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사와 인물 |
단군신화 바탕에서 유랑하는 신여성:탄실 김명순 |
|
이은경(이화여대 강사) | ||
(편집자 주)이 글은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00, {여/성이론} 제2호에 실렸던 내용입니다. 편집자가 필자에게 요청하여 약간의 수정을 가하여 재수록하였습니다. 최초의 근대소설 작가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이 질문에 그다지 힘들이지 않고 이광수라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최초의 근대 소설을 쓴 여성작가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을 것이다. 성차를 따져 사태를 구분하는 것이 최근의 일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지금으로부터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았던 그 시절의 여성들에 대한 관심이 대두한 것도 최근의 일이기 때문이다. 근대 최초의 여성 문학작품으로 알려진 [疑心의 少女]의 작가 김명순은 내면묘사에 탁월한 소설가였으며 "뛰어난 감수성을 감정의 절제를 통하여 묘사"한 시인이었다. 그녀는 김일엽, 나혜석 등과 함께 우리 나라 신문학의 태동기였던 192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이자 근대적인 교육과 근대적인 문물을 선두에서 받아들인 여성집단으로 통하는 '신여성'에 속했다. 이들 세 여성들 중에서 가장 본격적인 창작활동을 하고 작가다운 공적을 남겼던 김명순이 작가로서는 물론 존재했던 흔적조차 희미해질 정도로 잊혀진 이유는 무엇인가? 과연 감상적인 시 몇 편과 문학 작품도 아닌 짧은 수필이나 신문 기사로서 시인 작가 행세나 하고 문단내의 사교활동을 함으로써 당대에 명성을 얻었으나 문학사적 의미가 전혀 없음으로 인해 후세대에 이르러 까마득히 잊혀져버린 것으로 그녀를 해석해야 될까? 김명순에 대해 전해오는 이러한 오해는 많은 부분이 김동인의 [金姸實傳]에서 비롯되었다. 김명순을 모델로한 것으로 알려진 [金姸實傳]의 주인공 김연실은 허영을 포장하는 수단으로 문학을 이용하고 당대를 풍미하던 여성해방운동을 자유연애사상 쯤으로 오해하여 분방한 연애행각을 벌이다 도덕적인 타락으로 인해 파멸하는 인물로 그려져있다. {김탄실과 그 아들}을 쓴 전영택이나 김기진과 같은 보수적이고 새디즘적인 남성작가들은 혈통 속에 오염된 피가 흘러서 변태적인 생활을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녀를 매도했다. 이들에 의하면 김명순은 물려받은 화냥기를 싸구려 여성주의로 분장함으로써 여류문인이라는 이름에 먹칠을 한 인물이 되는 셈이다. 김명순에 대한 감정적이고 전기적인 접근이 아니라 문학적 성취를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해보고자 하는 김윤식 역시 이런 보수적인 관점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인형의식의 파멸]이란 글에서 김윤식은 김명순이나 김일엽은 가정환경부터가 정상이 아닌데다가 인간적인 결함으로 인해 도덕적인 파멸을 자초했다고 비판하였다. 이와같이 김윤식 역시 가정, 전통, 도덕적 파멸과 같은 어휘들에 관해서 반성적인 사고를 한 다음, 접근한 흔적을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남성비평가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적어도 근대적인 자의식과 근대적인 개인을 거론하는 평자라면 근대를 구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비판적인 성찰이 앞선 다음에 민족, 전통, 가문, 혈통과 같은 기존 개념에 접근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행히 최근들어 김명순을 비롯한 신여성에 대한 평가가 조심스럽게 시도되고 있으나 아직은 미흡한 실정이다. 