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정 작가의 새 소설집이 나왔다.
첫 소설집 '선글라스를 벗으
세요'와 두 번째 소설집 '겨울 정원' , 그리고 '오후의 뒤
뜰'에 이어 네 번째 소설집이다
책 소개
12편의 노래에 실려온 인생의 이야기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서랍이 있다. 서랍 속에는 저마다의 꿈, 약속, 열망, 기도, 무지개들이 담겨 있다. 김연정의 연작소설 『서랍 속 수수밭』에 등장하는 인물들도 크든 작든 서랍 하나씩을 간직하고 있다. 그중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가난한 가장 허찬수와 그의 딸 허명애의 서랍이다. 허찬수의 서랍에는 먹으로 그린 수수 그림들이, 그의 딸 허명애의 서랍에는 ‘강천’, ‘몌별’, ‘예리성’ 같은 단어들이 모여 있다.
허찬수는 병을 얻어 쓰러지고 나서야 비로소 가족 부양의 의무에서 놓여난다. 놓여난 그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오로지 수수 그림이다. 잘 여물어 고개 숙인 수수 이삭이 바람에 묵직하게 흔들리고, 밭 귀퉁이에서 시작된 일렁임이 너른 밭으로 번져간다. 자식들 교육을 위해 서울로 올라오기 전만 해도 허찬수는 고향의 작은 도시에서 인정받는 한의사였고 가족의 삶은 풍요로웠다.
집 앞 넓은 수수밭은 그 시절의 상징이다. 이제 늙고 병든 허찬수는 그 붉게 물결치던 수수밭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걸 안다. 그의 말대로 한번 떠나온 물에는 다시 올라탈 수 없는 법. 흰 종이에 검은 묵으로 수수밭을 그려갈 뿐이다. 속 깊고 눈 밝은 딸 허명애는 아버지의 그림 속에 담긴 회한을 알아본다. 아버지의 수수밭을 흔든 바람이 이제 딸의 서랍으로 불어온다. 서랍 깊이 넣어둔 ‘몌별’과 ‘예리성’이 들썩이고 ‘강천’이 흔들린다. 그러니 딸 허명애가 글 쓰는 삶 아닌 다른 삶을 꿈꿀 수 있었을까.
팬데믹의 어느 하루, 작가 허명애는 북한강이 휘감아 흐르는 섬에서 하룻밤 머물게 된다. 모처럼 아들네 가족과 함께하는 여행이다. 여행의 설렘은 섬까지 따라 들어온 ‘코로나’로 순식간에 깨지고 만다. 허명애와 손자가 코로나 검사를 받아야 한다는 전화를 받은 것. 검사를 받고 돌아와 가족은 각자의 방으로 수감되듯 흩어진다. 깊은 밤, 섬의 어디선가 기이한 소리로 공작이 울어대고 배는 끊겼다. 뭍에서의 거리와 상관없이 배가 끊기는 순간 그곳은 바로 절해고도가 된다. 하물며 팬데믹 상황. 뭍마저도 이미 셀 수 없이 많은 절해고도로 나뉜 상태다.
허명애는 불안과 불면으로 어두운 창가를 서성인다. 그런 그녀를 향해 ‘나뭇잎 배’ 하나가 소리 없이 다가온다. 어쩌면 오래전 수수밭을 흔들던 바람이 그 밤, 다시 나뭇잎 배 하나 띄워 보내준 건 아닐까. 그것을 시작으로 가슴 저미는 노래와 목소리들이 밤하늘을 날아, 밤물을 건너 허명애의 섬으로 온다. 허명애는 노래에 실려 온 사람들과 밤새 이야기를 나눈다. 오직 ‘이야기’만이 팬데믹의 밤을 견디게 해줄 수 있다는 것을 허명애와 그 밤의 사람들은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가난과 청춘, 상실과 문학이라는 역병도 함께 겪어낸 사람들이니까. 『서랍 속 수수밭』에는 경상북도의 벽촌과 청평, 멀리 나성이 등장하기도 하지만 이 소설의 화양연화는 종로, 인사동, 창덕궁, 돈암동, 미아리고개를 무대로 펼쳐진다.
서울을 납작하게 눌러 좌표평면으로 바꿔보면 1사분면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곳은 근현대사의 공간으로든, 문학작품의 배경으로든 익숙하고 새로울 것 없는 장소다. 힘들이지 않고 설렁설렁 걸어 오갈 만한 가까운 곳에서 무언가 놀라운 것을 보게 될 일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곳에서 여성 국극, 색소폰, 국화빵, 명랑, 돌문네 식당, 나라스케, 백송, 숙지황, 이순재 데뷔작, 자하문, 자두 같은 단어들을 발견하면 상황이 달라진다.
수자는 콧물은 흘렸지만 한 학년 위라고 허명애를 데리고 다니며 서울 구경을 시켜줬다. 창경원 벚꽃놀이도 가고 남산에도 올라갔다. 뚝섬에 데리고 가서 수영도 가르쳐주었다. 수영복이 없으니 입은 채로 한강에 들어가서 놀다가 햇볕에 말려서 돌아왔다. 자하문 밖 과수원에 가서 자두도 사주었다.(「오! 캐롤」, 52쪽)
1사분면의 설렁설렁한 좌표에 지나지 않던 지점들에 환하게 불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집을 지어본 사람들은 말한다. 새 터에 새집을 짓는 것보다 오래된 집을 고치고 다듬어 새집으로 만드는 것이 훨씬 어려운 일이라고. 솜씨 좋은 목수 김연정은 그 일을 해낸다. 연작소설 『서랍 속 수수밭』으로 우리를 나성보다 먼 종로, 미라보 다리보다 먼 인사동 골목으로 데려간다. 거창한 서사 없이 자잘한 ‘자두들’만으로도 그 일을 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