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 다시 계몽>
- 스티븐 핑커 (사이언스북스, 2021)
- 이 책의 3부에서 계몽주의 사상을 옹호하고자 함. 1부에서는 그 개념들을 개관했고, 2부에서는 그 유효성을 입증했다. 이제 3부에서는 의외의 적들에게서 그 개념을 보호하고자 한다.
- 나는 계몽주의의 이념들이 대중 사이에 더 깊이 뿌리 내리기를 바라지만, 대중 설득, 대중 동원, 혹은 바이러스성 meme 같은 어두운 술책을 부릴 줄 모른다. 다음의 내용도 논증에 신경을 쓰는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이러한 논증은 중요할 수 있다. 실용적인 사람과 광기에 사로잡힌 권력자들은 사상의 세계로부터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21장 이성
- 이성을 부정하는 것은 비이성적이다. 그럼에도 비합리주의자들은 늘 머리보다는 가슴을, 대뇌피질보다는 변연계를, 사유보다는 육감을 선호해 왔다. 계몽주의에 반하는 낭만주의 운동가 헤르더의 공언은 그 정신을 잘 표현한다. “나는 생각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존재하고 느끼고 살기 위해 존재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신념, 즉 합리적인 이유가 부족한데도 어떤 것을 믿는 마음을 존중한다. (왜 일까? 전체보다 큰 부분에 대한 선호의 이유는? 개체의 무모함으로 나타나는 이것은 공동체에게 의미, 가치의 기원일까? )
- 인지 심리학 분야의 연구자들마저도 인간은 이성적 행위자라는 계몽주의의 믿음은 논박되었고, 그럼으로써 자신이 이성 그 자체의 확실성을 무너뜨렸다고 주장하고는 한다.
- 하지만 이 모든 입장에는 치명적인 결합이 있다. 그 자신을 반박한다는 점인데, 바로 그런 입장을 믿을 합리적 근거가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부인하는 것이다. 변호라는 행위 자체가 상대를 설득하는 행위로, 양쪽 다 인정하는 합리적 기준에 따라 듣는 사람도 그 주장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
- 카너먼의 <생각에 관한 생각>에 나오듯이 인간은 여러 인지적 결합이 있지만, 이런 결함들을 보고서 인간은 이성적 행위자라는 계몽주의의 교의를 반박하거나, 합리적 설득은 포기하고 선동에는 선동으로 맞서는 게 차라리 낫다는 숙명론적인 결론을 승인하면 안 된다.
- 어떤 계몽사상가도 인간이 시종일관 이성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았다. 그들이 주장한 것은, 우리가 이성적이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를 매혹하는 오류와 도그마를 억제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우리는 개인적으로가 아니라 집합적으로 이성적일 수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표현의 자유, 논리적 분석, 경험적 검증 같은 것을 격려하는 제도와 규범을 시행하고 지지해야 한다.
- 사람들은 자신의 믿음을 객관적 평가가 아닌 충성의 서약으로 사용하는 경향은 어떤 면에서는 합리적이라고 케이헌은 지적한다.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사람들은 자신이 기후변화나 진화에 대해 어떤 견해를 갖고 있든 이 세계에 털끝만큼도 영향을 미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관련 발언을 하는 것은 그가 속한 소속 집단 내 평판에 관해서는 엄청나게 큰 역할을 한다.
이런 이해관계를 감안할 때 과학과 팩트체크를 통해 검증되지 않은 믿음을 승인하고 주장하는 것은 결국 그리 비합리적이지 않으며, 적어도 당사자에게 미치는 즉자적 영향을 기준으로 삼을 때는 더욱 아니다. 하지만 지구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기준으로 삼으면 문제는 달라진다. 대기는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신경 쓰지 않으며, 실제로 섭씨 4도만큼 더워진다면 수십억 인구가 고통을 겪을 것이다.
- 우리는 ‘믿음 공유지의 비극’이라는 연극에 참여하는 배우들이다. 모든 개인이 각자 믿기에는 합리적인 것(자신의 평판을 지킨다는 측면에서)이, 사회 전체적으로 비합리적인 것(현실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는 측면에서)일 수 있는 것이다.
