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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 주님 봉헌 축일
[수도회] 봉헌된 축성의 삶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신명 18,15-20
† 복음 마르 1,21ㄴ-28
(봉헌 생활의 날)
교회는 예수 성탄 대축일 40일째 되는 날, 곧 해마다 2월 2일을 예수
성탄과 주님 공현을 마감하는 주님 봉헌 축일로 지낸다. 이 축일은 본디
성모님께서 아기 예수님을 낳으신 뒤 모세의 율법대로 정결 의식을 치르신
것을 기념하는 ‘성모 취결례(정화) 축일’이었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에 따른 전례 개혁으로 1970년부터는 현재의 명칭으로
바꾸어 주님의 축일로 지내 오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점에서 죄가 없으신
성모님에 대한 ‘취결례’라는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1997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이날을 ‘봉헌 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로 삼았다. 이에 따라 해마다 이날
교회는 수도자들을 기억하는 한편, 젊은이들을 봉헌 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도록 기도할 것을 권한다.
★ 예언서는 이렇게 전한다. “보라,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홀연히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그는 정련사처럼 앉아,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제1독서).
★ 구약의 이 예언은 마침내 예수님의 탄생으로 성취되었다. 성모님과
요셉은 아기 예수님을 율법의 전통에 따라 성전에서 주님께 봉헌한다.
아기 예수님과 부모는, 죽기 전에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게 된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노인의 축복을 받는다(복음).
◈ 오늘의 묵상
졸업식의 계절인데 젊은이들의 처진 어깨가 안쓰럽다. 꿈이 없는 청춘의
모습도 안타깝지만 노인들의 모습 또한 그렇다. 노년의 기품이 느껴지지
않는다. 자식도 있고 돈도 있지만 가족이 보이지 않는다. 어느 때부터
‘잘살아 보세!’를 따라 농업과 고향을 버리고 도시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자식들을 다 출가시킨 뒤 이제 할 일은 무엇인가?
인도의 전통에서 남자들은 바로 그때를 출가의 기점으로 삼았다. 한생을
공부하고 일하며 결혼하고 양육하면서 살아오느라 종교 생활에 너무
소홀하였으니, 이제 남은 생은 신께로 귀의하겠다는 것이다. 싯다르타
석가모니불도 그렇게 출가했다.
노인은 평온히 쉬며 지낼 자격이 있다. 그렇지만 병원 다니면서 매일 한
주먹씩의 조제약을 먹으며 소일한다면 이미 죽은 몸과 같다. 사람은 꿈을
가질 때라야 살아 있는 것이다. 내일 죽더라도 꿈이 있어야 한다. 노인에게
꿈이 있으면 삶의 원숙함과 총명과 영감이 빛나게 된다.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봉헌되실 때 ‘시메온과 한나’라는 두 노인이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포기할 수 없는 원대한 꿈과 믿음이 있었으니, ‘죽기 전에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는 것이었다.
청년의 꿈은 입신출세(立身出世)와 세계 제패라 할진대, 노인의 꿈은 훨씬
더 큰 것이어야 한다. 생의 단 마지막 욕심을 내야 한다. 그것은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다. 욥의 꿈은 ‘나는 나의 하느님을 기어이 뵙고야 말리라.’
(욥 19,26-27 참조)였다. 하느님을 만나면 노년의 삶이 달라질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굳어 있는 얼굴에 평온함이 생길 것이다. 한 번도
그렇게 살아 보지는 못했지? 하루 한 걸음씩 아버지 품을 찾아 걸어가라!
남은 모든 것을 봉헌하라!
