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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역
부산역 14:43 -> 안양역 19: 59
무궁화 호
상전벽해인 안양역
안양역은 1905년 경부선 개통과 함께 보통역으로 영업을 개시하였다. 옛 시흥의 작은 시골 동네였던 안양, 그러나 역과 함께 도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인구 증가, 역사 노후에 따라 여러 차례 역사를 신축 준공하였다.
1974년에 지어진 옛 안양역은 191㎥규모의 슬레이트 단층 역사로 수도권 전철 1호선이 개통되어 전철역으로도 역할하였으며 2001년 현대식 민자역사로 탈바꿈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역내 대형 쇼핑몰이 연계되어 안양뿐만 아니라 인근 지역의 쇼핑과 만남의 중심으로 사랑받았다. 이용객과 함께하는 안양역은 다양한 문화공연이 이루어지는 역 광장과, 환승형 터미널 등 연계교통이 편리하게 설계되어 있다.
아내와 함께 갔던 호수가 기억나는 시흥군
서면 소하리의 현재의 위치는 광명시 소하동
이라 하니 촌놈 서울에서 김서방 찾기였다.
청령포
단종의 유배행렬은 배일치(拜日峙) [강원도 영월군 한반도면 광전리와 남면 북쌍리 사이에 있는 고개 ] 를 넘고 물길을 돌아 도착한 곳이 청령포다.
서울에서 이곳까지 오는 데 이레가 걸렸다. 청령포는 3면이 서강으로 둘러싸여 반도를 이루고, 나머지 한 면은 육육봉의 층암절벽으로 막혀 있어 육지이면서도 외딴 섬이나 다름없다. 나룻배가 아니고서는 드나들 방법이 없는
천혜의 유배지인 이곳에서 단종은 두 달간
유배생활을 했다.
서강
서강은 강원도 영월군에 흐르는 강으로,
평창강과 주천강이 합쳐지는 지점부터 동강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며 ‘영월군을 동서로 가르며 흐른다’ 하여 동쪽을 동강, 서쪽을 서강으로 부른다. 그러나 이는 속칭일 뿐 공식적인 하천명은 ‘평창강’이다.
이 강은 평창강 하류에 해당되는데, 동강과는 달리 유속이 느리고 하천 폭이 넓으며 강변을 끼고 많은 마을들이 위치해 있다. 한반도면
옹정리 선암마을에서 시작하여 단종의 첫
유배지인 청령포를 감싸 안으며 영월읍 합수머리에서 동강과 만나 남한강으로 흐른다.
서강은 동강보다 물길이 순하고 잔잔한 여성적인 느낌의 강이라고도 불리며, 한반도의
모양을 닮은 선암마을, 기암절벽의 선돌, 단종의 유배지인 청령포 등의 아름다운 경관과 역사적 유적지를 품고 있다. 서강은 국가지정문화재 명승 제76호로 지정되었으며, 영월의
대표적인 관광명소 중 하나이다.
서강은 동강과 마찬가지로 맑은 물과 기암괴석이 신비한 모습을 자아내며, 각종 희귀 동식물이 서식한다. 백로, 비오리, 원앙, 수달, 어름치, 참게 등이 살고, 주변에는 호랑나비, 사향제비나비, 노랑나비, 금낭화, 은방울꽃, 가는 구절초 등이 서식하기 때문에 생태계의 보고로서 가치가 높다.
청령포 포구에서
손자 이은성과 함께 나루에서 배를 기다리고 있다
제천전력관리처 근무 시 아내 친구 부부와
함께 왔을 때에는 노젓는 배로 들어 갔는데
이제는 동력으로 움직이는 나룻배이다.
나루에서 배를 타면 청령포까지 3분 남짓 걸린다. 맑은 강물에는 고기가 노닐고 빽빽하게 늘어선 소나무가 유원지 같은 느낌은
어디까지나 청령포를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의 생각일 뿐이다. 이곳에 갇혀 꼼짝할 수 없었던 단종에게는 그야말로 창살 없는 감옥과도 같았을 것이다
단종대왕 비각
단종대왕비’는 1698년 숙종 24년에 노산묘를 장릉으로 추봉함과 동시에 세워진 비각
으로 태백산 용정에서 천제단 쪽으로 100m 정도 거리에 위치한다. 비각의 전면에는 탄허
스님의 친필로 알려져 있는 ‘단종비각’이라 쓴 현판이 걸려있으며, ‘단종대왕비’에 관한 전설도 구전되어 내려오고 있다.
단종대왕 어소
단종어소는 육간대청처럼
큰 기와집이다. 유배생활을 하던 단종이 이처럼 좋은 집에서 기거했다는 것이 어쩐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마도 홍수로 떠내려간 건물을 1996년에 새로 지으면서 제대로 된 고증 없이 올린 느낌이다.
꿈마을 우성아파트에 삐딱하게 선 소나무
엄홍도소나무
단종어소에는 특이한 소나무
한 그루가 담장 밖에서 단종어소를 향해 절을 하듯 굽은 모양새가 눈길을 끈다. 단종의 시신을 수습해 지금의 장릉에 묻은 엄홍도의 충절을 기려 '엄홍도소나무'라고 불린다.
