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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따라 수원 인문여행 여섯 번째 이야기 – 행궁에서 만나는 원행을묘정리의궤
강좌 시작(4월 2일)할 때보다 기온이 많이 오른 5월7일 ‘화성행궁에서 만나는 원행을묘정리의궤’ 강좌는 나각순(서울역사연구소 소장)선생님의 설명으로 시작되었다.
강의실에서 하는 수업보다 현장에서 진행되는 수업은 현장감이 살아있다. 이번 선경도서관에서 시작한 ‘길 따라 수원인문여행’은 색다른 프로그램이었다.
이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강사섭외를 맡으신 신영주(지기학교 교장)선생님의 노고에 큰 박수를 보낸다. 또한 이런 프로그램이 진행될 수 있도록 강좌를 개설해 주신 선경도서관 담당자 김창숙(도서관 사서)선생님께도 주민으로서 고마움을 느낀다.
1. 정조는 어떤 나라를 만들려고 하였는가.
1.1 왕권강화와 민국(民國) 사상
정조는 군왕으로서의 교육과 훈련을 받고 마침내 1776년 25세의 나이로 조선 22 대 임금에 즉위하였다. 영조의 보호와 교육을 받은 정조는 행운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는 아픔이 있다.
영조 후계자였던 아버지 사도세자가 1762년 노론 벽파와의 갈등 속에서 뒤주에 갇혀 8일 만에 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이때 사도세자는 28세이고 정조는 11세였다. 아버지의 비극 때문에 정조의 영광이 가능했다고 할 수 있겠지만 그 영광 뒤에는 항상 아버지에 대한 연민과 함께 죄인의 자식이라는 불명예스런 꼬리표가 달려 있다. 정조는 그것을 씻지 않고는 군왕으로서의 당당한 면모를 과시하기 어려웠다.
개인적으로 아버지의 한을 풀면서 할아버지가 추진해 온 탕평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시비를 명확히 가리지 않는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엄격한 시비를 가리는 준론탕평으로 왕조중흥의 사업을 마무리하는 것이 정조가 짊어진 과제이다.
신하를 능가하는 학문적 기초를 다진 정조는 무예와 문예 그리고 과학기술에도 관심과 조예가 깊었고, 성리학은 물론이고 남인 실학과 노론 북학, 그리고 불교 등 당시 온갖 사상과 지혜를 수렴하면서 강력한 정치적 지도력을 구축해 갔다. 정치의 탕평과 사상의 탕평이 병행 된 것이다.
정조는 스스로 ‘군사(君師)’로 자처하기도 하고,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고도 자임하였다. ‘군사’란 임금인 동시에 선생이라는 뜻이며, ‘만천명월주인옹’ 이라는 것은 ‘수많은 강을 비추는 달과 같은 임금’이라는 뜻이다. 이는 신하들로부터 교육을 받는 임금이 아니라 신하들을 가르치는 임금이 되겠다는 의지가 담긴 것이다.
정조가 초월적 군주상을 업고 마무리하려는 왕조중흥은
첫째, 아버지의 비극을 빚어낸 붕당정치의 폐단을 극복하여 강력한 왕권을 세우고,
둘째, 재야의 선비와 백성을 적극 포용하여 지방사회의 동요를 막고 사회 통합을 강화함으로써 백성을 중핵에 둔 사민국가(士民國家)를 확립하겠다는 것이며,
셋째, 과학기술과 상공업이 병진하는 전향적인 경제 질서를 구축하는 일이었다. 말하자면 근대를 향한 전진이었다.
정조의 왕권강화 정책은 여러 각도로 추진되었다. 즉위 직후 규장각이라는 새로운 문한기구(文翰機構)를 설치하여 종전의 문한기능과 비서실의 기능을 통합함으로써 강력한 친위문신세력을 양성하고 이를 개혁정치의 선도적 중심기구로 활용하였다. 재위 5년 이후에는 초계문신제도에 의해 기성관료들을 재교육시켰다.
이는 37세 이하의 젊은 문신 중에서 재주 있는 신하를 의정부에서 추천하여 규장각에 위탁 교육시키는 제도를 말한다. 정조는 주기적으로 규장각에 나아가 직접 이들을 가르치고 시험을 치르고 글을 지어 바치게 함으로써 자신의 정책노선을 따르는 친위세력을 양성하였는데 정조가 죽을 때까지 초계문신으로 뽑힌 사람은 모두 138명이나 되었다. 그러고 나서 재위 6년 이후로는 각 도의 인재들을 현지에서 발탁하는 별시문과를 자주 시행하여 정치권의 대폭적인 물갈이를 시도했다.
