터 그로 인하여 남들의 비방을 받다가 잡혀서 순교하였다. 홍낙민(바오로)은 본래 충청도 예산현 사람으로 젊어서 진사시험에 합격하였다. 그는 서울로 이사한 후 이승훈,정약종과 어울려 갑진년(1784)과 을사년(1785)사이에 천주교를 믿었다. 을묘년(1795)성사를 행할 때 보례를 받고 고해성사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판공 때가 오기 전에 큰 박해가 일어났다. 그의 이름이 한영익의 고발에 들어있었으므로 선왕이 배교하라고 다시 핍박하였다. 그는 기미년(1799)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 만일 잡혀가서 배교하였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 확실한데 참수형에 이른 것으로 보아 그가 성교에 어긋난 일을 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이승훈(베드로)은 젊어서 진사에 급제하고 학문과 궁리를 좋아하여 벼슬하지 않은 선비 이벽이 크게 기특히 여겼다. 그 때 이벽은 성교의 서적을 비밀리에 읽고 있었는데 이승훈은 이를 몰랐었다. 계묘년(1783)에 아버지를 따라 북경으로 가게 되자 이벽이 부탁하기를 “북경에는 천주당에 서양선교사가 있으니 자네가 가서 찾아보고 신경 한 부만 달라고 하며 세례 받기를 청하면 선교사들이 자네를 크게 사랑하여 기이한 물건과 패물을 많이 얻을 것이니 반드시 그냥 돌아오지 말게”라고 하였다. 그래서 양신부에게 세례를 요청하여 세례를 받은 후 집에 돌아오자 이벽 등과 함께 전심전력으로 그 책을 읽어보고 비로소 진리를 터득하고는 가까운 친구들에게 권유하고 감화시켰다.
이가환은 문장으로서는 나라 안에서 으뜸이었으며,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기억력이 신과 같았다. 갑진(1784)년과 을사년(1785)무렵에 이벽이 그에게 『초함』책 몇 가지를 주었다.그때 이벽에게는 『성년광익』한권이 있었으나 가환이 기적을 믿지 않을까 하여 빌려주지 않으려고 하였다.그러나 가환은 기어코 달라고 하여 이벽이 그때 갖고 있던 성교서적을 모두 가져다가 정신을 쏟아 거듭 읽고는 믿기로 결심하고 말하기를 “이것이 과연 진리요,정도로다.진실로 사실이 아니라면 서적 가운데 쓰인 말은 전부 하늘을 모함한 것이요,하늘을 업신여긴 것이다."
드디어 그는 제자들을 권유하여 교리를 가르치고 아침저녁으로 이벽 등과 비밀리에 왕래하며 열심히 하였다.이가환은 무오, 기미(1798-1799)사이에 지방에서 박해가 계속 일어난다는 말을 듣고 자기의 소신을 은밀히 말하기를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과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임금께서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하였다.
김건순(요사팟)은 어릴 때부터 특이한 데가 있어 아홉 살 때에 선도(道交)를 배울 생각을 하였고 어려서 서당에서 훈장에게 “논어”를 배웠는데 ‘귀신을 공경하되 멀리할 것’이라는 대목에 와서 “마땅히 공경해야 한다면 멀리하는 것은 옳지 않을 것이고, 마땅히 멀리해야 한다면 공경하되 멀리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라고 물으니 훈장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그의 집에 있는 『기인십편』이라는 책을 보고 10여 세에는 『천당지옥론』을 저술하여 천당과 지옥이 반드시 있음을 밝혔으며, 이 나라의 상복은 송나라 유학자의 제도를 그대로 따라 써서 삼대의 옛날 법을 많이 잃었는데 요사팟은 열여덟 살 때 양부의 상을 당했을 때 이것을 바꾸어 바로 잡았다.
그는 이마르티노 등 5,6명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강소성과 절강성 지방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이용후생의 방법을 많이 배워가지고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다.그러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고 5,6명 모두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그는 마침내 참수형을 당해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그의 나이 26세였는데 장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해 하였다.
김백순은 그의 선조 상용은 벼슬이 정승이 되어 숭덕 병자년에 청나라 군사가 강화도를 함락시키자 의리를 굽히지 않고 스스로 불에 타 죽었다. 이로 인하여 그의 사당과 정문이 세워졌는데, 나라에서는 대궐 안에 대보단을 세워 전조(前朝)명나라의 황제였던 만력과 승정 두 황제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 이치가 의심스럽고 분명하지 않아 전적으로 믿을 수 없음을 깨닫고는 마침내 노자(老子)장자(莊子)의 책을 읽었다. 그리하여 사람이 죽어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 있음을 깨닫고 새로운 이론을 내세워 친구들에게 강의하였더니 친구들은 “이 사람의 이론이 새로운 것이니 반드시 서교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백순은 그들의 꾸짖는 말을 듣고 의아한 생각이 나서 그는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들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고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하며 더욱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다.그는 늘 “나는 천주가 계심을 안 이래 내 마음이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홍필주(필립보)는 본래 성품이 선량하여 어머니를 따라 천주교에 입교하였는데 별로 열심이지 않았다. 그런데 신부를 모신 지 1년 만에 아주 딴사람이 되어 모두들 놀라 기이하게 여겼고 집에서 늘 미사 복사를 하였다. 강완숙(골롬바)은 10여 세가 되어 지식이 약간 열리자 불교가 허황하여 믿을 것이 못됨을 알고 다시는 따르지 않았다. 강완숙은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스스로 짐작하기를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바르니 도리도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책을 구해 한번 읽어보고는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다. 을묘년(1795)에 세례를 받았는데 신부는 그녀를 보자 매우 기뻐하고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겼다. 강완숙은 6년이나 교회의 모든 중요한 일을 도왔으므로 신부의 총애와 신임은 누구도 그와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안으로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복, 음식을 바르게 공궤하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용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
조 베드로는 나이가 30이 넘도록 관례(冠禮)도 못하고 장가도 들지 못하였다.그는 몹시 쇠약하고 세상일에도 어두워 사람들이 그를 비웃고 사람 축에 넣지도 않았다. 정약종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는데 경신년(1800)4월에 아버지와 함께 여주 이 마르티노의 마을에 갔다가 마르티노가 체포될 때 부자가 함께 붙들려 관청으로 끌려갔으나 굴복하지 않았다.관리가 노하여 “네가 명령을 듣지 않으면 네 아버지를 당장에 죽이겠다.”하고 아버지를 끌어내어 그가 보는 앞에서 혹독한 매질을 하니 베드로는 하는 수 없이 배교하는 말을 하여, 석방되어 문을 나올 때 이중배(마르티노)등이 깨우치고 권면하자, 베드로는 마음을 돌이켜 참회하고 다시 들어가 성교를 설명하였다. 베드로만은 가장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았다.베드로는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신유년(1801)2월 관원이 다시 엄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령하니 “하늘에는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그러니 한번 죽는 것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소.”라고 대답하였다.
③ 성직자 성교(聖敎)활동
주문모 신부는 을묘년(1795)이래 늘 강완숙(골롬바)의 집에 살면서 간혹 딴 곳에 돌아다녔는데 오직 강완숙만이 이 사실을 알았고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랐다.주문모 신부가 이 나라에 오자마자 고발한 자가 있어서 이미 선왕이 알고 있었으므로 7년 동안 조심하고 또 두려워서 몸을 움츠리지 아니한 때가 없었고 감히 성사를 널리 집행하지도 못하였다.83)그러나 실제로는 각주 83項에 보면 주문모 신부는 5년간 이 땅에서 사목활동은 매우 활동적이었다. 당시 초기교회 지도자들은 성사를 집전하는 선교사가 없이는 교회가 유지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주문모 신부는 당시 조선의 풍습을 잘 알지 못하여 오는 사람들을 쉽게 받아들였다.그러던 과정에서 자신을 밀고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진사 한영익이 주문모 신부를 만난 후 천주교를 비판하고 있던 이벽의 동생 이석을 찾아가 신부의 거처를 알렸다. 당시 우의정인 체제공은 이석으로부터 중국인 선교사가 들어왔음을 알았고, 이 사실을 정조에게 보고하였다. 정조는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비밀리에 체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당시 주문모 신부는 최인길의 집에서 강완숙의 집으로 옮긴 상태이고 최인길은 주문모를 가장하여 있다가 체포되었다. 이 사건 이후 주문모 신부는 자신의 신변 안전과 천주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하여 서양선박을 청해야한다는 생각을 하였다.
(3)순교
① 순교자 현황보고
황사영은 교회의 지도층의 신자들이 거의 순교를 당하고 주문모 신부까지 순교함으로써 교회는 거의 빈사상태에 이르러 당시 교회에 대한 현황을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저희는 예로부터 어두운 지역에 태어났으나 다행히 천주의 백성이 되었으므로 항상 몸과 마음을 다하여 주님의 이름을 드높여서 특별한 은혜의 만분의 일이라도 갚기를 생각하였는데, 중도에서 이런 일을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까? 일찍이 듣건대 “순교자들의 피는 성교의 씨앗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뜯어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살아나가기를 바랄 수 있지만 저희는 백번 생각해 보아도 실로 살 길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는 불행하게도 동쪽으로 일본과 이웃하고 있습니다.섬나라 오랑캐들이 잔인하고 흉악하여 스스로 천주와의 관계를 끊어버렸는데,우리 조정에서는 오히려 그것을 잘한 것으로 받아들이려고 하니 어찌 한심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뜻이 이 나라의 일을 주교님께 맡긴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저희가 어찌 감히 간절하고 애틋한 마음을 하소연하여 이 은혜를 우러러 받들지 아니하겠습니까? 모두 말씀드리오니 원컨대 굽어 살피시기 바랍니다.
전라도는 신해년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서 교우가 대단히 많았습니다.4월 초 전주의 유항검(아우구스티노)과 고산의 윤지헌(프란치스코)등 200여 명이 체포되었는데 오직 김제의 가난한 선비 한 씨와 전주의 상인 최여겸 만이 의지가 굳어 참수형으로 순교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굴복하였습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배교한 사람들은 모두 먼 곳으로 귀양 보냈는데 그 수가 대단히 많았습니다. 유항검 형제와 윤지헌은 지도자였기에 바로 귀양 보내지 아니하고 서울로 올려다가 가두었습니다. 김 토마스는 체포되었을 때 자기가 그들과 내왕한 일이 있다고 실토하였으므로 그 역시 서울로 옮겨다가 가두었는데 죽었는지 아니면 귀양을 보냈는지는 아직 모릅니다.
외교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정식으로 처형된 자와 옥중에서 죽은 사람이 300여 명인데 지방의 숫자는 포함되지 않은 것이라고 합니다. 조선 건국 이래 사람을 죽인 수가 올해처럼 많은 적이 없었다고 합니다만, 그것이 믿을 만한 일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 또 헛되이 죽은 자가 누구이며 순교한 사람이 몇인지도 잘 알 수가 없습니다. 조정에서 기어코 죽여 없애려 하는 자는 지위가 높고 글을 잘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리석고 무식한 평민들은 혹 알아도 모르는 채 내버려두고 취조도 혹독하게 아니하여, 서울 장안의 상인들은 목숨을 보전한 이가 많습니다.
2월 보름 전의 일은 죄인이 친히 목격하였으므로 꽤 상세하게 압니다만 그 이후 일은 전하는 말을 얻어들은 것이기에 매우 소홀하고 간략합니다. 순교자들의 사적은 분명히 들은 것과 평소에 전부터 잘 아는 것을 추려서 적은 것이라 대강에 지나지 않지만 그 나머지는 감히 함부로 기록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기록한 것 가운데서도 오히려 진실되지 못한 데가 있을까 염려됩니다. 마땅히 다시 자세히 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전국적으로 펼쳐지고 있는 박해에 대하여 소상히 밝히고 있다.
