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중일기 7
섣달 달력이 절반쯤 지나는 십이월 중순 금요일이었다. 전자우편이나 전화로 가끔 안부를 나누는 친구를 만나러 먼 길을 나섰다. 친구의 생활근거지는 울산인데 주말이면 경주 산내면 골짝에서 텃밭을 가꾼다. 그가 가꾸는 작물은 약초와 푸성귀들로 수익을 보기 위함이 아닌 취미활동이다. 도시에서만 살아온 친구는 농사 경험이 적긴 하지만 마음을 단단히 먹고 내공을 쌓고 있다.
이맘때 친구 텃밭의 푸성귀 수확은 끝내고 더덕이나 곰취는 잎맥이 시들었지 싶다. 친구로부터 알고 지내는 후배와 셋이 하룻밤 함께 보내며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자는 제안이 왔더랬다. 후배는 함안 칠원에 살면서 낙동강 건너 창녕 남지의 어느 초등학교에 근무한다. 후배는 평소 이런저런 모임에 엮여 바삐 살면서 자신의 블로그에 생활 속에 남긴 글들을 자 차곡차곡 채워간다.
친구가 나를 만난다는 구실로 후배를 함께 부른 데는 나름의 사연이 있다. 인터넷 서핑에서 내가 남긴 글의 궤적을 따라가니 후배 블로그에 고스란히 올라져 있더란다. 이후 친구는 방명록에다 서로 떨어져 지내지만 해가 바뀌기 전 자신의 텃밭 누옥에서 자리를 한 번 갖자고 했단다. 그리하여 중간에 내가 나서서 날짜를 잡았다. 후배는 근무를 마치고 나를 데리러 창원까지 와주었다.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금요일 오후 후배가 운전해온 차량에 동승했다. 나는 동반석에 앉아 그간 서로 밀린 안부를 나누면서 밀양 얼음골로 향했다. 동지가 가까워진 무렵이라 산골은 빨리 어두워지고 어둠 속 안개가 자욱해 조심스레 운전해 갔다. 석남사에서 고개를 넘어 산내면소재지까지 길고 긴 골짝을 내려갔다. 친구 텃밭은 건천으로 넘어가는 당고개 부근 감산마을 꼭뒤다.
고개를 넘어 범곡천을 따라 내려가는 찻길은 운무가 자욱했다. 어지간한 겨울날엔 눈이 내리는 골짝인데 안개비라 비가 내려 다행이었다. 친구 텃밭은 가지산과 운문산의 산세가 뻗친 단석산 근처다. 눈이라도 내리면 쉬 녹지 않아 교통이 두절되는 두메다. 내가 자주 들리고 싶어도 대중교통이 불편해 그러질 못할 입장이다. 그런 가운데도 한 해 몇 차례 텃밭을 찾아 일손을 도왔다.
친구는 텃밭 주택에 먼저 닿아 우리를 맞아주었다. 나는 후배와 드물게 교류가 있다만 친구는 그렇지 않아 초면이나 마찬가지였다. 친구는 곳간 바깥에서 숯불을 피워 석쇠에다 창고 바닥에 화덕을 놓고 염소고기를 구워냈다. 술은 근동에서 알려진 건천막걸리였다. 우리 셋은 삼십년 전 진주 신안동에서 보낸 청년기로 돌아간 타임머신을 탔더랬다. 생갈치와 양미리 구이도 맛보았다.
밤이 이슥해져갈 무렵 거실로 자리를 옮겼다. 친구는 우리를 융숭하게 대접해주었다. 심야에 속을 푸는 안주로 오리탕을 끓여내었다. 청정지역에서 가꾸어 냉동시킨 풋고추를 다져 넣은 맛깔스런 안주였다. 술은 일편단심 건천막걸리였다. 후배는 먼저 잠들고 친구와 나는 날짜변경선을 한참 넘겨 축시를 지날 무렵 잠들었다. 우린 산골 새벽녘 안개가 자욱하게 번질 때 잠에서 깨었다.
나는 바깥으로 나가 산골짝의 정취를 감상하고 곳간에 어지럽혀진 물건을 치우고 바닥을 청소했다. 지나간 주말 친구의 근무학교 직원들을 맞으면서 못다 씻어둔 솥단지까지 씻어 두었다. 친구는 보일러실의 수도를 수리하고 후배는 주방 설거지를 했다. 아침식사는 간밤 먹다 남은 오리탕과 햇반을 데우니 훌륭한 상차림이었다. 친구가 손수 가꾼 건고추와 배추로 담근 김치를 맛보았다.
아침 식후 텃밭으로 가서 날씨가 추워 성장이 멈춘 배추를 뽑았다. 나와 후배가 한 자루씩 가지고 친구 모친 몫으로 하나 더 담았다. 친구는 창고 곁 바닥을 시멘트로 깔았다. 방청소를 끝내고 나온 후배는 친구 일손을 도왔다. 예닐곱 포대 시멘트를 물과 섞어 깔고 진입로 입구 윗마을에서 흘러온 쓰레기를 담아 치웠다. 친구는 우리가 떠나올 때 여름에 뽑아둔 매실 효소를 챙겨주었다. 12.1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