- 매일 미사 -
◈ [수도회] 봉헌의 축복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뉴튼수도원 84일째) 주님 봉헌 축일,
말라3,1-4 루카2,22-40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또는 히브 2,14-18>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봉헌의 축복
뉴튼수도원을 떠나기 전 주님 봉헌 축일에 앞서
봉헌하는 마음으로 송바르나바 수사님에게 머리를 깎으니
마음이 나를 듯 상쾌하니 이 또한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봉헌'이란 말보다 더 아름답고 좋은 말은 없을 것입니다. 봉헌이란 말
하나에 삶의 중심, 삶의 목표, 삶의 방향, 삶의 의미가 환히 계시되기
때문입니다. 우리 삶이 허무와 무의미의 삶이 아니라 의미 충만한 삶임을
깨닫게 해 주는 말입니다.
이미 봉헌이란 말 안에 하느님이 우리 삶의 전부임이 드러납니다.
봉헌의 기쁨, 봉헌의 축복, 봉헌의 행복, 봉헌의 아름다움, 봉헌의 사랑,
거룩한 봉헌, 끝이 없습니다. 어제의 감동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미국 뉴튼수도원에서 약 3개월의 내적순례여정을 끝내기에 앞서
하느님이 주신 참 좋은 선물의 날이 었으니 봉헌의 삶을 사는 아름다운
두 자매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오늘 봉헌 축일 미사 전, 초 축복후 촛불을 들고 행렬할 때의 모습처럼,
'주님의 촛불'이 되어 주위를 밝히며 봉헌의 삶을 살았던 두
자매님이였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2,22ㄴ). 짧은 구절이지만 저에겐 신선한 충격입니다.
이 한구절 안에 요셉, 마리아 부모의 신앙에 응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생각나는 엊그제 1독서 히브리서 중 한 구절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히브11,13ㄱ).
지극히 평범한 기술이지만 저에겐 앞서의 말씀과 더불어 무한한 위로가
되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봉헌의 삶을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감도 큰 축복임을 깨닫습니다.
봉헌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만납니다. 복음의 시메온도 한나 예언자도
경건하게 일편단심 주님께 봉헌의 삶을 살다가 성전에서 탄생하신 아기
예수님을 만났고, 요셉 마리아 부부도 예수 아기를 봉헌하다가 주님을
만났습니다. 시메온의 찬미가를 통해 봉헌하는 예수 아기가 바로 주님임을
깨달았습니다.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화로이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루카2,29-32).
주님을 만나 감격에 벅차 노래하는 시메온의 찬미가는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우리 수도자들이 끝기도 시 잠자리에 들기전 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감미로운 찬미가입니다.
제가 여기 뉴튼수도원에서도 끝기도 때 영어로 바치는 이 찬미가 곡의
아름다움은 내내 잊지 못할 것입니다. 봉헌의 삶을 살 때 주님을 만납니다.
어제 두 분(오은정 레오나르다, 김성주 아나시타시아) 자매님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아, 오늘이 자매님들에게, 또 저에겐 봉헌 축일입니다. 자매님들은 저를
통해, 또 저는 자매님들을 통해 주님을 만나 하루를 봉헌했기 때문입니다.“
출국에 앞서 그 먼 LA에서 저를 만나러 불야불야 방문한 오은정 자매
부부였습니다. 그동안 석연치 않게 느꼈던 모든 회의(懷疑)의 구름이
완전히 걷힌 날이었습니다.
즉시 오은정 자매 부부(나르다. 로마노)를 격려했고 인정했습니다.
"건강한 영성입니다. 그대로 기도생활에 전념하셔도 됩니다.
1.자매님이 쓰신 책(깨어나는 기도; 온은정, 황인수 글: 성바오로) 내용도
좋고,
2.든든한 후견인인 황인수이냐시오 신부님이 계시고,
3.이렇게 좋은 남편의 전폭적 신뢰와 존경이 있기에 자매님의 영성은 아주
건강합니다.
부부동행함으로 부부일치의 바탕이 마련됐으니 이보다 더 좋은 증거는
없습니다. 영적일수록 현실적이라 했는데 자매님의 적극적 현실적 투신의
삶이 자매님의 영성을 보증합니다.“
그대로 살아있는 아름다운 성경책처럼 느껴지는,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부부의 봉헌의 삶이었습니다. 광야를 찾아 미국에 왔다는 자매님의 고백도
깊은 울림을 줬고, 한국에선 부부싸움도 잦았는데 미국에 와선 일체의
부부싸움이 없어졌다며 아내에 대한 깊은 신뢰와 우정을 표현하는
형제님의 진솔한 고백도 좋았습니다.
