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이제 평양이다
한국군 응원한 미군
미군은 어찌 보면 우리와는 여러모로 다른 군대다. 적을 맞아 싸우는 점에서야 다를 바 없었지만, 사람들이 뭉쳐 이룬 집단으로서 드러내는 특징이 몇 개 있다. 정실(情實)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이 그 중의 하나다. 미군이라서 미군의 편을 들지만은 않는다는 얘기다. 평양을 향해 줄기차게 북진하던 그 무렵의 한 에피소드가 그랬다. 앞에서도 이야기한 대로 우리 국군 1사단의 북진 속도와 평양을 향해 함께 다른 하나의 주공(主攻) 길에 나섰던 미 1기병사단의 속도는 당시 미군 지휘부는 물론이고 일선 부대 사이에서도 큰 화제였다.
‘한국군과 미군 중 어느 주공 부대가 평양에 선착할까?’에 관한 호기심이자 관심이었다. 월튼 워커 장군이 이끄는 미 8군 사령부, 우리 국군 1사단이 배속해 평양 공격의 선두에 섰던 미 1군단이 우선 그랬다. 그들은 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이 펼치는 공격로 상공에 앞서 말한 대로 아주 작은 몸집의 모스키토 경비행기를 띄웠다. 상공에서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 중 어느 누가 선두를 유지하고 있는가에 관한 정황을 관측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의 공격 진척도는 그래서 시시각각으로 미 8군 사령부와 미 1군단 사령부에 알려진 상황이었다.
우리 1사단에도 윌리엄 헤닉 대령이 이끄는 미 10 고사포 여단이 지원을 위해 와있었다. 이들은 미군을 응원하지 않았다. 제가 임시로 배속해 있던 한국군 1사단의 열렬한 팬에 해당했다. 윌리엄 헤닉 대령은 내 곁에 늘 붙어 있다시피 하면서 온갖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을 몸소 겪은 야전의 군인답게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었다. 작전이 펼쳐지는 모든 상황에서 그는 제 경험을 내게 들려주면서 “반드시 평양에 먼저 닿아야 한다”고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보다 과감한 진격(進擊)을 위해 내가 미 1군단장 프랭크 밀번 장군에게 요청해 우리를 지원코자 현장에 와있던 6전차대대 C중대도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경험이 부족한 한국군 지원을 꺼렸으나 서로 호흡을 맞추기 시작하면서 그들 또한 우리 1사단의 열성적인 지원부대로 변하고 말았다. 그뿐이 아니었다. 선두 경쟁에서 우리 1사단의 속도가 더 붙어가던 무렵이었다. 이번에는 6전차대대의 대대장 존 그로든(John Growden) 중령이 나머지 모든 병력을 이끌고 우리 1사단을 직접 찾아왔다. 그는 대뜸 “우리도 한국군 1사단과 함께 싸우러 왔다”고 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상공에 떠다니던 경비행기 모스키토의 ‘생중계’ 때문이었다. 한국군 1사단과 미 1기병사단의 선두경쟁을 지켜보다가 한국군 1사단의 평양 선착 가능성이 보다 더 크다는 점을 눈여겨봤던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먼저 평양에 닿을 것으로 보이는 부대에 ‘줄’을 대고자 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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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 중 적진을 향해 수색작전을 벌이는 미군 전차 부대.
갑자기 나타난 미 전차대대장군공(軍功)에 관한 문제였다. 전쟁터에 나선 군인은 명예와 훈공(勳功)을 탐내기 마련이다. 평양에 먼저 도착할 부대 뒤에 섰다가 함께 목적지에 도달함으로써 ‘평양 첫 탈환’의 공적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놓고 싶었던 것이다.
내 입장에서야 더 바랄 나위가 없었다. 전차 자체가 없어 급히 미 1군단장 밀번 장군에게 요청해 ‘억지 춘향’ 식으로 전차 중대 1개를 지원받은 게 고작이었던 우리 1사단의 형편으로는 그야말로 감지덕지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1사단의 전차 대수는 급작스럽게 50대 수준에 이르렀다.
병력 1만 5000명, 군단이 보유했던 전차대대, 원래 대한민국 제2의 도시 부산을 방어했던 미 10 고사포여단이 떠받치고 있던 우리 1사단은 그야말로 아무것도 거칠 게 없는 듯한 강력한 기세로 평양을 향해 전진할 수 있었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이 있을 때 닥칠 수 있는 재앙에 대비하라는 교훈을 담은 말이다. 그로든 대대장의 합류로 힘을 얻은 우리 1사단의 앞길에 고비가 나타났다. 나는 여전히 1번 전차에 올라탄 채 선두를 이끌고 있었다. 황해도 시변리를 한참 지나서 북진하던 무렵이었다. 그때 길의 굽이가 보였다.
