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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들 아!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 오곡 백화가 만발하게 피었고
종달이 높이 떠 지저귀는 곳 / 이 늙은 흑인의 고향이로다.
내 상전 위하여 땀 흘려가며 / 그 누른 곡식을 거둬들였네.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보다 / 더 정다운 곳 세상에 없도다.
<Carry me back to old Virginny>
어느 시인의 말처럼 나 “어쩌다 여기까지” 와 버렸구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비명에 있는 말처럼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갈팡 질팡 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생각도 못하고, 이렇게 8 순을 넘겼구나.
진남이 형, 영수 형, 공수 형, 석천 형, 종훈, 희순, 기순, 왕순 아!
나, 장영(場永)이야. 지금 다 어디 가고 이렇게 보고 싶음 만 가슴을 울리느냐? 나는 지금 우리 어렸을 때
같이 불렀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노래를 들으며, 80년 전에 같이 놀던 고향을 그리며 너희들 모습을
그린다.
친구들 아! 우리 출성산, 용천산, 오성 산 주위가 온통 산으로 둘러 싸인 숯 골이라는 두메 산골에서 살았
었지. 80년이 지난 그 어릴 때 같이 살던 때가 왜 이렇게 그리우냐? 벌써 귀뚜라미 처량하게 울어대며 나
의 마음을 더욱 슬프게 하는 구나.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하며 고향으로 가 보아도 그리운 너희들 단 한
사람도 볼 수 없으니 지금까지 살고 있는 내가 잘못 한 거냐? 보고 싶다.
친구들 아! 우리 동네 그랬었지. 그 두메 산골에 30 여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사는 곳이었지. 마을 한가운
데에 공동 우물 하나 있었고, 문명의 이기라고 는 아무 것도 없이 집집마다 논 밭에서 모든 삶의 근원을
찾으며 살았었지. 특별히 부자인 집도 없이 거기에서 거기만큼 사는 순수한 우리 부모님들 아니었더냐.
순수하기 짝이 없는 부모님들이었다. 누구네 집에 일이 생기면 자기 집 일처럼 모두 한 마음이 되어 도와
주며 살았었어. 어쩌다 읍내만 나가려 해도 20 리는 걸어가야 했고 학교도 마을에서 오르기 시작하여 출
성 산을 넘어 십오 리는 가야 거기에 하나 있고,
우리가 30 살이 되어서 야 전기가 들어왔기에, 접시에 기름을 부어 불을 켜기에서 시작하여 등잔 불로 불
을 밝히며 살아오지 안 했느냐. 참으로 우리가 마음대로 태어날 수 있었다면 그런 곳에서 태어나고 싶지는
안 했을 거다. 그러나 그때 우리가 함께 살던 그때처럼 평화롭고 우애(友愛)가 넘치고 재미있게 살던 때가
어디에서 만날 수 있겠니. 모두가 그처럼 그립다.
그리운 삶 나는 생생히 기억한다. 우리 다시 그때로 추억 여행 한 번 해보자.
진남이 형이 우리 보다 네 다섯 살이 위였지. 그 뒤가 영수 형, 공수 형 이었고 나하고 왕 순이만 동갑으로
막내였고, 석천이 형, 종훈이, 희순이, 기순 이는 나보다 한 살 위였었구나. 그렇게 모두 합쳐야 8명이었네.
병정 놀이 생각이 난다. 자연히 진남이 형이 대장이었고 나머지는 진남이 형 지시대로 계급을 달고 놀았었
잖아. 그리고 자치기도 했고 재기 차기, 연 날리기, 팽이 돌리기, 썰매 타기, 숨바꼭질, 도랑 품어 물고기 잡
기, 겨울에는 토끼 몰이 잡기 등, 해가 지는 줄 모르고 놀이를 하다가, 부모님이 저녁 밥 먹으라고 소리 내어
부르면 겨우 들어갔던 생각이 앞선다. 조금만 더 하다가 부모님 목소리가 커져야 우리 집에 가면서 아쉬워
했을 만큼 재미있게 놀았었지. 아침이면 학교에 가면서 먼저 나온 사람이 소리 내어 부르면 보자기에 싼 책
둘러메고 고개 넘어 가다가, 학교 근처에 가면 줄을 서서 구령을 맞추어 가던 생각이 또렷하다. 등교는 그랬
지만 하교 때는 일부러 기다렸다가 만나서 함께 왔었지.
