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본업은 시를 쓰는 일이고, 부업은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이다. 더 세세히 말하면 시 쓰는 것으로는 빵이나 밥을 얻을 수 없고, 강단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일로 생계를 유지한다. 그런데, 은행이라든지, 아니면 관공서에서 피치 못할 사무로 나의 정체를 드러내게 될 때 우스꽝스런 장면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곤 한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문 : 직업이 뭡니까?
답: 시인입니다.
문: 아니 그런 거 말고, 직장이요
답: .....
나에게 그 물음을 던진 사람은 정상적인 질문을 던진 것이고 나는 우답을 한 셈이다. 한 일간지의 최근조사에 따르면 예술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30퍼센트 이상이 예술행위에 따르는 일년 단위의 수입이 전무하다고 한다. 이십 퍼센트 가까운 사람은 고소득자로 생활에 지장이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 예술 종사자들 사이에도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존재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반수가 넘는 빈곤한 예술인들이 자신이 예술인임에 긍지를 느끼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시인으로 살아오면서, 한 두 번의 정부의 배려 -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서 시행하는 창작지원금- 로 출판비를 보조받은 것이 가장 큰 수입이었으며, 그 외에는 시를 써서 생계에 보탠 적이 없는 나는 , 바로 그 점에 대단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는 사람중의 하나이다. 나의 시 쓰는 행위는 상품화되지 않음으로써 - 물론, 서점에서 나의 시집을 구입해 준 독자들도 존재하지만 -그 순결성을 보장받았고, 나의 시를 빵으로 바꾸지 않았으므로, 아직도 자연과 역사와 고단한 삶의 꿈을 노래할 수 있었다고 외칠 수 있다. 그래서 나의 정신은 나의 주업이 시인이고, 밥풀이나 먹게끔 도와주는 수단이 선생이라는, 잘못된 정보를 각인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위의 대화를 정상적으로 돌려본다면 이렇게 될 것이다.
문: 직업이 뭡니까?
답: 학교 선생입니다.
문: 그 밖에 하시는 일은 없습니까?
답: 취미로 시 좀 쓰고 있습니다.
철학의 본질적인 물음은 반드시 적시적인 것은 아니다. 그 까닭은 철학은 언제나 자기의 시대보다 훨씬 앞서서 企投되어 있기 때문이든가, 아니면 철학이 자기의 시대를 그 이전에 있던 것 즉 원초적으로 있던 것에 遡行해서 결합하기 때문이다. 여하간 철학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適時代的으로 되어있지 못한 知일 뿐만 아니라 오히려 역으로 시대를 자기의 척도 밑에 두는 知이다.
4호선 전철역을 빠져나오는 지하도 계단에서 구걸을 하는 소년의 때묻은 손을 보면서 느닷없이 나는 하이데거를 떠올린다. 철학은 마로니에 벤치에 앉아 헛소리를 질러대는 실직자의 정신을 돌려놓지 못하고, 지하도 계단에서 때묻은 손을 내미는 장애인을 정상인으로 돌려놓지 못한다. 예술 또한 개인들의 상처를 위무할지언정 개인들의 상처를 근본적으로 치유하지는 못한다. 그러나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되물어보고, 추함보다 미를 추구하는 정신적 활동은 文化라는 무지개를 인간 사이에 걸어놓는다. 문화는 있으면서 손에 잡히지 않는 것이고, 이미 손에 잡힌 문화는 이데올로기화한 괴물에 다름 아니다.
마로니에 미술관 3층 세미나실
2004년 2월 18일부터 20일, 3일간에 걸쳐 문화비전 수립을 위한 공개 워크숍 제 5 주제 ‘평화와 번영을 위한 문화교류협력 증진’ 섹션에 방청객으로 참여했다. 세미나실 전면에 걸린 프랭카드가 눈에 거슬렸다 ‘참여정부 문화비전 공개 워크숍’
누가 참여하는 정부인가? 온 국민이? 그 전 정부에서는 문화정책이 없었나?