아버지의 명예를 회복시키는 것도 정조의 왕권강화를 위해 매우 긴요한 일이었다. 그것은 아버지를 핍박한 정치세력에 대한 간접적인 응징의 의미도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왕은 즉위 직후 사도세자를 장헌세자로 추존하고 사도세자의 사당인 수은묘를 경모궁으로 승격시키고 양주 배봉산에 있는 아버지 묘소를 영우원으로 승격시켰다.
1.2 군권 장악
군대의 장악도 왕권강화의 필수적인 요건이다. 정조는 재위 9년 이후로 군대개혁에 착수하였다. 장용영의 설치는 그 핵심 사업이었다. 조선 후기 5군영은 붕당정치가 치열해지면서 각 당파의 이해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점차 정치군대로 변질되어 갔다.
정치자금도 군영에서 조달되는 경우가 많았다. 정조는 이러한 중앙 5군영의 기간부대를 대폭 축소시키고, 장용영이라는 새로운 친위부대를 창설하여 5군영 산하의 군대를 배속시켰다. 문신 장악으로 시작된 정조의 왕권강화정책은 군대의 장악을 통해 완결을 보게 된 것이다.
장용영 중에서도 화성에 설치한 장용영 외영의 존재는 매우 중요하다. 이는 외관상으로는 이곳에 있는 아버지의 무덤을 지킨다는 명분을 건 것이지만 실제로는 국왕 정조에게 절대 충성을 바치는 친위부대였다. 원래 장용영은 정조 9년(1785)에 정조의 친위부대로 설치된 장용위에서 비롯된 것인데, 정조 17년(1793)에 장용영의 지방부대인 외영을 수원에 설치하게 된 것이다.
일찍이 18세기 중엽에 실학자 성호 이익도 왕권강화의 한 방법으로 국왕의 친위부대 장악을 역설한 바 있는데 정조는 바로 이러한 주장을 실천한 것이다.
정조가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얼마나 신경을 쓰고 있는가는 1795년 화성행차에서 실감 있게 나타난다.
1.3 경제정책
정조의 새로운 경제정책은 재위 15년에 이루어진 이른바 신해통공정책에서 그 진수가 발휘되었다. 종전에 서울 시전상인들에게 부여하였던 금난금지권, 즉 금난전권을 혁파한 것이다. 이는 난전으로 불리던 사상(私商)의 활동을 보장하는 획기적 조치로서 독점상업체제로부터 경쟁적인 시장경제로 경제정책의 축을 바꾼 것을 의미한다.
조선후기 상공업 발달로 이미 농업 일변도의 국가운영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미 도고로 불리는 거대한 상인들이 국가경제의 고삐를 잡고 있었다. 대외무역도 활발하였다.
화폐경제의 발달에 따라 강제부역인 부역노동이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는 고임제도로 바뀌었다. 국가경영 방식도 강제성에서 벗어나 시장경제의 원칙을 수용하면서 유연하게 대처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정조는 이러한 시대의 흐름을 파악하고 시장경제의 원리를 도입한 신해통공정책으로 나타난 것이고 장인들의 품값을 반나절까지 계산해 주는 철저한 고임제도의 도입으로 가시화 된 것이다.
2. 8일간의 화성행차(윤2월 9일~윤2월 16일)
2.1 첫째 날, 윤2월 9일
드디어 모든 준비가 끝나고 예정된 출궁일이 왔다.
왕은 창덕궁 영춘헌에 나와 “먼저 자전(할머니)을 알현해야 한다”고 말하고 말을 타고 수정전에 가서 할머니께 인사를 드렸다. 할머니 정순왕후는 바로 할아버지 영조의 계비로서 나이는 51세였다. 어머니보다도 10세가 아래인 것이다. 할머니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관여하였지만 행차를 떠나기 앞서 인사를 드리는 것이 왕의 도리였다. 왕은 할머니와 자신의 비(효의왕후)를 궁에 남기고 청연군주, 청선군주만을 대동하고 창덕궁을 떠났다.