- ‘표현적 합리성’ 혹은 ‘정체성 보호 인지’ 뒤에 깔린 이 비틀린 동기가 21세기의 부조리를 설명해 준다. 우리는 인간의 비합리성을 두고 우리의 도마뱀의 뇌를 탓해선 안 된다. 자신이 믿는 정치 성향에 가장 크게 휘둘린 응답자는 지성 있는 사람들이었다.
다른 잡지들은 이 결과를 이렇게 요약했다. “과학적 발견: 정치 성향이 우리의 수학 능력을 망가뜨린다.”, “정치는 어떻게 우리를 멍청하게 만드는가.”
- 인류가 진보해 온 사실들 앞에서 주요 이데올로기들이 힘없이 좌초한다고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데올로기들은 다 200세가 넘었고, 인간이 치명적 결함을 가진 존재인지 무한한 순응성을 가진 존재인지, 사회가 유기적 전체인지 개인들의 집합인지와 같은 순진한 전망에 기초하고 있다.
현실 사회는 주어진 규칙들 아래에서 일어날 일을 단순하게 설명하는 어떤 이야기하고도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더 합리적으로 정치에 접근하는 방법은 사회를 계속되는 실험으로 취급하고, 정치 스펙트럼의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최선의 방법이라면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이다.
현재의 경험적 이해로는, 인간의 번영은 자유 민주주의 위에 시민적 규범, 인권 보장, 자유 시장, 사회 복지, 신중한 규제를 결합한 체제에서 가장 아름답게 꽃을 피운다.
이성이 우리에게 일러 주는 가르침은, 우리가 정치 토론을 할 때 통치를 익스트림 스포츠의 경쟁이 아니라 과학적 실험에 더 가까운 것으로 취급한다면 가장 유익한 결과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 예측의 실적은 정치 이데올로기를 포함한 지식 체계를 평가할 때에도 반영되어야 한다. 이념적 차이가 가치관의 대립에서 발생하는 경우에는 화해가 불가능하지만, 많은 차이들이 동일한 목표로 가는 수단의 차이에서 발생하고, 그래서 우리는 그 차이와 갈등을 조정할 수 있다. 어떤 정책을 채택해야, 지속적인 평화나 경제 성장처럼 모두가 원하는 일이 실제로 일어날까? 어떤 정책이 가난, 폭력 범죄, 문맹을 줄여 줄까? 합리적인 사회라면 이념 주의에 파리 떼처럼 달라붙은 고집쟁이 이데올로기들이 모든 답을 알고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세계를 향해 물음표를 던지고 실제로 거둔 실적을 살핌으로써 그 답을 찾을 것이다.
- 테틀록의 실험에서 슈퍼 예보자들의 특성. 인구의 상위 1/5. 경험에 대한 개방성(지적 호기심, 다양성 선호), 인지적 욕구(지적 활동에서 쾌감을 느낌), 통합적 복합성(불확실성을 이해하고 여러 측면에서 봄)이라는 성격 특성을 갖고 있다. 그들은 충동적이지 않고, 즉각적인 육감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들은 좌파도 우파도 아니다. 자신의 믿음을 지켜야할 보물이 아니라 검증되어야 할 가설로 여기는, 적극적인 열린 마음.
- 사람들은 지금까지 표명해온 입장과 모순되는 정보를 처음 마주할 때 원래의 입장에 훨씬 더 집착하게 된다. 이것은 정체성 보호 인지, 동기 기반 추론, 인지 부조화 감소 이론으로 쉽게 예상할 수 있는 현상이다. 믿음을 지닌 사람들은 정체성이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 더 완고해지고, 도전에 응수하고자 더 많은 탄약을 그러모은다. 하지만 우리 마음의 다른 부분은 개인과 실재를 계속 접촉시키기 때문에, 반증이 쌓이는 만큼 부조화가 증가하고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균형을 잃고 생각이 바뀌는데, 이 현상을 정서적 전환점이라고 부른다. 그 전환점은 견해를 포기하면 당사자의 평판이 얼마나 떨어질지와, 반증이 일반 상식처럼 뻔하고 공공연한지의 균형에 달려 있다.