회의장에 들어가면서 170쪽 분량의 워크숍 자료집을 받았다. 삶의 질 제고를 위한 문화참여 확대, 문화정체성과 창조역량 제고, 국가 균형 발전의 문화적 토대 구축, 문화를 국가발전의 新 成長動力化 등 선행 주제에 대한 이해가 없어 아쉽기는 했지만, 사회자를 비롯한 발제자, 패널들의 토론 자세는 원론적인 수준이었음에도 진지했다. 참여정부는 출범 이후 문화비전 24개의 추진과제를 설정하고 이를 실행에 옮길 것이라고 했다.
그동안 우리는 문화를 예술이나 문화유산 등 특수한 영역으로 이해해 왔음. 역대 정부가 발표했던 문화비전들 역시 이런 협의의 문화개념에 입각하여 문화예술, 문화유산, 문화업무만 다루어 왔음.
이런 개념하에서 문화는 전문가에게는 중요할지 몰라도 일반 시민의 삶과는 무관하거나 없어도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되어 왔음. 그러나 문화를 삶의 양식으로 보는 광의의 개념에서 보면 문화는 사실상 삶의 모든 측면과 불가분한 관계를 갖고 있으며 몇 개의 특수한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것임
- 자료집 13쪽
나는 인용문에 보이는 바와 같은 문화의 광의적 개념에 일단 동의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의 개념을 우리 삶의 전 영역에 삼투시키겠다는 의지 또한 받아들이고 싶다. 그렇다 문화는 삶의 양식 그 자체이고, 특수한 영역으로 환원될 수 없는 총체적인 것이다. 총체적인 것이기 때문에 집적과 퇴적이라는 공간이 필요하고 부단한 변화 속에서 응집되어야할 시간이 필요하다. 그렇다. 문화는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같은 공간에 사는 개인이 선택한 삶의 양식이며 보다 나은 삶을 지향하는 진보적인 태도이다. 그러나 문화의 발전은- 문화가 발전한다는 생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상의하달로 집행되는 정책이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문화의 진정한 의미는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있고, 인간을 인간답게 가꾸려는 노력과 분투의 과정이지, 문화 자체가 목표가 될 수 없다는 점에서 정부에서 구상하고 있는 문화비전은 시대착오적이고 권위적이라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문화란 무엇인가? 있는 그대로 해석을 해본다면 質朴함에서 세련됨으로 변화되는 것이고, 인간의 야만성이 휴머니즘으로 승화하는 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더 나아가서 개개인이 추구하는 삶의 맛과 멋이 어우러지는 과정과 공동체적 결집이 문화라고 이해한다. 우리가 문화 앞에 붙이는 여러 단어들을 생각해 보라. 음식, 주택, 술, 교통, 성, 청소년 강남, 지방, 서민.... 심지어 정치까지도 문화의 관형어로 채택하여 사용할 수 있다. 이렇게 놓고 볼 때 문화의 실체는 和而不同의 원리가 작동하는 무형의 정신적 세계이며, 그것이 有形化 될 때 각기 세분화된 영역으로 나뉘면서 정부기관과 같은 각가의 특징을 부여받는 것이다. 모든 정부기관은 국민의 복리와 안녕을 도모를 꾀한다, 안녕과 복리의 핵심에는 알게 모르게 문화의 개념이 자리잡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이번에 야심차게 추진하는 문화비젼 프로젝트는 문화관광부가 아닌 정부의 모든 기관이 함께 추진해야 할 과제를 망라한 거대한 프로젝트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추진의 핵심동력이 어디가 되어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으며 목표 달성에 대한 플로우 챠트가 제시되지 못한 점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프로젝트는 국민을 향하여 제시되기 보다는 국가를 위하여 봉사하는 각 핵심 부서의 요원들이 자신들의 업무에 문화의 개념을 이식하기 위한 정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었다.