돈화문에서 출발한 행렬은 노량배다리에 이르렀다. 배다리의 위치는 지금의 한강대교와 한강철교 중간쯤으로 보인다. 지금 한강대교에는 중간에 중지도가 있지만 당시에는 중지도가 없었다. 어머니 보다 앞서 다리를 건너간 왕은 용양봉저정에서 어머니가 쉴 방돌과 수라의 찬품을 조사하고 막차로 나아가 어머니를 맞아들였다.
1791년에 완공된 용양봉저정은 ‘용이 뛰놀고, 봉황이 높이 나는 정자’라는 뜻으로 지금 상도터널 북측 입구의 동편 언덕에 있는데 대부분의 집은 헐리고 한 채만 남아있다. 이 정자는 잠시 어가가 쉬면서 휴식을 취하고 점심을 드는 곳으로 이용되어 주정소라고도 불렀다. 창덕궁에서 노량행궁까지의 거리는 당시 10리 로 간주되었다.
노량에서 음식을 들고 휴식을 취한뒤 출발하였다. 행차는 노량에서 13리 떨어진 시흥행궁을 향했다. 원래 시흥현은 금천현으로 불리고 있었으나 이 해에 시흥현으로 바꾸고 현감도 현령으로 승격시켰다.
어가가 첫날밤을 보낸 시흥행궁의 위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지금의 금천구 시흥5동 동사무소 부근으로 추정된다. 현재 행궁은 없어지고 그 부근에 있던 수 백 년 된 은행나무 몇 그루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행궁은 이번 행차를 위해 새로 지은 집이었다.
2.2 둘째 날, 윤2월 10일
시흥에서 하룻밤 묵은 왕은 다음날 점심을 들기로 예정되어 있는 사근참행궁을 향해서 떠났다. 시흥에서 20리 떨어진 거리다. 시흥행궁을 떠난 어가는 지금의 시흥대로를 타고 안양을 향했다. 만안교를 건너 안양점 앞길에 이르자 행차를 잠시 쉬게 하였다.
당시 만안교는 나무로 만들어져 있었으나 이 해 9월 경기감사 서유방에 의해 아름답고 견고한 아치형의 돌다리로 개수되었다. 지금은 이 다리가 약 200미터 북쪽으로 이동되어 복원되었다. 안양점은 지금의 안양 전철역 부근이다. 왕은 안양점 앞에서 쉬는 동안 대추를 고은 미음다반을 혜경궁에게 드렸다.
사근참행궁은 지금의 의왕 고천동이다. 사근참은 정조가 과천을 통해 화성을 갈 때에도 거치던 곳으로 시흥로와 과천로가 만나는 지점이다.
왕은 먼저 사근참행궁에 도착하여 시설을 점검하고 혜경궁 가마가 도착하자 내차로 맞아들였다. 이곳에서 오전 간식과 점심을 들었다.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의왕시와 수원시의 경계인 지지대고개가 있다.
사근참행궁에서 쉬고 있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왕은
“비가 아직 멎지 않고 있는데 새로 지은 사근참행궁이 방사가 낮아서 밤을 지내는데 어려움이 있다. 백관과 군병이 비를 맞을 것이 걱정되지만 이곳에서 화성이 얼마 되지 않으니 오늘 도착할 수 있다.”
고 말하고 왕은 우구를 갖추고 출발했다. 화성행궁까지는 20리의 거리였지만 비를 무릅쓰고 행진을 다시 시작되었다.
어가가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에 도착하였다. 왕은 말에서 내려 어머니를 봉수당 왼편에 있는 장락당으로 모셨다. 드디어 이틀에 걸친 여행이 일단 끝났다.
2.3 셋째 날, 윤2월 11일
한양을 떠난 지 사흘째 되는 날이지만 화성에서 여러 행사가 시작되는 첫째 날이기도 하였다.
왕이 향교의 대성전에 참배하고 행궁에서 문무과 별시가 시행되며, 행궁의 봉수당에서 회갑잔치의 예행연습인 진찬습의가 거행되는 등 세 가지 행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화성에서 첫 행사를 향교참배로 정한 것은 학문을 사랑하는 정조의 유학진흥 의지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향교의 대성전에는 공자에서 주희에 이르는 21명의 중국 성현과 설총에서 박세채에 이르는 15명의 우리나라 유학자들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화성 향교에 가는 시간은 아침 묘시(5~7)로 예정되었다.
