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177
7월5일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연중 제14주간 화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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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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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mpHgyFrP5aE
(황범중 요한 세례자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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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더 이상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실천하는 길은?>
더 이상 목이 잘리고 피를 흘리는 대박해가 없는 이 시대, 순교 영성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 하는 것은, 순교자들의 후손인 오늘 우리에게 남겨진 중차대한 과제입니다.
나와 너무나 다른 그, 정말이지 견디기 힘든 그, 해도 해도 너무한 그를 하느님의 시선으로 바라보고, 인내롭게 견뎌내며 축복해주는 일이야말로 순교 영성을 생활화하는 길입니다.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초라하고 남루한 나란 존재일지라도, 내 안에 하느님께서 현존해계시고, 내 이마에 그분의 인호가 새겨져 있으니, 각별한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존중하는 태도 역시 순교영성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내 인생을 보다 희망적, 낙관적 바라보고, 내 인생에 대한 점수를 30점, 50점, 박한 점수가 아니라, 80점, 90점, 후한 점수를 주는 것도 순교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내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내 눈 앞에 펼쳐진 열악하고 암담한 현실을 호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기꺼이 살아내는 것 역시 순교 영성을 사는 길입니다.
남과 북으로뿐 아니라, 동과 서, 남과 여, 기성세대와 신세대로 갈라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이토록 심각한 분열과 대립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인내롭게 화해와 통합의 길을 모색하는 것도 순교 영성을 구체화하는 길입니다.
오늘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을 경축하며 대한민국 1호 사제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를 묵상합니다. 오랜 고달픈 유학 생활을 끝낸 김대건 신부님께서는 조선 입국을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시는데, 그런 노력이 참으로 아이러니하고 신비스럽습니다.
조선 입국 즉시 신부님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축하연이나 감사패가 아니라 입국 즉시 체포와 투옥, 혹독한 매질과 비참한 죽음이었습니다.
꿈결조차 그리웠던 고국의 산천, 입국을 위해 그 숱한 나날들을 기다려왔던 조국인데...이제 그 고향 땅에 들어가면 기다리고 있는 것은 처참한 죽음이라니...참으로 비극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박해가 가라앉을 때까지 좀 기다렸다가 천천히 입국할 수도 있었습니다. 박해의 세월이 지나가기를 기대하면서 다른 학문을 공부할 수도 있었습니다. 아쉽지만 입국을 뒤로 좀 미루고 중국에서 사목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의 뇌리 속에는 오직 목자 없이 길 잃고 방황하는 동포들의 고통만이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목자 없어 서러운 민중들 한 가운데로 투신할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김대건 신부님의 길, 예정된 죽음의 길, 굶주림과 고문, 갖은 조롱과 처참함만이 기다리고 있는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면서 다시 한번 제가 가고 있는 길을 반성합니다.
죽기를 작정하고 시작한 사제의 길이었습니다. 양보하고 희생하는 일은 기본이라는 것을 알고 시작한 수도자의 길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그 작은 것 하나 양보하지 못하고 티격태격하는 제 모습이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 하찮은 고통 앞에서도 세상이 끝난 듯이 불평불만을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제 삶이 참으로 한심하기만 합니다.
오늘 하루 김대건 신부님처럼 죽기 살기로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살지는 못하더라고 평소보다 좀 더 희생하고 좀 더 자신에 대해 죽는 ‘작은 순교’를 실천하기를 다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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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pwXxOfHsX3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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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사제가 외로움을 선택해야만 하는 이유>
김대건 신부님의 일대기를 보면 그분은 무엇보다 선교 사제들이 입국할 길을 개척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를 위하여 포졸에게 쫓기고 얼어붙은 강을 건너고 바다를 건넜으며 지도를 그렸고 수많은 편지를 썼습니다. 이렇게 길을 내신 이유는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찾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도 당신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하셨습니다. 신자들과 예수님 사이에는 커다란 바다가 놓여있습니다. 사제들은 라파엘 호를 만들어 그리스도와 신자들을 이어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길을 내는 것은 얼마나 힘든 일일까요?