또 이에 앞서 뉴튼수도원을 방문하여 저에게 고백성사를 본 후 픽업하여
뉴악 공항으로 안내한 후, 두 부부를 태우고 이후의 여정에 동행했던
김아나스타시아 자매님의 봉헌의 삶도 참 아름답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전주교대를 졸업하고 오랫동안 경기도 광명시에서 초등학교 선생님으로
복무했던 분이었습니다.
"제가 인터넷을 잘 안 보는데 그날은 아들을 픽업하러 맨하탄에 가야
하기에 날씨 확인 차 맨하탄을 클릭했더니 나르다 자매님이 뉴튼수도원의
프란치스코 신부님을 방문한다는 정보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동안 꼭 신부님을 만나야 겠다는 일념으로 지낸 터에 즉시 나르다
자매님과 연결하여 이렇게 만남이 성사됐습니다.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웬지 꼭 신부님을 만나고 싶다는 강렬한 끌림이 있었습니다.“
좌우간 두 자매님은 하느님과 현실에 깊이 뿌리내린
건강한 열정과 영성에 지혜롭고도 강한 생활력을 지닌 분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성가정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든든했습니다.
두 자매님 모두 봉헌의 삶에 충실하다 저를 통해 주님을 만났고
저 또한 아름다운 영혼의 두 자매님을 통해 주님을 만났습니다. 주님은
거룩한 봉헌의 삶을 사는 우리에게 거룩한 만남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아기는 자라면서 튼튼해지고 지혜가 충만해졌으며,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바로 봉헌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봉헌에 주님은 축복으로 응답하심을 깨닫습니다.
말라키 예언자 역시 봉헌의 축복을 보여줍니다.
"그는 은 제련사처럼 앉아, 레위의 자손들을 깨끗하게 하고,
그들을 금과 은처럼 정련하여, 주님에게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리라.“
진정 주님을 믿는 이들은 모두가 영적 레위의 자손들입니다. 주님은 봉헌의
삶을 사는 이들을 부단히 깨끗하게 하시어 당신께 의로운 제물을 바치게
하십니다.
어제의 하루를 주님께 의로운 제물로 봉헌함으로 서로의 만남을 통해
주님을 만남으로 깨끗해지고 새롭게 충전된 자매님들과 저의 삶이
되었습니다. 수도자와 사제는 물론이요 믿는 모든 이들이 봉헌의 삶에로
불림을 받고 있습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일상의 모두가 봉헌이요, 주님께 봉헌의 삶을 살 때
거룩한 삶이며, 삶의 의미는 이것 하나뿐입니다.
봉헌 중의 봉헌이 마지막 죽음의 봉헌입니다.
일상의 평범한 봉헌의 삶에 항구할 때 축복된 봉헌의 죽음입니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당신과 함께, 자신을 봉헌하는 우리
모두에게 풍성한 축복을 내려주십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요셉 수도원 신부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봉헌된 축성의 삶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 2,22-40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주님께 바쳤다.”(루카 2,22)
봉헌된 축성의 삶
오늘은 나자렛에 머물던 아기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에 봉헌되신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또한 오늘은 1997년부터 교회가 ‘축성(봉헌)생활의
날’로 정하여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한 날이기도 하다.
예수님의 부모는 당시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였다.
주님께서 가난한 이의 모습으로 봉헌되신 이 날 다 함께 우리의 봉헌의
의미를 되새겨 보고, 주님께 삶을 봉헌한 수도자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도록
하자. !