제 5 주제 평화와 번영을 위한 문화교류협력 증진
* 기본방향
●가속화되는 지구화 과정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며, 특히 동북아 중심시대의 부상 및 평화의 공존이라는 대외적 과제에 문화적으로 부응하기 위한 새로운 과제로 평화와 번영을 위한 문화교류협력 증진이라는 과제가 설정되어야 함
●형식적이고 일회적인 전시효과 위주의 교류에서 내용적 실질을 갖춘 지속적인 국제교류로 전환
●기관을 중심으로 한 국가간 대규모 교류와 병행해 지역 대 지역의 소규모 직접교류로 국 제교류를 다변화, 일상화, 미시화
●미국, 일본, 유럽의 특정국가로 편중되어 온 국제교류에서 동북아, 아시아, 유럽 전반과 제 3세계로 확대된 국제교류로 전환
●일회적인 전시공연 위주의 남북 문화교류에서 지속적이며 구체적인 생활문화 영역으로 확 장된 남북문화교류로 전환
●해외관련 기구의 파편화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해외문화교류체계 일원화를 추진하고, 이 를 통해 문화교류, 문화외교, 문화홍보의 통합운영 체계 확립
팔고 싶은 상품이 질이 좋고 가격이 저렴하다면 소비자는 별도의 광고가 없어도 그 물건을 사게 될 것이다. 국가의 이미지 제고의 비전은 우리의 문화를 상품화하여 한국이라는 이미지를 높이자는 방안이다. 그런데 정말 우리에게는 팔 수 있는 문화상품이 과연 얼마나 있으며 다른 나라와 변별력을 갖춘 독특한 이미지가 존재하고 있을까? 매우 아픈 이야기지만 우리의 것을 제대로 지키지도 못하면서 어떤 이미지를 생성해 낼 수 있을까? 서울이 아직도 漢城(한칭)으로 불리워도 아무 거리낌없는 현실에서, 우리의 서울이 500년 넘게 한 왕조의 수도였다는 사실을 콘크리트로 포장된 이 도시에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남대문, 동대문 시장을 서양인들이 찾는 이유가 뭘까? 지저분하고 미로로 얽힌 질퍽한 통로를 비집고 다니면서 물건값을 흥정하는 것이 한국적인 이미지이다. 박제같은 고궁에서 박제같은 안내원들의 설명을 듣는 것으로 한국의 이미지는 형성되지 않는다. 한국의 문화적 이미지는 처마 낮은 인사동 골목의 골동품가게를 서성거리면서 길가의 노점상에서 파는 호떡에서 떠오르지 서구화된 고급호텔의 라운지에서 찾아지는 것은 아니다.
국제간의 교류도 상호교류를 목표로 하고 있지만 문화는 위에서 아래로 흘러가는 것이다.
국제교류가 서구 일변도임을 지적하지만, 세계화의 기치를 내걸면서 서구를 본받자고 하는 풍토가 만연한데, 어떻게 계량적으로 동등한 교류를 시행할 수 있겠는가? 우리가 원한다고 상대국가가 받아주는 것도 아님은 자명한 것이 아닌가? 2002년의 월드컵의 붉은 물결을 놓고 성숙한 시민문화의 정수라고 자찬한다든가, 동두천 효선, 미선양의 역살 사고에 대응한 촛불시위를 자주의식의 고양이라고 견강부회 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위험한 발상이다.
왜 그 많은 국민들이 월드컵 사강에 환호 했는지. 왜 우리가 어린 여학생들의 죽음에 비통해 했는지 사회적인 진단은 신중해야할 필요가 있다.
동북아문화협력 강화의 추진은 한국, 일본, 중국의 삼국의 역사적 토대를 바탕으로 협력을 강화하자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짝사랑에 불과하다. 일본은 총리까지 나서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고 나섰으며, 지난 1월의 독도 우표 발행에 대해 전 세계를 대상으로 독도 우표 발행을 성토하는 일에 전력을 다하고 있다. 중국은 어떤가? 고구려의 한국역사 편입을 부정하는 동북공정을 진행하면서 한국과 북한을 압박하고 있지 않은가? 이러한 때에 국제문화교류 협력이라는 과제는 자칫 잘못하면 국가의 아이덴티티를 훼손시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다. 친일파 청산 문제나 종군 위안부 문제에 대해서도 정부는 수동적인 태도로 일관하고 있다. 광주민주화 항쟁이나 제주도 4.3 사건의 명예회복에는 전력을 기울이면서, 왜 탈북자 문제나 국군 포로 송환에는 미온적인가? 요는 정치, 외교적인 평등외교가 성립되지 않는 한 문화교류는 동상이몽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제는 전통의 문화에 이미지를 내세우지 말자고 하는데, 지금 그 것 말고 우리의 얼굴을 부각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는가?
