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대가 ‘프랑수아 쿠프랭’
프랑수아 쿠프랭(Francois Couperin).(wikimedia)
17세기에 활동했던 비올 주자 콜롱브와 마랭 마레의 삶을 그린 영화 ‘세상의 모든 아침’에는 아주 아름다운 음악이 나온다.아내를 잃은 콜롱브가 성당에서 의식을 치른 후 아내의 환영과 함께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에 나오는 ‘르송 드 테네브르’이다.
적들이 뻗은 손이 예루살렘의 모든 보물에 닿았습니다.
당신께서 말씀하신 자들이 성소에까지 쳐들어가는 것을 봅니다.
당신께서 명하셨던 대로 공동체에 들이지 못할 사람들이었습니다.
온 백성이 탄식하며 빵을 찾고 모든 귀중한 보물을 먹을 것으로 바꿔 기운을 차리려 합니다.
보소서, 주님, 살펴보소서. 제가 멸시만 당합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을 슬퍼하는 예레미아의 비가를 담은 이 노래의 작곡가는 프랑수아 쿠프랭이다. 장 필립 라모와 함께 프랑스 클라브생 음악의 대가로 불리는 프랑수아 쿠프랭은 1668년, 프랑스 파리에서 태어났다. 그를 배출한 쿠프랭 가문은 17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파리에서 크게 이름을 떨친 유명한 음악가문이었다. 그가 태어났을 당시 그의 아버지는 쿠프랭 가문의 대를 이어 생 제르베 성당의 오르가니스트로 활동하고 있었다. 쿠프랭은 큰아버지와 같은 이름을 썼는데, 두 사람을 구분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를 ‘대(大) 쿠프랭’이라고 불렀다.
쿠프랭의 나이 10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 쿠프랭 가의 오랜 전통에 따라 아들이 그 자리를 물려받게 되어 있다. 하지만 당시 쿠프랭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가 18살 성인이 될 때까지 랄랑드라는 오르가니스트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공식적으로는 18살 때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받았지만 워낙 재능이 뛰어나 그 전에도 비공식적으로 랄랑드를 대신에 오르간을 연주하곤 했다.
22살 때인 1690년, 쿠프랭은 ‘2개의 미사에 의한 오르간 곡집’을 발표했다. 평소부터 쿠프랭의 음악적 재능을 높이 평가했던 랄랑드는 이 작품집을 ‘사람들에게 권할 만한 가치가 충분한 곡’이라고 평가했다. 1693년, 왕실 교회 오르가니스트인 토믈랭이 세상을 떠나자 루이 14세는 후임을 결정하기 위한 경연대회를 열었다. 쿠프랭은 여기에 참가해 최종적으로 베르사이유 궁전 교회에서 일할 네 명의 오르가니스트 중 한 명에 뽑혔다. 오르가니스트가 모두 4명이었기 때문에 쿠프랭은 일년 중 3개월만 오르간을 연주했다.
오르간 주자로 일하던 1700년, 쿠프랭은 베르사이유 궁의 클라브생 주자로도 취임했다. 이때부터 그는 파리와 베르사이유를 오가며 바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황태자인 부르고뉴 공작의 클라브생 교사로 왕가의 아이들에게 클라브생을 가르쳤으며, 루이 15세의 젊은 약혼녀에게 음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이런 과중한 업무 때문에 쿠프랭에게는 성악곡이나 실내악, 오르간곡을 작곡할 시간이 없었다. 1690년에 처음 오르간 곡집을 펴낸 후 다시는 오르간 곡집을 내지 못했다. 대신에 그는 이탈리아 소나타와 칸타타를 들여와 사적인 연주회에서 소개하는 일에 정열을 쏟았다. 카리시미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양식에 대한 쿠프랭의 관심은 그의 세속성악곡 특히 모테트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그 후 쿠프랭은 음악적으로 최그의 경지에 도달한 클라브생 곡들을 계속해서 작곡했다. 그리고 그것을 모아 1713년 제1집을 시작으로 1717년, 1722년, 1730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클라브생 곡집’을 펴냈다. 쿠프랭은 230여곡에 달하는 방대한 양의 클라브생 곡들을 27개의 모음곡으로 정리하고, 여기에 ‘순서’ 혹은 ‘서열’을 의미하는 프랑스어 ‘오르드르(Ordre)’라는 이름을 붙였다. 하지만 심혈을 기울여 작곡한 그의 클라브생 곡들은 올바른 방식으로 연주되지 않았다. 이에 쿠프랭은 연주법에 대한 책을 써야겠다고 결심하고 1716년, ‘클라브생 연주법’을 써서 건반악기 연주법의 표준을 제시했다.