어떤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이 아이는 키 작고 운동도 못하고 공부도 못하고 사교성도 없어서 매일 혼자였습니다. 잘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자기 자신도 “난 안 돼!”라는 마음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그런데 그가 좋아하는 한 가지가 있었습니다. 만화 그리기였습니다. 만화를 그릴 때만큼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커서 만화가가 되겠다고 꿈꾸었습니다. 하지만 실상은 만화를 그리는 실력도 그리 출중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곳에서도 그의 그림을 실어주지 않고 그에게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할 만큼 한 그는 이제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자신 안에 왜 “난 안 돼!”라는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는지 돌아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다 누구도 자신에게 용기를 주는 사람이 없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만화에다 자기를 위로해주는 캐릭터를 넣었습니다. 자기보다 몸집이 커다란 로봇 고양이였습니다. 고양이는 외로워하는 작은 아이에게 이렇게 말해주었습니다.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지 마.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지 마. 네 안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너만의 보석이 분명히 들어있을 테니까.” 이 고양이가 ‘도라에몽’입니다. 그리고 이 작가는 후지코 후지오입니다. 그는 만화 안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합니다. 항상 자신을 위로해주는 도라에몽과 함께.
만약 하느님께서 후지코 후지오를 통해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여기는 아이들에게 힘을 주시고 싶으셨다면 어떻게 하셔야 했을까요? 먼저 그를 외롭게 만들고 그 외로움을 극복해가게 해야 하셨을 것입니다. 실제로 도라에몽을 통해 많은 아이가 힘을 얻습니다.
길을 닦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외로운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이 싸움을 위해 친구들을 떠나야 합니다. 이 과정을 이겨낼 때야만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의 삶이 됩니다. 사제는 이 길을 가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분명 많은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겪으셨습니다. 저는 그중에서도 가장 힘들었던 것이 여기에도, 저기에도 속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 같습니다. 중국에 있으면 조선으로 입국해야 하고, 조선에 있으면 다시 중국으로 나가는 길을 개척해야 했습니다. 이 일을 위해 부모와 가족, 친지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하는 신자들을 떠나고 그들을 고생시키기까지 해야 했습니다. 길을 개척하는 자로서 겪어야만 하는 외로움, 이것은 아버지의 필수 아이템입니다.
아버지가 가장 힘든 것은 밖에서 일하는 것일까요, 아니면 집에 돌아와도 나만 소외되는 느낌일까요? 자녀들은 엄마가 고생하는 것에 비해 아빠가 고생하는 것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엄마와 더 가깝습니다. 하지만 남모르는 고생을 많이 합니다. 그리고 가장 힘든 것은 이것을 알아주지 못하는 가족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하지만 아버지이기 때문에 이것을 이겨내야만 합니다. 신부도 아버지이기 때문에 마찬가지입니다.
MBC 예능 프로그램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22년간 돌산을 깎은 ‘마운틴맨’ 다쉬라트 만지히 씨의 사연이 공개됐습니다. 지난 1960년 인도의 한 남성 다쉬라트 만지히는 인도 비하르주 겔라우르에서 일하며 점심을 가져다줄 아내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아내는 산길을 가던 중 뜻밖의 사고를 당했습니다. 아내를 데리고 다쉬라트는 병원으로 급히 향해야만 했지만, 겔라우르에서 시내까지 직선거리 3km를 돌산이 가로막아 55km를 돌아 이동해야 했습니다. 결국 다쉬라트의 아내는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망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다쉬라트는 자기 아내와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망치와 정을 사들여 돌산을 깎기 시작했습니다. 몸이 망가져도 날이 좋지 않아도 다쉬라트는 끝내 포기하지 않았고 망치질을 계속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쉬라트는 22년 만에 길을 만드는 데 성공했고, 55km가 넘던 시내까지의 거리가 불과 3km로 단축됐습니다. 22년 동안 망치와 정으로 길을 만든 다쉬라트에게 주민들은 ‘마운틴맨’이라 부르기 시작했고, 이 이야기가 알려지면서 ‘만지히-더 마운틴 맨’이란 제목으로 영화화됐습니다.
만지히는 산에 길을 내기 위해 마을 사람에게도, 또 이웃 마을에도 이방인이 되는 것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그 노력으로 두 마을 사람이 쉽게 만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비웃던 모든 사람이 그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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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세상의 천재, 천국의 바보>
한 연구에서 초등학교 교사들에게 가장 마음에 드는 학생들과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의 목록을 작성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두 집단의 학생들을 여러 가지 특성에 따라 점수를 매기도록 했습니다.
조사 결과 교사들이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들은 자기 스스로 규정을 만드는 이른바 비순응자들이었습니다. 기존 체계에 의문을 품고 새로운 시스템을 꿈꾸는 이들이었던 것입니다.
교사들은 이렇게 도발적이면서도 창의적인 학생들은 좋아하지 않았고 순응하고 머리 좋은 학생들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바꾸는 이들 대부분은 순응하는 학생들이 아닌 비순응자들이었습니다.
심리학자 엘렌 위너(Ellen Winner)는 신동이나 천재들은 어른이 되면 자기 분야에서 전문가가 되고 자기 조직에서 지도자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신동들 가운데 아주 극소수만이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창의력을 발휘한다.” 고 말합니다.