- 공공 담론을 더 이성적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이슈들을 가능한 한 탈정치화해야 한다. 실험들로 입증된 바에 따르면 사람들은 가령 복지 개혁 같은 새로운 정책에 대해 들을 때 자기가 지지하는 당이 제안하면 그 정책을 좋아하고 반대하는 당이 제안하면 싫어하면서도, 내내 자기는 객관적인 장단점에 반응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몇몇 기후 운동가는 앨 고어가 <불편한 진실>을 쓰고 영화에 출연한 것이 환경 운동에 득보다는 독이 되었다고 한탄한다. 기후 변화에 좌파 낙인이 찍혔다는 이유에서이다.
22장 과학
- 과학적 합의에 대한 정치권의 경멸은 곧 무지를 광대역으로 확대하는 일이 되고는 한다.
- 과학이 이성의 다른 행사와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할 수 있다는 이념. 우리가 가진 세계에 대한 개념이 정확한지 아닌지는 세계로부터 들어야 한다는 것.
- 과학적 사실이 자체적으로 가치를 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 가능성에는 참여한다. 과학적 사실들은 교회의 권위에서 사실적인 문제에 대한 신빙성을 제거해서, 도덕적 문제에 대한 확신에 찬 주장에 의문을 제기한다. 같은 이유로 과학은 신비한 힘, 영적 탐구, 운명, 변증법, 메시아 시대에 토대를 둔 도덕 체계나 정치 체계를 약화시킨다.
과학은 우리의 물질적, 도덕적, 지적 삶 속에 점점 더 깊이, 그리고 유익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지만, 우리의 많은 문화적 제도는 과학에 대해 속물적인 무관심을 조장하고 이 무관심은 종종 경멸로 발전한다.
- 과학 악마화 캠페인. 인종 차별, 노예제, 정복 전쟁, 대량 학살 등 인류의 문명과 궤를 같이해 온 범죄들을 과학 탓이라고 비난. 이것은 영향력 있는 유사 마르크스주의 운동인 프랑크푸르트 학파가 주창한 비판 이론의 주요 주제였다. 이 학파의 창시자 아도르노와 호르크하이머는 “완전히 계몽된 지구는 재난을 당당하게 발산하고 있다.”라고 선언. 미셸 푸코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이론가도, 홀로코스트는 계몽주의와 함께 시작된 “생명 정치”의 불가피한 절정이었고, 그 기간에 과학과 합리적 통치가 사람들의 삶에 미치는 권력이 점점 강해졌다는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도 홀로코스트의 원인을 “사회를 개조하고, 사회를 전체적이고, 과학적으로 고안한 청사진에 억지로 맞추고자 하는” 계몽주의의 이념에서 찾았다. 이 뒤틀린 이야기에서 나치는 처벌을 면한다.(cf. 알래 바디우 <철학을 위한 선언>, <윤리학>)
계몽주의에 광적으로 반대한 나치 이데올로기도 화살을 피한다. 나치 이데올로기는 이성과 진보를 숭배한 타락한 자유주의 부르주아를 멸시하고, 인종 간 투쟁을 부추기는 유기체적이고 비이성적인 활력 개념을 채택했다. 비판 이론과 포스트모더니즘은 정량화와 체계적인 연대학 같은 과학적 방법을 피해 갔는데, 이 사실들을 통해서도 우리는 두 이론이 역사를 퇴보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량 학살과 독재 정치는 전근대에 전 세계에 만연했으나,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과학과 자유주의적 계몽주의 가치들이 점점 더 영향력을 갖게 됨에 따라, 증가가 아닌 감소 추세를 보이고 있다.
- 19세기에 서양을 물들인 지적 인종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역사, 철학, 고전학, 신화학)의 창작물이었다. 1853년 소설가 겸 아마추어 역사가인 아르튀르 드 고비노는 백인의 한 종인 아리안 족이 고대의 고향에서 흘러나와 유라시아 전역에 영웅적인 전사문명을 퍼뜨렸다고 주장. 아리안 족이 열등한 피정복민과 이종 교배를 할 때부터 모든 것이 타락하기 시작했는데, 그들의 위대함은 희석되고 강인했던 문화는 낭만주의자들이 항상 비판했던 나약하고, 퇴폐적이고, 영혼이 없고, 부르주아적이고, 상업적인 문화로 타락했다. 이 동화같은 이야기에 독일 낭만적 민족주의와 반유태주의를 결합하기는 식은 죽 먹기였다. 튜턴 족은 아리안 족의 후손이었고, 유태인은 아시아계의 잡종이었다. 고비노의 생각에 바그너가 열광했고, 바그너의 사위인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이 열광했다. 그들에게서 이 생각을 물려받은 히틀러는 체임벌린을 “영적 아버지”라고 불렀다.