행랑채
단종을 따라 온 궁녀와 관노가 생활하던 곳이다.
처음 단종이 유배되어 왔을 때에는 따르는
궁녀가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단종이 청령포에 도착한 지 5일이 지나자 단종을 섬기던
궁녀들 중에서 4명은 단종비 정순왕후를 따르고 6명은 영월까지 먼 길을 따라왔다. 당시
영의정 정인지가 궁녀들이 따라가 노산군을 시종하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세조에게 누차 고했으나 세조는 이를 듣지 않았다 한다.
왕관을 벗어놓고 영월땅이 웬말이냐
두견새 벗을 삼아 슬픈 노래 부르며
한양천리 바라보며 원한으로 삼년 세월
아~ 애달픈 어린 임금 장릉에 잠들었네
2절
두견새 구슬프게 지저귀는 청령포야
치솟은 기암절벽 굽이치는 물결아
말해다오 그 옛날의 단종대왕 귀양살이
아~ 오백년 오랜 역사 비각만 남아 있네
단종과 정순왕후의 천상재회
정순왕후(조선 단종의 왕비)
본관은 여산으로 전라북도 정읍군태인면(현 칠보면)에서 태어났으며, 판돈녕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영돈녕부사로 추증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 송현수(宋玹壽)의 딸이다. 어려서 아버지 송현수를 따라 한성부로 이사하였다.
성품이 공손하고 검소해 가히 종묘를 영구히 보존할 수 있는 인물이라 하여 간택되었는데, 그 배경에는 고모가 영응대군의 부인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하였다. 1454년 2월 19일(음력 1월 22일)에 열넷의 나이로 한 살 연하였던 단종과 혼인하여 왕비에 책봉되었다.
1455년, 단종이 수양대군(세조)에게 왕위를 일임하고 상왕이 되자 왕대비가 되어 의덕(懿德)의 존호를 받았다.
그러나 1457년, 성삼문, 박팽년 등 사육신이 추진하던 단종 복위 운동이 발각되자 상왕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되었고, 의덕왕대비는 군부인이 되어 궁에서 쫓겨났다.
친정마저 풍비박산 난 상태였던 그는 동대문 밖 숭인동 청룡사 근처에 초암을 짓고 시녀들과 함께 살았다. 송씨는 시녀들이 동냥해온 것으로 끼니를 잇고
염색업을 하며 어렵게 살았는데, 이를 안 세조가 집과 식량 등을 내렸으나 끝내 받지 않았다. 한편, 그를 가엾게 여긴 동네 아녀자들이 조정의 눈을 피해 그의 집으로 먹을 것을 건네주고자 시장을 조직하는 일도 있었다.
청계천에 있는 영도교(永渡橋)는 귀양 가는 단종과 정순왕후가 마지막으로 헤어진 곳으로 전해지는데, 결국 두 사람은 이승에서는 만날 수 없었다. 단종이 끝내 유배지인 영월에서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부군의 죽음을 전해 들은 송씨는 매일 아침 저녁으로 큰바위를에 올라 영월을 향해 통곡을 하며 단종의 명복을 빌었다. 이후 세조는 그에 대해 '신분은 노비이지만 노비로서 사역할 수 없게 하라'는 명을 내려 아무도 범하지 못하도록 정업원(淨業院)으로 보냈다. 정업원은 부군을 잃은 후궁들이 출궁하여 여생을 보냈던 곳이다.
후일, 영조가 친히 동망봉(東望峰)이라는 글씨를 써서 바위에 새기게 하였다. 일제강점기 때 동망봉 근처 지역이 채석장으로 쓰였으며 그 바위는 깨어져나가버렸다. 2011년 현재, 서울 종로구 낙산 근처인 이곳 동망봉 남쪽에는, 동망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들어서 있다.
한편 조선 말의 문장가이자 역사가인 김택영은 자신이 지은 야사에서 "신숙주가 그를 자신의 종으로 달라고 했다."라고 주장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반론이 많아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그는 세조의 증손이자 단종의 종손뻘인 중종(中宗) 16년인 1521년 7월 7일(음력 6월 4일), 81세의 나이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중종의 재위 초기, 사림파인 조광조 등에 의해 복위가 주장됐으나 중종은 이를 거부했다.
그뒤 현종 때부터 송시열과 김수항 등은 단종과 그의 복위를 거듭 건의했다.
그들은 세조의 단종 살해는 측근들의 오도에 휘둘린 것이며 본심은 단종 살해에 있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 건의로 1698년 12월 7일(숙종 24년 음력 11월 6일), 단종과 그는 복위되어 시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신위가 모셔졌다.
그의 별세 때에는 대군부인의 격에 따라 치러진 장례로 경기도 양주군(楊州)
군장리(群場里, 현재의 남양주시 진건읍 사릉리)에 매장됐다. 단종과 그의 복위로 종묘에 배향되면서 능호를 사릉(思陵)이라 했는데 이는 억울하게 살해된 남편을 사모(思慕)한다는 뜻에서 지은 것이다.