향교 문 밖에 이르자 왕은 말에서 내려 여를 타고 명륜당 대차(大次)로 들어가서 면복으로 갈아입었다. 규를 들고 동쪽 협문으로 들어가 동쪽 계단을 따라 올라가 대성전 앞 판위에 네 번 절하였다. 배종한 백관과 유생들도 규정에 따라 예를 올렸다.
왕은 내부를 살펴보고 노후 된 것을 수리하라고 하였고, 참반유생들에게는 별시응시기회를 주었다.
두 번째 행사는 진시(7~9)에 행궁 낙남헌에서 문무과 별시를 거행하는 일이었다. 화성부 및 그 인근지역인 광주, 과천, 시흥 지역의 선비들과 무사들을 등용하여 지역주민의 사기를 높이기 위한 배려라고 할 수 있다.
이날 문과에 합격한 사람은 모두 5명이고, 무과는 모두 56명을 선발하였다. 문무과 합격자의 명단을 공개하는 의식인 방방의(放榜儀)는 미정(오후 2시)에 이루어졌다. 융복을 입은 왕이 친림한 가운데 합격자에게는 합격증서인 홍패와 사화, 사주, 복두, 관대 등의 예물이 하사되었다.
2.4 넷째 날, 윤2월 12일
오전에 아버지 묘소인 현륭원에 전배하고 오후와 야간에는 화성에서 두 차례 군사훈련을 하도록 예정되어 있다.
행차는 팔달문으로 나와 지금의 정조로를 따라 남으로 향했다. 어가는 상류천점앞길에서 휴식을 취했다. 원래이름은 매교삼거리로 불리고 있었으나 이름을 상류천으로 바꾼 것이다.
어가는 다시 출발하여 만년제를 거쳐 현륭원 동구에 이르렀다.
혜경궁이 장내로 들어가자 비통함이 절도를 넘어서서 울음소리가 장 밖에까지 들려왔다. 28세에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마친 남편이 자기와 동갑이면서도 회갑을 보지 못하고 묻혀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랴.
왕은 이날 현륭원을 관리하는 관원들의 벼슬을 올려 주기도 하고, 포목 혹은 쌀을 상으로 주었다. 또한 현륭원의 원찰인 용주사 승려들에게도 상을 내려 주었다.
화성을 건설한 목적의 하나가 난공불락의 군사요새를 만들려는 데 있고, 또 이곳에 5천 명의 장용영외영을 두었던 만큼 화성을 방문하면서 군사훈련을 실시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더욱이 외영의 군사들이 가장 친위적인 성격이 강하여 이들을 왕이 직접 조련한다는 것은 서울에 있는 반대세력에게는 엄청난 시위효과가 있는 것이다.
이날 군사훈련은 주간과 야간 두 차례에 걸쳐 시행하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성에서 하는 군사훈련을 성조, 낮에 하는 훈련을 주조, 밤에 하는 훈련을 야조라고 한다. 왕이 친림하는 곳은 팔달산 정산에 있는 장대였다. 훈련은 정해진 의례에 따라 질서 있게 진행되었다. 훈련이 끝나자 왕은 말을 타고 낙남헌으로 돌아왔다.
이날 밤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야간 군사훈련이 실시되었다. 야간훈련에는 횃불이 사용되고, 성안의 일반 시민들도 문 위에 등을 하나씩 걸도록 하였다.
왕은 군사훈련이 끝난 뒤 수백 명의 장병들에게 궁시와 포목 등을 상으로 내려주었다. 군사훈련을 통해서 군사들의 사기를 높여 주었다.
2.5 다섯째 날, 윤2월 13일
이날은 이번 행사의 하이라이트인 진찬례, 즉 자궁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잔치가 벌어지는 날이다. 그동안 행사가 화성의 선비와 무인들을 다독거리는 행사였다면, 오늘은 왕실을 위한 행사라 할 수 있다.
잔치는 진정 3각(오전 8시 45분)에 봉수당에서 거행되었다.
혜경궁은 예복을 갖추고 안내를 받으면서 자리에 앉고 왕은 융복을 입고 절하는 자리로 갔다. 혜경궁과 왕이 등장할 때 여민락이 연주되었다. 자리에 앉자 노연(향불)이 피어오르고 음악이 중지 되었다. 내명부가 혜경궁에게 절을 하고, 의빈과 척신이 절을 올렸다.