여성주의적 문학의 관점에서 김명순을 구출해내려는 여러 여성평자들도 남성 평론가들이 거론한 도덕적인 문란을 수용하여 김명순의 파멸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거나 아니면 민족모순은 전혀 개의치도 않은 자유주의 부르주아 여성작가에 불과한 것으로 혹은 관념적이고 턱없이 애상적인 낭만주의에 입각한 연애지상주의자 정도로 치부해버린다. 김명순에 대해 거의 최초로 본격적인 관심을 가진 김영덕마저 '한 남성이라도 이 여인들에게 진정으로 인간답게 대해 주었더라면' 이런 여류문인들이 그처럼 파멸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함으로써, 여성은 언제나 남성에 의해 구원받는 수동적인 존재인 것처럼 만들어버리고 있다. 아니면 김명순이 일부일처제를 부정했음은 물론이거니와 모성마저 폐기했기 때문에 그녀의 비극은 여성의 입장에서 보더라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처럼 주장하기도 한다. 이 글에서 필자는 그녀에 대한 문학사적인 위상을 조명하는데 일차적인 관심이 있다기보다 근대로 진입한 1920년대의 신여성을 대표하는 이미지로서 그녀를 재구성하고자 한다. 그녀의 삶 자체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음은 물론 죽음조차 제대로 알려진 바 없다. 다만 전영택에 의하면 그녀는 말년에 정신을 놓아버리고 일본의 청산뇌병원에서 사망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발굴된 작품과 단편적으로 드러난 생애를 종합하여 근대적인 자의식과 근대적인 이미지로서의 김명순의 삶을 여성의 역사이자 여성의 이야기로 발굴하고자 한다. 작가, 기자, 영화배우로서 다양한 삶을 살았던 그녀는 근대적인 대중문화를 상징하는 인물이었으며 그런 의미에서 새롭게 도시군중으로, 도시노동자로 형성된 여성들의 갓 눈뜨기 시작한 은밀한 욕망을 가시화할 수 있는 입장에 서 있었다. 신문물을 표상하는 그녀의 이미지를 통해 대다수의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을 투사시켜 대리만족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녀처럼 욕망을 대담하게 노출시켰다가는 처벌을 받지 않을까라는 자기들 내부의 두려움 역시 그녀에게 투사하여 그녀의 몰락에 한숨을 내쉬면서 안도하도록 만들어준 여성이었다는 점에서 그녀의 존재 그 자체가 페미니즘에 일정한 의미를 부여해주고 있다.
1. 김명순은 역사의 도시이며, 기독교와 더불어 근대문화의 발상지인 평양에서 아버지 김희경과 기생 출신의 소실어머니 김인숙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12남매중 둘째였다. 어려서는 "반도 안에 둘째 가는 큰 도회처에 또 거기서도 권력 있는 집의 귀한 따님으로 여러 사람들 위에 받들려 길러온" 김명순은 유복한 환경에서 인물이 곱고 태도가 귀여웠기 때문에 탄실이라는 아명으로 불리우며 아쉬운 것 없이 자랐다. 1902년 평양 남산현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던 탄실은 어머니가 심히 꺼렸으나 1903년 기독교 계통의 학교인 평양 사창골 야소교학교에 3학년으로 진급하여 옮긴다. "50원을 기부하고 입학한" 학교에서도 선생들의 귀염을 독차지하며 학예회나 크리스마스 행사에 늘 뽑혔다. 하지만 교회학교에 다니면서 탄실과 어머니와의 정은 "점점 엷어갔다. 그것은 탄실이가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게 될수록 세상 영화가 쓸데없다든지 또 남의 첩노릇을 해서는 못쓴다든지 기생은 악마 같은 것이란 교훈을 듣게 된 탓이었다."(「탄실이와 주영이」,『김명순』, p. 176) 어린나이에 기생의 딸이니 난봉이 나기 쉬울 것이라는 주위의 손가락질에 깊은 상처를 받았던 탄실은 하느님께 어머니에게 회개하는 마음을 달라고 밤이나 낮이나 기도를 하였다. 탄실을 데려다 길러 첩살림하는 남편의 마음을 돌려 보려는 적모에 의해 본가에서 살 때 남편이 애지중지하는 탄실을 데려다 길러도 소용이 없자 구박을 일삼는 적모를 비롯해서 본가 식구들이 모두 멸시를 해도 "탄실은 얼른 집으로 돌아가서 산월을 '어머니, 어머니' 하기에는 얼른 싫었다. 그는 산월이를 무엇인지 어머니라고 부르기가 꺼리었다. 