그의 묘소 뒤편에 심은 나무들이 단종의 능인 장릉쪽을 향해 고개숙여 자란다는 전설이 한 때 전해졌다. 무속의 신의 한 명으로 숭배됐는데, 무속에서는 그를 송씨부인 신이라 부른다.
동강
강원도 정선군 정선읍의 남쪽 가수리에서 영월군에 이르는 강.
총 길이 약 65㎞로 영월읍 동쪽을 흐르는 남한강의 별명이다.
동강이라는 하천 지명은 현지 주민이 부르는 것으로 영월읍 동쪽을 흐르는 하천이라는 뜻이다. 정식 명칭은 조양강이다.
태백시 검룡소(儉龍沼)에서 발원한 한강(漢江) 원류가 골지천(骨只川)을 이루고 북류하면서 임계면을 지나 북면 여량리의 아우라지에 이르러 황병산에서 발원한 송천(松川)과 합류한다.
이 하천은 조양강(朝陽江)을 이루고 남서류하다가 나전리에 이르러 오대산에서 발원한 오대천과 합류하여 곡류하다가 남면 가수리 수미마을에 이르러 고한읍에서 발원한 동남천(東南川)과 다시 합류한다.
이곳에서부터 동강이라는 명칭으로 불리며, 이 하천이 남서류하다가 진탄나루에 이르러 평창군 미탄면에서 발원한 미탄천(美灘川)을 합류하고, 다시 남류하다가 영월읍 덕포리에 이른다.
이 하천은 중동면 연하리에 이르러 연하천(蓮下川)을 합류하고, 하송리에서 평창강(平昌江,이른바 서강)과 합류하여 남한강 본류를 이루는데, 수미마을에서 하송리까지 약 65㎞의 구간을 동강이라 부르는 것이다.
동강 유역에는 1979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백룡동굴을 비롯해 많은 석회동굴과 기암절벽 등이 가을단풍과 어우러져 국내 최대의 비경을 이루고 있다.
한편, 이곳은 자연 생태계가 고스란히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감입곡류하천 분포 지역으로 하곡의 양안에는 유로의 발달 과정을 나타내는 하안단구, 곡류 절단에 의한 구하도, 전 윤회 지형면인 고위평탄면 등이 모식적으로 형성되어 있어 동강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지형 발달을 해석하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한다.
아울러 희귀 조류인 원앙(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까막딱따구리(천연기념물, 1973년 지정), 소쩍새(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등과 포유류인 수달(천연기념물, 1982년 지정) 등 동ㆍ식물의 보고이기도 하다.
동강은 1997년 10월 건설교통부가 댐 건설을 공식발표하면서, 환경운동단체의 댐 건설 반대운동이 일어났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1999년건설교통부에서 댐 건설을 강행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동강댐을 저지하기 위한 시민운동이 격렬하게 진행되었다. 1999년 7월 활동을 시작한 동강댐민관공동조사단이 ‘동강댐건설백지화’로 최종 연구결과를 발표하였고, 2000년 6월 5일 세계환경의 날 기념식에서 김대중 대통령이 동강댐 건설 백지화를 발표하였다. 그러나 지금도 동강댐 건설에 대한 논란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탑스텐리조트
시와별의집 - 동강시스타(時STAR) .
별빛과 반딧불이 빛나는 청정한 생명 * 생태의 요람 굽이쳐 흐르는 동강의 품안에서 펼쳐지는 자연과 인간이 그린 한폭의 수채화.. 최고의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동강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에 위치한 유러피안 스타일의 콘도미니엄으로 주변의 경관을 최대한 살린 휴양지로 치유와 휴식이 있는 사계절 가족 휴양형 생태체험 힐링스파로 동강을 찾는 이들에게 편안하면서도 건강한 휴식을 제공한다.
첫댓글 왕세자의 자세에 대한 판돈녕 이기진의 상서
공자(孔子)의 경사(敬事)에 대한 훈계에 조목이 다섯이 있는데,
주자(朱子)가 해석하기를, ‘공경스럽게 하지 않으면 믿음을 얻을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아침에는 검소하였다가도 저녁에는 사치를 하게 된다.
절용(節用)을 해야 하는데 절용하지 않으면 재물을 버리고 백성에게도 해를 끼치게 된다.
또 사랑할 줄 알아야 하는데 사람을 사랑하지 않으면 백성을 시기에
맞추어 부리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요컨대 근본은 모두가 ‘경(敬)’ 자
하나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바로 철두 철미(徹頭徹尾)하고 위아래를 통(通)하여 시종(始終)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생각하건대, 저하께서는 학문을 날로 진취시켜 주일(主一)하는 본지(本旨)에 반드시 이해와 체득이 있어 천승(千乘)의 나라를 인도하는 근본으로 삼으시리라고 여깁니다. 하우(夏禹)의 지덕(祗德)도 실은 좋지 못한 옷과 음식에서부터 시작하였고, 문왕(文王)의 의공(懿恭)도 허름한 옷을 입고 백성을 편안케 하는 일에 힘썼던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바로 신의 어리석은 심정으로 밤낮으로 저하에게 기대하는 바이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