신동들은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평범한 방식으로 사용하지만, 세상을 변화시키는 사람들은 자신의 평범한 능력을 천재적으로 발휘합니다.
예를 들면 천재들은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가 되지만 비순응자들은 사람들이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고장 난 의료체계를 바꾸기 위해 싸운다는 것입니다.
천재들은 불합리한 법을 바꾸기 위해 애쓰기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지는 법을 위반한 고객들을 변호하는 변호사가 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불합리한 법에 맞서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퓰리처상을 수상한 역사학자 잭 래코브(Jack Rackove)는 미국의 독립선언문에 서명한 이들은 혁명가적 기질이 전혀 없는 이들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두려움에 맞설 용기가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이들은 적응력이 강한 천재들이기보다는 의심을 품고 편한 자리에서 내려와 아슬아슬한 모험을 즐길 줄 아는 용기 있는 이들이었습니다. [참조: ‘오리지널스; 1장 창조적 파괴’, 애덤 그랜트, 한국경제신문]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대축일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체력도 약했고 공부도 함께 갔던 최방제, 최양업 신학생보다 뛰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결국엔 가장 먼저 사제가 되었고 복음을 전하기 위해 가장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당연히 믿음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심문하던 관장이 “왜 왕명을 거슬러 그 종교를 믿는 거요. 그 교를 버리시오.”라고 말하자, “나는 그 교가 참되기 때문에 믿는 거요. 그 교는 천주를 공경하도록 나를 가르치고 나를 영원한 행복으로 인도해주오. 배교하기를 거부하오.”라고 대답했습니다.
관장은 시대에 순응하는 엘리트였습니다.기존체제에 가장 잘 순응하는 이들은 엘리트라 불립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은 더 천재였습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랐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천재라도 하느님의 뜻에 다다를 수는 없습니다. 스티븐 호킹도 평생 천재소리를 들었지만 우주인이 있을 수 있다고는 말했지만 신은 없다는 결론을 내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처럼 천재가 아니어도 하느님이 계심을 압니다. 자신의 머리를 믿는 이들은 세상에선 인정받을 수 있어도 거기까지입니다.
자신을 박해하는 이들을 위해 기도해주시는 김대건 신부님의 이런 지혜를 그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관장님, 천주님의 사랑을 위해 고문을 받도록 해준 데 대해 감사드리오. 천주께서 당신을 더 높은 벼슬에 오르게 하여 그 은혜를 갚아주시기를 기원하오.”
아마 바보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이 세상에서는 어리석음이지만 우리에게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입니다. 사람의 머리로 다다를 수 없는 하느님의 지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나의 머리에 의지하지 않고 하느님의 영에 의지할 때 나는 천재라는 인간들보다 훨씬 지혜로우신 하느님의 영을 따르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면 이 세상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체제에서 벗어나 참 지혜의 삶을 살게 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돈과 쾌락과 명예를 좇지만 성령께서는 가난과 절제와 멸시와 박해의 가치를 알게 하십니다. 그래서 김대건 신부님이 마지막으로 신자들에게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하는 신자 여러분, 이런 환난의 때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돌보심을 빌어 삼구(三仇: 세속, 육신, 마귀)를 대적하십시오. 박해를 참아 받아 주님께 영광을 드리고, 여러분들의 영혼을 위한 큰일을 도모하십시오.” [출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와 가경자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삶과 영성’, CBCK 시복시성 위원회]
현명하고 현명하다는 사람들도 세상의 속임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머리를 믿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해 순응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당신을 믿는 이들을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밟고 천국으로 오르는 길로 안내합니다.
세상에서 천재보다 천국의 바보가 훨씬 지혜롭습니다. 믿음만 있다면 아무리 바보라도 성령의 지혜로 삽니다. 세상의 천재는 아무리 똑똑해도 아주 작은 성령의 지혜의 조각에도 다다르지 못합니다.
성령의 지혜는 세상의 어리석음입니다. 그런 성령을 택하는 것이 순교의 길이요, 참 지혜의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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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7월5일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기념일]
한국 최초의 사제로서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1821년 8월 21일 충남 당진군 우강면 송산리(솔뫼)에서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와 어머니 고 울술라 사이에서 출생하셨다. 6살 때 박해를 피해 경기도 용인시 남곡리의 골배마실로 이사를 하고 1836년 은이 공소에서 온 세례를 받으셨다. 그해 12월 모방 나 신부에 의해 최양업 토마스와 최방제 프란치스코와 함께 마카오 유학길에 오르니 16세였다. 1844년 12월 15일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고 1845년 1월 조국에 몰래 입국하였다가 다시 4월에 주교와 신부를 영입하기 위하여 10여 일의 항해 후 상해에 도착한다.
