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음 속을 걷다
이현공원에서 만난 초여름의 숨결
초여름의 햇살이 유난히 눈부시던 날이었다. 대구 서구 이현공원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먼저 초록의 냄새를 만났다. 도시의 먼지와 소음에 익숙해져 있던 마음은 나무들이 만들어 낸 녹음 속에서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높게 뻗은 나무들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고, 잎사귀들은 서로의 어깨를 스치며 여름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공원 입구에 흐드러지게 핀 금계국은 마치 작은 태양들이 땅 위에 내려앉은 듯 환하게 빛났다. 노란 꽃들이 바람 따라 흔들릴 때마다 어린 시절 시골길 풍경이 떠올랐다. 논두렁 옆에 피어 있던 들꽃과, 땀 냄새 섞인 여름 바람, 그리고 멀리서 들려오던 매미 소리까지. 사람은 결국 어떤 풍경 앞에서 자신의 시간을 다시 만나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현공원의 숲길은 참 조용했다. 나무들은 서두르지 않고 하늘을 향해 자라고 있었고, 사람들도 그 속에서는 자연스레 걸음을 늦추었다. 메타세쿼이아와 은행나무, 버드나무가 어우러진 산책길에는 초록빛 그늘이 길게 드리워져 있었다. 나는 한동안 아무 말 없이 그 길을 걸었다. 걷는다는 것은 단순히 발을 옮기는 일이 아니라 마음속 복잡한 생각들을 조금씩 내려놓는 일이라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언덕 위 꽃밭에는 붉은 꽃과 노란 꽃들이 계절의 색으로 피어 있었다. 그 가운데 서 있는 푸른 조형물은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고개 숙인 사람의 형상처럼 보이는 그 작품 앞에서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누군가는 삶 앞에서 겸손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어쩌면 인간은 자연 앞에서 가장 겸손해지는 존재인지도 모른다. 푸른 하늘과 숲, 그리고 꽃들 사이에 서 있는 조형물은 마치 인간의 외로움과 사색을 상징하는 듯했다.
공원 깊숙한 곳에서는 물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연못 위로 솟아오르는 분수는 햇살을 받아 반짝였고, 버드나무 가지는 물 위로 조용히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물줄기는 쉼 없이 솟아올랐다가 다시 아래로 떨어졌고, 그 모습은 마치 사람의 삶과도 닮아 있었다. 올라가는 순간이 있으면 내려오는 순간도 있고, 결국은 다시 흘러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못가 벤치에는 몇몇 시민들이 앉아 있었다. 어떤 이는 조용히 책을 읽고 있었고, 어떤 이는 휴대전화를 내려놓은 채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작은 돌다리를 건너며 웃음을 터뜨렸고, 나무 위 새들은 그런 풍경을 내려다보며 한가롭게 울고 있었다. 도시 속 공원은 그렇게 서로 다른 삶들이 잠시 쉬어 가는 공간이 된다.
서구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는 한낮의 햇살이 더욱 짙어져 있었다. 회관 앞 광장에는 야외조각전이 열리고 있었다. 강철로 만든 거대한 조형물들은 바람을 머금은 짐승처럼 역동적이었고, 전시장 안에는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따뜻한 작품들도 전시돼 있었다. 사람들은 작품 앞에서 오래 머물렀고, 아이들은 작품보다 자신의 그림자를 더 신기해하며 바닥 위를 뛰어다녔다.
예술은 거창한 설명보다 잠시 멈추어 바라보게 만드는 힘인지도 모른다. 이현공원의 예술은 자연 속에 스며들어 있었다. 숲과 꽃, 조각과 물소리가 따로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풍경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곳에서는 누구나 조금 더 부드러운 표정을 짓게 된다.
수국이 피어난 화단 앞에서는 초여름의 시간이 더욱 선명하게 느껴졌다. 연푸른 꽃잎은 아직 완전히 익지 않은 계절처럼 조심스럽고 맑았다. 나는 한참 동안 수국 앞에 서 있었다. 화려하지 않아도 오래 바라보게 되는 풍경이 있다. 사람의 마음도 그런 것인지 모른다. 조용하지만 오래 남는 마음.
이현공원을 걷는 동안 나는 여러 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녹음 사이로 드러난 파란 하늘은 유난히 높고 맑았다. 사람들은 늘 더 높은 곳을 향해 달려가지만, 정작 마음은 자연 속에서 가장 편안해진다. 초록 그늘 아래 서 있을 때 비로소 자신의 숨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공원을 빠져나오는 길, 금계국 꽃밭이 다시 눈에 들어왔다. 노란 꽃들은 처음 보았을 때보다 더 따뜻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계절은 늘 같은 자리로 돌아오지만 사람은 같은 마음으로 돌아오지 못한다고. 그래서 우리는 계절 속에서 자꾸만 지난 시간을 떠올리게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현공원의 초여름은 그렇게 조용히 마음속으로 스며들었다. 숲은 아무 말 없이 사람을 위로했고, 꽃들은 짧은 계절을 온몸으로 피워 내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 풍경 속에서 잠시 삶의 속도를 늦추는 법을 배웠다.
초록은 결국 쉼의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