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영 감독 영화 "下女하녀"의 리뷰

김기영의 [하녀]는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최근 영화들에서조차 전혀 발견할 수 없는 치밀하고 과감한 시도와 계산으로 이루어진 놀라운 형식미, 정신분석 심리학과 산업 자본주의를 거점으로 논의되어야만 그 진실된 본의가 드러나는 놀라운 주제의식과 사회통찰력, 그에 숨겨져 있는 놀라운 정치적 의도 등은 모두 과감하기가 이루 말할 데가 없다.(놀랍게도 이영화는 혼란의 격변기 1960년도에 개봉되었다.)
김기영의 많은 추종자들이나, 이미 부산에서 열린 바 있는 김기영특별전(2007년 2월)에서 그의 작품들을 만난 이들이라면 김기영의 첫작품으로 [하녀]를 본 지금의 내 심정을, 이 뭐라 표현해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는 혼란스럽고 충격적인 지금의 내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
이층집을 소유하는 것이 인생의 목표였던 아내는 쉬지 않고 재봉틀을 돌리고, 공장에서 여공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남편은 사랑하는 아내와 두 자녀를 생각하면 조금도 피곤치 않다. 아내와 남편 모두에게 가정은 생(生)의 전부인 동시에 사유다. 장애를 앓고 있는 딸아이에게 바퀴를 돌리고 있는 다람쥐를 선물하는 아버지는 세상을 딸앞에 전부 가져다 줄 수 없기에, 좋은 집과 안락한 가정을 꾸며주고 싶다. 문제의 발단이 시작되는 [공장]이라는 공간은 영화의 비극이 시작되는 원인을 제공하는 "사악한 공간"이다. 이 저주의 지대를, 남자는 진정 벗어나고 싶지만 벗어날 수 없다. 물론, 그 이유는 생존 때문이다.
자, 이제부터 고통은(남자와 가족 모두에게) 시작된다. 피아노를 배우고 싶다던 여공들은 피아노가 아닌 선생의(남성) 육체를 원하고 자신들의 요구에 응하지 않는 선생, 그 사실을 급기야 공장측에 알리고야 마는 선생의 강경한 입장에 순순히 물러서지 않는다.
영화는 이제 본격적인 정치적 태세로 돌입한다. 단순히 생존의 목적 때문에 그러니까, 급료를 받기만을 원하는 남성의 직장은 그에게 그 이상의 것을 요구하기 시작한다. 피아노를 가르치는 일 따위만으로 그에게 순순히 급료를 제공하거나 그의 일신의 안락을 보장하지 않겠다는 태도로 말이다.
선생을 좋아하다가 공장에서 쫓겨나 자신의 목숨까지 끊은 곽선영이나, 선생의 집까지 찾아가 피아노 교습을 받고야 마는 미스조(엄앵란)의 캐릭터는 바로 그 정치적 태도를 실천으로 이행하는, 이가족에게 직접적인 고통을 주는 첫 번째 장애물인셈이다.
정말 놀랍게도 선생이 미스조의 욕망을 받아들이는 것을 거부하자 미스조는 자신의 옷을 스스로 찢고 이런 사실을 공장에 일러바친 후 "당신의 직장을 빼앗겠다!"라고 (은연중)선포하는데 이순간이 바로 여성의 성적 욕망이 바로 "권력"으로 변모하는 중요한 지점에 해당한다. 마치 루이스 뷔뉘엘의 "욕망의 모호한 대상"의 콘치타의 그것처럼, SEX는 권력으로 변화하여 이제부터 모두를, 모든 상황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제어한다. 이 괴기스러운 공포감과 긴장감을 김기영 감독은 단 한순간도 "느슨"하게 풀어놓을 요량이 없다. 마치 완전히 녹아버린 강 가운데 유일하게 떠있는 얼음 한조각 위에 서있는 당신의 공간을 녹여버리려고 시종일관 아래를 쏘아보는 독살 맞은 태양의 "빛"처럼 김기영 감독은 인물들을 바짝 긴장시킨다.
"너만 걷게 되면 우리집은 동네에서 제일 행복한 집이 돼"
삶에서 단 하나의 부족함이 있다면 딸아이의 온전치 못한 다리였던 남자의 불안과 걱정은 이제 곧 "전체"가 되어버린다. 이 중산층 가정의 몰락 과정은 "하녀"의 등장과 잠입을 통해 극 전체로 확대된다.

하녀역으로 열연한 이은심씨의 놀라운 연기가 영화 전체를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로 이끄는 가운데 보는 이는 극도의 공포감과 긴장감을 느끼게 되는데, 하녀가 선생의 아이를 갖게 되자 온화하고 너그럽게만 보였던 아내가 하녀에게 가하는 육체적 정신적 폭력에 의해 하녀의 아이가 사산되는 과정을 통해 감독은 자신들의 안정과 행복을 위해 양심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버리는 중산층 지식인들의 "허위와 오만"을 들춰낸다. 선생에 대한 하녀의 집착보다 끔찍한 그들의 폭력과 냉소가 자신들의 테두리, 그 밖을 조금만 벗어나더라도 얼마나 끔찍하게 변화되는가에 영화는 주목하는 것이다.

이층구조로 설계된 거실 내부 그리고 그것을 밖에서 마치 연극(김기영감독은 오랫동안 연극무대에서 일해왔다.) 세트처럼 한 프레임 안에 두 공간을 동시에 노출시키는 카메라는 히치콕의 영화처럼, 바로 다음 씬(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공간의 등장, 예를들어 아내와 가족의 공간 혹은 거실, 혹은 그녀들의 부엌 이후 계단, 계단이후 하녀의 방 등의 순차적인 노출)에서 등장할 인물이나 사건을 감히! 짐작할 수 없게끔 만든다. 이로서 그들의 꿈이었던 이 안락한 집은 귀신 들린 집으로 변한다. 부르주아 계층과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이어주던 유일한 층계 위에서 그들의 아들은 죽고 남편 또한 죽는다. 물론 하녀도 죽는다. 그들이 염원하던 행복과 안락은 죽어간다.
김기영의 [하녀]는 엔딩에서 다시 한번 반전을 시도한다. 60년도에 개봉한, 그 지독했던 검열을 뚫고 세상 빛을 본 이 괴기스럽고 충격적인 귀신들린 집의 이야기에 완벽하게 몰입되어 있던 관객들을 다시 한번 놀래키는 재치를 선보인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극구조와 타이트한 연출, 금기를 마음대로 뛰어넘는 이 놀라운 가정 파괴극은, 비교적으로 21세기에 김지운이 그려낸 (이와 같은)귀신들린집 [장화,홍련]의 내러티브가 얼마나 조악하고 밋밋한 것인지 새삼 다시 한번 느끼게 만든다.
현재, 그러니까 21세기에 한국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모든 공포물을 다 합쳐도 김기영의 한 작품만큼의 공포감과 긴장감의 질량을 따라잡을 수 없다는 사실은 다시 한번 이 놀라운 천재 감독의 죽음을 안타깝게 만드는 슬픔을 안겨준다. 부산이 아닌,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김기영회고전은 다시, 시작되어야 한다.
출처 : 블로그 > 글쓰는 도넛 님의 블로그 (2006.0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