라틴어 ‘콘세크라씨오’(consecratio)는 우리말로 봉헌과 축성으로
번역된다. 이 단어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주는 핵심적인
말이다. ‘봉헌’이란 인간 편에서 우리를 창조하시고 사랑과 선을 주시는
하느님께 자신의 전 존재를 배타적으로 유보시키고, 감사와 찬미의
응답으로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다. ‘축성’은 인간의 자발적인 사랑과
희생과 헌신에 대해 하느님 편에서 축복해주시고 당신의 거룩함에
참여시켜주는 것이다. 우리네 삶의 주인이 하느님이시라면 ‘봉헌된
축성’ 또는 ‘축성된 봉헌’이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오늘 축일에 듣는 말씀들의 주제는 봉헌이다. 봉헌이란 거룩하게 되는
것을 뜻한다. ‘우리의 삶이 하느님께 봉헌되었다는 것은 하느님께만
유보되었다는 말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힘으로 노력으로 거룩해져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봉헌이
참될 때 그분은 우리를 축성하여 주신다. 희생 없는 봉헌은 생각할 수
없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희생은 자신의 어떤 것을 포기하고 참아 받는
그 이상의 훨씬 더 깊은 뜻이 있다. 시메온의 고백처럼, 예수님께서는‘반대
받는 표징’이 될 것인데(2,34), 그분과 함께 구원의 여정을 시작한 성모님의
고통은 십자가 밑에 이르러 극에 도달한다. 신앙인의 희생은, 곧 자신을
온전히 희생한 예수님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봉헌은 나의 일부를 일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때에만 바치는 희생이
아니라, 전인격적이며 항구한 그리스도의 구원의 희생에 동참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봉헌은 ‘남김없이 건네줌’이며 ‘되돌려드림’의 삶이다. 정결예식은
히브리인들이 에집트에서 노예상태로부터 해방될 때 그들의 맏아들들이
목숨을 구하게 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맏아들 예수는
생명을 내놓고 피를 흘림으로써 궁극적인 해방을 가져다준다. 따라서
우리의 삶은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주어지는 것이 모두
하느님으로부터 거저 받은 선물임을 깨달아 머뭇거림 없이 하느님께
되돌려 드려야 하며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남겨두지 말아야 한다.
깨끗하고 순수하게 되어, 올바른 마음으로 제물을 바치라는 말라키의
말씀처럼 우리의 봉헌은 늘 대가나 인정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으로
이루어져야 하리라!
우리의 봉헌생활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가르침을 재현하는
삶이다. 이런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 세상에 증거가 되어야 하며 이는
곧 예언자적인 소명을 일깨워 준다. 축성된 삶이란 그저 자신의 내적
생활만을 추구하거나 순수영성주의에 빠져 안일하게, 그리고 초월적인
신비나 자신의 내적인 만족만을 추구하며 사는 삶이 결코 아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향하여 참된 사랑과, 하느님의 진리, 복음적 가치들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적극적으로 드러내야 할 중대한 사명을 받았다.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살아있는 복음으로 걸어가야 하는 것이다.
봉헌생활은 교회생활의 ‘필수 부분’이며, 하느님께서 교회에 주신
은혜이다. 따라서 우리 모두는 잠에서 깨어나 주 예수님을 더욱 뜨겁게
사랑하고 그분 안에서 모든 인류를 사랑하기 위한 철저한 자기 봉헌을
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복음적 가치의 풍성한
표현이 되어야 하리라. 그분의 거룩함에 참여하고, 구원의 희생에 자신을
일치시키며, 모든 것을 기꺼이 되돌려드리며 살아가는 우리의 삶이야말로
인류 성화에 대한 더 완전한 표현이 될 것이며, 이 세상에 복음적 가치를
일깨워 주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예언자적인 소명인 것이다.