하나 탄실은 결코 그 모친을 진심으로 싫어하는 것이 아니고 다만 「첩의 딸」,「기생의 딸」이란 말이 듣기 싫었다."(「탄실이와 주영이」,『김명순』, p. 181) 친어머니가 기생이라는 이유로 인해 비롯된 친어머니에 대한 애증의 관계에서 그녀는 어린시절에 이미 분열을 경험한다. 한국적인 맥락에 대한 아무런 이해가 없이 들어온 기독교의 교리 역시 그녀의 죄의식과 그로 인한 분열에 한몫을 했다. 서얼제도의 피해자이자 축첩제도의 희생양이면서도 명순은 신분이 높은 아버지와 가부장제가 인정하는 제도적인 어머니인 적모를 받아들여 자신의 신분상층을 소망한다. 적모야말로 그녀가 소망하는 것을 줄 수 있는 강력한 어머니로 간주하여 친모를 대체하는 위치에 적모를 세우게 된다. 하지만 명순은 친모가 일찍 죽게 되자 부재하는 어머니로 인해 해소되지 않는 애도와 그리움을 후일 그녀의 시에서 절절히 드러내게 된다. 명예심 많고 지식욕이 강했던 명순은 12세에 관립여자고보에 진학한 후 '字典'이라는 별명을 들을 정도로 열심히 공부한다. 명순은 봉건적인 신분질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공부를 택한다. 여기서부터 봉건적인 신분질서로부터 스스로를 단절하려는 근대적인 자의식과 기생의 딸로서 경험한 수모로 인한 여성적인 자의식이 싹트기 시작하게 된다. 이런 자의식은 1910년대 후반부터 20년대 중반에 이르기까지 신지식인층에 의해 외세 지배하에서의 '실력양성운동론'이 이론화되면서 식민치하에서 비롯된 민족적인 각성과 반봉건의식이 싹트게 되는 시대적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았다. 자신의 결함, 즉 기생의 피가 흐른다는 그런 결함을 감추기 위해서라도 정숙해야한다는 자기검열은 그녀의 시 [追憶]같은 탁월한 시와 [斷腸]에 잘 드러나있다. "漢江이미쳐 귀한님타신배를 삼켯너니라/오실듯오실 듯이 드놉흔내마음에/별고흔밤에 落花인듯억해서 치마를펴고서 한아름밧건마는 허전한이모양을/사람의말이 계집들의젊음만 바란다거니 행혀나말을마라 네 번목메든때를/곤한다리를 락산밋셩허리에 쉬여지라고 어스렁져녁때를 길일허우럿서라/帝王에게도 허락안될내정조 뭇입이되니 산이야재되려문 바다야불타려문/가든사공아 여긔는복판이나 고만져어라 하늘에별따라서 바다에불꼿하나/치켜든눈을 안으로듸리보매 세상이 和해 하늘과땅과빗이 聖스런노래로써"가 보여주다시피 제왕에게도 허락하지 않을 정조를 세상이 오해하고 조롱하는 것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내 안에서 별빛과 더불어 화해하여 하늘과 바다와 땅이 혼열일체가 되면서 느끼는 성스러움을 노래하고 있다. [追憶]에서는 "적은금방울소리에 어린미듬에 도라가면은/가시덩굴에서 능금을못딴다고 순결치못한쳐녀는 믜웁다고햇지요"라고 노래한다. 이 시에서 보다시피 그녀는 정숙하려고 노력했지만 가시덩굴에서는 능금을 못 따고 순결치 못한 처녀는 사랑받지 못한다는 것이 세인의 눈이고 그것이 자기 시대를 지배하는 전통적인 도덕이라는 천연덕스런 얼굴을 하고 있으므로 그것을 초월하려는 의지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단죄의 목소리는 마치 "날센 장검과 가태서 「네몸의 썩은 것은 잇는대로 다-찍으라!」"라는 호통으로 되돌아온다. 부패한 육신으로 내리찍히는 날카로운 검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명순의 노력은 남성들의 검이자 펜인 글쓰기로 이행된다. 그녀는 자신을 여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남성적인 호사였던 지식으로 자신의 혈통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고 처음에는 생각하였던 것같다. 이처럼 그녀에게 강박으로 남은 순결의식은 모친에 대한 보상심리에서 비롯된 것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기독교학교를 다녔다는 것과도 무관하지 않다. 하지만 일본유학을 통해 접근하게 된 낭만적이고 자유주의적인 서구 페미니스트인 엘렌 케이에 영향을 받으면서 근대적인 여성의식이 싹트게 되었다. 이 때 근대적인 자아의식이라는 것은 가부장적인 전통과의 급격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전통 속의 개인이 아니라 자율적인 개인으로서 세상과 주체적으로 대면하려는 주체의 노력을 의미한다. 