친구들 아, 우리 함께 오면서 무얼 했지? 배가 고프던 시절이라 아침에 가지고 가다 어느 나무 밑이나 바위
틈에 숨겨 뒀던 고구마 찾아 먹던 생각이 나지 않니? 그 뿐인가?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칡 뿌리 캐서 산골짜
기 흐르는 물에 씻어 먹었고 칡 넝쿨도 일미(一味)였었지. 산 딸기 따먹고 머루 다래 등은 열기가 바쁘게 따
먹기도 했고, 심지어 소나무 새 가지 꺾어 껍질 벗겨내서 훑어 먹기도 했잖아? 지금은 먹어라 해도 못 먹을
그 소나무 속 껍질, 그때는 왜 그렇게 맛있게 먹었을까? 다시 한 번 먹어 보고 싶구나. 배추 꽃이며 찔래 꽃
새 순이며 목화 송이 꽃도 먹었고, 아카시아 꽃은 그 향기 맛이 어떠했고, 잎 따기 게임도 즐겼고, 오디 맛은
천하 일미였는데 먹고 나면 입이 물들어 새까맣게 되어도 더 따 먹으며 좋아했구나. 앵두는 어땠어? 빨간
열매 한 줌 따서 한 입에 넣고 먹었고, 살구도 신지도 모르고 먹었었지.
감이 떨어지면 주어다 쌀 독에 묻어두었다가 물러지면 먹으면 떫은 맛을 덜고 먹었지. 누에가 자라 번데기
로 실을 뽑을 때는 번데기를 입에 가득 넣고 먹었고, 보리, 밀, 콩이 열매가 어느 정도 익었을 때 꺾어다 불
에 구워 먹으면 입가 주위에 생긴 시꺼먼 얼굴을 서로 쳐다보며 좋아 웃기도 했고, 특히 생 밀은 꺾어 씹다
보면 껌이 되었었지.
배가 고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먹었지만 뭐나 먹어도 맛이 있던 그 시절이 그렇게도 그립구나.
명절 때는 어땠니? 모처럼 입어보는 새 옷에 흥이 넘쳤고 세배를 하면 주시던 송편이며 음식을 얻어먹고
배를 두드리며 좋아했지. 마을 어른들 풍물을 들고 집집마다 돌며 부귀 안녕을 기원하는 놀이를 할 때는,
우리들 쓰고 남은 대나무 몽당 빗자루에 불을 붙여 들고 따라다니던 그 기분 말할 수 없이 즐거웠다.
용천 산 너머 남의 감이며 밤을 몰래 따다 먹다 주인에게 들켜 용천 산을 바람같이 날쌔게 도망치기도 할
때의 그 스릴은 또 얼마나 재미있었니?
여름이면 논두렁에 가만 가만 걷다가 올라와 있는 게를 잡았고, 더 잡으려면 우렁이를 잡아서 긴 풀줄기를
꺾어 거기에 꽂아 게 구멍에 넣으면 게가 따라 나올 때 잽싸게 잡았고, 벼를 베기 위해 논에 있는 물을 흘려
보낼 때 깨진 사금 파리를 모아 깔아 놓고 게가 물을 따라 흘러갈 때 잡기도 했었잖니? 개울에 가서 소쿠리
로 새우, 미꾸라지를 잡았고 특히 새우는 토삼(土蔘)이란 것을 먼 훗날 알았다. 보약이란 말이다. 더구나
우리 동네에 있던 저수지(방죽)는 또 어땠니? 물 반, 고기 반이었잖아? 낚싯대가 어디 있었어? 희순이네 대
밭에서 곧은 대나무 하나 꺾어 만들면 기가 막힌 낚싯대였었지. 몇 번 낚싯대 넣었다 거두면 용수에 가득
담긴 고기를 들고 와 어머님 드리면 얼마나 맛있는 민물 매운탕을 끓여주셨니?
논에 지천으로 살던 우렁이를 잡아 된장국에 넣어 끓이면 그 맛은 또 어땠고. 금강 옆에 자라는 갈 밭에서는
조그만 게를 잡아 젓을 담아 밥과 함께 먹으면 그 맛은 또 얼마나 맛있었니? 지금도 입가에 침이 흐르는구나.
수박, 참외가 자랄 때는 원두막에서 흐르는 달을 따라 조용하고 평화로운 동네에 태어난 기쁨을 맛보았고,
개구리 참외며 백 참외의 그 맛은 왜 그렇게 달았는지 모르겠구나. 지금 그처럼 단 참외를 먹어보지 못했어.
수박은 어땠니? 배를 가르면 붉은 살이 가득해서 한 입 삼키면 주르륵 단물이 흘러내렸지. 수박 서리 오는
사람 잡으려 서로 소리 내어 외치기도 했던 그 멋있는 고향 생각이 왜 이렇게 사무치게 그리운지 모르겠구나.
