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 축구가 막을 올렸다. 새벽시간에 벌어지는 경기를 실시간으로 시청하느라 출근하는 사람들의 눈빛이 참으로 형형색색이다. 티브이가 일반화되지 않았던 사절 라디오를 통해서 축구중계 방송을 들었다.
“고국에 계신 동포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기는 말레이시아의 수도 쿠알라룸푸르입니다. 지금부터 아시안 게임 축구경기를 중계해드리겠습니다.”
열띤 아나운서의 중계방송을 듣고 있으면 우리나라 선수들은 그야말로 신출귀몰하게 공격하고 수비를 한다. 상대나라 선수들은 마지못해 뛰어다니는 것 같다. 그런데 우리나라 골기퍼의 손가락이 하나나 두 개쯤 모자라게 공을 쳐내지 못하면서 지는 경우가 더러 있었다.
권투중계도 거의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 선수는 거의 맞지도 않고 피한다. 저쪽 선수의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 선수가 링바닥에 잠시 쉬려고 했는지 잠시 앉거나 누웠다가 그만 경기가 끝나버린다.
내가 상상한 것과 시인의 것이
다른 것은 문제되어 지지 않아
평면문자 표현된 시인의 그림
상상으로 유추하는 묘미있어
우리가 중계방송을 들으면서 어린 시절 떠올렸던 동영상의 그림과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고 있는 그림이 달랐기 때문이다.
동파거사는 왕유의 시와 그림에 대해서 말했다.
詩中有畵 (시중유화)
畵中有詩 (화중유시)
시 속에 그림이 들어있고 /
그림 속에 시가 들어있다네
요즘엔 웬만한 시청자들이 모두 현장에 있는 감독의 수준을 뛰어넘어 있다. 티브이로 경기를 보면서 쉴 새 없이 작전지시를 내린다. 경기장에서 뛰고있는 선수들의 귀에 시청자 감독들의 작전지시가 들리지 않는 것이 어쩌면 천만다행이다.
한시를 읽노라면 대부분 동영상으로 된 그림이 떠오른다. 읽는 독자가 떠올리는 그림과 작자가 그린 그림이 같은 것인지 아닌지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축구경기장이나 야구 경기장에서 직접 경기를 구경하는 관중들이 보는 그림도 사실 똑같지는 않다. 아예 운동장에는 시선이 가지 않고 경기장 바로 안쪽에서 경기장을 등지고 움직이는 치어리더만 보는 사람도 아주 없지는 않다.
시인은 그림으로 떠오르는 장면을 평면문자로 표현한다. 독자는 평면문자를 통해서 시인의 눈동자에 입체적으로 떠올랐던 활동사진을 상상으로 유추한다. 상상으로 유추하는 과정에서 한없이 마음이 평온해지는 경우도 있고 등골이 까닭없이 시원해지기도 하고 사지 끝까지 피가 뛰기도 한다.
왕유의 시 한편을 읽어본다.
輕陰閣小雨 (경음각소우)
深院晝開 (심원주용개)
坐看蒼苔色 (좌간창태색)
欲上人衣來 (욕상인의래)
슬글슬금 흐려지더니 집 주변에 비를 조금 뿌려주길래 /
깊숙한 집 낮에야 마지못해 문을 열었네 /
주저앉아 푸른 이끼 바라보노라니 /
이끼의 푸른 빛이 사람의 옷으로 스며올라오려하네.
프랑스 영화보다도 더 느린 속도로 돌아가는 그림에 한없이 사지가 편안해지는 기운이 평온하게 다가온다. 이끼의 푸른 빛이 옷에 스며들어 올라오면서 내장 벽까지 시원하게 해주는 느낌이 든다.
축구선수들은 우주허공이 입체적으로 압축되어 있는 공으로 격렬하면서도 열정적인 시를 쓴다. 축구공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우리 선수들과 전 세계의 젊은 선수들이 피튀기는 승부를 맘껏 즐기되 큰 부상을 서로 입히지는 않는 대회가 될 수는 없을까. 생각이 축구공처럼 구르고 있다.
[1249호 /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