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암 이응노 하면 아마도 〈군상〉이 가장 먼저 떠오를 것이다. 흰 종이에 수묵 또는 수묵담채로 둘, 셋 또는 수십, 수백의 '사람'들이 걷듯, 뛰듯, 춤추듯 역동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다. 멀리서 보면 점으로도 보이고 새떼처럼도 보이는 이 그림들은 고암이 1989년 작고하기 전까지, 즉 1980년대에 10여 년간 몰두한 작품들로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나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향한 노화가의 예술관이 투영된 이 작품들은 작가가 걸어온 인생 역정과 역사를 알고 보면 고개가 절로 끄덕여진다.
구한말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고암은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분단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살았고, 1958년 나이 쉰다섯에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 활동했다. 정치적으로 암울했던 시기인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으로 투옥되는 시련을 겪었다. 1977년에는 백건우, 윤정희 부부 납치 미수 사건에 연루돼 국내 입국이 불허되었으며, 결국 그리던 고향 땅을 밟지 못한 채 1989년 파리의 작업실에서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서울 호암미술관에서 자신의 대규모 회고전이 열리던 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