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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2월 11일
말씀 : 행2:17-21
제목 : 성령을 통한 부흥
본문 말씀은 요엘2:28을 인용한 구절인데 여기서 베드로는 ‘그 후’를 ‘말세’라는 표현으로 대체했습니다. 유대인들의 말세란 엄밀히 말해서 메시야가 오시는 때를 가리키는데 오순절 성령강림과 관련하여 사용한 것을 볼 때 이 말은 그리스도의 초림에서 재림까지를 지칭하는 종말의 개념으로 이해해야 합니다. 즉 이제 성령은 지엽적인 것이 아니라 오순절을 기점으로 모든 사람이 누리며 그 은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본문은 오순절을 시작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을 통해 성령의 부으심이 나타나며, 이로 말미암아 열방이 부흥의 때를 맞이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즉 21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는 부흥의 때를 맞이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이 우리에게 가장 직접적으로 적용되는 것이 바로 부흥운동입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다시피 부흥운동의 기초는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한 성령의 역사가 이 땅에 임함으로써 엄청난 부흥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도 이런 부흥의 때를 맞이할 수 있기를 원하며 갈망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기초로 한 요한 웨슬리의 사역과 저술을 살펴보면 그의 부흥운동은 감리교의 활동뿐만 아니라 19세기 성결운동과 20세기 오순절운동 및 기독교 사회복지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웨일즈 부흥운동’은 영국 전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지역으로 확산된 강력한 성령운동이었습니다. 장대현교회를 중심으로 1907년에 일어난 이 땅의 부흥운동 역시 웨일즈 부흥운동의 자극을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 교회 초기 사역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다른 예로 피니 부흥운동과 에드워드 부흥운동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흥에 대한 에드워드와 피니의 견해는 180도 다릅니다. 그것은 중세와 현대 사상의 차이입니다. 에드워즈는 ‘부흥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고 기도해야 가능한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이고, 그 기초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있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피니는 부흥은 ‘인위적으로 일으킬 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피니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왜 부흥을 체험하지 못하는 줄 아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즉 당신이 부흥을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것을 위해 기도하지도 않고 갈망하지도 않으며, 그것을 위해 별 노력도 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맞는 말인 것 같지만 이것이 바로 인본주의적 근거 속에서 주장하는 부흥운동의 방법입니다.
피니는 하나님께 자신의 마음을 바치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앞으로 나와서 앞자리에 앉기를 호소했고, 은혜를 받기 위해 즉시 결단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부흥이 사람의 능력과 노력으로 된다는 뜻인데, 그의 몇 가지 주장을 살펴보면 쉽게 구별할 수 있습니다.
‘첫째, 인간은 복음을 듣고 스스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서 가능하다. 둘째, 이를 위해서는 어떤 행동을 해야 한다. 셋째, 만일 이것을 반대하면 복음주의적 설교를 파괴하는 것이다.’ 그런데 피니의 부흥운동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습니다.
역사가들은 피니의 낙관적 부흥운동은 원죄를 부인하는 ‘펠라기안주의’, 즉 ‘인간의 구원은 인간의 노력에 달렸다’고 주장하는 이단교리를 따랐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피니는 이 교리에 부흥의 근거를 두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가 인간의 원죄와 인간의 전적 부패를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부흥운동은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십자가와 부활의 관점에서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을 우리는 다시 한번 명심해야 합니다.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인위적으로 부흥을 가져오려는 움직임이 교회마다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총동원 같은 경우도 사람의 노력과 애씀을 강조하는 편입니다. 물론 노력하고, 찾고, 구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사람의 힘과 능력을 의지하고 나가는 것이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분의 능력을 사모하며 복음을 전하는 자세가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이유는 우리가 아무리 애쓰고 힘쓰고 노력해도 부흥이 안 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능력이 없어서 혹은 우리가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고 그 기초 위에 믿음을 세워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교회의 부흥은 우리를 사용하셔서 이루시는 일이지만, 그것은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사모하고 체험하며 전적인 거룩함과 신령함으로 나갈 때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영적 생활의 유일한 중심축으로 삼고 십자가가 성령의 일하심의 기초와 중심이 됨을 깨달을 때 부흥은 일어납니다.