내가 올라탄 1번 전차는 기세 좋게 앞으로 향하면서 길의 굽이를 돌다가 급히 멈춰 서야 했다. 길의 커브가 끝나는 곳으로부터 북한군의 T-34 전차가 여러 대 줄을 지어 서 있었던 것이다. 서로를 처음 발견한 상태였다. 따라서 북한군 전차 부대원들도 우리처럼 깜짝 놀랐던 듯하다.
위기였다. 양쪽 모두 자칫 잘못 대처할 경우 상대의 전차에서 날아온 포탄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다. 나는 전투의 경험이 절체절명(絶體絶命)의 위기 속에서 왜 밤길을 밝히는 밝은 별처럼 빛을 발하는지 그때 지켜볼 수 있었다.
내가 타고 있던 1번 전차의 중대장은 나를 향해 “빨리 전차 밑으로 뛰어 내려가라”고 소리쳤다. 나는 그의 말대로 급히 전차 아래로 뛰어내렸다. 이어 길 밑에 몸을 숙인 뒤 다음에 벌어질 광경을 고스란히 지켜봤다. 미군은 역시 제2차 세계대전을 겪은 역전(歷戰)의 부대였다. 1번 전차에서 명령이 떨어지자 뒤를 따라오던 미군 전차는 모두 해치를 닫고 순간적으로 몸을 돌려 길 양쪽 옆으로 산개(散開)하기 시작했다. 전면에 있던 북한군 전차는 아직도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꿈쩍도 하지 않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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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군 전차가 포격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숨 막혔던 전차전북한군 전차는 약 10여 대 정도에 달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1번 전차를 비롯한 미군 선두 대열의 전차도 그 정도에 이르렀다. 그러나 길 양쪽 옆으로 산개한 미군의 전차가 훨씬 빨랐다. 미군 전차는 길 양쪽으로 산개하고 바로 사격을 시작했다. 한참 동안 미군 전차의 사격이 이어졌다. 북한군 전차의 대응은 거의 없었다. 길 양쪽의 미군 전차부대는 신속하게 교차 사격을 벌였다. 눈 깜짝할 새라고는 할 수 없었어도 매우 이른 시간에 양쪽 전차의 조우전(遭遇戰)은 쉽게 결말이 나고 말았다.
북한군 전차 모두는 곧 화염에 휩싸였다. 미군은 길 양쪽으로 급히 산개하면서도 적의 전차를 정확하게 사격하는 기술을 선보였다. 역시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노련함의 승리였다. 목숨을 건 전쟁터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 게 무엇일까. 나는 속으로 미군의 전투 경험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다음은 파죽지세(破竹之勢)였다. 잠시 우리 눈앞에 나타났다가 미군 전차부대에 의해 무너진 북한군 전차부대는 북한 수뇌부가 우리의 평양 진격을 마지막으로 막아보기 위해 서둘러 남진(南進)시킨 부대로 보였다. 그들의 최후 저지선을 돌파하고 나서는 거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1사단의 진군은 속도가 더 붙기 시작했다. 길에는 북한군 저항이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10월 14일에는 신계를 지났고, 사흘이 흐르고 드디어 평안남도 중화군 상원에 도착했다. 이제 평양이 곧 눈앞에 나타나는 지점이었다. 길이 갈라지는 곳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우선 멈췄다. 사단의 모든 연대가 지금까지는 함께 움직이는 방식으로 진격했다. 공로(攻路)를 세분화해야 하리라는 판단이 들었다. 평양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공격로를 펼치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15연대를 강동(江東) 방면으로 우회하도록 했다. 대동강 북쪽 모란봉 지역을 향해 진격하면 강의 수심(水深)이 낮아 쉽게 강을 건널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부대 전체를 어떻게 전개(展開)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이 깊어졌다. 평양은 적도(敵都), 따라서 무너지고 있었음에도 그곳의 반격(反擊)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까닭이다. 10월 18일 저녁 무렵에 우리는 평양 남쪽 15㎞ 지점인 지동리에 이르렀다. 작전회의를 소집했다. 공격 일선을 어떻게 전개할 것인가를 다시 논의하기 위해서였다. 11, 12연대장과 사단 참모, 미군 고문관, 미 10 고사포여단 헤닉 대령, 미군 전차부대 지휘관들이 길가의 민가(民家)로 모였다.
그러나 일선 작전 부대의 전개 방식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다. 전쟁터에 선 군인들은 대개 선두(先頭)에 서고자 한다. 특히 일정한 규모 이상의 부대를 이끄는 지휘관들의 경우가 그렇다. 누구를 선두로 세울 것인가-. 그 상위(上位)의 지휘관은 항상 그런 고민에 빠진다. 그때의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