② 교우들의 순교
고위 관료회의에서 대역부도죄로 판결하고 26일에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최창현(요한), 최필공(토마스),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이승훈,등 여섯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다. 최필공(토마스)은 늙고 병이 많은데다가 옥중에서 오래 시달려 지쳐 있어서 수레에 오르자 곧 인사불성이 되었는데 형장이 가까워오자 비로소 얼굴에 즐거운 표정이 나타났다. 그는 맨 먼저 형을 받았는데 나이는 56세였다. 홍낙민(바오로)은 기미년(1799)에 모친상을 당하였는데 신주를 모시지 않았다.근래에 열심이 약간 일어나 전심으로 주님께 돌아오려 하였으나 이 거룩한 뜻을 미처 이루지 못하고 체포되어 참수형을 당하였다. 최필제(베드로)의 아버지는 본래 외교인이었는데 아들이 체포된 뒤에 놀라고 걱정한 나머지 병이 들어 죽게 되자 천주를 믿고 세례를 받고 죽었다. 베드로가 옥에서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관청에 출감을 청하니 관청에서는 집에 돌아가 장례지낼 것을 허락하고 또 은근한 뜻을 보여 달아나게 하였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말대로 하지 아니하고 장례를 치른 뒤 기일 안에 감옥에 돌아와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나이는 32세였다.
김건순(요사팟)은 이중배(마르티노)등 5,6명과 생사를 같이하기로 친교를 맺고 장차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강소성과 절강성 지방을 거쳐 북경에 이르러 서양 선비들과 만나 이용후생의 방법을 많이 배워서 본국에 돌아와 가르치려고 하였다. 그러나 입교하였기 때문에 실현하지 못하였고 5,6명 모두가 천주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김백순은 김건순과 함께 한날에 참수형을 받았는데 나이는 32세였다. 그는 입교한 지가 오래되지 않아 세례를 받지 못해 세례명이 없었다. 이희영(루가)은 본래 화공으로 성상을 잘 그렸는데 역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홍필주(필립보)는 골롬바의 전실 아들이다.체포되어 옥에 들어가니 관리가 신부의 동정을 물으면서 혹독한 형벌로 다스렸으나 필립보는 괴로움을 참아 견디고 실토하지 않았다. 마침내 참수형을 당하였는데 이때 나이 28세였다. 강완숙(골롬바)은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리가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하니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그녀는 마침내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는데 나이는 41세였다. 조용삼(베드로)은 옥중에서 대세를 받았고 신유년(1801)2월,관원이 다시 엄한 형벌로 고문하면서 억지로 배교하기를 명령하니 “하늘에는 두 천주가 없고 사람에게는 두 마음이 없소, 그러니 한번 죽는 것 외에는 더 할 말이 없소”라고 말했다. 그러자 관리가 다시 옥에 가두라고 명령하였는데 며칠 후 옥중에서 숨을 거두었다. 때는 2월 14일이었다. 이존창(루도비 코)은 충청도에 전교했다는 죄로 공주에서 참수형을 당하였다.
③ 성직자 순교
주문모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다시 매고 거리를 지나갔다. 신부가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두루 들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자 군졸이 술 한 잔을 바쳤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남쪽 10리 되는 연무장으로 갔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읽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때는 4월 19일 삼위일체 대축일 신시(申時)였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다.
(4)교우들의 배교
백서에 나타난 배교에는 두 가지로 나타난다.배교를 한 후 다시 회개한 사람과 배교를 한 사람으로 나타나는데 전자는 최필공(토마스), 홍낙민, 이가환, 최필제(베드로), 조용삼(베드로), 이존창(루도비코)이고, 후자는 이승훈, 유관검,유항검, 윤지헌(프란치스코), 이존창(루도비코)으로 나타난다. 황사영은 이렇게 두 가지의 형태 중에서 배교 후 순교를 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한 것으로 보아 당시의 배교로 인한 어려움의 극복을 신앙적으로 잘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5)박해
① 박해에 대한 현황보고
황사영은 처절하게 진행되고 있는 박해의 상황에 대하여 이렇게 보고하고 있다.
이제 박해의 전말을 대략 아뢰고자 합니다.현재 교회는 여지없이 무너져 아무 것도 남은 것이 없는데 오히려 죄인만이 요행히 화를 면하였고 요한도 발각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의 은총이 아직 우리나라에 아주 끊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할 것입니다.그러나 재능이 미약하고 힘이 부족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두세 명의 교우가 비밀리에 모여 당면한 해야 할 일들을 의논한 결과 그동안 속에 품었던 사건을 일일이 아뢰기로 하였으니 읽어보시고 의지할 곳 없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빨리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죄인들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울음마저 터뜨리지 못한 채 흐느끼고 있습니다. 마음이 쓰리고 뼈가 저려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주님의 전능과 주교님의 넓으신 사랑뿐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정성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 주시고 연민의 정을 크게 베푸시어 저희를 이 환난에서 구원하시고 저희로 하여금 편안한 한자리위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② 교우들의 박해
19일 주님봉헌축일 새벽, 최필제(베드로)는 길가에 있는 약방의 안방에서 몇몇 사람들과 함께 경문을 외우고 있는 도중에 갑자기 들이닥친 관원들에 의해 몸을 수색당하고 이 과정에서 침례표 한 장이 발견되었다. 그것이 곧 성교에 관계되는 글임이 밝혀지자 다른 교우들은 날이 밝자마자 다 달아나 흩어졌고 오직 최필제와 오석충(스테파노)두 사람만 남이 있다가 잡혀서 관가로 끌려가 토마스와 함께 갇히게 되었다.
1801년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의금부에 가두고 2월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체포하고,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였다.2월 24일에는 강완숙(골롬바)의 모든 가족이 체포되고 이어 양반집 부녀자들도 아주 많이 체포되었다.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이 관가에 이르러 관리가 책롱사건에 관련된 책들에 대해 그 내력을 물으니 정약종은 다 자기의 것이라고 하였다. 관원이 그 가족에게 사람을 보내어 “너의 남편과 너희의 아버지가 신부의 성명과 있는 곳만 알리면 절대로 죽을 리가 없는데 혹독한 매를 맞으면서도 끝내 입을 열지 않는다. 너희 가족들은 틀림없이 알고 있을 터이니 가장의 목숨을 생각하여 바른 대로 말하라”고 하였으나 가족들은 한결같이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③ 성직자 박해
주문모 신부는 1801년 3월 중순께 의금부로 들어가 “나 역시 천주의 가르침을 받드는 사람으로 조정에서 이것을 엄중히 금하고 무죄한 사람들을 많이 죽인다고 하니, 살아있는 것이 무익하므로 스스로 죽기를 구하러 왔다.”고 말하였다. 그가 신부임을 알고 옥에 가두었는데 다만 양쪽 발에 족쇄만을 하고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다시 떠메고 거리를 지나갔다.
(6)선교정책
① 선교 현황보고
황사영은 신부영입 및 신앙의 자유 획득책에 대한 희망을 갖고 당시의 선교에 대한 현황을 보고하고 있다.
교우로 말하면 아직 현저히 나타난 자는 없지만 오히려 몇몇 쓸 만한 사람들이 있어 끌어들일 수 있습니다.정세로 말하면 을묘년(1795)이후 해마다 재앙이 많았는데 거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선왕이 신부를 의심하고 두려워하여 기어코 찾아내려고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노론이 남인을 꺼리고 미워하며 애써 함정에 빠뜨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선왕의 의심하던 것도 이미 깨어졌고 노론이 미워하던 자도 다 없어졌으며 교우 중에 두드러진 사람이 다 죽었으므로 금년만 지내면 박해가 잠잠해질 것입니다. 지방으로 말하면 서울에는 비록 오가작통법이 있어 교우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는 그 법이 엄하지만 교우가 살고 있지 않은 곳에서는 오가작통법이 있어도 유명무실하여 모두 마음 놓고 지내게 되니 발을 붙일 수 있습니다.
지역 형편으로 말하면 경기, 충청, 전라,3도는 본래 교우가 많고 경상도와 강원도는 근래의 난을 피해간 사람이 더러 살고 있는 까닭에 염탐하는 관리가 이 다섯 도를 두루 다니고 있습니다.황해 평안도는 원래 교우가 없었고 이주한 교우도 없어서 잠잠하고 일반 사람들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변문에서는 조사와 감시가 있지만 1,2년 이래 의심할 만한 사람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감시나 조사가 차차 소홀해질 것이므로 손을 쓸 수 있을 것입니다. 경륜으로 말하면 이전 사람들은 널리 드러내기를 힘썼지만 이제는 그렇지 못합니다. 마땅히 보존하기에 힘써야 하니 도랑을 깊이 파고 담을 견고히 쌓아 삼가 자신을 엄격히 지키고 이미 입교한 자들은 성취시키며 아직 완숙하지 못한 사람은 가르쳐 훈계하고 주의 도우심을 정성껏 기도하면서 조용히 기회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린다면, 가히 보존하기에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② 선교에 대한 당위성
현재 교회가 잔혹하게 파괴된 상태에서 선교에 대한 필요성을 신앙적인 측면으로 나타내면서 교회재건의 의지와 계획을 제시하고 있다.
이 나라에서 천주의 은혜는 다른 곳보다 월등하게 컸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일찍이 전교하는 이가 온 일도 없이 천주께서 친히 특별하게 교리를 가르쳐 주셨고 이어 성사를 베풀어 줄 이를 주시는 등, 내리신 갖가지 특별한 은혜를 손가락으로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금년의 이 벌은 진실로 죄인들이 은혜를 저버린 탓으로 일어난 줄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주의 자비하심이 우리를 아주 버리지 아니하시고 이처럼 잔혹하게 파괴된 가운데서도 한 줄기 나아갈 길을 남겨놓으신 것은 이 나라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표증입니다. 천주의 도우심이 이와 같으니 만일 중국과 서양 여러 나라의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합심하고 전력을 다해 도우려고만 한다면 어찌 재난을 길복으로 바꾸어 이 손바닥만한 땅을 구원해 살리지 못하겠습니까? 저희는 이렇게 스스로 위로하고 남도 위로해 주면서 죽음을 참고 목숨을 늘리고 있습니다.
갑인년(1794)의 일에 교우들이 분수에 넘치도록 기뻐하고 다행스럽게 여긴 나머지 엄히 근신치 않은 까닭에,처음에 한 번 실수한 일이 그만 차차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귀감으로 삼을 만한 앞 수레의 뒤집혀짐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았으니, 이제 참으로 더욱 삼가 조심하여 스스로 잘못만 않는다면 환난이 일어날 리가 없습니다. 현재 사태가 이렇다고 해서 반드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것은 아니지만 이런 일은 모두 재물이 있은 다음에야 논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한 지역의 성교회의 존망과 영적생명의 생사가 악한 마몬에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이 없는 관계로 성교가 망하고 영혼이 죽는다면 그 원한이 또한 어떠하겠습니까?
이제 몽매함을 무릅쓰고 감히 엎드려 바라오니 이 일을 위하여 서양 여러 나라에 애걸하여 주십시오. 그리하여 이 나라에 성교를 유지하고 영혼을 구제하는 자본이 마련된다면 면밀히 운영하고 올바르게 준비한 뒤 다시 살아날 은혜를 청하겠습니다. 원하건대 주교님은 가련히 보시고 살펴주십시오.