우리 모두 ‘주님 봉헌 축일’과 ‘축성생활의 날’을 맞아 다시 한 번 우리의
삶의 원점을 확인하면서 나날의 삶이 그분께 드리는 더욱 철저한 사랑의
봉헌이 되어 세례의 축성을 꽃피울 수 있도록 우리의 마음을 모으도록
하자.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서울] 주님 봉헌 축일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또는 히브 2,14-18>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언젠가 서울 시장이 ‘서울시를 하느님께 봉헌하겠습니다.’라고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열심한 신자인 시장이라서 그렇게 말을 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서울시가 자신의 것이 아닌데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이 맞는 말인지
논란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교회는 전통에 따라서 오늘 제단을 밝힐
초를 축성합니다. 초는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초는 빛을 내서
어둠을 밝혀 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어둠 속을 걷지 않고, 더 이상 고통과
좌절 속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초는 스스로 타서 빛을 냅니다. 완전히
다 탈 때까지 초는 계속 불을 밝힙니다. 이것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시고 하느님께 순종하셨던 예수님의 희생을 말해 줍니다.
초는 열을 냅니다. 그 열기는 다른 것들에 전해집니다. 주님의 사랑은
넘치고 넘쳐서 제자들에게 전해 졌습니다. 그 사랑은 2000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해서 우리들에게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주님의
봉헌 축일에 교회는 초를 축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초를 축성하면서 우리들 자신도 그렇게 봉헌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들의 사랑과 나눔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은 하느님
품안에서 영원한 안식을 얻을 때까지 주님을 증거해야 합니다. 우리는
혼자만이 구원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함께하는 삶, 나누는 삶은 주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하면서 제물로 비둘기 한 쌍을
드렸습니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전해지는 전승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서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치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진실한 믿음을 보시고 이사악
대신에 숫양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준비해주신
양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양을 제물로
드리기도 했고,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던 사람들은 비둘기를 제물로
드리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모님은 부유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둘기를
제물로 드렸습니다.
해마다 연초가 되면 본당에 교무금을 책정합니다. 매주 주일 헌금을
준비하고 감사헌금을 하는 것도 의미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성전에
봉헌한 것은 단순히 물질적인 봉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과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과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께 봉헌해야
합니다. 샘물은 자꾸만 퍼내야만 새로운 샘물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가진 재능, 시간, 마음을 주님께 기쁜 마음으로 봉헌하면
주님께서는 더 큰 것들을 우리에게 주실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마음의
평화이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주님의 봉헌 축일을 지내면서 우리가 봉헌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기도 봉헌입니다. 하루 24시간 중에 조금이라도 하느님을
찬미하고, 기도하는데 시간을 봉헌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신앙인은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받고, 힘들고 어려운 일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늘 시간을 내서 따로
기도하셨습니다.
둘째는 선행의 봉헌입니다. 선행은 아주 작은 것부터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이웃을 도와주는 것은 커다란 선행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
선포를 하시면서 힘들고 어려운 이웃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습니다.
찾아오는 사람들을 치유해 주셨고, 누군가 청을 하면 기꺼이 가셔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예전에 어느 식당의 식탁에서 보았던 글이 생각납니다.
생각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힘의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읽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혜의 샘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사랑 받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신이 부여한
특권입니다. 웃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영혼의 음악이기
때문입니다. 주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이기적 이기엔
우리의 하루가 너무 짧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시간을 따로 떼어
놓으십시오. 그것은 지상 최대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기도와
선행의 봉헌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도회] 2015년 나해 2월2일 주님 봉헌 축일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예수님의 부모는 아기를 예루살렘으로 데리고 올라가 주님께 바쳤다.>
(루카 2,22)
주님 봉헌축일입니다. 예수님도 어려서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셨군요.
사실 우리 부모님도 우리를 하느님께 봉헌하셨더랬지요.
백일 잔치 때도 돌 잔치 때도 세례 때도...
우린 모두 하느님께 봉헌된 사람들입니다.
다만 기억 못하고 있었을 뿐이지요. 살아가면서
"아! 정말 내가 하느님께 바쳐진 몸이구나!"
깨달아 알게 되면 그제야 제대로 나를 봉헌하고 싶어지지요.
"이 몸은 주님의 종입니다. 맘대로 쓰소서."