그녀는 전근대적인 신분질서와 성질서와 철저하게 단절할 수 있는 길은 남성중심적인 성질서에 복수 하는 것이라고 믿기라도 한 것처럼 자유로운 연애에 탐닉하였다. 기생첩인 친모에 대한 수치심과 죄의식이 이와같은 강박적인 순결의식으로 남아있으면서도 근대적인 자의식을 구현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으로서의 자유연애를 내세우게 되는 것 사이에서 초래된 그녀의 혼란은 그녀의 혼란이기도 했지만, 그 당시 신여성이라고 불리었던 여성들의 혼란이기도 했다. 자유연애를 부르짖던 남성들에게는 대체로 조혼했던 본처가 있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이 첩의 위치에 머물러야 했던 혼란이 그것이었다. 그것이 신여성들의 아이러니였다. 명순이 진명여학교를 졸업하기 1년 전 여러 여자에게 관심을 보이느라 바빴던 아버지는 파산하여 빚만 남기고 사망한다. 아버지의 파산과 죽음은 기생 딸이라는 열등감을 어느정도 덜어 주었던 갑부 딸이라는 위치를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더구나 "부친의 사랑도 허사였던 것을 알았다, 자기만을 귀애하던 부친이 그 아들 정택에게만 재산을 남기고, 탄실의 것은 다 전당에 넣은 채로 운명했다."(「탄실과 주영이」, 『김명순』, p. 193) 명순의 이름으로 생명보험회사에 돈을 넣었다던 것도 그녀의 이름이 아닌 아들의 이름으로 였다. 김명순은 이제 더 이상 갑부인 아버지의 딸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만 기생의 딸일 뿐이었으며 앞에 놓인 것은 가난이었다.
2. 1916년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에 편입하여 1917년 졸업한다. 같은 해 단편 「疑心의 少女」로 『靑春』지 현상응모에 2등으로 당선한다. "17, 8 밧게 아니되든 소녀의 몸으로 일즉 최남선씨가 주재하든 청춘잡지에 의심의 소녀란 단편소설 일편을 내여, 현상응모원고 70여편 중에서 2등에 뽑히엇다." 당시 심사를 맡았던 이광수는 선후평에서 언문일치, 문학에 대한 비유희적인 엄숙한 태도, 비현실적인 관념사고를 배제한 현실재현, 권성징악을 초월한 현실묘사, 근대사상의 반영을 들어 이 작품을 칭찬하였다. 후에 이광수는 {春園, 요한交談錄}에서 이 작품을 근거도 제시하지 않은 채 일본작품의 표절작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창조동인이었던 김동인은 1940년 김명순을 회고하면서 「疑心의 少女」를 김명순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있다. 삼일운동 전후의 여성의 사회적 표랑을 표현한 「疑心의 少女」는 문학사적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 문학을 통해 구사회를 비판한 신여성의 제 일성이라 볼 수 있는 이 작품은 신여성의 자화상이었다는 점에서 사회문제뿐 아니라 여권운동적 측면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疑心의 少女」는 전통사회의 불합리한 부부관계에서 생긴 비극을 소재로한 작품으로서 봉건사회 가치관에 죽음으로 항거한 여성과 그녀의 딸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광수가 지적한 것처럼 구소설과 달리 교훈적 의도를 직접 내세우지 않았다는 점에서 이 작품은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김동인이 지적한 대로 노인과 범례가 빚는 신비적 분위기를 그것보다 더높이 평가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 당시까지 우리 소설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시도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하지 않는 여백의 처리방식은 모작의 의심을 받기에 충분히 세련된 기교이다. 「배따라기」(김동인),「소년의 비애」(이광수)「천치냐? 천재냐?」