③ 재정지원
모든 나라 중에 이 나라가 제일 가난하고 이 나라 중에서도 교우들이 더욱 가난하여 굶주림과 추위를 면하는 자가 겨우 10여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하지 못하고 합당치 못한 사람을 끌어들여 환난이 이처럼 참혹하게 된 것도 그 태반이 재정난 때문이었습니다. 금년 박해가 끝난 후 화를 입은 사람은 전 재산이 없어졌고 살려고 했던 자들은 홀몸으로 도망하여 가난한 형편은 도리어 갑인년 이전보다 더 심해졌으므로 설혹 무슨 계획이 있다고 하여도 실행할 길이 없습니다. 지금 비록 다 파괴되었지만 재정만 있으면 아직도 할 일이 있습니다.
④ 북경교구와 연락
국경을 넘어가는 데도 두 가지 난관이 있으니,하나는 머리모양이요 또 하나는 언어입니다.머리털은 쉽게 자라도 입과 혀는 변하기가 어렵습니다. 만일 말이 능통하면 그다지 위험한 곤란이 없을 것입니다.이 나라 사람 하나가 먼저 그 곳 천주당에 들어가서 연소한 상공(相公)들에게 이 나라 말을 가르쳐 후일에 대비하는 것이 극히 타당할 것 같습니다.
만약 허락하신다면 피차간에 암호를 정하고 두드리는 소리로 약속하여 冬門을 기약하고 동문이 불편하면 다시 춘문으로 기약하면 순조롭게 될 가망이 있습니다. 가장 편리한 것으로는 열심하고 신중한 중국인 교우 한사람을 책문 안에 이사시켜 극히 조심하여 소문이 나지 않도록 하고 가게를 차려서 지나가는 사람을 접대하게 하면 왕래할 때와 서신교환에 별로 힘들지 않을 것입니다.그렇게 되면 그 중에 교묘한 방안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것은 막다른 지경에 이른 이 나라 사람들의 생명에 관련된 것이요 또한 실행하기도 과히 어렵지 않습니다.
⑤ 교황을 통한 청원
이 나라는 지금 위태롭고 어지러운 시기이므로 무슨 일이든지 막론하고 황제의 명령이 있으면 감히 좇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때를 타서 교황께서 황제에게 서한을 보내시어 “내가 조선에 성교를 전하고자 하는데 듣건대 그 나라는 중국에 속해있어 외국과 상통하지 아니한다 하므로 이렇게 청하는 것입니다. 폐하는 그 나라에 따로 칙령을 내리시어 서양선교사들을 받아들이게 하여 마땅히 충성하고 공경하는 도리를 가르쳐 백성들이 황조(皇朝)에 충성을 다하여 폐하의 덕에 보답케 하십시오.”하고 간청하면 황제는 본래 서양 선교사의 충실하고 근실함을 잘 알고 있으므로 그것을 허락할 가망이 있습니다.
⑥ 내복 감호책
이 나라는 땅이 기름지고 산물이 많은 좋은 나라지만 李氏가 미약하여 끊어지지 않음이 겨우 실오리 같고 여군이 정치를 하니 세력 있는 신하들이 권세를 부리므로 국정이 문란하여 백성들이 탄식하고 원망합니다. 진실로 이러한 때에 내복을 명하시어 옷을 같이 입게 하고 서로의 왕래를 터 이 나라를 영고탑에 소속시킴으로써 황조의 근본이 되는 영토를 넓히고 안주(安州)와 평양사이에 안무사를 설치하여 친왕을 임명하여 그 나라를 감독보호하게 하면 튼튼한 기초를 만대에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또 들으니 그 나라 왕은 나이가 어려 아직 왕비를 맞지 않았다고 합니다.만약 종실의 딸 하나를 골라 공주라 하여 시집을 보내서 왕비를 삼는다면 왕은 사위가 되고 그 다음 왕은 외손이 되므로 자연 황조에 충성을 다 할 것이며 또한 넉넉히 몽고를 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황제가 이를 들어주고 교우들이 중간에서 일을 주선만 한다면 성교가 차차 크게 퍼져 금지할 수 없을 형세에 이르기까지 이를 가능성도 많습니다. 중국에는 이미 교우가 많고 접촉할 길도 넓으니 어찌 황제에게 진언할 길이 없겠습니까?
비록 그렇다 할지라도 이유 없이 내복을 명할 수 없으니 반드시 한두 가지 죄가 되는 허물이 있은 연후에야 이를 구실로 계획을 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이 나라에는 공적이 아닌 불법적인 행동이 허다하오나,시헌서를 사사로이 만든 일과 상평통보를 사사로이 만든 일,이 두 가지는 책하지 아니한 일이오니 한번 조사해보면 족히 죄목이 드러날 것입니다.이 계획은 황실에도 유익할 뿐 아니라 이 나라에도 해 될 것이 없습니다.
⑦ 청래 대박책
군함 수 백 척과 정예군 5,6만 명을 얻어 대포 등 날카로운 무기를 많이 싣고,사리에도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곧바로 해안에 이르러 국왕에게 서한을 보내되 “우리는 서양의 전교하는 배입니다. 여자와 재물을 탐내어 온 것이 아니고 교황의 명령을 받고 이 지역의 생령(生靈)을 구원하려고 온 것입니다. 만약 천주의 사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주의 벌을 집행하고 죽어도 발길을 돌리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한 사람을 받아들여 나라의 벌을 면하게 하시려는지 아니면 나라를 잃더라도 그 한사람을 받아들이지 않으시려는지, 그중 어느 하나를 택하기 바랍니다. 천주성교는 충효에 가장 힘쓰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왕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 입니다.우리에게는 아무런 이익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부디 의심치 마십시오.”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군함의 척수와 군대의 인원수가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은 숫자면 대단히 좋겠지만 힘이 모자란다면 배 수 십 척에 군인 5,6천명이라도 족할 것입니다.
(7)관면
① 관면113)요청
재일(齋日)을 당할 때마다 신자라는 것이 탄로 나기 쉬우므로 감히 간청하오니, 현재 이 나라 교우로서 여행하는 자에게 대.소재를 막론하고 일체 관면해 주셔서, 남의 눈에 띄지 않도록 숨겨 생명을 보존하게 하심이 어떠하겠습니까? 박해가 일어난 뒤로 그 사람은 집을 떠나 피신하여 헤매다가 산골로 들어가게 되었는데 산골 음식이 말이 아니고 객지의 형편이 몹시 불편하여 하는 수 없이 재를 지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관면해주시기 바라고, 아울러 기왕에 지키지 못한 것이 죄가 되지는 않겠는지요.
다.교회 외적주제
(1)정치의 현황보고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200년 이래 당파가 생겨 서로 대립하고 있습니다. 남인, 노론, 소론, 소북의 네 당파가 있는데 선왕의 말년에 남인이 또 두 파로 갈라져 그 한파는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 등 몇몇 사람으로 이들은 모두 이전에는 천주교를 믿었으나 목숨을 아까워하여 배교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몹시 성교를 해쳤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믿음을 위해 죽을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또 한편 홍의호, 목만중 등 진심으로 성교를 해치는 자들인데 십 년이래 양편에 맺힌 원한이 매우 깊어졌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선왕에게 심복하는 신하가 되었습니다. 벽파는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냈는데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성교를 혹독하게 해치는 것은 두 가지 이유가 있어서입니다. 하나는 당파끼리의 논쟁이 몹시 심하여 이런 것을 빙자하여 남을 배척하고 모함하는 자료로 삼기 때문이요, 다른 하나는 견문이 넓지 못해 안다는 것이 오직 송학뿐이므로 자기와 조금만 다른 행위가 있으면 그것을 천지간의 큰 괴변으로 여기기 때문입니다.
(2)선왕 및 당파
선왕은 성교에 대하여 몹시 의심하고 두려워하기도 했지만 본래 무슨 사건이든 크게 확대하려고 하지 않았다.선왕에게는 서형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반역죄로 죽은 뒤 선왕은 그를 강화도로 귀양을 보냈다. 신해, 임자년(1791-1792)무렵 한 교우가 그들을 가련히 여겨 권유하여 감화시켰더니 사람들이 모두 우환의 실마리가 여기 있을 것이라 하여 그들과 내왕하기를 꺼렸다.그렇지만 강완숙은 거리낌 없이 주선하였다. 그러다가 결국 발각되어 그들에게는 사약이 내려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하고, 강화도의 죄인은 성교는 믿지 않았으나 연루되어 역시 사약을 내려 죽였다.
Ⅳ.황사영백서에 나타난 신앙적 특징
1.백서에 나타난 신앙
가.순교자 신앙
순교에 대해서 가톨릭대사전은 “자기가 믿는 종교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행위로 순교는 최상의 은총으로서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최고 표현이며, 가장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고, 그 분과 일치하는 방법이며 최고 성성에 이르는 길이다.”라 정의하고 있다. 또한 용어의 의미를 보면 순교의 ‘殉’자는 죽을 ‘死’와 열흘 ‘旬’이 합쳐진 것으로 “죽은 사람의 뒤를 이어 열흘안에 따라 죽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라틴어의 의미로는 ‘증언’또는 ‘증거’를 의미하지만 ‘피 흘림으로 순교자’가 됨을 뜻한다. 즉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죽임을 당한 상태를 의미한다.
자신이 믿고 따르는 그리스도를 위해 가장 소중한 생명을 바치는 이 행위는 그리스도의 진리성과 그리스도에 대한 자신의 진실성을 죽음으로써 증명하는 행동이다. 박해를 받던 시기에는 순교라는 말보다,‘주님을 위해 목숨을 바친다.’는 의미로 위주치명(爲主致命)이라는 용어가 사용되었다. 영성 신학적인 순교의 의미는 교회 안에서 언어를 통한 증거,피 흘림의 증거(순교),영적순교 등 세 가지로 발전하였다.
언어를 통한 증거로는 “여러분은 이런 일들의 증인입니다.”(루가 24,48), “여러분은 여러분에게 내릴 성령의 능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서 뿐 아니라 땅 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될 것입니다.(사도 1,8)”와 같이 그리스도는 제자들에게 증거의 사명을 부여하셨고 ,이에 사도들은 전 생애를 통한 활동 전체가 증거의 삶이었다. 즉, 그 분 때문에 법정에 끌려가 매를 맞고 재판을 받으면서 그 분을 증거 하였으니,결국 피흘리면서 진리를 밝혔던 것이다. 이렇듯 피 흘림의 증거를 보였기에 그들을 ‘순교자’라 하였다. 넓은 의미에서 영적 순교란 매일 매일의 일상에서 각자의 십자가를 지는 일을 순교의 시작이라 할 수 있으니,이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복음적 삶을 살기 위해서는 매일 매순간 순교적 결단이 요구되는 까닭이다.
백서에 나타난 순교자들을 살펴보면 황사영은 자신이 직접 보았거나 전해들은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백서에 총 55명의 순교자들이 나타나는데 이 중 천주교와 관련된 사람으로는 최필공(토마스+1801.4,8), 이중배(마르티노 +1801,4,25), 권철신(암브로시오+1801,7,1), 강완숙(골롬바+1801,7,1), 이가환(+1801,4,8), 정약종(아우구스티노+1801,4,8), 최창현(요한+1801,4,8), 홍교만(사베리오+1801,4,8), 홍낙민(바오로+1801,4,8) 이승훈(베드로+1801,4,8), 최필제(베드로+18015,14), 김건순(요사팟+1801,6,1), 김백순(+1801,5,11),이희영(루가+18015,10), 홍필주(필립보+1801,3,27), 조용삼(베드로+1801.3,27), 이존창(루도비코+18101,4,8), 신 마리아, 송 마리아, 주문모 신부 등에 대해서는 순교 사실이 잘 나타나고 있고, 오석충(스테파노+1801,4,8), 임대인(토마스), 권일신(프란치스코 사베리오+1792년 봄), 유항검(아우구스티노 +1801,10,24)형제, 이안정, 원경도, 김유산, 한전흠, 윤지헌, 정약용, 이벽, 최인길, 지황, 강이천, 정철상, 현계흠, 옥천희 등 19명은 이름만 언급한다. 본고에서는 백서에 나타난 순교자 39명 중에서 다음 여섯 명 최필공, 최창현, 정약종, 강완숙, 주문모 신부, 황사영에 대한 순교신앙을 서술하기로 한다.