섬세한 울림과 우아한 꾸밈음으로 장식된 쿠프랭의 유려한 클라브생 멜로디는 이른바 로코코풍의 세련된 감각을 지니는 동시에 내면에 심오한 우수를 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의 클라브생 음악은 감정을 절제하려는 작곡가의 고상한 취향을 보여주며, 이렇게 이성과 감정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려는 쿠프랭의 고전주의적 이상은 바흐나 헨델 같은 거장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쿠프랭의 클라브생 곡에는 ‘틱 톡 쇽’ ‘키타이롱의 자명종’ ‘전쟁의 소음’ ‘신비한 방벽’ ‘배회하는 망령’ ‘편물 짜는 여자’ ‘선발된 뮈제트’ ‘전리품에 계속되는 노래’ ‘전쟁의 소음’ ‘자장가 또는 요람에의 향수’ ‘몽상가’와 같이 문학적 혹은 회화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제목들이 붙어 있다.
클라브생 모음곡 2번의 마지막 곡으로 실려 있는 ‘나비’는 허공을 날아다니는 나비의 날렵한 모습을 그린 일종의 묘사음악으로 대상의 모습을 생생하게 포착해 이를 음악으로 구현하는 작곡가의 교묘한 솜씨가 돋보인다. 한편 모음곡 14번의 첫 곡인 ‘사랑의 꾀꼬리’는 오른손과 왼손 선율 모두에 장식음이 붙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작곡가는 이 곡에 ‘천천히, 상냥하게, 그러나 절도있게’ 연주하라고 지시했다. 사랑에 빠진 꾀꼬리의 마음이 장식음을 가미한 느긋하고 여유있는 멜로디 속에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모음곡 17번의 2번 ‘작은 풍차’는 처음부터 끝까지 16분음표의 음형으로 일관하는 선율의 흐름에서 끊임없이 돌아가는 풍차의 모습이 연상되는 재미있는 곡이다.
쿠프랭은 폭발적이거나 엄청난 극적 효과를 추구하지 않았다. 통곡 속에서도 절제와 격조를 보여 주려고 노력했다. 쿠프랭은 “나는 마음을 움직이는 음악을 좋아하지 깜짝 놀라게 하는 음악은 좋아하지 않는다.”라고 얘기했다. 이 말처럼 그는 강렬하거나 무거운 음악은 자제했다. 오페라도 작곡하지 않았고, 관현악도 작곡하지 않았으며, 자신이 오르가니스트 임에도 불구하고 오르간 곡도 거의 작곡하지 않았다. 음악가로서 그의 천재성과 개성은 보다 작고 소박한 양식, 예를 들면 클라브생 독주곡이나 실내악, 그리고 독창이나 2성, 3성을 위한 성악곡에서 진가를 발휘하는데, 두 명의 소프라노를 위한 <르송 드 테네브르>는 그런 작품 중 하나이다.
‘어둠 속에서 듣는 가르침’이라는 뜻의 <르송 드 테네브르>는 부활절 전과 후 3일 동안 그리스도의 수난을 기리는 성주간 전례에서 연주되었다. 이 의식은 촛불을 하나 씩 꺼나가면서 진행되는데, <르송 드 테네브르>는 마지막에 불이 모두 꺼진 상태에서 불려진다. 바로크 시대 프랑스인들이 특히 사랑한 형식으로 순결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다. 각각의 곡은 3개의 가르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선지자가 불렀던 슬픈 노래를 가사로 하고 있다. 쿠프랭은 이 곡을 궁정이 아닌 수도원의 기도를 위한 음악으로 작곡했다. 곡을 작곡할 때 이전에 수도원의 수녀들을 위해 샤르팡티에가 작곡한 9개의 <르송 드 테네브르>의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쿠프랭의 실내악은 초기에 이탈리아 양식을 따랐지만, 루이 14세의 통치 말기에는 왕의 취향에 따라 프랑스 풍으로 바뀌었다. 1720년대 초반에 발표한 곡에서 비로소 이탈리아 양식과 프랑스 양식의 융합을 시도했다. 주요작품으로 <수도원을 위한 미사곡> 세속성악곡 <사랑의 노래> <어느 게으른 자의 묘비명> 종교성악곡 <5개의 베르세의 모테트> <성 아우구스티누스 날을 위한 모테트> 기악곡 <왕궁의 콩세르> <파르나소스 산 또는 코렐리 찬가> <트리오 소나타> <여러 사람들> 등이 있다. 쿠프랭은 방대한 양의 작품을 썼지만, 의외로 사생활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것이 없다. 평생 왕실을 위해 일했지만 높은 자리에 오르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는 마지막 클라브생 곡집을 펴낸 지 3년이 지난 1733년 파리에서 6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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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회숙은 서울시립교향악단 월간지 ‘SPO’ 편집장을 지냈다. 예술의 전당 문예아카데미와 서울시립교향악단
‘콘서트 미리 공부하기’ 등에서 클래식 강의를 하고 있다. 저서로 ‘클래식 오딧세이’ ‘영화와 클래식’ 등이 있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63XX189000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