1845년 8월17일 상해 근처 김가항에서 페레올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 되니 한국교회 최초의 사제가 되었고 그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해 10월 12일 주교와 신부를 모시고 충청도 나바위에 무사히 입국하였다. 8개월 동안 국내에서 사목활동을 하던 중 1846년 6월 5일 몰래 출항하려다 황해의 순위도 부근에서 체포되어 9월 16일 새남터에서 참수되어 군문 효수 형을 당하니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1925년 비오 11세에 의해 로마에서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에서 성인으로 시성 되었다.
복음: 마태 10,17-22: 박해를 각오하여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종류의 싸움을 준비시키신다. 그분 때문에 신앙 때문에 제자들은 부당한 대우와 형벌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하신다. 이것은 선을 위해 악을 참고 견딜 때 승리가 있다는 것을 가르치시는 말씀이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정말 가치가 있는 것인지 따져보지 않았다. 그들은 그대로 순종하였다. 그들이 순종한 것은 어떤 무서운 일이 닥친다 해도, 그것을 견디어낼 수 있는 더 많은 은총을 받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17절) 유다인들은 이렇게 하는 것이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위한 일인 양, 회당에서 그들을 채찍질 할 것이다. 기도와 찬양을 바치고 성경을 읽는 그곳에서 사도들을 처벌할 것이다. 사실 사도들이 겪은 고통은 하느님께 바치는 희생 제물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19-20절)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큰 위안을 주시는 말씀이다. “말하는 이는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라고 하셨다. 즉 사도들은 하느님의 영 없이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21절) 한 집안의 가족들이 서로 다툴 것이다. 이것은 꼭 가족들이라는 말이 아니라, 인간은 부모와 친척으로 불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에는 사람들이 일치하고 있었지만, 이 믿음 때문에 사악한 믿음과 충돌한다는 뜻이다. 그 사악한 믿음 앞에서 우리의 신앙을 증언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22절) 앞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 만나게 될 사람들은 아마 이러한 사람들이라고 하시는 것 같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시작은 많이 하지만 끝에까지 가는 이는 별로 없기 때문이다. 은총으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니고서는 아무도 끝까지 견디어 낼 수 없다.
영광스러운 것은 어떤 좋은 일을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아름답게 끝맺는 것이다. 이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그 끝에 이를 수 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되었으니 과거를 돌아보지 말고 우리의 마지막을 생각하라고 하신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시는 이유이다. 우리의 마지막 순간까지의 신앙을 묵상하고 항구하여야 한다는 말씀이다.
김대건 신부님은 인간의 본 모습을 잘 깨닫고, 알고 사랑한 분이시며, 하느님께 자신의 목숨을 바쳐 사랑한 죽기까지 효애를 드린 분이시다. 끝까지 항구한 분이시다. 우리도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과 같은 항구한 믿음과 온갖 박해도 이길 수 있는 주님의 은총을 청하도록 하여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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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의 ‘박해 예고 말씀’에 대해서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신앙인은 항상, 무조건, 심한 박해를 받게 되는가? 정말로 그렇다면 어떻게 복음 선포 활동을 할 수 있겠는가? (“신앙생활은 무조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는 생활인가?”로 바꿔서 물을 수도 있습니다. 정말로 그렇게 무조건 고난의 가시밭길을 걸어가야 한다면, 또는 줄곧 십자가의 길만 걸어가야 한다면, 어떻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겠는가?)