(1)최필동(토마스)의 신앙
최필공(토마스)은 그는 성품이 곧고 의지가 굳세며 재물을 멀리하고 교회에 대단히 열심이었으나 선왕이 장가들게 하고 벼슬까지 주자 한동안 배교하였다가 다시 돌아온 사람이다. 돌아온 그는 충효에 대한 교회의 도리와 자기의 잘못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심정을 솔직히 진술하였는데 그 말이 빛나고 위엄이 있어서 옆에서 듣는 모두가 감동하였다고 전해진다. 하느님의 사랑에 기초를 둔 올바른 앎에서 비롯된 신심은 그의 참된 생활과 태도에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최필공(토마스)의 신심이란 완전한 사랑을 뜻하는 것으로 완덕이란 자기의 결점과 싸우는 것이다. 스스로 그 결점을 알지 못하면 싸울 수가 없고 또한 이길 수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고 가르쳐 주셨듯이 그리스도인의 삶은 하느님의 뜻을 찾기 위함이다. 하느님께서는 창조적인 영을 통하여 일을 하시고, 성령께서는 하느님께서 뜻하는 곳으로 움직이시기 때문이다. 최필공 자신의 삶 안에서 자신의 내적인 강함을 느껴 완전한 사람의 길을 걸음을 볼 수 있다.
(2)최창현(요한)의 신앙
최창현은 을묘년(1795)에 순교한 최인길(1765-1795)의 족질로 황사영이 평가하기를 몸가짐이 평화스럽고 언행이 공정하여 20년을 하루같이 지냈다고 하면서,도리에 대한 강론도 자세하고 깊은 맛이 있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신심의 유익함을 주었다고 하였다. 그의 순명과 겸손은 천성에서 우러나온 것으로 남보다 특별히 뛰어난 점은 없었으며, 흠잡을 행동도 없었다고 하였다. 하느님의 자비 앞에서 은총의 풍성함을 생각하는 최창현(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주신 “그분은 커지셔야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복음에서 나타난 영적인 삶을 살았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최창현(요한)은 하느님의 뜻에 자신의 의지를 순종시켰으니,“순명은 겸손의 행위로써 하느님께 종속의 표현이다.”에 걸맞는 순명과 겸손을 그대로 지켰다. 최창현(요한)이 포도청에 갇히어 곤장 열세 대를 맞다 기절하여 쓰러졌을 때 관리가 그의 죄목을 세자 그는 벌떡 일어나 성교의 십계명을 강론하였다. 관리가 또한 “네가 부모를 효도로 공경한다면 어찌하여 제사를 지내지 않느냐?”고 물으니 최창현은 “잘 생각해 보시오 밤에 잠이 든 때는 아무리 맛있는 음식이 있더라도 맛볼 수 없지 아니하오. 그렇거늘 하물며 이미 죽은 사람이 어떻게 음식을 먹을 수 있겠소.”라고 답을 하였다. 조상제사124)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는 순종을 보이고, 겸손 된 답변을 나누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 43세의 나이에 참수형을 당한 순교자이다.
(3)정약종(아우구스티노)의 신앙
정약종(아우구스티노)은 성질이 강직하고 의지가 굳세며 무엇에나 자상하고 세밀함이 남보다 뛰어났다. 일찍이 선도를 배워서 영원히 살 뜻이 있어 엉뚱하게 천지 개벽설을 믿었다가 탄식하여 말하기를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다. 그러니 결국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기에 배울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러던 중 성교의 도리를 듣게 되어 이를 독실히 믿고 열심히 실천하였다. 혹 한 가지 조그만 도의라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먹고 자는 것을 잊고 온 마음과 힘을 다해 생각하여 반드시 분명한 깨달음에 이르고야 말았다. 그는 말을 타고 가거나 배를 타고 가거나 하면서도 묵상공부를 그치지 아니하였다. 어리석고 몽매한 사람을 만나면 힘을 다해 가르치고 깨우쳐 주기를 혀가 굳고 목이 아플 정도까지 하여도 싫증내는 기색이 조금도 없었으며 아무리 막힌 사람이라도 그의 앞에서는 깨치지 못하는 자가 별로 없었다. 일찍이 그는 무식한 교우들을 위하여 이 나라의 한글로 『주교요지』두 권을 저술하였는데, 성교의 여러 책을 널리 인용하고 자신의 의견을 보태서 아주 쉽고 명백하게 썼으므로 어리석은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이라도 책을 펴보기만 하면 환히 알 수 있고 한 군데도 의심스럽거나 모호한 데가 없었다.
그는 여러 해를 두고 깊이 학문을 연구한 것이 아주 습관과 성품으로 생활화되어 교우들을 만나면 안부 인사를 하고 나서는 곧 강론을 펴기 시작해서 날이 저물도록 계속하였으므로 다른 이야기는 할 겨를조차 없었다. 그는 혹 자기가 모르던 것을 한두 가지 알아 깨닫게 되면 만족하여 기뻐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냉담하고 태도가 명확하지 못한 자가 강론 듣기를 좋아하지 아니하면 딱하고 민망하게 생각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사람들이 갖가지 도리에 대해 물으면 마치 호주머니에서 물건을 꺼내듯이 생각해내는 기색도 없이 말이 술술 풀려 나와 끊어지는 일이 없었고 어려운 문제를 늘어놓아도 가려내는 데 조금도 막히지 않았다.
그의 말은 질서가 있어 어긋나거나 뒤바뀜이 없었고 정확하고도 기묘하였다. 또한 아름답고도 상세하고 확실하여 사람들의 신덕을 굳세게 하고 애덕을 더욱 왕성하게 하였다. 덕망은 관천만 못하였으나 도리에 밝기는 그보다 훨씬 더 나았다. 또한 그는 천주의 모든 덕과 여러 가지 도리가 너무 광범위하고도 방대하게 여러 가지 책에 흩어져 있어 전체를 설명한 책이 없었으므로 읽는 자들이 이해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여러 책에서 가려 뽑아 부분별로 구별한 것을 한데 모아 한 책으로 만들어 책이름을 ‘성교전서’라 하여 후배들에게 남겨주려고 하였으나 그 책의 초고가 절반도 이루어지지 못한채 박해를 당하여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가 감옥에 들어갔을 때 관리가 국왕의 명을 거슬렀음을 문책하니 아우구스티노는 성교(聖敎)의 진실한 도리를 솔직하게 진술하였는데 그것을 금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뜻을 밝혔다. 그러자 관리는 크게 노하여 국왕의 명령을 변박했다고 해서 대역부도의 죄를 논하였다. 그는 옥에 끌려 나와 수레 위에 올라 처형장으로 갈 때에도 큰소리로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우리를 비웃지 마시오.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음은 당연한 일이오. 공심판 때 우리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할 것이고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당신들은 서로 웃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다시 엎드렸다. 이 때 그의 나이는 42세였다.
순조실록(‘純祖實錄’)권2순조원년 2월 26일에 의하면 “정약종은 1801년 2월 11일 체포되어 2월 26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되었으며 정약종은 한결같이 곧바로 사학(邪學)을 정도(正道)라고 하며, 화상(畵像)을 만들어 놓고 7일마다 첨례(瞻禮)하며 이르기를 ‘천주는 대군(大君)이고 대부(代父)이다. 하늘을 섬길 줄 모르면 살아 있어도 죽은 것만 못하다.’고 하면서 선조에게 제사를 지내고 분묘(墳墓)에 배알(拜謁)을 하는 것은 모두 죄라고 하였다. 심지어 그 아비를 원수처럼 여기고 군상(君上)을 만들어 향해서도 망측한 말을 지어내었으니 윤리를 멸절시키고 상도를 패몰시킴이 이보다 심할 수 없으므로 범상부도(犯上不道)의 죄로써 자백을 받아 정법 하였다.”고 하였다.
정약종의 순교는 그의 신앙생활 안에서 보았듯이 대군대부(大君代父)요 대부모(代父母)이신 천주의 은혜에 대한 굳은 신뢰로, 마땅히 드려야 할 최상의 孝였다고 볼 수 있다.그리스도를 본받는 실천적 행위는 그리스도의 모방을 실현한 것이며 사랑의 극치로써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이룬 것이다. 정약종이 주교요지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전하고자하는 그 열정은 교회 내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하느님의 말씀 즉, 기쁜 소식의 필요성을 깊이 인식하였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만이 이 나라와 이 민족을 구원할 수 있었으니 양반에서 천민에 이르기까지 평등하게 그리스도의 신앙을 직접 가르치면서 그들을 한 형제로 받아들임으로 그들이 진정 하느님의 자녀로서 태어날 수 있도록 인도하였다.즉,그들로 하여금 현세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도록 하였다. 그 당시에 천민의 글로 여기던 한글을 사용하여 자신도 양반의 신분에 안주(安住)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그가 마지막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본받기 위해 자신이 당하게 되는 고통을 흔연히 받아들임은 그리스도의 말씀과 모범을 충실하게 실천한 삶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초기교회에 관한 사실 중에 하나는 ‘순교’나 ‘증거’를 똑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진정한 증거들은 실제적으로 죽음으로 표현되었다. 그 죽음은 믿음의 실체를 반영하고 있으며,진실된 순교의 중요성은 고통을 이기는 꿋꿋함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증거의 강함과 생생함이다. 정약종의 순교의 증거에서 지금 우리에게도 볼 수 있는 주교요지의 강함과 생생함을 그대로 보고 있다.
(4)강완숙(골롬바)의 신앙
강완숙(골롬바)은 서얼출신 집안의 딸이었다.충청도에 처음 성교가 들어갔을 때 골롬바는 천주교라는 세 글자를 듣고 스스로 짐작하기를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 교의 이름이 바르니 도리도 틀림없을 것이다.’라고 하여 책을 구해 한번 읽어보고는 마음이 기울어져 믿고 따랐다. 그녀는 총명하고 부지런하며 열심하고 자제함이 뛰어나서 남이 미치지 못하였다. 을묘년(1795)에 세례를 받았는데 신부는 그녀를 보자 매우 기뻐하고 회장으로 임명하여 여교우들을 보살피는 임무를 맡겼다. 골롬바는 안으로 신부를 받들어 거처와 의복, 음식을 바르게 공궤하였고, 밖으로는 교회 사무를 처리하여 경영과 수용에 조금도 차질이 없었다. 그는 처녀들을 많이 모아 가르쳤고 그것이 끝나면 그들에게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천주님을 믿으라고 권고하도록 하였으며 자신도 역시 두루 다니며 전교하기에 밤낮을 가리지 않으니 편히 잠자는 시간이 없었다. 도리가 밝고 구변이 좋아 누구보다도 많은 사람을 귀화시켰고 일처리에 과단성과 위엄이 있어 사람들이 다 조심스러워 하였다.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리가 신부의 거처를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으나 음성과 기색이 조금도 달라지지 아니하였으므로 양쪽에 늘어섰던 형리들이 “이것은 귀신이지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교황청 자료집에 의하면 1801년 5월 22일 강완숙은 다른 교우 여덟 사람과 함께 환재치(사형수를 사형장에 데리고 갈 때 사용하는 수레)에 실려 서소문밖 형장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런데 그들은 기쁨에 넘친 얼굴로 하고는 흥겨운 목소리로 기도하였다. 강완숙이 몸에 십자가를 그은 다음 목을 내밀어 형을 받았다. 그 이튿날 비가 많이 내려 아홉 사람의 시신이 진흙구덩이에 있었는데 전혀 썩지도 않고 악취도 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살아있을 때와 똑같았으며 피부색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고 전한다. 강완숙의 순교영성에 대하여 송종례는 “오직 하느님을 위해 그리고 하느님의 사람들을 위해 헌신하다가, 이 때문에 죽음을 당하였다.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대한 강한 사랑과 믿음 때문에 천주교 가르침을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실천하고 사람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전한 실천영성을 보여준다. 그녀의 삶은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완전히 의탁하고 하느님으로부터 힘을 받는 삶이었을 뿐 아니라 천주교 가르침을 일상적인 삶 안에서 실천하였고, 이 때문에 결국 순교하였다.”고 한다.