(전영택)등 우리 신문학 소설들이 일본 작품들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사실을 참고해보면 이 작품의 표절여부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는 김명순 문학연구의 최우선 과제로 여겨진다. 어쨌거나 「疑心의 少女」에서 첩에게 남편의 사랑을 빼앗기고 이혼을 해달라고 해도 이혼도 해주지 않아서 囚人처럼 생활하던 어머니는 가장 극단적인 저항의 방식으로 자결을 선택한다. 그 어머니의 딸 범례가 아버지의 집을 떠나 외할아버지 황진사와 함께 정처없는 표랑을 계속하는 것으로 작품은 끝난다. 이 작품은 그 당시 소설로서는 드물게 볼 정도로 세련되고 열려진 결말로 인해 외할아버지와 표표히 떠돌 범례의 인생행로가 과연 어떻게 될런지에 대한 궁금증을 자욱한 안개처럼 남겨놓아서 신비스런 분위기와 서늘한 아름다움을 불러일으키는 단편 소설이다. 이와같은 범례의 표랑은 당시 소위 신여성들과 작가 자신의 자화상이다. 봉건사회의 불합리에 저항한 신여성들은 아버지의 집을 뛰쳐나온 뒤 갈곳을 모른 채 표랑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온몸을 던져 구사회의 가치관에 반역을 꾀했음에도 새로운 목표를 세울 능력이 아직 부족했던 당시의 신여성들은 대부분이 불행한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는데 길 위에서 떠도는 범례의 유랑은 이러한 종말을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부장제에 두 발을 완전히 들여놓지 않았던 김명순의 경우, 이런 유랑의식은 당대의 경제적인 궁핍과 가부장적인 문화와 사회적인 편견에서 부터 비롯된 점이 많았다. 그 당시 신여성 문제에 관심이 많았던 채만식은 「人形의 집을 나와서」라는 소설을 쓰면서 여성문제를 본격적으로 조명해보고자 했다. 채만식이 임노라의 경험을 소설적으로 형상화하는데는 노신의 발언이 미친 영향을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노신은 [노라는 집을 나간 후 어떻게 되었는가]라는 강연에서 집을 뛰쳐나간 노라가 택할 길은 굶어죽는 것을 빼놓고는 두 가지 선택 밖에 없다고 했다. 말하자면 타락을 하던가 아니면 결국 집으로 되돌아가던가라고 말하면서 경제의 균등한 분배가 없는 상태에서의 참정권과 같은 여권론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었다. 자유를 얻는 대신 치루는 대가는 엄청났다. 채만식에 의하면 "노예가 되는 자유, 웃음과 아양과 정조를 파는 자유, 그렇지 아니하면 굶어죽는 자유, 또 그렇지 아니하면 자살을 해버리는 자유!"가 있었다. 여기에 덧붙여 미쳐버릴 자유가 있다. 신여성들이 처한 사회, 경제적인 한계에 대한 통찰은 대단히 보수적이고 탐미적이었던 김동인마저 인정하는 측면이 있다. 신여성들의 여성해방운동을 못마땅하게 여겼던 김동인은 "이즈음 소위 새여자라는 사람들이 온전한 자각 업시 남녀평등을 그릇 깨다러 가지고 덤뷔는 것은 아니껍지만 소위 사내라는 사람들도 그 사조를 오해하여 가지고 여자에게 참정권을 주어라 어저라 덤뷔는 것이 한심하다"라고 하면서도 그의 조롱기 섞인 목소리에서 신여성이 처한 사회적인 맥락이 보다 구체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金姸實傳」 서문에서 목표를 정하지 못한 신여성들의 실상을 그는 정확히 지적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명순을 {創造} 동인으로 영입했던 김동인, 전영택 등이 그녀에게 휠씬 가혹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것은 근대를 식민지 지식인으로 경험했던 그들의 정신세계와 결코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가난해진 김명순에게 대리 아버지였던 김유방은 서북출신 화가였으며 김동인 역시 서북출신이었다. 하지만 식민지 지식인으로서 사회적인 진출이(친일을 통해 관직에 나가지 않는 한) 거의 막혀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처음부터 잉여인간에 속했다. 그들은 세련된 교양과 지식으로 자신들의 잉여성을 포장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좌절된 삶을 관능이나 허무주의로 치장했다. 