겨울이면 연 날리기도 했고 판자 몇 붙여서 썰매를 만들어 벼를 벤 논에 얼음이 얼면 썰매 타기는 얼마나 신
났더냐? 더 추워서 방죽이 얼면 손수 만든 스케이트를 타며 달리던 그 기쁨은 어떠며, 팽이 돌리기 게임은
더 없이 신 났었고, 눈 덮인 산에 올라 눈이 무릎을 덮어도 지푸라기 길게 꼰 새끼 줄로 망을 만들어 두 사람
이 맞잡고 그물을 치면, 나머지 우리들은 위에서 아래로 토끼를 몰아 잡던 그 재미에 취해 추운 줄도 모르고
살았구나. 동네에서 돼지라도 잡을 때면 기다렸다가 방광을 얻어 바람을 넣어 축구공 만들어 축구 시합도
했고, 주로 지푸라기 새끼 꼬아 둥글게 공을 만들어 차기도 했었지. 지금은 그렇게 버린 공이 많은데 그때는
그게 얼마나 멋있는 놀이 도구였더냐? 지금 생각하면 실소가 나지만 그런 놀이가 있었기에 참으로 생각나는
추억이다.
친구들 아! 다시 우리 한 번 모여 그때로 돌아갈 수 없겠니?
한 번은 차를 가지고 고향에 갔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고향이 나오지 않는 거야. 내 어릴 때 놀던 내 고향
잔뜩 기분을 내서 찾았는데 말이다. 그래서 차를 세우고 물었다. “어르신, 저 진장(마을 이름)을 가는데 어찌
나오지 않네요.” 했더니 허허 웃으시며 ‘많이 지나왔어. 오던 길로 다시 돌아가요.’ 하더라. 그래서 도 돌아와
진장을 찾았다. 부모님이 계실 때는 그러지는 안 했는데 어이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동네가 완전히 바뀌
어 있었어. 우리가 살 때 길이 좁아 달구지도 겨우 다니던 거기가 도로가 생기면서 그렇게 변했단다. 그래서
그나마 작았던 마을이 두 동강이 되었더구나. 하필 이면 우리 아버지 어머니 폐가(廢家)나 다름없는 집에
분가 하여 사시다가 새로 집을 장만 나 어릴 적 살던 그 집이 없어졌더라.
우리 집만이 아니고 우리 집 뒤에 있던 구복이네 집, 장석이네 집, 그리고 우리 집과 이웃했던 왕순이네 집이
다 없어졌더라고. 눈물이 핑 돌며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부모님들이 살아 계셨으면 얼마나 허탈해 하셨
을까 생각이 났고 수몰 지구에서 집을 잃은 사람들도 이런 마음이었겠다 싶기도 했다. 거기다가 동네 한가운
데에서 그때는 제법 사셨던 우리 큰 댁 석천이 형 집이며, 진남이 형 집, 면장 님 댁, 희순이네 집 등 자식이
대 여섯은 되었던 그 집들도 다 자식들이 도시로 떠나는 바람에 텅 비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어. 출성산을
넘어 학교를 다니던 그 길에도 도로가 생겼고 용천산 옆으로 넘어 임 피로 가던 그 길도 도로가 생겨 몰라보
게 변했다니까. 우리가 살 때 하루에 한 번 버스가 오고 갔지만 그것마저 10 리는 가야 탈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처럼 번듯한 도로가 생긴 마을로 변해 있다. 그래서 하루에도 몇 차례씩 버스가 다녀. 이런 것을 상전벽해
라 하던가? 지금은 사시는 분이 그때의 반도 안 되는데 문명의 이기는 그처럼 늘어 있었다.
우리가 살 때 그런 혜택을 받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하며 부러워지더라.
친구들 아! 추억 몇 개만 더 찾고 너희들 만날 기회를 간절히 기다리련다.
진남이 형! 그래도 우리 동네에서 제일 잘 살았다고 해야 하나. 그래서 신문물인 유성기가 있었지. 그러다
보니 동네 누나들이 저녁이면 모여 축음기 소리에 눈물도 지었고, 영수 형은 그때 오징어를 좋아했었어.
그래서 오징어를 사서 우리에게 주어 맛있게 먹은 생각이 나네. 그때는 오징어를 일본에 수출을 하지 않고
국내에서만 소비했기에 싸기도 했지.
어쩌다 마을에 얼음 과자(아이스 케이크)나 엿장수가 와서 ‘아이스 케이키 얼음 과자’ 하고 소리치면 돈 주고
사 먹기도 했지만, 쭈그러진 냄비나 쇠붙이, 헌 고무신 등 가지고 가서 사 먹었고 그 맛은 얼마나 맛있었니?