항상, 무조건, 박해를 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사도행전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찬미하며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었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들의 모임에 구원받을 이들을 보태어 주셨다.”(사도 2,47)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 5,13ㄴ-14) (온 백성에게서 호감을 얻고, 백성이 사도들을 존경하던 시기는 박해를 받지 않고 평화를 누리던 시기였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경우를 보면, 평생 수많은 박해를 받았지만, 언제나 어디서나 항상 박해를 받았던 것은 아닙니다. “그곳 유다인들은 테살로니카의 유다인들보다 점잖아서 말씀을 아주 기꺼이 받아들이고, 그것이 사실인지 알아보려고 날마다 성경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그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믿게 되었다. 지체 높은 그리스 여자들과 남자들 가운데에서도 믿게 된 사람이 적지 않았다.”(사도 17,11-12)
<교회 전체 역사를 보면 박해를 받은 시기보다 안 받은 시기가 더 많습니다. 지금의 한국 교회도 옛날과 같은 박해는 받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데 박해를 받으면 신앙을 포기하는 일이 많고, 박해가 없으면 자만심에 빠지는 일이 많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개인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항상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는 것은 아닙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편안할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힘들면 신앙생활을 중단하는 때도 있고, 편안하면 방심하는 때도 있습니다. 힘들든지 편안하든지 간에 변함없이 꾸준히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이 참된 신앙인입니다.>
“사람들을 조심하여라. 그들이 너희를 의회에 넘기고 회당에서 채찍질할 것이다.”(마태 10,17)
여기서 “사람들을 조심하여라.”라는 말씀은, 글자 그대로 사람들을 조심하라는 뜻이 아니라, 박해 때문에 신앙을 버리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뜻입니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구원사업의 대상이고, 우리의 선교 활동의 대상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을 조심해서 피한다면, 그것은 복음 선포 활동을 안 하겠다는 것이고, 그러면 그것은 교회의 존재 의미를 잃어버리는 일이 됩니다. (안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구원을 갈망하면서, 누군가가 복음을 전해 주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또 너희는 나 때문에 총독들과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너희에게 일러 주실 것이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 형제가 형제를 넘겨 죽게 하고 아버지가 자식을 그렇게 하며, 자식들도 부모를 거슬러 일어나 죽게 할 것이다. 그리고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 10,18-22)
“증언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가 오히려 신앙을 증언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는 뜻이기도 하고, 박해를 받아도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중단하지 말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걱정하지 마라.”라는 말씀은, 인간적인 말재주로 신앙을 증언하려고 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일은, 인간적인 지식이나 말재주로 하는 일이 아니라 믿음으로(신념으로) 하는 일입니다. “일러 주실 것이다.” 라는 말씀은, 박해 상황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증언하고 복음을 선포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성령께서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사실 말하는 이는 너희가 아니라 너희 안에서 말씀하시는 아버지의 영이시다.”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이 아무 말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도 성령께서 다 말씀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노력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신다는 뜻입니다. <그 도움을 받으려면 신앙인답게 살아야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21절에 언급된 ‘가족의 박해’는, 모든 가족이 박해자가 된다는 뜻이 아니라, 가정 안에서도 박해가 일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가정이 안식처와 피난처가 되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혈육에 대한 사랑보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어떤 신념이 더 강하면 그런 일이 생길 수도 있을 텐데, “어찌 가족이 그럴 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실제로 옛날의 박해시대 때에는 권력자들의 박해보다 가족의 박해가 더 고통스러웠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성가정을 이루는 것은 대단히 큰 은총입니다.>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에서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모든 사람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박해자들이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해서 박해를 하는 것을 뜻하는 말입니다.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박해를 받아도 죽지 않게 해 주겠다는 약속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는 박해가 있든지 없든지, 유혹이 있든지 없든지, 어떤 인생을 살든지 간에 잘 견디고 끝까지 가야 합니다. (‘끝까지’는 ‘죽을 때까지’입니다.) 중간에 포기하는 것은 처음부터 출발하지 않은 것보다 더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신념을, 또 자신의 믿음과 희망을 중간에 꺾는 일이기 때문이고, 조금만 더 참고 견디면 얻게 될 궁극적인 은총을, 즉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나중에 후회만 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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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고, 복음을 전하셨고, 죽으셨지만 부활하신 곳이기 때문입니다. 베들레헴은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곳입니다. 성모님의 순명과 요셉 성인의 순명이 만나서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곳입니다. 나자렛은 어린 시절 예수님께서 부모님께 순명하며 꿈을 키운 곳입니다. 요르단 강은 예수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하느님으로부터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라고 선포하신 곳입니다. 광야는 예수님께서 40일간 단식하시고, 사탄으로부터 유혹을 받았지만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유혹을 물리친 곳입니다. 가나는 예수님께서 성모님의 청을 받아들여 처음으로 표징을 일으킨 곳입니다. 갈릴래아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신 곳입니다. 제자들을 부르신 곳입니다. 많은 표징과 가르침으로 새로운 권위를 드러내신 곳입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곳입니다. 무참하게 굴욕을 받으신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곳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입니다.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통해서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것은 신앙인들에게는 기쁨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의 발자취를 따라서 순례를 가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기 때문입니다. 성지를 순례했다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 가신 길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백견이 불여일행이기 때문입니다. 김대건 신부가 태어난 곳은 솔뫼입니다. 솔뫼는 소나무 숲이 청청하다는 뜻을 지닌 송산(松山)의 우리말입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충청도에서 제일 좋은 땅'이라고 했던 솔뫼는 김대건 성인이 태어난 생가 터일 뿐 아니라 증조부 김진후(비오, 1814년 순교)를 시작으로 4대에 걸쳐 순교자 11위를 낸 성지입니다. 한국을 방문하셨던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솔뫼를 방문하셨습니다. 성지는 2004년에 복원한 성인의 생가와 함께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기념관, 소나무 그늘 아래 서 있는 김대건 신부 동상 및 기념탑 등으로 조성됐습니다. 기념관은 성당을 비롯해 성인의 생애와 사목 활동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김대건관, 대전교구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주는 내포교회관, 기증 유품실, 소영상관 등으로 이뤄졌습니다. 김대건 성인의 삶과 신앙을 보고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습니다.