강완숙의 순교는 정약종의 『주교요지』에 나타난 순교부분에서도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사료된다.『주교요지』에 나타난 순교에 대한 사항을 살펴본다.
“지극히 높으신 천주가 지극히 천한 사람과 결합하여 계심이 어찌 마땅하리오.” 대답하되 “천주와 사람이 서로 합함에, 사람은 천주와 같이 높아지려니와, 천주는 사람과 같이 낮아질 것이 없으니 비컨대 세상 임금이 신하의 딸을 왕비로 삼아 배합하면, 그 여인의 낮은 것은 없어져도 임금의 높은 것은 높은 대로 있음과 같으니라.” 한 사람이 묻되 “예수가 죽을 때에 천주성은 죽으심이 없고 응당 인성만 죽어 계시거늘 어찌하여 ‘천주가 죽으시다’하느뇨?" 대답하되 ”천주성이 비록 죽지 아니하셨어도 천주성과 인성을 합하신 몸이 죽어 계시니 비컨대 사람이 죽을 때에 그 영혼은 죽지 아니하고 육신만 죽되 그 육신이 이미 영혼으로 더불어 합하여 한 사람이 된 고로 사람이 죽으면 이르기를 ‘육신이 죽었다’아니하고 ‘그 사람이 죽었다’함과 같이 이제 천주가 사람의 몸과 합하여 한 위(位)가 되셨으니 그 몸이 죽으심을 보고 ‘천주가 죽으시다’한 말이 옳지 아니하리오.”
옛적에 서국(西國:서양)에서 두 나라가 서로 싸워 백성이 무수히 죽고 승패를 결단치 못한지라 그 한 나라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겨 귀신에게 점을 쳐 물어보니 가로되 “임금이 죽으면 적국(敵國)을 이기고 백성이 다 살리라.”하거늘 임금이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이 지극하여 임금의 옷을 벗고 군복으로 바꾸어 입고 다른 사람이 모르게 하여 적 진중(敵陣中)에 들어가 죽으니 그 백성을 위하여 죽기를 자원함이 어찌 아름답지 아니하며 찬송치 아니하리오?이제 예수도 세상을 구하신 법이 이와 같이 만세만민(萬世萬民)을 살리기 위하여 고난을 즐겨 받으시고 마침내 죽기까지 하셨으니 그 은혜 더욱 기묘하시고 만 배나 더하리라.
“강완숙(골롬바)의 활약으로 4천명에 불과하던 신자 수가 만 여명을 이루었는데 그 중에서 여신도의 수가 절대 다수였음을 볼 때 골롬바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가 있다.”
성령께서는 이처럼 각자 안에서 활동을 하셨고 순교자들 안에서 활동하셨음을 볼 수 있다.이러한 모든 생생한 사건들은 단순한 기록으로서가 아니라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계시되고 나누어진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기쁜 소식의 선언으로 기록되는 것이다.
(5)주문모 신부의 신앙
주문모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다시 떠메고 거리를 지나갔다. 신부가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두루 들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자 군졸이 술 한 잔을 바쳤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남쪽 10리 되는 연무장으로 갔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읽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때는 4월 19일 삼위일체 대축일 신시(申時)였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이 때 한 교우는 300리 밖에서 길을 가고 있었고 또 한 교우는 400리 밖에 피난해 가서 있었는데 바람과 천둥이 심상치 않음을 보고 필연코 이 날 이상한 일이 있으리라고 하여 날짜를 기억해 두었다가 그 후에 신부가 순교했다는 말을 듣고 따져보니 바로 그날 그 시간이었다. 춘천에 있던 황심과 제천에 있던 황사영 자신이 목격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내용이 교황청 자료집에도 다음과 같이 나온다. 주문모 신부의 순교 모습으로 “이제까지 맑고 깨끗하기만 하던 하늘에 갑자기 어두운 구름이 짙게 깔리더니, 광풍이 일면서 모래사장의 모래와 자갈이 날리고 소나기가 쏟아져 한치 앞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그런데 형집행이 끝나자 즉시 바람과 비가 그치고 하늘에는 다시 해가 나타나면서 영롱한 무지개가 피워 올랐으며, 상서로운 구름들이 멀리 하늘 끝에서부터 밀려오더니 서북쪽으로 흩어지며 사라져갔다.”
황사영은 주문모 신부의 순교를 예수의 죽음과 동일시 한 것으로 여겨진다. 먼저 주문모 신부의 순교직후 바로 초자연적인 현상인데 이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마태 27,51-51)라는 부분과 닮아 있다. 그리고 주문모 신부의 시신을 담당했던 대장이 대왕대비의 영을 거역하고 자기 고집대로 그냥 묻어둔 것도 빌라도가 대사제들의 요청 즉,‘유다인의 왕’이라고 쓰지 말고 ‘자칭 유다인의 왕’이라고 써 붙여야 한다는 요청에도 빌라도는 “내가 한번 썼으면 그만이다.”(요한 19,22)라고 거절한 부분이라든지 주문모 신부의 시신을 몰래 옮긴 군졸들과 예수의 시신을 지키다가 대사제들에게 매수된 경비병(마태 28,11-15)의 대목 등을 견주어볼 때 많이 닮아 있음을 알 수 있다. 순교자들의 육체는 성체성사를 통해 늘 새롭게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의 예수처럼 희생된 몸이라는 의미에서 성사론적인 차원을 지니고 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가 축성하는 말을 통해 피 흘림 없이 재현되듯이 순교자들의 죽음은 순교자의 육체를 희생 제물로 변화시킨다.”그래서 순교는 하나의 성체라고 말하면서 구원의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성서에서도 하느님이 나타나실 때의 모습으로 “북쪽에서 폭풍이 불어오면서 광채로 둘러싸인 큰 구름과 번쩍거리는 불이 밀려드는데 그 광채 한가운데에는 불속에서 빛나는 금붙이 같은 것이 보였다."(에제 1,4-5)이라고 적혀있다. 발현의 종교학적인 측면은 초월적 신이 자신의 뜻을 인간에게 전하기 위해 스스로 선택한 사람, 즉 현자나 예언자들에게 일반적인 방식으로는 체험할 수 없는 초자연적인 어떤 현상을 일컫는데, 구약성서에서 폭풍과 지진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알려주거나 천사를 시켜 자신의 뜻을 전하는 야훼라든지, 신약성서에서 부활한 후 제자들에게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 등이 모두 일종의 발현 현상이라 하겠다. 주문모 신부는 공초에서 "천주교의 도리는 사람들에게 충군(忠君),애군(愛君)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가 7년 간 조선에 있으면서 (조선의)풀을 먹고 땅을 밟았으니 또한 그와 같이 조선의 한 백성일 따름입니다. 이제 모든 천주교 신자들고 함께 진심으로 기구하는데 천주교는 국가의 평안 무사함, 오곡의 풍요로움, 세상의 안녕을 원합니다."라고 말한다. 순교자와 그리스도의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특성은 다음 네 가지 측면에서 고찰할 수 있다.
첫째 그리스도 본받기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말을 행위를 통해 증거 하였고,십자가의 죽음으로 그것을 완성하여 봉인하였다. 한편 그의 제자들은 소중한 목숨을 바치는 순교가 스승인 그분과 가장 긴밀히 일치하는 방법이고, 모범인 그분을 제일 가까이 따르는 길임을 일찍이 깨달았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순교자들은 주님을 증거 하는 것이 자신의 힘이나 인간적인 영웅심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분도 자신들 안에서 함께 고통을 나누고 도와주신다는 것이 공통 신념이었다. 순교자들은 처형장에 가면서 끊임없이 기도하였으며 그 안에서 현존의 열매인 천상적 평화와 영원한 구원의 확신을 보여 주었다.
셋째 애덕의 완성으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주님께서 직접 가르치셨고 또 구체적으로 실천한 이 말씀은 순교자들에게 그대로 적용된다.
넷째 순교의 결실로 순교 결실은 순교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당사자들에게는 주님이 큰 은총을 주신다는 가르침을 준다. 즉 초기 교회 때부터 순교는 하느님 나라로 가는데 장애가 되는 죄의 모든 때를 깨끗이 씻어 주는 또 하나의 세례성사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들은 하느님 대전에서 인간들의 변호사 혹은 중재자로 여겨지게 되었고 동시에 신자들은 알맞은 예절로 그들을 공경하게 되었다.
또한 순교는 그리스도와 하느님 나라에 대한 복음적 증거임을 잘 나타내고 있다. 그 예로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10),“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위하는 특권을,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그분을 위하여 고난까지 겪는 특권을 받았습니다.”(필리 1,29),“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을 채우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위하여 당신 말씀을 선포하는 일을 완수하라고 나에게 주신 직무에 따라 나는 교회의 일꾼이 되었습니다.”(콜로 1,24-25)라는 성서 구절을 통해 알 수 있다.따라서 아무도 그리스도의 도우심 없이는 그분의 사랑을 확인할 수 가 없다. 이것이 순교자들의 행전을 기록했던 이들과 순교자 자신들이 지녔던 의식이었다.
(6)황사영(알렉시오)의 신앙
백서에 나타난 황사영의 기도는 두 가지다. 첫째는 교회재건을 위한 절실함을 나타내는 기도이고, 다음은 주문모신부의 순교에 대한 교회의 절망을 나타내는 기도이다.
저희는 하루를 보내기가 한 해와 같으니 스스로 행할 힘은 없어 바라는 마음이 심히 간절합니다. 간곡히 원하오니 불쌍히 여기시어 속히 구원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님의 박애정신을 본받고, 교회에서 가르치는 바대로 모든 이를 두루 사랑하시는 뜻을 드러내어 간절히 바라는 저희의 이 정성을 도와주십시오. 저희 죄인들은 가슴을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고,목을 늘리고 발돋움을 하여 오직 반가운 소식이 있기만 기다립니다. 반드시 저희를 불쌍히 여기시고 구원해 주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극도에 달한 고통 속에서 저희는 장차 주교님 외에 누구에게 호소하겠습니까?
황사영(알렉시오)이 어두컴컴한 토굴의 호롱불 밑에서 작성한 이러한 기도문은 당시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서 하느님 앞에서 자신의 전 존재를 들어 올리는 하나의 몸부림으로 먼 미래가 아닌 가까운 장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한 예고임을 알 수 있다. 특히 황사영이 안타깝게 생각하였던 것은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자신의 소명 안에 어떤 불가항력적인 것을 느끼면서 신부 영입과 교회 재건을 간절히 나타내고 있다.