또한 장날이면 겨우 그 아이스 케이크 하나 얻어먹으러 어머님 따라 20 리가 넘는 그 먼 거리까지 가기도
했었지. 그때는 얼음 과자가 얼음을 설탕물에 섞어 나무에 얼린 과자였는데 왜 그리 맛있었고, 지금도 그 맛
이 입 안에서 도는 듯하다. 또한 어쩌다 계몽 영화 한다고 소식이 오면 하나 밖에 없는 학교 교정에서 상영
했기에 15 리가 넘는 학교까지 가서 보았고 특히 만화 영화에 홀딱 반하기도 했지. 영화가 끝나면 소리 내어
서로 모여 칠흑 같은 고개를 넘어오던 생각은 너무 다정하였구나.
이제 왕순이 너 이야기만 하고 매듭지으려 한다. 왕순 아! 너는 나와 동갑이기도 했지만 바로 울타리 하나를
경계로 이웃에 살던 친구였었기에 누구보다 친하게 살았지. 태어나서 20살이 넘을 때까지 함께 살았던 친구
야. 너와 나만 군산에 있는 중학교에 다녔잖아. 그래서 아침이면 같이 학교로 갔지만 내가 너보다 15 리도 더
되는 먼 거리 학교에 다녔기에, 저녁이면 나 혼자 창감 재를 넘으며 무서워 땀으로 목욕하던 생각이 난다.
먼 훗날 너를 서울에서 만나 저녁에 술을 한 잔 나누었을 때, 네가 건축 일을 하느라고 몹시 힘들어 하던 모습
이 아련하구나. 자주 만나서 술이라도 나눌 걸 그 한 번으로 끝나고 너는 유명을 달리했으니 참으로 보고
싶구나. 진남이 형, 영수 형, 공수 형 기순 이도 이미 고인이 되었지. 보고 싶어도 불러도 대답 없는 친구들
이렇게 불러 본다.
그래 삶이란 순서가 있더냐? 오는 것은 순서가 있어도 가는 것은 순서가 없는 것이 아니더냐. 왔으면 가는 것
또한 순리이지. 그러나 삶이란 항상 미련이 남는 것이었다. 테레사 수녀님이 “인생이란 낯선 여인숙에서 하룻
밤이다.”하셨지.
그 짧은 삶 살면서 이제 이처럼 보고픔 만 남았으니 어쩌면 좋으냐?
누가 한 말인지는 모르겠다 만 좋은 말이라 생각되어 여기에 옮기며 닫겠다.
“살아온 삶 되돌아보니 왜 그리 긴가 싶더니 남은 삶 생각하니 왜 그리 짧은가 싶구나.”
내가 마지막으로 간절한 소원 하나 말하겠다. 이미 불러도 오지 않을 내 친구들 아! 내 심정이다.!
2025년 1월 1일 우리가 죽마고우로 살던 진장에 모이자. 모든 오고 가는 비용이며 드는 비용은 산 자인 내가
다 부담하마. 술이나 한 잔 하면서 보고 싶은 마음 달래나 보자. 그리고 어릴 때 함께했던 그 놀이들 한 번
해보고 헤어지면 어떻겠니?. 보고 싶다.
내 어릴 적 같이 놀던 친구들 아.
이 말 남기는데 왜 눈물이 나냐?
<끝>
첫댓글 진짜 눈물이 나올 정도의 옛적 고리타분 하지만
다시 찾을수 없는 놀이등 저역시 감명깊게 읽어 봅니다.
이제는 구경도 할수 없고 "○알" 친구들도 거의 고인이
되엿으며 살아 계셨다면 움직일수 없는 노인
참 인생 쇠뭉치님 그래도 기억을 글로써 잘 묘사 되여
감명깊게 보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나이가 들다 보니 그리움의 첫 번째가 옛 친구였습니다.
지금 아파트에는 언제 타고 방치한 지 모르는 자전거가 가득합니다.
지금 그 방치된 자전거가 제가 학교에 다닐 때 있었다면 해 봅니다.
운동장에는 버려진 축구 공이 주인 없이 놓여 잇습니다.
제 어릴 적이었다면 돼지 오줌 통 축구는 안 했겠지요. 모두가 아깝습니다.
Carry me back to old Virginny
무척 즐겨 부르던 학창시절 애창곡입니다 그 시절이 그립군요
늙으면 추억먹고 사는게 인생입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와서 보니 그리움의 우선 순위가 고향이고 옛 친구입니다.
그러다 보니 "내 고향으로 날 보내 주" 노래가 콧노래로 자리 잡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