이 영향의 사슬에서 과학은 거의 어떤 역할도 하지 않았다, 실제로 고비노, 체임벌린, 히틀러는 다윈의 진화론, 특히 원숭이로부터 모든 인간이 점차 진화했다는 개념을 거부했다. 그들의 낭만적 인종주의와도 맞지 않고 그 인종 이론을 낳은 오래된 설화와 종교적 개념과도 맞지 않아서였다.
반면 다윈의 주장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공통 조상을 가진 단일 종의 가까운 친척이고, 모든 민족은 원래 ‘야만인’이었으며, 모든 인종은 정신 능력은 사실상 똑같고, 인종이 서로 섞여도 이종 교배로 인해 아무런 해도 발생하지 않는다.
- (사회 다윈주의, 우생학... 고찰) 내가 이 운동에서 과학의 역할이 제한되어 있었음을 언급한 이유는 그 운동들이 반과학의 선전 도구로서 현재 하는 역할보다는 더 깊은 맥락을 고려한 차원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다윈에 대한 오해가 그 운동들에 활기를 불어넣기는 했지만, 실질적인 분출구는 그 시대의 종교적, 예술적, 지적, 정치적 믿음(낭만주의, 문화적 비관주의, 변증법적 투쟁이나 역사의 신비주의적 전개로서의 진보, 권위주의적 하이 모더니즘)이었다.
- 인문학의 위기를 진단할 때면 우리 사회의 반지성적 경향과 대학의 상업화가 가장 먼저 감지된다. 그러나 정직하게 평가하자면 인문학이 자초한 측면도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인문학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재해, 즉 반항적인 난해주의, 스스로를 논박하는 상대주의, 숨막힐 거 같은 정치적 올바름에서 아직 다 회복하지 못했다. 게다가 니체, 하이데거, 푸코, 라캉, 데리다, 비판 이론가들처럼 기라성 같은 사상가들이 까탈스러운 문화 비관주의를 큰소리로 외치면서, 근대성을 가증스럽고, 모든 진술은 역설적이고, 예술 작품은 억압의 도구이고, 자유 민주주의는 파시즘과 똑같으며, 서양 문명은 빈사 상태라고 선언한다.
- 세계를 그렇게 ‘유쾌한’ 눈으로 보고 있으니, 인문학이 종종 자신의 사업을 위해 진보적인 의제를 정의하는 데 애를 먹는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나는 몇몇 대학 총장과 사무처장에게서 이런 한탄을 들었다. 과학자가 그들의 사무실에 들어올 때는 어떤 흥미롭고 새로운 연구 기회를 알리고 거기에 필요한 재원을 요구하는데, 인문학자가 들를 때에는 항상 해 왔던 방식을 존중해 달라고 간청하기 위해서라고.
- 과학과의 융합을 인문학은 새로운 통찰의 가능성을 풍부하게 획득할 수 있다. 예술, 문화, 사회는 인간의 뇌에서 나온 것들이다. 그것들은 우리의 지각, 사고, 감정의 능력에서 비롯되며, 한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로 영향이 전파되는 동역학을 통해 쌓이고 퍼져 나간다. 그 연결점들을 이해하고 싶어 하면 안 되는가?
- 토머스 페인(1737-1809) : (1782) 과학은 한 국가의 당원이 아니라 모두에게 자애로운 후원자이며, 사람들과 만나는 모든 곳에서 신전을 자유롭게 개방한다. 얼어붙은 땅을 비추는 태양처럼 그녀는 더 높은 교양과 향상을 이룰 수 있도록 오래전부터 인간의 마음을 준비시켜 왔다. 한 나라의 철학자는 다른 나라의 철학자를 적으로 보지 않으며, 과학의 신전에 터를 잡고 앉아서 옆에 앉을 사람 누구 없느냐고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