솔뫼에서 태어난 성인이 순교로 생을 마감한 곳은 서울 새남터입니다. 새남터에서 순교한 분은 김대건 신부님뿐만이 아닙니다. 한국교회가 낳은 순교 성직자 14명 가운데 11명이 이곳에서 순교하였습니다. 그리고 11명 가운데 8명이 성인품에 올랐습니다. 성 앵베르 주교와 성 모방ㆍ샤스탕 신부님이 새남터에서 순교하였습니다. 새남터에는 현재 이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습니다. 전통 한옥 양식으로 세워진 새남터성당에서 꼭 둘러봐야 할 곳은 2006년 문을 연 '새남터 기념관'입니다. 모두 4개 공간으로 이뤄진 기념관에서 '도입 공간'(입구)은 새남터성지 역사와 103위성인 성화를, '전시 공간'은 천주교 수용과 창설, 박해 및 순교과정 유물들을 전시했습니다. 또 '추모의 장'은 김대건 신부 등 성직자 14인의 흉상과 부조 및 추모대가 있습니다. '체험 및 교육 공간'은 김대건 성인 유해를 모신 조배실과 영상물 상영실, 박해 체험 공간 등으로 꾸며졌습니다.
경기도 안성 산골짜기에 있는 미리내는 성인이 묻힌 곳입니다. 당시 대역죄로 처형당한 김 신부님의 유해를 거둔다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습니다. 성인이 순교한 지 40일이 지난 후 목숨을 걸고 성인 유해를 거둔 이가 있었으니, 바로 이민식 빈첸시오(1829∼1921)입니다. 미리내는 다름 아닌 이민식의 고향입니다. 성인이 미리내에 묻힌 사연입니다. 미리내(은하수의 우리말)는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신자들 집에서 흘러나오는 불빛들이 달빛 아래 냇물과 어우러져 은하수처럼 보였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경당 앞에 있는 네 개의 묘 가운데 성인의 묘는 왼쪽에서 두 번째입니다. 성인의 왼쪽은 강도영 신부, 오른쪽은 차례대로 페레올 주교ㆍ최문식 신부의 묘입니다. 묘역 위편에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어머니 고 우술라와 이민식 빈첸시오의 묘가 있습니다.
성인이 사제품을 받고 조선에 들어와 붙잡힐 때까지 활동한 기간은 반년 남짓입니다. 짧았던 만큼 성인의 자취가 남은 곳은 많지 않습니다. 나바위와 용수리 포구는 성인의 조선 입국과 관련된 성지입니다. 나바위는 성인이 1845년 제3대 조선교구장 페레올 주교와 함께 서해를 통해 귀국하면서 첫발을 디딘 곳입니다. 이곳에는 성인 일행이 한국 땅을 밟은 것을 기념해 세운 나바위성당이 있습니다. 일행은 나바위에 도착하기 전 바다에서 풍랑을 만났습니다. 표류하던 일행이 도착한 곳이 바로 제주도 용수리 포구입니다. 일행은 이곳에서 며칠간 머물면서 배를 수리하고 먹을 것을 구한 뒤 다시 뱃길에 올랐습니다. 제주교구는 이를 기념해 용수리 해안에 김대건 신부 제주표착 기념관과 기념 성당을 세웠고, 성인 일행이 타고 왔던 라파엘호를 복원해 전시하고 있습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은 옥중에서 신자들에게, 주교님에게 편지를 보냈습니다. 신부님의 굳은 신앙과 열정을 볼 수 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편지 중에서 최양업 신부님에게 어머니를 부탁하는 내용을 읽으면서 눈물이 났습니다. “머지않아 천당에서 영원하신 성부 대전에서 서로 만나 뵙기를 바랍니다. 저를 대신하여 모든 공경하올 신부님들께도 인사드려 주시기를 청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한 저는 그리스도의 권능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혹독한 형벌을 끝까지 용감하게 이겨내도록 도와주시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의 환난을 굽어보소서.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주여, 누가 감당할 수 있으리이까. 지극히 사랑하는 나의 형제 토마스여, 잘 있게. 이후 천당에서 다시 만나세. 그리고 내 어머니 우르술라를 특별히 돌보아 주기를 그대에게 부탁하네. 지극히 공경하올 신부님들, 안녕히 계십시오. 무익하고 부당한 종,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조선 선교지의 교황 파견 선교사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편안하고 쉬운 길보다는 어렵고 힘든 길 그러나 보람되고 가치 있는 삶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 길은 때로 참을 수 없는 고통과 시련을 줍니다. 하지만 그 고통과 시련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그 인내는 시련을 이겨내는 끈기를 키워주고 그러한 끈기는 영원한 삶을 갈망하는 희망을 낳습니다. 또한 그 희망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하느님의 사랑을 부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들 또한 김대건 안드레아 성인께서 걸어가신 신앙의 길, 희생의 길, 순교의 길을 끝까지 따라가야 하겠습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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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대전교구 김인호 루카 신부님]