다음은 술잔을 올리는 의식이 이어졌다. 왕이 술잔을 올리고 치사를 드리자 혜경궁도 “전하와 더불어 경사를 함께 한다”는 선지(임금의 命을 널리 선포함)를 내리고 술을 마셨다.
잔치가 끝난 뒤 왕은 음식을 베풀고 꽃을 나누어 주었다.
왕은 행좌승지 이만수에게 어제시를 써서 주고 연회에 참여한 신하들이 화답하는 시를 쓰도록 명하였다. 그러고 나서 정리소의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의식은 실로 천년 만에 처음 있는 경사이다. 오는 갑자년에는 자궁께서 칠순이 되신다. 그때도 현륭원에 참배하고 잔치하기를 오늘처럼 할 것이다. 오늘 사용한 도구들을 화성부에 보관해 두었다가 10년 후에 경사가 거듭 돌아옴을 기다리게 하라.”
또한 화원으로 하여금 진찬도 병풍을 만들게 하였다.
2.6 여섯째 날, 윤2월 14일
새벽에 신풍루에서 주민들에게 쌀을 나누어 주고, 오전에 낙남헌에서 양로연을 열도록 되어 있었다. 화성부 주민들에게 인정을 베푸는 날인 것이다. 왕은 어머니 회갑의 기쁨을 화성부 주민들과 함께 갖기를 원했고, 또 자신의 인정이 화성을 중심으로 하여 전국 방방곡곡에 미치게 되기를 기대하였다.
이 행사 뒤에는 방화수류정을 방문한 다음 저녁에 득중정에서 활을 쏘는 행사가 예정되어있었다.
화성주민에게 쌀을 나누어 주는 행사는 미리 대상자를 선발하는 등 치밀한 준비가 있었다. 쌀을 받는 대상자는 사민과 진민에 해당하는 사람들이었다. 사민이란 환과고독 즉 홀아비, 과부, 고아, 독자를 말하며, 진민은 가난한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한곳에 모아놓고 쌀을 주는 것은 아니었다. 지역을 네 군데로 나누어서, 성곽 내외의 도시지역은 행궁의 정문인 신풍루에서 왕이 친림한 가운데 사미하고, 주변지역은 승지들을 산창(山倉)과 사창(社倉), 그리고 해창(海倉)으로 보내 왕을 대신하여 나누어 주도록 조처하였다.
혜택을 받은 주민은 사민이 539명이고, 진민이 4,813명이며, 이들에게 나누어 준 쌀이 약 368석이 된다. 당시 화성부의 인구가 대략 6만 명이었으므로 전 인구의 10분의 1정도가 혜택을 받은 셈이다. 형식적인 행사가 아님을 알 수 있다.
왕은 진민에게 쌀과 소금을 주는데 그치지 않고 죽을 만들어 먹이도록 하였다.
양로연은 진시(오전7~9)에 낙남헌에서 거행되었다. 양로연에 초대받은 노인은 노인관료 15명과 화성에 사는 노인 384명이다.
양로연 때 노인들에게 백화주, 황목주 등의 비단과 청려장이 상으로 내려졌다.
양로연을 마지막으로 이번 행차의 공식행사는 거의 끝났다. 문인, 무인, 결손가정, 가난한 사람, 노인 등 화성부의 각계각층 주민들을 골고루 다독거린 셈이다. 왕이 표방하는 성인의 통치가 구체화된 것이다. 여기에 화성부 전주민의 요역과 세금을 면제하는 등의 혜택이 또한 부여되었다.
이제 왕 자신의 시간을 가질 때가 되었다. 왕은 자신이 설계한 화성의 성곽을 자세히 살펴보고 싶었다. 성곽 건물 중 경관이 빼어난 방화수류정으로 갔다.
왕은 군복을 입고 말을 타고 낙남헌에서 나와 강무당을 거쳐 성을 밟으면서 걸어갔다. 수행원은 측근 몇 사람으로 제한되었다.
화성의 북문인 장안문루에 이르자 왕은 화성유수 조심태에게 물었다.
“전에 성 밖에 개간할 만한 땅이 있다고 했는데 그곳이 어디냐.”