어쩔 수 없는 갖가지 장애로 말미암아 사랑을 참고 드러내지 못하시다가 이제 순교하셨으니 천당에서 우리를 보호하시는 힘이 세상에 계실 때보다 훨씬 더할 것이오.
황사영은 2차 추국 때 1801년 10월 10일에 “저는 세상에 살고 싶지 않고 깊은 산골에 가서 기도하고 싶다.”는 말을 남겼는데, 이 의미는 배론에서 백서를 작성하면서 묵상기도를 통한 하느님과의 만남을 나타내고 있다.묵상기도에 대한 정의로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보다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우리 의무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마음을 들어 더 영적으로 성장하고, 우리들의 의무들을 하느님께 바치기 위하여 마음을 들어 높이며, 그분의 일에 전념하는 것이다.” 라고 정의한다. 황사영은 묵상기도를 통해 세속과 헛된 쾌락에서 떼어 놓고 위험에서 보호해주시는 하느님만이 자신을 행복하게 해주신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황사영은 당파를 통해 권력에 집착한 인간의 아집을 보면서 권력세계에 사로잡힌 인간은 권력의 철저한 노예라는 사실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만을 탐하는 그들에게 복음에 나타나는 ‘이웃’ ‘나눔’그리고 ‘사랑’의 가치들은 융화할 수 없는 상대였다.
나.구령(救靈)구원 신앙
구령 신앙은 영혼을 사랑하고 그것을 구하려는 열정으로 주님의 뜻을 따라 복음을 선포하고 천주님을 섬기며 성사생활에 열심히 참여하는 가운데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성교요리문답』이나,『천주교리문답』에서 신자들의 신앙생활에 가장 중요한 지침으로 ‘천주를 알아 공경하고 자기 영혼을 구하는 것’이 문답의 첫 조목이다. 구령의 의미가 현재는 구원으로 “아담의 죄로 인해 은총의 결핍상태에 놓인 인류를 당신의 신적 권능과 자비로운 사랑으로 다시금 창조 때의 은총 상태로 회복시키기 위한 하느님의 신적 활동을 지칭하는 가장 일반적인 개념”이라 정의 내릴 수 있다.
특히 교회와 구원의 관계에서는 그리스도께서는 성부의 뜻을 이루시려고 지상에 천국을 건설하기 시작하며 그 신비를 우리에게 계시하여 당신 순명으로 구원을 성취하셨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성취한 구원을 인류 역사 안에서 보존하고 전달하는 중요한 역할의 담당자이며 하느님과의 완전한 은총의 관계를 회복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을 향해 나아간다.
물론 인간은 자신 만의 힘으로 구원되지 못한다.인간을 구원하는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총일 뿐이다.(사도 16,17)하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主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는 조건이 필요하다.우선 영원한 구원의 원천이요, 유일한 구세주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회개하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 할 하느님의 말씀에 충실하여야 하고 선행을 실천하며,구원을 위한 여러 덕을 쌓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한다.(1데살 5,8히브 2,3)
백서에 나타난 영혼구원으로는 백서 85行에 “주문모신부가 순교한 후 10년 동안이나 애쓴 정성이 하루아침에 허사로 돌아가 영혼과 육신이 다 멸망할 지경에 이르렀다”고 나타내고 있고,백서 96行에서도 주문모 신부의 순교로 인한 사태에 대하여 “한 지역의 성교회가 존망과 영적 생명의 생사가 악한 마몬에 달려 있음을 미처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재물이 없는 관계로 성교가 망하고 영혼이 죽는다면 그 원한이 어떠하겠습니까?”계속해서 백서 97行에는 “이 나라의 성교를 유지하고 영혼을 구제하는 자본이 마련된다면 (중략)"이라고 말하면서 영혼을 구하고 공경함이 많이 표출되고 있다.
아울러 백서 111行에서는 “서양에서 군함이 들어오는 목적으로 교황의 명령을 받고 생령(生靈)을 즉 살아있는 영혼을 구하여 온 목적”임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황사영은 영혼구원을 중시한 그의 신앙을 볼 수 있다.또한 하느님의 사랑과 은혜를 깊이 느끼면서 백서 3行,백서 9行,백서 95行,백서 102行에 주님의 도우심(主佑)을 나타내고,백서 3行에서는 주님의 전능하심(主全能)으로 나타내고,백서 5行에서는 주님의 넓으신 사랑의 은혜(主博愛之恩),백서 1行에서는 주님의 넓으신 은총(主洪恩),백서 102行에서는 주님의 인자(主之仁慈),백서 4行에서는 주님의 적자(主赤子)백서 90行,백서 102行에서는 주님의 뜻(主旨)로 나타내고 있어 하느님께 대한 보은(報恩)이 황사영 자신은 당연한 도리라고 나타내고 있다. 백서에 나타나 있듯이 영혼을 사랑하고 하느님을 섬기는 구원 영성을 볼 수 있다.
다. 내세 신앙
교의 신학에서의 내세신앙의 의미는 인간의 삶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하리라는 믿음으로 그리스도교의 내세신앙은 인간의 보편적인 희망인 사후세계에서 영적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 구체인물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신앙에 입각하여 형성되었다. 구약의 유대인들은 영혼과 육신을 엄격하게 분리시켜 파악하지 않았으며 육신을 떠난 영혼만의 생명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인간 생명 자체가 하나의 피조물이고 본래 인간적 삶이란 육신과 현세가 상관하는 실재였다. 그들에게서 인간 영혼은 하느님과 같은 영혼 불멸의 존재가 아니었다. 그래서 구약성서는 영혼의 선재(先在)를 표상하고 있지 않다.
인간은 창조된 조물이기 때문에 불멸성은 영혼에 내재하는 속성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정초한 희망 일뿐이다. 유대인들의 삶은 죽음으로 일단 끝나고 사후에는 생명의 주 하느님에게 전적으로 예속되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희망은 약속된 땅 메시아의 시대 또는 하느님 나라와 연결되어 표현되었다. 신앙의 선조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상태가 현세에서 착하게 살다가 죽음으로 영복을 누릴 수 있는 것으로 인간의 삶이 지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고, 사후에도 영원히 지속하리라는 믿음을 나타내는 의미이다. 백서에 나타난 내세신앙의 경향으로는 백서 47-48行에서 보다 깊이 통찰할 수 있다.
갑진(1784)을사년(1785)무렵에 그는 이벽 등이 성교를 믿는다는 말을 듣고 꾸짖어 말하기를 “나도 서양서적 몇 권을 읽어보았는데 그것은 기이한 글이요 궁벽한 저술에 지나지 않으므로 다만 내 식견을 넓히는데 그쳤는데 어찌 생사의 도리를 깨달아 내세에 마음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길일 수 있겠소.”라고 하였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교회의 교리에서 부활의 의미는 신체나 시체의 재생을 뜻하지 않고 육신-영혼적 단일 존재인 인간이 죽음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구원되어 전인으로서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리게 됨을 뜻하고 있다.교회의 내세 신앙은 개인주의적 구원희망에 사로잡히지 않고 만인의 구원을 희망하는 연대적 신앙의 성격을 지닌다.이처럼 육신 부활을 통해 이루어지는 내세적 삶은 순전히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 속에서 개인과 공동체 그리고 세계가 유대를 맺는 가운데 충만에 이르는 보편적 과정의 단계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교회는 부활신앙을 통하여 육신과 영혼을 분리될 수 없는 인간 생명의 원리로 규정하고 영혼과 함께 육신 역시 구원되는 내세신앙을 고수하고 있다.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사실들을 확인 시켜 주고 있다.
2.백서에 나타난 신앙적 특징
황사영 백서에 나타난 신앙적 특징으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분 할 수 있다.첫째는 황사영이 백서를 작성하면서 자신의 신앙을 그대로 백서에 표현한 신앙의 특징이 있고,두 번째는 당시의 성교활동 중에 나타난 신앙의 성격과 신심서적, 옥중형벌, 순교방법에 대한 서술로 나눌 수 있다.
가. 신앙적 특징
황사영백서에 나타난 신앙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황사영은 당시 고통을 받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하느님께 죄를 지어 그에 상응하는 벌로써 이 세상 안에서 고통이 따른다고 하면서,“저희 죄인들은 위로는 죄악이 깊고 무거워 주님의 노여움을 샀습니다.”이것은 조정에서 벌어 자고 있는 악의 실체와 자신에게 벌어지고 있는 고통의 실체를 나타내고 있는데 이것을 신앙적인 상태로 보면 하느님의 체험을 하는 경우 기쁨과 감사가 성립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조정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는 죄와 벌(인과응보)라는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이렇게 체험한 황사영은 자신의 고통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며 동시에 고통을 겪고 있는 교우들의 모습을 위하여 기도드린다. “저희 죄인들은 마치 양떼가 흩어져 달아나듯이, 어떤 이는 산골로 도망쳐 숨고 혹은 몸 둘 곳이 없어 길바닥에서 헤매면서 울음마저 터트리지 못한 채 흐느낍니다.”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받고 있는 핍박을 받는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양이 목자를 잃고도 풀을 뜯어먹고 자라고 젖먹이가 어머니를 잃고도 살아나가기를 바랄 수 있지만 저희는 백번 생각해 보아도 실로 살길이 없다.” 이는 마치 구약의 예레미아가 ‘도살장에 끌려가는 흠 없는 양’(예레 11,19)의 비유처럼 무죄하게 고통 받는 교우들을 묘사하고 있다.여기서 나타나는 고난의 예언자 모습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죄를 대신하여 고통을 받음은 속죄의 고통 개념을 나타내고 있다. 황사영은 삶을 주관하는 하느님께 은총을 청하면서 “주님의 특별한 은총이 없으면 예수의 거룩한 이름이 이 동쪽 땅에서 사라집니다..”고 하면서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있다.
황사영은 이 세상의 악을 하느님의 선으로써 극복하기 위하여 자신의 고통과 죽음까지도 기꺼이 바치겠다고 하면서,“아!죽은 사람들은 이미 목숨을 바쳐 성교를 증명하였거니와 살아있는 사람들은 마땅히 죽음으로써 진리를 지켜야 한다면서 잠자코 구하지 않거나 구하여도 얻지 못한다면 이는 영영 죽는 것과 같은 것이고 구하다가 얻지 못하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여 이미 자신을 속죄의 제물로 내 놓음으로써 인간의 한계 상황 속에 갇혀있지 않고 그 한계를 무너뜨리면서 하느님께 나아가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하느님의 뜻에 따라 자신의 생명까지도 내놓음으로써 ‘하느님과 함께 계심’을 몸으로 보여 주고 있다.하느님을 믿는 의인은 이 세상의 악을 하느님의 선으로써 극복하기 때문에 그에 따른 고통을 감수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하느님께 전교에 대한 당위성으로 예수의 거룩한 가르침에 의거하면 전교를 용납하지 않는 죄는 소돔과 고모라보다 더 중요하다 했으니 비록 이 나라를 진멸한다 해도 성교의 표양에 해로울 것이 없을진대 지금의 이방법은 성세를 크게 벌려 전교를 용납하게 함에 지나지 않은 것입니다.특히 백성을 해치지 아니하고 재물을 빼앗지 아니하고 또한 仁과 정의의 극치로써 오히려 뛰어난 표양일 것" 이라 하였다. 세상에 공존하는 선악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아름답고 선한 창조세계를 희망하면서 전교에 대한 당위성을 나타내는 신앙적인 특징을 백서는 나타내고 있다.