부흥의 원리와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고 영적인 부흥이 무엇인지 정의 내리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영적 부흥은 단순히 하나님의 영이 인간의 영을 통해 흘러나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의 영은 성령을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기관입니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인간의 영 안에 내주하시며 인간의 영을 통해 역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십자가의 진리와 영적 생활의 법칙을 깨닫게 되면 부흥은 자연히 따라오게 됩니다.
그러면 먼저 영적 부흥의 방해 요소들에 대해 알아봅시다. ‘부흥의 때’를 시리즈로 설교하면서 이 부분에 대해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먼저 긍정적인 측면에서 보면 성도들이 하나님의 성령과 어떻게 동역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의 십자가의 진리를 어떻게 그들의 삶 가운데 적용하며, 어떻게 성령을 쫓아 행할 수 있는가를 실질적으로 배울 때 영적 부흥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측면은 성령의 흐름을 막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는 일입니다. 이 제거는 십자가를 의지하고 철저히 회개하며 성령의 충만을 적용할 때 이루어집니다.
영적 부흥의 방해 요소들을 살펴보면 첫째, 영적으로 겸손하지 못할 때, 둘째, 생활 속에서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여 성령의 역사를 가로막는 요소들을 방치할 때, 셋째, 사역에서 하나님의 진리를 말하거나 증거하지 않을 때입니다.
이런 방해 요소를 없애기 위해서는 세 가지가 필요합니다.
첫째, 영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고후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교만한 마음을 굴복시키고, 내게 범죄한 자들을 용서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빛을 조명받아 생활 가운데 옳고 그른 일들을 분별하며, 빛이 비치는 즉시 성령을 근심케 하는 일들을 처리해야 합니다.
셋째, 하나님께 전적으로 항복함으로 성령께서 주시는 말씀과 증거를 담대히 전해야 합니다.
더 나아가 위와 같은 방해 요소들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우리를 정결케 하는 보혈의 능력을 의지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동참함으로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적용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보혈과 십자가의 역사는 성령을 통해서만 증거되며 나타납니다.
그리고 영적 부흥에는 몇 가지 위험 요소도 존재합니다. 첫째, 주님 중심의 영적인 삶이 아닌 육신의 감정, 감각에 의한 행동이나 생활에서 나타나는 위험입니다.
둘째, 성령의 사역을 모방하는 악한 영들로부터 일어나는 위험입니다. 성도들이 육체적 관점에서 감각과 감정의 지배를 받을 때 발생하는 위험도 있습니다. 자기 생각과 자기 짐작으로 사역하면서 성령의 사역이라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는 보이지 않은 악령들의 세력에 의해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차원에서의 위험 요소들을 특별히 주의해야 합니다.
영적인 부분이라 이런 사례를 체험하거나 깨닫는 것이 제한적일 수 있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깨닫지 못할 뿐이지 많은 곳에서 이런 일들이 얼어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거짓 영들은 끊임없이 성령의 역사를 모방하는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탄은 적절한 기회만 주어지면 그 즉시 거짓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역사를 대체합니다. 미국의 한 신학교 학생이 학교 기도실에서 신학대학교의 부흥을 갈망하며 기도하고 있었는데 ‘네가 정말 학교의 부흥을 원한다면 학교 옥상에 올라가서 뛰어내려라’라는 속삭임을 듣고 3층 옥상에서 뛰어내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지만 꽤 오랫동안 고생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40일 금식하셨을 때 이와 유사한 사건이 나타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영적 충만을 사모하는 모임에서 종종 일어나지만, 말씀을 의지하고 분별하여 물리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건에 매몰되어 있을 때 우리는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웨일즈 부흥운동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순수한 성령의 바람이 일어나 영적 부흥이 최고조에 달했던 1905년에 악한 영들도 거짓된 성령의 역사로 부흥운동의 깊숙한 내부까지 침투해 왔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대부분의 무지한 영혼들이 이것을 분별하지 못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정하여 받아들였다는 사실입니다. 마귀의 거짓 역사를 겉으로 보면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분별할 수 없을 정도로 탈바꿈해서 성도들을 현혹했습니다. 병이 낫거나, 마음을 꿰뚫어 보거나, 과거를 정확하게 맞히는 것과 같은 외적 현상들이 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무당도 병을 낫게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더 크고 강한 귀신을 불러들여 약한 귀신을 쫓아내어 순간적으로 병을 낫게 함으로써 마귀에게 묶여 살도록 속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점쟁이들이 귀신의 소리를 듣고 과거를 맞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상황들을 성령의 역사로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뱀으로 만들었을 때 애굽 왕의 마술사들도 그것을 따라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뱀들이 모세의 뱀에게 다 잡아먹혔지만, 그들도 그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역을 왜곡되게 가르치면 교회는 변질되고 부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누가 가장 좋아할까요? 바로 사탄입니다.