우리의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전문가가 부족하여 풍부한 문회유산을 제대로 알리지 못하고 주먹구구식 관광에 매달리고, 캐릭터 상품 하나 없는 관광 유적지에서 누가 한국을 제대로 알고 갔다고 할 수 있겠는가?
구슬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이 있는 것도 제대로 포장하지 못하는 것이 더 큰 선결문제가 아닌가?
워크숍에서는 국제교류에 관련된 기관이 너무 많아 이의 효율적인 통폐합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하나의 기구로 국제관계를 통합한다면 일사분란한 행정과 예산집행이 이루어질 것이라지만, 다양한 국제적인 현안을 처리하는데에는 유연한 기관들이 다수 존립하는 것이 오히려 국가의 이익에 부합될 수 있다. 정작 중요한 것은 기관의 많음이 문제가 아니라 부처간의 이해를 떠나서 국가적 차원에서의 정책통합능력과 유기적 협력을 하는 행정의 유연성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남북 문화교류의 확대를 반대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교류의 최전선에는 당연히 전문 예술인들이 동참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문화교류의 뜻이 아무리 순수하다 하더라도 교류의 결단은 정치적이고 외교적인 문제이다.
무거운 문화와 가벼운 문화
클래식 공연이나 무용공연의 입장료는 일반 서민들이 감당하기 어려운 금액이다. 외국의 오유명한 오페라를 보거나 조수미 같은 세계적 음악가들의 내한 공연을 보려면 상당한 출혈을 감수해야 한다. 극소수의 청중만이 그러한 혜택을 누린다. 청소년들이 열광하는 스타들의 공연을 보기 위해서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 들어간다. 한국영화는 할리우드 영화를 물리치고 승승장구하고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팝송 판은 팔리지 않고 국내 가수들의 앨범이 다수 판매를 점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 젊은이들의 꿈은 얼짱이 되거나 몸짱이 되어 일약 스타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대중문화는 상업주의와 결합하여 호황을 누리고 있다. 고도로 세련된 상품과 그것을 파는 기획력이 수 많은 스타들을 명멸하게 한다.
보고서에도 지적한 바와 같이 대중들은 고급문화를 향수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불행감을 느끼지 않는다. 출판의 볼륨에 있어서는 세계적인 수준에 올라서 있음에도 독서의 양에 있어서는 형편없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결과론적인 인생관과 아이엠에프로 촉발된 경제 불안이 우리를 조급한 문화로 내몰고 있는 실정이다. 더군다나 인터넷으로 통칭되는 이 시대에 있어서 즉흥적이고 동시적이며, 가상적인 세계가 존재하는 한, 보다 일회적이고 시뮬레이션화된 사고는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은 틀림 없는 일이다.
문화는 도구가 아니고 바로 목표이어야 한다고 앞서 말한 바 있다. 문화는 획일적인 것이 아니라 다양성이 그 존재근거이다. 랩이 주종을 이룬다고 해서 트로트가 사라져 버린다면, 영화가 경쟁력이 있으므로 같은 공연예술인 연극은 없어져야 한다면, 문화를 계량화하고 컨텐츠화 할 수 있다는 제안은 반평생을 순수 예술에 목매단 나 같은 사람들에게는 비애로 다가온다.
다양하게 제시된 문화비전의 제안들은 정치공약처럼 허무하다. 문화는 한 개인이 평생동안 학습하고 훈련을 하면서 환경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지, 집단적으로 향수하는 대중주의를 지향하는 것은 아니다.
땅거미 지는 마로니에 광장
대학로는 예술과 청소년들의 문화가 어우러진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수많은 전시회와 공연들이 일 년 열 두 달 개최되고, 야외무대에는 힙합 춤을 추는 청소년들, 아이들 데리고 나온 주부들, 연인들로 가득 찬다. 사람이 사는 사회에는 명과 암이 존재한다. 마로니에 광장 주변도 낮과 밤의 풍경이 완연히 다르다. 이 풍경은 아마도 의도된 것이 아닐 것이다. 보다 품위 있고 예술적인 정서가 흐르는 공간으로 준비되고 일정부분 그 목적과는 방향이 틀어졌는지 모르지만 , 바로 그 틀어짐이 문화의 속성이다. 오히려 목적된 공간을 비집고 들어오는 개체들의 역동성이 마로니에 광장의 인상을 확대시킨다.