제자들을 파견하며 들려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복음 선포에 대한 두 가지 사실을 알려 줍니다. 첫째, 복음 선포는 혹독한 방해와 맞닥뜨리게 되는데 그 방해의 주인공이 ‘사람’이라는 점, 둘째, 복음 선포는 어떠한 방해에도 힘을 주시는 “아버지의 영”께서 계시기에 멈추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늘 기념하는 성 김대건 신부님에게서 현실이 된 예수님의 말씀을 만납니다. 복음이 전하는 제자들의 처지와 승리를 교회에서 본 신부님은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고 싸우나 능히 이기지 못할지니, …… 성교 두루 무수 간난 중에 자라왔습니다.”(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간 스물한 번째 편지 [마지막 회유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탄생 200주년 희년살이 안내서』, 39면 참조)라고 하셨고, 아울러 당신이 천주교인이냐고 묻는 관장의 질문에 “나는 천주교인이오. …… 나는 배교하기를 거부하오.”(김대건 신부님의 옥중 서간 스무 번째 편지, 29면)라고 답하시며 무엇을 말해야 할지 일러 주시는 ‘아버지의 영’을 드러내십니다.
복음을 선포하고 실천하는 삶은 일상에서 환호가 아닌 방해를 만납니다. 방해가 두려워 시작을 못 할 때가 있고 적당히 흉내만 낼 때도 있습니다.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방해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이는 방해의 순간에 오시는 아버지의 영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에 희망이 아니라 두려움만을 보는 사람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희망을 안고 담대하게 살아가는 신앙인이 되게 해 달라고 성 김대건 신부님께 특별한 전구를 청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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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노성호 요한보스코 주교님]
<주님은 언변의 마술사>
말주변도 없고, 사람들 앞에만 서면 얼굴부터 붉어지는 인물의 전형이 바로 나다. 왜 그리 멋쩍고 창피하던지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무엇인가 발표할라치면 원고를 준비하고 충분히 연습한 끝에 시도하는데, 그래도 그 시간이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학창시절에는 ‘어떻게 이다음에 사제가 되어 강론을 할 수 있을까?’하고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일은 부제가 된 이후에 벌어지기 시작했다.
부제품을 받고 처음 강론하던 날,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원고를 준비하고 강론대에 섰는데 긴장한 탓에 신자석에 앉은 교우들의 얼굴은 고사하고 강론 원고도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마음을 가다듬고 무작정 입을 열었다.
시작 부분은 좀 얼버무리고 주제에서 어긋나는가 싶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점점 교우들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고 원고 없이도 강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놀라웠다.
사제가 된 후에 하느님의 은총이 나에게 내리고 있다는 것을 가장 크게 느끼는 때는 강론할 때인 것 같다. 강론 준비를 잘하는 날도 있지만 때로는 이런저런 일들에 치이다가 그만 준비도 못하고 미사를 봉헌하는 경우도 있다.
처음에는 좀 당황스럽고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엔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그때마다 내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일러주실 거라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믿음을 빌미로 강론 준비를 게을리하는 것은 아니지만, 나한테는 하느님께서 참으로 살아 계시며 당신 일을 하실 때 나를 당신 도구로 쓰고 계신다는 것에 대한 깊은 확신이 생겼다.
신앙인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해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다. 때로는 복음을 전할 때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고 두려울 때도 있을 것이다.