특히 이렇게 변질된 가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나 성령을 잘못 가르치는 사람들은 성도들이 자신들에게 무조건 맹종하도록 만듭니다. 잘못된 교리를 받아들여 맹종한다면 그들은 이미 마귀에게 묶여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중에서도 성령을 통해 나타나는 은사를 오해하거나 비성경적으로 남용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말씀이 아닌 자기 주관이나 체험, 또는 외형적인 사탄의 유혹과 역사를 근거로 겉으로 드러나는 일들만 증거로 삼아 주장하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소위 말하는 은사주의, 감정주의, 방언주의, 신유주의, 기적주의, 체험주의, 계시주의, 기복주의, 신비주의 등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성경 외의 것을 계시로 받기(직통계시), 앞으로 일어날 일을 말로 예언하거나 환상으로 보기, 하나님의 뜻을 알아내기 위해 꿈을 해석하기 등이 있으며, 눈으로 사람의 마음을 보는 투시, 영적 세계로 들어가는 입신 등도 조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방언과 방언 통역 등을 조심해야 하는데 그 이유는 마귀도 방언을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이 몸에서 벗어나는 유체이탈과 같은 현상을 은사적 측면에서 해석합니다. 물론 이런 은사를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아닙니다. 특별한 사명이 있는 분에게 특별하게 나타는 경우도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대부분 이런 체험과 현상을 통해 마귀에게 속는 경우가 굉장히 많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강조하는 자들은 대부분 영적으로 잘못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잘못되었거나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향해 성령을 거스르는 자, 성령을 훼방하는 자, 성령을 모독하는 자라고 질타합니다.
성경말씀을 기초로 성령을 의지해서 영적으로 깊이 투시하면 성령을 악령으로 대체해 놓은 마귀의 궤계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탄은 처음부터 이상하게 행동하지 않습니다. 불순물을 조금씩 투입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쉽게 분별할 수 없도록 유도하고 결국은 혼돈하게 만들어 문제를 일으킵니다.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강한 능력을 행한다고 해서 성도들이 많이 모이는 신유 은사주의자가 한 분 계신데, 이분이 여자 문제로 거룩하지 못한 삶의 모습을 보인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더욱더 기도와 회개를 통한 거룩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그분의 말씀을 내 마음 판에 새기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근거로 나타난 성령을 사모해야 합니다. 그리고 계속 강조하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자녀들은 영적 분별력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영적 분별력을 가지면 부흥의 근원이신 하나님께 기인한 순수한 영이 거짓 영으로 바뀌는 것을 즉시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은 곧 다시 순수한 영적인 흐름으로 바꿀 수 있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무릎 꿇고 그분의 영광을 사모하며 은혜 가운데 마쳤다 하더라도 사탄이 바로 교회의 분위기를 망치는 일들이 나타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사탄의 역사임을 알고 겉으로 드러난 모든 일들을 영적으로 해석하고 기도함으로써 이겨나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할 때, 성령께서 임하실 때 우리는 하늘의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런 신령한 임재는 혼적이나 육적이 아닌 영적으로 체험하는 것입니다. 요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적인 체험 공간이라는 말입니다. 즉 육체만을 달래거나 심리적인 어려움을 해결하여 혼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는 예배가 아니라 신령과 진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영적인 공간에서의 만남입니다.
요즘 성도들도 영적으로 많이 속습니다. 부흥의 은혜가 조금이라도 임하면, 하나님을 높이며 경외하는 찬양과 예배가 살아있으면, 뜨겁게 회개하며 통회하는 운동이 일어나면, 악한 세력들이 반드시 찾아와서 우리를 유혹할 수 있다는 것을 먼저 아셔야 합니다. 마귀는 외적으로 거칠고 악한 모습으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현혹되기 쉽습니다. 사탄이 빛의 천사로 가장해서 나타난다는 바울의 말은 실질적으로 사탄이 빛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사탄의 정체는 어둠이지만 빛으로 가장하고 나타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성령을 조명해야 성령의 은혜를 올바로 구별할 수 있다는 점을 아시고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롭게 부흥의 때를 맞이하는 영명교회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