계몽주의적 선각자라는 자기 나르시시즘과 동시에 그런 선구자를 알아주지 않고 잉여인간으로 만드는 사회 속에서 절망하는 자신을 무기력한 여성의 위치에 두고 자기학대를 했다. 그들은 역사적인 조건으로 인해 거세된 인물들이었다. 20년대는 일본이 식민지 지식인들의 정치적인 불만을 무화시키려고 유화정책을 펼쳤던 탓으로 이들은 문학이나 예술에서 출구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그런 의미에서 삶이 곧 문학이자 예술일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은 탐미적인 댄디가 되어갔다. 이런 김동인에게 김명순은 {創造}를 위한 페티쉬처럼 보였을런지도 모른다. 이들 댄디들은 대체로 새롭게 유입된 소비문화를 받아들여 남산골 딸깍발이와 같은 양반기질로 상징되는 보수적인 민족주의자와는 달리 상당히 여성화된 취향을 가지고 있었다. 근대적 맥락에서 본다면 댄디라는 의미 자체가 그런 풍경을 제시하기 위한 개념이기도 하였다. 그런 창조파들에게 지적이고 아름답고 세련된 신여성 김명순은 구식여성이 풍기는 자연과 모성이라는 촌스러움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상징하는 존재였다. 댄디의 속성상 정성을 다해 유혹을 하지만 그런 유혹의 대상은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한 욕망의 대상으로 남아있게 된다. 그러므로 차갑고 초연한 그래서 칭칭감기는듯한 감상성이 배제된 건조한 미학적인 대상으로 남아있지 않는 여성은 더 이상 그들에게 매력을 주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공들여 모셔온 김명순은 유혹에 넘어가야 하면서도 결코 그런 유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했다. 온갖 유혹으로 인해 김명순이 조금이라도 허트러진 자세를 보인다면 그 순간 그들은 냉담하게 등을 돌리고 가혹하게 단죄하려고 했을 것이다. 마치 도리언 그레이들처럼. 그런 측면은 {創造} 동인으로 김명순을 끌어들일 때, 마치 그녀가 시의 여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받들어모셨던 그들의 태도에서 읽을 수 있다. "양은 불붓는 둣한 열정과 흐르는 듯한 예술적 천분이 잇서서..." (『創造』,1921, 1, 제8호, p. 115) 라는 극찬과는 달리 그 다음 호인 창조 8호에서는 단 한줄로 "망양초 김명순은 8호부터는 우리 글벗이 아닙니다"라고 기록해놓았다. 근대와 더불어 형성된 이들 신지식인들의 분열된 의식은 여성을 대할 때 가장 극적으로 연출되었다. 지주의 아들이 아닌 이상은 생계마저 아내에게 의존하는 거세되어 '여성화되고' 무기력한 인물군상이었음에도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 더욱 남성적인 치기를 부려야 했다. 게다가 식민지 지식인으로서의 선각자적 우월감과 동시에 식민지 종주국에 대한 열등감으로 인해 그런 이중적인 감정을 투사하는 장치가 여성이었다. 여성은 그들에게는 훼손될 수 없는 조국이자 자연이며 언제라도 귀향할 수 있는 정결한 공간이었다. 이런 성녀로서의 여성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면 그 순간 성녀는 창녀가 되어버린다. 소위말하는 사회주의자였던 김기진 역시 여성문제에 관한한 한 걸음도 더 나아간 태도를 찾기 어렵다. '신여성' 인물평에 실린 김기진의 「김명순씨에 대한 공개장」은 명예훼손 수준의 인신공격을 퍼붓고 있는 바 김명순에게 가해진 세인의 비난의 정도를 짐작케한다. 김동인과 김유방 등이 김명순을 그들 사이에서 상징적으로 문자적으로 교환하면서 새도-메저키즘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소위 사회주의자라고 하는 김기진 역시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식민지 지식인의 열등감과 피해의식으로 인해 그들은 자신들을 유린당한 조국이자 그런 의미에서 수동적인 여성으로 간주하게 되었다. 여성을 유린당한 조국으로 놓고 순결하기를 갈망하는 환상과 왜곡된 가부장제로 인한 모순이 가로지르는 공간이 김명순이었다.