나는 독도사랑협의회라는 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문학신문이라는 조그만 문학웹진을
꾸려가고 있기도 하다.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것도 아니고, 영리적인 목적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은 더욱 아니다. 독도사랑협의회는 국내외의 문인들, 역사학자들을 중심으로 약 40여명이 가입되어 있는 단체이다. 지난 해 8월 29일(한일합방 국치일)에 영혼까지 독도에 산골하고“라는 사화집을 내고 독도의 의미를 되묻는 세미나를 개최했다. 그리고 9월에는 카나다 토론토에서 독도시화전을 개최했다. 조국을 떠나온 동포들에게 조국과 국토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소중한 행사였다. 이 예산 중 일부분은 재외동포재단에서 지원을 받았으나 전체 예산의 1/5도 안되는 금액이었다. 2004년도의 사업으로 ‘동해, 만파식적을 찾아서 ’라는 프로젝트를 통해서 국토 사랑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자 두 번째 사화집을 준비하고 있으며, 해외행사를 위해서 보조금 신청을 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산부족으로 지원이 불가하다는 통고문 한 장을 받는 것으로 끝났다. 올 연초 일본의 고이즈미 총리의 독도 망언에 분기탱천하여 이에 항의하는 서한을 발송하기도 하였고, 올 4월 미국 뉴욕에서 개최되는 세계수로기구 표준지명연구자회의에 즈음하여 뉴욕한인회와 공동으로 동해 표기를 확정하는 운동을 전개할 계획도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외교 마찰을 이유로, 지원에 난색을 표명하는 단체도 있었으며, 말로는 국제교류 협력을 외치고, 민족 자존을 외치면서 정작 우리 한국의 기와 혼을 살리는 일에 인색한 세태에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우리의 사업이 우리의 자발적인 참여와 의지로 결행되는 것인 만큼 지원에 관련된 불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우리의 문화예술에 대한 정책당국의 보다 전문화되고 진지한 접근을 기대하는 것일 뿐이다.
땅거미가 지는 대학로 곳곳에서 연극전단을 뿌리는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름대로는 예술인으로서의 성취를 꿈꾸면서 불법 벽보를 붙이고 호객을 하면서 꿈을 키우는 그들에게 누가 따듯한 격려의 인사를 던지겠는가? 세상 살아보지 않은 객기라고 그들을 호도할 것인가? 모든 문화현상의 기저에는 대중들이 숨죽이며 바라보아야할 匠人들과 그들의 피땀어린 분투가 자리잡고 있음을 소중히 하는 풍토가 진정한 문화비전이 아닌가?
세상은 유형의 물질로 가득 차 있지만 세상을 움직이는 진정한 가치는 무형의 정신의 살아있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문화고 뭐고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한다. 경제적으로 풍족해야한다. 주오일제 근무에 여가를 즐기려면 주머니가 든든해야 한다. 배를 굶으면서, 회사에서 쫓겨나면서 연극을 보고 음악회에 갈 수는 없다.
우리가 국제교류의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우리에게 경제적인 힘이 있어야 하고 부강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 자료집에 나열된 사업들에 재원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리고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한 재원은 도대체 얼마쯤 될 것인가?
대학로를 건너다가 일군의 시인들을 만났다. 모 문학단체의 임원을 뽑는 행사에 바람처럼 불려왔다 사라져 가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세상이 변한 줄 모르고, 음풍농월, 낭만의 향수를 몸에 걸친 사람들이었다. 변화와 개혁은 피할 수 없는 이 시대의 화두이다. 예술인이 진정으로 예술인으로 대접받으려면 그들이 대중과는 다른 영혼의 소지자라는 것을 자각해야 한다.
문화정책 입안자들은 국민들에게 가르치고 계몽하고, 정치적 도구로 문화를 도용하는 자세를 버려야 한다. 정부는 판을 만들어 주면 된다. 책 읽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 도서관을 확충하고 도서를 제공하면 된다. 이 책을 읽어라, 저 책을 읽어라 하는 것은 너무 힘에 겨웁다.
깔아놓은 판에서 춤을 추든, 벌렁 드러눕던 그것은 대중들의 몫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