이렇게 특별하게 봉헌된 사람들이 수도자들입니다.
오늘 내가 아는 수도자들에게 축하드리고
그들을 위해 주모경 한번 바쳐 주십시오. 봉헌된 신분임을 잃지말도록...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청주] 기다림의 기쁨|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 주님 봉헌 축일 (루카2,22-40)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또는 히브 2,14-18>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기다림의 기쁨
교회는 주님 봉헌축일을 '봉헌생활의 날'로 정하고 자신을 주님께 봉헌한
수도자의 날로 지냅니다. 수도자들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많은 젊은이들이
봉헌생활로 초대하시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도록 기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에 사는 시메온 이라는 사람은 의롭고 독실한 사람으로서 주님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알림을 받았고
이스라엘에 내려질 위로, 곧 메시아가 가져다 줄 구원을 기다렸습니다.
그리고 마치내 주님을 만났습니다. 많은 예언자들이 메시아가 장차
오리라고 선언하였지만 시메온은 메시아를 직접 보았습니다. “주님께서
모든 민족들이 보는 앞에서 당신의 거룩한 팔을 걷어붙이시니 땅 끝들이
모두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보리라”(이사52,10) 한 예언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시메온은 기다림의 열매 앞에서 “주님, 이제야 말씀하신 대로
당신 종을 평안히 떠나게 해 주셨습니다. 제 눈이 당신의 구원을 본
것입니다. 이는 당신께서 모든 민족들 앞에서 마련하신 것으로 다른
민족들에게는 계시의 빛이며 당신 백성 이스라엘에게는 영광입니다”
(루카2,29-32). 하고 고백합니다. 이로써 “나의 구원이 땅끝까지
다다르도록 나는 너를 민족들의 빛으로 세운다”(이사49,6).는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의 말씀이 이루어졌습니다.
시메온은 의롭고 독실하기에 끝까지 기다릴 줄 알았고 마침내 주님을 직접
뵈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옛말에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도 주님께서 약속하신
영원한 생명에 대한 희망을 간직하고 희망하는 대로 살아감으로써
행복하였으면 좋겠습니다.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열망이
있는 만큼 하느님의 뜻에 맞는 삶으로 기다림을 간직해야 합니다.
“사람이 하느님에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요, 사람이 지킬 것은
지존하신 분에게 서원한 것을 갚는 일.”(시편50,14) 이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로마12,1)라고 말합니다. 사실 “태를 열고 나온 사내 아이는 모두 주님께
봉헌되어야 한다”는 주님의 율법에 따라 아기 예수님께서 성전에 봉헌
되었고 만국의 빛이 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자신의 거룩한
삶을 봉헌함으로써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제는 만민에게
베푸시는 주님의 구원을 우리가 전해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마태5,16) 어떤 기다림이든지 그 간절한 기다림이 하느님 마음에 들어
기쁨이 되고 복이 되시길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행정 부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도회]
- 살레시오회 한국관구 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전삼용 요셉 신부 -
◈ [서울] 살다보면
2015년 나해 2월2일 월요일 주님 봉헌 축일
제1독서
<너희가 찾던 주님, 그가 자기 성전으로 오리라.>
◎ 말라키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3,1-4<또는 히브 2,14-18>
복음
<제 눈이 주님의 구원을 보았습니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22-40<또는 2,22-32>
◆ 살다보면
살다보면 마음이 칼에 찔리듯 아픔을 겪어보신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사노라면 마음이나 영, 정신, 혼이 칼로 후비듯 아플 날이 올 것입니다.
특히 배신, 모욕, 이별, 사별, 자식의 죽음 같은 비통한 일들로 말입니다.
평소에 이런 일을 생각하며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지만 대비는 해야지요.
어쩌면 인간들은 태어나면서 이런 고통들의 예언을 들었다 해도 맞습니다.
그러나 성모님은 주님의 수치의 혹독한 십자가처형으로 너무하셨다 싶네요.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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