(1)신앙성격
순교자들의 신앙성격의 입장에서 순교자들의 천주교 입교동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앙의 성격은 두 가지의 양상으로 나타난다. 하나는 친구와 친척들에 의한 입교와 또 하나는 자발적인 입교를 볼 수 있다.친구와 친척 등의 권유로 입교한 경우 이승훈은 이벽으로부터 부탁을 받고 북경으로 가서 세례를 받았고, 이중배는 친구 김건순에 의해 입교하였고, 홍낙민은 친구 이승훈, 정약용등의 권유로 입교하였고, 홍교만은 친척 권철신 집안의 믿음으로 입교하게 되었고 홍필주는 강완숙의 권유로 입교하고, 은언군 부인과 며느리는 조씨 할머니의 전교로 입교하였고 그러나 정약종과 강완숙은 자발적인 입교로 김백순은 당시 천주교를 사학(邪學)이요 이단(異端)이라고 하여 천주교를 비판하다가 입교하게 되었다. 여기서 살펴볼 상대는 강완숙의 입교이다. 천주교라는 글자를 보고 서학책을 구하여 입교한 경우로 어떠한 책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조선 초기 천주교인들은 『천주실의』,『주교요지』,『칠극』,등의 책을 읽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천주교란 이름만으로 입교의 동기가 되었다는 점을 눈여겨본다면 『천주실의』,『주교요지』가 참고 되었을 것이다.
다음으로는 정약종의 입교는 도교(道敎)를 통하여 죽지 않고 오래 사는 종교로 인식하던 차에 천주교의 영생은 죽음 거쳐 심판을 통해 천당에서 영원한 복락(福樂)을 누린다는 뜻은 도교에서 장생과 상통하는 의미도 있지만, 백서 35行에서 “천지가 다시 변하는 때는 신선도 역시 함께 사라짐을 면치 못할 터이다. 그러니 결국 이것도 영원히 사는 길이 아니기에 배울 것이 못된다.”하여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를 주목해야 한다. 강완숙(골롬바)의 입교는 성령께서 함께 하셨음을 볼 수 있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천주교라는 글자를 보고 책을 얻어 본 후 그 많은 신자들의 전교를 할 수 있음은 성령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2)신심서적
다음으로, 백서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신심교리서적과 또한 백서에 나타난 순교자들의 어록을 살펴보자. 최필제는 ‘주님봉헌축일’날 전례서인 첨례단(瞻禮單)145)한 장이 발견되었고, 김건순은 『기인십편』이란 책을 즐겨 읽는 모습이 나오고, 최창현 회장은 감옥에서 매질을 당한 후 ‘十戒’(십계)를 강론하기도 하였다. 정약종의 한글 교리서 『주교요지』,『성교전서』가 나타나고 이가환의 교리서적인 『천학초함』, 『서학범』, 『성년광익』, 『직방외기』들이 나타난다.
또한 이중배에게 하루는 옥리(獄吏)가 와서 의서(醫書)를 좀 보자고 하였으나 그가 대답하기를 “내게는 의술을 적은 책은 없소 다만 천주를 공경할 뿐이오, 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주님을 믿으시오.”라고 하였고, 정약종은 “사람이 세상에 나서 천주를 위하여 죽음은 당연한 일이오. 공심판 때 우리의 울음은 즐거움으로 변 할 것이고, 여러분의 기쁜 웃음은 변하여 참된 고통이 되리니 당신들은 서로 웃지 마시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처형을 당할 때 구경꾼들을 둘러보며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시오. 이것은 당연히 행해야 할 일이니 당신들은 겁내지 말고 이 뒤에 반드시 본받아 행하시오.”라고 말했다. 그는 칼에 한번 맞아 목과 머리가 반쯤 잘렸는데 도 벌떡 일어나 앉아 손을 크게 벌려 십자성호를 크게 긋고는 조용히 다시 엎드렸다. 당시에 예비신자였던 김백순은 ‘내가 남보다 뛰어난 견해를 얻었는데 남이 서교라고 하니 서교에는 반드시 오묘한 이치가 있을 것’이라 하고 마침내 교우들과 상종하게 되어 여러 해 동안 서로 토론한 결과 굳게 믿고 따라 계명과 법규를 엄격히 지켰다. 그는 늘 “나는 천주가 계심을 안 이래 내 마음이 태산과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중배(마르티노)의 신앙도 삶 안에서의 신앙생활임을 알 수 있다.“당신도 의술을 배우려거든 주님을 믿으시오. 주님께서 이 세상의 주인이시고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베풀어 주고 계심”에서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3)옥중형벌
이중배와 11명의 신자들은 마르티노의 격려와 권면에 힘입어 혹독한 형벌은 여러 차례 겪으면서도 모두 한결 같이 굳게 버티어 끝내 석방되지 못하고 갇혀 있게 되었고, 2월 9일 이가환, 정약용, 이승훈, 홍낙민을 의금부에 가두고 11일에는 권철신과 정약종을 체포하고, 포도청에 단단히 일러 전에 석방한 사람들을 모두 다시 체포하였다. 최요한은 9일 밤중에 김여삼이 포도부장을 데리고 와서 집을 둘러싸고 체포하는 바람에 포도청에 갇히게 되었는데,10여 일후 치도곤 열세 대를 맞았는데 매를 맞는 동안 기절하여 죽어 쓰러진 것 같았으나 매질이 끝나고 관리가 그의 죄목을 셀 때에는 벌떡 일어나서 성교의 10계명을 강론하여 밝혔다. 이가환은 광주부윤과 충주목사 재임시 혹독한 형벌로 다스려 억지로 배교하라고 명령하고, 교우들에게 주리형을 사용한 것도 가환에서부터 시작하였다. 강완숙이 체포되어 관청에 이르자 관리가 신부의 거처를 케어 물으며 주리를 여섯 번이나 틀었다.
조용삼은 고문을 당할 때 마다 다른 사람들은 예사로운 매를 맞았지만 베드로만은 가장 혹독한 매를 많이 맞았다. 그것은 관리가 그의 사람됨을 보고 마음속으로 멸시하여 ‘이런 자는 쉽사리 항복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 오히려 완강하므로 몹시 미워져서 기어코 죽이려고 했던 것이다. 관리가 골롬바 모자를 잡아다가 혹독한 형벌로 고문하였으나 이들은 죽기를 각오하고 말하지 않았다. 주문모 신부는 이졸들이 그를 붙들어 관리 앞에 데려가 양쪽 발에 족쇄만을 하고 형벌과 문초는 하지 않았다.
이에 앞서 여섯 사람이 반역죄로 처형되었는데 신부가 자수하자 서울 사람들이 서로 “서양 사람이 옥중에서 천주교인은 역적이 아니라고 변명하고 있다”고 하고 또 “서양 사람이 그냥 죽음을 당하려 하지 않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한 다음에야 죽기를 청하려 한다.”고 하였다. 신부를 옥에서 끌어내어 처음으로 형벌을 가해 문초하고 다시 떠메고 거리를 지나갔다. 신부가 길가 좌우 구경꾼들을 두루 둘러보고 목이 마르니 술을 달라고 하자 군졸이 술 한 잔을 바쳤다. 다 마시고 나서 성 남쪽 10리 되는 연무장으로 갔다. 귀에 화살을 꿴 후 군졸이 죄목이 적힌 판결문을 주어 읽어 보게 하였다. 그 조서는 꽤 길었는데 신부는 조용히 다 읽고 나서 목을 늘여 칼을 받았다. 때는 4월 19일 삼위일체 대축일 신시(申時)였다. 목을 베자 갑자기 큰 바람이 일고 검은 구름이 하늘을 덮고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고 눈부시어 장안 사람들이 모두 놀라고 황겁하지 않은 이가 없었습니다. 인간의 고통도 한계가 있음에도 한계를 초월한 순교신앙을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목숨은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그리스도를 가까이 닮고, 그 분과 일치하는 방법을 찾는 순교신앙의 참모습을 볼 수 있다.
(4)순교방법
순교방법은 서대문 밖에서 참수를 당한 순교자는 대역부도죄로 판결하고 26일에는 정약종(아우구스티노)과 최창현(요한), 최필공(토마스), 홍교만(프란치스코 하비에르), 홍낙민, 이승훈등 여섯 사람을 참형에 처하였다. 그후 또 아홉 사람을 참수형에 처하였는데 그 중 여자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골롬바이고, 다른 두 사람과 남자 여섯 명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고 전한다.
1801년 5월 23일 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한 이는 여교우 세 명과 남교우 여섯 명이 아니라 여교우 5명과 남교우 4명으로 여진천 의『누가 저희를 위로해 주시겠습니까?』70쪽에서 밝히고 있다. 여자 교우로는 강완숙(골롬바), 강경복(수산나), 한신애(아가다), 김연이(율리안나), 문영인(비비안나) 5명과 남 교우로는 최인철, 김현우, 이현, 홍정호이다. 참수를 당한 사람으로는 최필제, 김건순, 김백순, 이희영, 홍필주, 강완숙, 이존창, 김제의 한 씨와 최여겸으로 모두 9명이 나타난다. 또한 왕족인 송 마리아와 신 마리아는 사약(賜藥)을 받았고, 이가환은 매질과 불로 지지는 형벌인 독장낙형(毒杖烙刑)으로, 권철신은 매를 맞아 죽었고, 조용삼은 옥사를 당하였으며, 주문모 신부는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를 당했고 황사영은 11월 5일 서소문밖에서 능지처참(陵遲處斬)되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당시에 죄 없이 죽어가는 수많은 교우들의 순교를 보면서 하느님께 울부짖었다. 더욱이 일본으로부터 순교의 방법까지 배워서 순교를 시키고 있음을 안타까워하고 있었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순교자의 피는 성교의 씨앗이 된다.”는 라틴 교부인 떼르뚤리아노(Tertullianus)가 197년에 말한 부분을 인용하면서 순교가 미치고 있는 영향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이가환도 (백서 51行)에서 박해에 대하여 “이것을 비유하면 막대기로 재를 두드리는 것 같아 두드리면 두드릴수록 더욱 일어나는 것이니, 임금께서는 아무리 금할지라도 어찌 할 수 없을 것이오.”라고 1797년 기미년 청주 박해의 신자들의 죽음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박해가 조선의 조정대로 끝나지 않고 선교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
나. 황사영의 국가관
교회와 국가는 그 발생 기원과 성립 과정이 다르고 구성과 목적도 서로 다른 이질적인 사회집단이다. 가톨릭대사전에 나타난 교회와 국가에 대한 독자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는 원죄 중에 있는 인류를 구원하시려고 하느님이 성자 예수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시어 세우신 초자연적인 신앙단체이다. 이에 반하여 국가는 어떤 모양이든 인간이 필요에 따라 만든 자연적인 공익단체이다. 교회는 인간의 초자연적인 구원 즉,현세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착하게 살아 死後에 영생을 얻게 하는 것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는데 반해 국가는 국민의 자연적 복리 즉 현세적 행복을 얻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설명하고, 관련성에 있어서는 첫째 교회에는 교황을 으뜸으로 하는 可見교회,(ecclesiavisibilis)와 창립자인 그리스도를 으뜸으로 하는 不可見교회,(ecclesiainvisibilis)가 있는데, 국가와의 관계에서 문제가 되는 교회는 ‘가견교회’이다. 신자들은 교회의 구성원으로 각 국가에 분산되어 살며 그 가르침을 따르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두 번째는 교회는 인류내세적 구원을 궁극의 목적으로 삼지만 국가는 국민의 안전과 복리증진을 목적으로 하여, 교회의 권한과 국가의 권한이 서로 구별된다.
셋째는 교회는 하느님의 계시(啓示)에 따라 백성에게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고 가르치고, 성사를 집행한다. 그러나 국가는 국민 모두가 현세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한다.
넷째는 교회와 국가가 각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행사하는 관할권의 중복이 종종 있기 때문에 관계를 맺게 된다.