3. 앞에서도 밝혔다시피 이 글에서는 김명순에 대한 객관적인 접근을 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에 관한 여러 자료 자체의 사실성이 의심스럽고 그 당시의 기사나 그녀를 아는 지인들의 말조차 객관성이 의심스러웠다. 그렇다면 여성의 관점에서 왜 김명순을 되살려내야 하는가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오히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가 속했던 근대 자체를 정신분석해봄으로써 '방종한' 신여성으로서의 그녀를 다시 맥락화하고 싶었다. 근대 초기를 신여성의 선두주자로서 살다간 김명순은 그녀의 삶 자체가 시였고 문학이었다. 작품없는 문학생활과 그런 문학생활이 곧 지적 허영과 방종이라는 의미에서 매도당했던 그녀는 시인으로서도 탁월한 서정시, 민족저항시를 남겨두고 있다. "북방의 처녀가 남방을 생각하면"으로 시작되는 그녀의 시 「南邦]은 김영랑의 시를 능가하는 서정시로서의 품격을 가지고 있다. 또한 "늙은병사가 잇서서/오래싸왓는지라/왼몸에 상처를 밧고는 싸홈이시러서/군기를 호미와 괭이로갈앗섯다"로 시작되는 [싸움]과 [귀여운 내수리]는 이육사, 윤동주에 앞선 저항시로 평가받아야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문학사의 뒤켠에도 끼이지 못한 채 잊혀지고 말았다. 그녀가 망각속에 정신이상으로 처참한 생애를 마칠 수밖에 없던 데에는 남성평론가들의 망각에의 적극적인 의지가 개입하지는 않았을까. 이미 정립된 문학사와 남성원로 비평가들의 말에 공손히 귀기울이면서 문학없는 문학생활을 한 김명순이라는 식으로 간주하면서 여성으로서도 시인으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앞서간 여성들을 남성의 눈으로 내재화된 남성적인 시선에서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여성의 관점에서 다시 본다면, 다시 말해 젠더의 관점을 개입해서 본다면 객관성이라는 이름 하에 온갖 남성적인 편견과 이해관계의 실타래들이 헝클어져 김명순의 이야기를 역사로 만들어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근대 지식인으로서의 남성들은 봉건적인 가부장제에 머물러 있어서 하등 손해볼 것이 없었다. 그들을 근대적인 지식인이라고 부르기조차 민망하게 구식의 아내에게 기생하면서 신여성을 첩으로 두면서도 자기네들이 마치 봉건제도와 단절한 것처럼 행동하였다. 그런 그들의 행동은 그다지 문제가 되지 않는 반면, 여성에게는 성적방종이라는 딱지만 붙으면 사회적인 금치산자가 되는 것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이런 시절에 '애정없는 결혼은 매춘'이라고 주장하면서 "양의 새끼같은 착한 여자가 아니고 이리 새끼나 호랑이 새끼"(「탄실이와 주영이」, 『김명순』, p. 171) 같은 여자가 되고 싶었던 김명순은 미치지 않을 방법이 없었다. 정신병자로 죽었다는 것 자체가 가부장제에 온몸으로 저항한 적극적인 행위로 볼 것이지, 신여성의 방종한 말로라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여성 스스로 가부장제적인 이데올로기를 내재한 탓은 아닌지 묻고 싶었다. 가부장제와 적당히 타협하지 않고 내면에 천재를 가진 여자가 있었다고 하자. 민족모순, 계급모순, 성모순, 적서차별의 모순 등 온갖 모순을 자기 속에 가지고 있는 그런 여성이 시대를 앞선 자의식과 튀는 개성과 성애를 적극적으로 표출한다면 사회적인 처벌이 뒤따를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로 인해 미치지 않으면 도리어 이상하지 않겠는가. 그녀의 파멸은 곧 가부장제에 온몸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저항한 형태이며 단순히 가부장제에 희생양인 것만은 아니다. 그녀의 비극 자체가 그녀 나름의 적극적인 저항의 흔적이며 이런 저항은 후세대 여성들의 비극을 줄여주면서도 일보 진보한 여성의식을 위한 밑거름이 된 측면은 없겠는가. 김승희의 시가 보여주다시피 순종적이고 착한 곰이 아니라 호랑이가 되고자 했던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호랑이가 되고 싶었던 그 여자, 그래서 남성의 것으로 간주된 지식과 자유와 독립을 훔치고 싶었던 여자. 그래서 가부장제에서 완전한 일탈은 자살이거나 창녀가 되는 수밖에 없었던 시절에 그녀가 택할 수 있었던 것은 제정신을 놓는 것이다. 이것은 기존질서를 파괴하려는 강력한 새디즘적인 충동이 내면화된 결과로서 자기파괴를 통해 세상을 파괴하고픈 충동의 전도된 형식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녀를 부끄럽다고 여기기에 앞서 여성인 우리 스스로가 가부장제에 공모하고 있는 측면은 없는지를 들어다보아야 할 것이다. 내 안에 살고 있는 호랑이 한 마리가 뛰쳐나올 수 있도록. 김승희가 노래한 "쑥과 마늘을 먹고/ 백일 동안 동굴속 어둠을 견디면/신시의 햇볕을 그대에게 주리라던/환웅의 약속을 기다리지 않고/스스로 햇볕의 폭포속으로/뛰어나간 호랑이/단군신화 속에서 낙제하고 단군신화 밖에서 /외출한 그녀"(김승희, 「다시 보는 단군신화」)는 바로 김명순. 단군 신화 바깥으로 뛰쳐나가 호랑이 그녀에게 인간의 몸을 입혀주는 것이 후세대 여성들이 해야할 작업은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