조심태는 성 밖 서북지방을 가리키면서 자세하게 설명했다. 왕은 이곳에 내탕전으로 곧 건설될 만석거의 저수지와 대유둔의 농장 후보지를 알고 싶었던 것이다. 실제로 만석거는 3월 1일부터 공사가 시작되어 5월 18일에 완성되었는데 둘레가 1,022보에 달했다. 만석거 축조로 이 일대는 흉년을 모르는 비옥한 옥토로 변하였다. 만석거를 이용한 대유둔의 농장은 이해 11월에 완성되었다.
이날 신시(오후 3~5)에 왕은 득중정에서 활쏘기를 하였다. 정조는 무예도 뛰어났지만 그에게 활쏘기는 단순한 무예는 아니었다. 그것은 정신을 집중시키는 수양 방법이기도 했다. 활쏘기는 유엽전, 소포, 장혁 등 세 종류의 화살을 가지고 했다.
활쏘기가 끝나자 왕은 조심태에게 물었다.
“성조 뒤에는 매화를 터뜨리는 것이 순서인데 지금 비가 올 것 같다. 그래도 할 수 있느냐”
“약성의 맹렬함이 맑은 날 같지는 않겠지만 적은 비는 땅을 적시지 못하므로 기구들을 이미 갖추어 놓았습니다.”
라고 조심태가 대답했다.
왕이 차례대로 하자고 말하자 조심태가 규정대로 거행하였다. 득중정에서 매화포가 터지는 장면은 지금 남아 있는 능행도 병풍그림에도 보인다.
득중정 활쏘기를 끝으로 화성에서의 행사는 모두 끝났다. 이제 이 밤이 지나면 다음날 아침은 귀경길에 오르게 된다. 이번 행차에서 왕은 참으로 많은 일을 하였고 많은 모습을 신하와 백성들에게 보여 주었다.
2.7 일곱째 날, 윤2월 15일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내려올 때 여정과 같다. 행차는 미륵현(지지대고개)에 도착했다. 당시 이 고개는 꽤 높은 고개였다. 이 고개를 넘으면 화성이 보이지 않는다. 왕은 여기서 신하에게 명령을 했다.
“미륵고개에 오면 떠나기 싫어 거둥을 멈추고 한참동안 남쪽을 바라보게 된다. 고개 위를 보니 둥글게 생긴 돌 자리가 있다 그 자리를 ‘지지(遲遲)’라고 이름 지으라. 그리고 앞으로는 미륵현 밑에 지지대라는 새 글자를 넣어 표석을 세우라”
그래서 이때부터 이 고개를 지지대고개로 부르게 된 것이다.
점심 무렵 사근평 행궁에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고 행차는 다시 안양을 지나 시흥행궁에 도착했다. 왕은 먼저 행궁에 도착해 시설을 점검한 뒤에 혜경궁을 내차로 맞이하고 저녁을 올렸다.
2.8 여덟째 날, 윤2월 16일
왕은 궁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백성들을 직접 만나 민생의 질고를 듣고 싶었다.
“지방관은 자기 경내의 부로와 민인들을 데리고 연로의 넓은 곳으로 나와 대기하고 있으라.”
왕은 민인들의 여론을 직접들을 기회를 갖기 위함이었다.
용양봉저정에서 점심을 올렸다.
왕은 한강의 배다리를 관리한 주교도청 이홍운을 불러 혜경궁이 하사한 금단 1필을 사급하고 배다리를 건설한 사격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상을 내렸다. 또한 노량별장에게도 음식을 하사 했다.
“8일간의 행행으로 노동이 많았다. 자궁의 체도가 일향으로 강녕하시니 지금 돌아오면서 기쁨을 가눌 수 없다”
라고 정조는 여러 신하들에게 교를 내렸다.
“배들을 지금 내려 보내면 삼남의 조운을 다시 할 수 있겠는가?”
“내일 다리를 철파하고 배들을 내려 보내 선인들이 늦지 않게 하라”
배다리는 왕의 명령대로 다음날, 즉 윤2월 17일에 해체되었다. 다리를 놓은 지 23일 만이다.
왕은 다시 말을 타고 한강의 배다리를 건너 한양으로 입성했다.
8일간의 장엄한 화성행차가 드디어 막을 내렸다.
첫댓글 선생님의 이번 수업에 대한 공부 덕분에 저 또한 값진 수업이었습니다. 고맙습니다~
기록한 사람만이 안다는 전설이~~~^^
곁에 있으면서 많이 배웁니다. 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