이렇듯 국가 권력과 종교의 충돌은 권력을 남용할 때 발생되었다.어느 민족사나 처음에는 국가적 통치권과 종교가 하나로 형성되었다. 그리스,고대 로마, 이집트, 중국, 조선 모두가 그러했다. 이러한 체계에서는 국가의 장이 곧 종교의 장이었다. 그러나 국가가 권력구조화 됨으로써 점차 탈종교 될 때 종교는 개개인의 인권을 옹호하고, 그 구원을 지키려는 방향으로 기울어졌다. 그러나 교회는 국가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공존을 전제로 한 것이며 충돌을 최소한으로 줄이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교회와 국가 간의 관계에서 교회는 인권이 국가에 우선하고 인간은 국가이전에 하느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었으며, 인권은 하느님으로부터 이어지는 것이다.또한 국가는 보존의 질서이지 창조의 질서는 아니다. 국가는 하느님이 준 것을 보존하는 의미이지, 파괴하고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황사영은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와 같은 서학을 통하여 神은 국왕이나 부모위에 존재하며, 神이 이들을 창조했다는 논리를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당연히 갖게 되는 결과이다. 이것은 국가보다 종교를 우선할 수 없다는 조선의 정통의식에 대치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사영은 기본적으로 천주교 신앙이 결코 국가에 해가 되지 않는다고 백서에서 나타내고 있다.
천주성교는 충효에 가장 힘쓰고 있으므로 온 나라가 봉행하면 실로 왕국에 한없는 복이 올 것입니다.
국가의 법이 합법적이냐 불법적이냐 하는 것은 국민이 존재할 때 성립될 수 있으며 국민이 존재하지 않으면 나라의 존재도 가능하지 않은 것이다. 종교적인 면으로 볼 때 국가를 하느님의 창조사업과 섭리에 유래한 질서 내지 제도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류다. 국가라는 제도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창안된 여러 제도들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다. 하느님이 세우신 질서는 국가가 아니다. 그 질서의 최상형태는 하느님의 절대주권 및 신앙인의 생활에서 이루어지는 하느님과의 친교(공동생활)에 있다. 인간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귀속되어 있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국가의 요구에 응답한다. 따라서 국가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승인하는 범위 안에서 무엇인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인간은 하느님과 국가에게 다 봉사할 수 있으며 두 실제가 배타적인 것으로 나타나지 않게 된다.
“문제는 인간이 정치원리를 인간실존의 원리로 삼아서는 아니 되며,인간의 본질을 정치, 국가적 원리에 예속된 것으로 이해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당시 조정에서는 수많은 박해와 순교를 통하여 인간의 본질을 국가적 원리에 예속시키는 일들을 자행해 왔었다. 체제 유지를 위하여 인간의 목숨을 역률(逆律)로 다스려왔던 것이다. 황사영은 남인시파에 속해 있었다. 탕평정국이 붕괴되면서 대왕대비 김씨의 사적인 감정이 노론의 벽파 쪽으로 기울어져 수많은 목숨을 국가적 원리에 예속시키는 우(優)를 범하였던 것이다.
이에 황사영은 국가차원의 악(惡)에 항거할 권리를 단호히 주장하고 있다.인간의 존재가 오로지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이다. 황사영은 자기의 전 존재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일을 조금이라도 유보할 수 없었다. 간은 하느님께 전적으로 귀속되어 있다는 전제 조건하에서 국가의 요구에 응답한다. 국가가 하느님과 동등한 위치에서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할 수 없다. 인간은 하느님의 절대주권을 승인하는 범위 안에서 무엇인가 국가에 기여할 수 있다.복음이 지적하듯이 인간은 오직 한 주인 하느님을 섬기며, 인간다운 공동체가 가능키 위해서도 한 주인을 섬길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 대한 전적인 헌신이 허락되어 있는 한에서 인간은 국가에 봉사할 수 있다. 근대에 와서 홉스와 헤겔이 자기들의 국가론에서 이 문제를 거론하였다. 두 철학자의 지론에 의하면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국가로부터 부여 받으므로 신앙인이 창조주 하느님을 섬기듯이 국민은 국가에 충성과 헌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논리로 국가는 하나의 기존체계에서 절대원리 내지는 최고 가치로 격상된다. 성서에서 말하는 인간은 그렇지 않다.그가 절대 가치라고 믿고 관계를 갖는 대상은 하느님뿐이다. 국가는 이 절대가치를 저해하지 않는 한에서 자기에게 위임된 권리를 주장할 수 있다.
황사영은 서학을 강력히 심으려는 주장을 하고 있었으나. 조선 조정은 당파싸움과 권력의 다툼으로 악이 침투한 불의를 조성하고 있었다. 황사영의 윤리 및 종교에 근거한 이 복종의 거부를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황사영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비윤리적인 상태에서 권리를 침해한 ‘불복종의 권리’임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었다.
황사영은 추국(推鞫)에서 어찌하여 이런 흉언 흉계를 꾸민 것이냐는 질문에 신문에서는 “제가 생각하기에 백성과 나라에 해 되는 일이 없다고 여기는데도 조정에서 반드시 이를 금지하여 없애 버리려하기 때문에 西學을 강력히 심으려는 뜻에서 이 계획을 세운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조정에 대한 불복종의 권리를 나타냈다. 아울러 이에 대한 악의 침투로 불의를 조성한 부분에 대해서는 백서에서 이렇게 나타낸다.
위에는 뛰어난 임금이 없고 아래로는 좋은 신하가 없어서 자칫 불행한 사태가 일어나기만 한다면 흙더미처럼 와르르 무너져 버리고 기왓장처럼 부서질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노론도 또 갈라져 두 파로 나뉘었는데 시파는 임금의 뜻을 받들어 순종하여 선왕에게 심복하는 신하가 되었습니다. 벽파는 모두 당론을 고수하여 임금의 뜻에 항거하므로 시파와는 원수같이 지냈는데 당의 형세가 매우 커서 선왕도 이를 두려워하였고, 근래에는 온 나라가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선왕이 돌아가시자 그 뒤를 이는 임금은 나이가 어려서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청을 하였습니다. 대왕대비는 선왕의 계 조모로서 본래 벽파 사람에 속하였는데 친정이 일찍이 선왕에게 폐가를 당하였습니다. 그로 인하여 대왕대비는 여러 해 동안 원한을 품고 있었으나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하고 있다가 뜻밖에 정권을 잡게 되자 마침내 벽파는 거리낌 없는 학정을 폈습니다.
조선 정부로서는 국가의 토대를 확고하게 하지 못하면서 백성들의 아픔을 무시하고 체제상의 유연성을 갖지 못한 채 천주교인들을 탄압하고 체제유지에 급급했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신유교난 당시 적게는 수천 명에서 많게는 만여 명의 교우가 있었는데 수많은 희생자 중 수백 명의 이름이 정부 기록과 황사영 백서에 남아 있다. 신유교난은 가장 본격적으로 이루어진 천주교 박해이며 그 충격은 상당히 큰 상태였다. 당시의 정치는 왕조의 유지와 집권에 핵심에서 조선의 모든 부분을 통제하는 수단이었기에 그들의 역률(逆律)은 조선의 근대화에 후퇴를 초래하는 어리석음으로 이어지고, 교회로서는 주문모 신부 입국(1785년)이후 1834년 여항덕 신부가 이 땅에 오기까지 약 35년간 성직자 없는 시대를 갖게 되고, 지도층의 신자들이 거의 순교 또는 유배당하여 교회는 거의 빈사상태가 되었다. 더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해서는 반교문의 반포로 천주교를 언제라도 박해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함에 따라 다시 교회를 재건하는 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Ⅴ.결론
초기 교회의 평신도 지도자로 활동하던 黃嗣永(알렉시오)은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임금이나 부모님 위에 하느님이 존재하고 천지만물과 인간의 주재자이며 하늘과 땅의 주인이라고 표현하였다. 황사영 백서를 신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백서에 나타나 있는 주제에 대한 인식이 이루어져야 한다.백서의 내용을 좀 더 세밀하게 고찰해 보면 질서정연하고 논리적인 방법에 따라 주제를 배열한 보고서 형식을 더욱 느낄 수 있다.황사영은 각 신앙적인 주제에 따라 당시의 현황을 잘 나타내고 있다.그 주제는 교회 내적인 문제와 교회 외적인 문제로 구분하여 볼 수 있다.교회내적인 주제로는 교회내의 聖敎활동과 순교, 배교, 박해, 선교정책과 관면으로 나눌 수 있고 교회 외적인 주제로는 정치적 상황을 나타낼 수 있다.한 가지 특이할 만한 사항은 당시의 주어진 현황에 대하여 각 주제별로잘 구분되어 있다는 것이다.
황사영은 당시의 박해에 대한 정황파악을 노론이 남인을 배척하기 위한 함정이고,정조가 주문모 신부를 기어코 찾으려 하였으나 이 두 가지 모두가 해결되었기 때문에 박해가 잠잠해질 것이라고 판단하였다.또한 전국적으로는 그렇게 많은 교우들이 없고 변문에서도 1,2년 후면 조사가 소홀해질 것으로 판단하였다.그러면서 聖敎를 해치는 일은 당파끼리의 논쟁과 견문이 넓지 못함이 聖敎를 해치는 일이라 지적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조정의 박해는 날로 심해져 갔다.어렵게 영입한 주문모신부가 순교하여 교회는 거의 폐허화되어 갔다.황사영은 교우들이 받은 상처로 인한 고뇌와 슬픔을 백서를 통하여 보고하였다.황사영은 백서를 통하여 자신의 정당함을 입증하고 박해자들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백서를 작성하였다. 또한 황사영은 당시의 상황을 통상적인 정치적 관점으로 보지 않고 오직 전교를 통하여 백성을 해치지 않고 재물을 빼앗지 않으며 仁과 정의의 극치를 이루려하였다. 그러나 계속해서 들려오는 소식에는 처절한 박해의 소식과 주문모신부의 순교소식으로 인하여 신부영입과 교회재건을 위한 방안으로 다섯 가지의 선교정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다섯 가지의 선교정책 중에서 교황을 통한 청원과 내복 감호책, 청래 대박책이 문제가 된 3條凶言의 역모(逆謀)가 되었던 것이다.
황사영백서를 전체적으로 볼 때 하느님께서 인간을 용서하기 전에 당시의 권력의 우상을 깨뜨리는 ‘하느님의 훈육’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한다. ‘하느님의 분노’란 백성을 벌하기 위하여 나선다는 뜻이라기보다 권력의 행실과 태도 때문에 참혹한 결과를 맛보도록 내버려 둔다는 뜻이다. 하느님이 인간사를 주도하고 있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하느님의 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뜻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법은 ‘자기 행동의 결과’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행실을 지적하며 간절한 호소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황사영은 백서에서 분명히 나타내고 있듯이 교회를 유지하는 것은 하늘의 뜻이라고 여기고 교회의 재건에 강한 사명감을 느끼면서 하느님의 요구에 따른 것이다. 그러나 조선 조정은 당파 싸움과 권력의 다툼으로 악이 쉽게 침투하여 불의를 조성하고 있었다.황사영의 윤리 및 종교에 근거한 이 ‘복종의 거부’를 당시 조선 조정에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황사영은 자신에게 내려진 명령이 비윤리적인 상태에서 권리를 침해한 ‘불복종의 권리’임을 분명히 표현하고 있었다. 본고에서는 황사영 백서에 나타나 있는 신앙적인 부분을 고찰하여 보았는데 앞으로 구약의 예언자 예레미아와 연관된 연구가 이루어지면 백서의 평가가 더욱 신앙적인 접근으로 가능해지리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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