또한 그들의 냉대와 무관심 속에서 의기소침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가 없다. 끝까지 견디는 이한테는 구원이 따를 것이고, 주님은 우리의 커다란 힘이 되어주실 것이며 하느님의 영이 우리 안에서 우리 대신 말씀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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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염철호 요한 신부님]
요셉 덕분에 야곱의 가족은 이집트 땅 고센에 정착합니다. 나일강 삼각주에 있는 고센 땅은 이집트에서도 가장 비옥한 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나 야곱은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이 두려웠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아브라함과 이사악이 영원한 하느님이신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던 브에르 세바에서(창세기 21장 33절 / 26장 25절 참조) 하느님께 제사를 드립니다.
그러자 하느님께서 나타나시어 야곱의 이름을 직접 부르시며, 이집트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십니다. 왜냐하면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그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받을 박해를 생각하시며 “뱀처럼 슬기롭게” 살라고 권고하십니다.
이 말씀은 박해를 피하여 대충 타협하며 살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을 따르다 보면 미움을 받을 각오도 해야 하고, 박해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물론, 일부러 박해를 받으려고 찾아다닐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목표는 박해가 아니라 주님의 뜻에 따라 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하여 우리는 뱀처럼 슬기로워야 합니다. 사실, 박해자들이 박해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세상이 박해하고 거부하는 것은 주님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일꾼일 따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박해하는 이들 앞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주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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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약해질 때와 강해질 때>
엄격한 선교수행지침(10,5-15)을 하달하신 예수께서는 제자들의 파견을 마치 양들을 이리들 가운데로 보내는 것에 비유하신다. 이 비유는 장차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지를 미리 암시하는 한 폭의 그림과도 같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살아 계시는 동안 당장에 이와 같은 일이 나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의 죽음 이후에 복음선포자와 신자들이 당하게 될 박해를 미리 예고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받게 될 수난과 죽음에 대한 예고이다.
오늘 복음은 두 가지 형태의 박해 예고와 두 가지 모양의 위로 약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는 유대인들과 로마제국으로부터의 박해 예고(17-18절)와 성령에 의한 변호보장 약속이며(20절), 둘째는 가족의 고발과 세상으로부터 받게 될 미움예고(21-22절)와 종말론적 구원보장 약속(23절)이 그것이다.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에 빛나는 승리나 커다란 효과가 보장되기 보다는 처절한 박해가 준비되어 있음은 예수님 스스로가 그런 박해를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스승께서 그 길을 걸어가셨고, 제자들도 스승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길은 예수님을 따르는 모든 자들이 비켜갈 수 없는 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길은 혼자 가야하는 외로운 길이 아니다. 하느님의 성령과 예수님의 성령께서 함께 가시며, 그 길 끝에는 아버지의 품과 천상의 월계관이 기다리고 있다.
그 마지막 길을 가는 동안 예수님의 복음은 세상의 무관심과 적대심을 만나게 된다. 복음의 입장에서 볼 때 적대심이 무관심보다는 차라리 더 낫다. 적대심은 박해를 불러일으키고, 박해는 복음을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 때 복음이 취하는 태도는 박해자의 태도와는 정반대이다. 이것이 바로 양과 이리의 다른 점이다. 복음의 강점(强點)은 오히려 어린양과 같은 약함이다. 이것이 곧 오늘날 교회가 세상에 대하여 취해야 하는 자세이다.
이는 재물과 명예와 권력에는 약하지만 청빈과 사랑과 봉사에는 강하다는 말이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교회는 그 동안 세상과의 법적 조약이나 협정을 통하여 확고한 지위와 특혜를 영위하고 누려왔으며, ‘신성모독’이나 ‘종교적 타부’ 등의 방패를 세상에 내걸고 온갖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왔으며, 지금도 많은 부분 그렇게 하고 있다.
신부(神父)인 나 자신도 그 맛에 젖어가고 있음을 보면서 복음선포자로서 복음 앞에 부끄러움을 금할 길이 없다. 교회는 자신이 인간적인 인정과 보호를 얻으면 얻을수록, 인간적 권력으로 자신을 보호하면 할수록 약해지고, 무력해지고, 별다른 의미 없는 그 무엇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이는 더 나아가 복음이 지향하는 ‘너희 중에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 하나’(마태 25,40)에 대한 관심과 연대감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다면 종국(終局)에 가서는 교회와 복음의 결별을 초래할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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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마음>
마태오 9,32-38 (말 못하는 이를 고치시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때에 사람들이 마귀 들려 말 못하는 사람 하나를 예수님께 데려왔다. 마귀가 쫓겨나자 말 못하는 이가 말을 하였다. 그러자 군중은 놀라워하며, “이런 일은 이스라엘에서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은,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음>
마음이
나를 움직입니다
열린 마음이
보게 합니다
산 마음이
다가가게 합니다
가엾은 마음이
품게 합니다
따뜻한 마음이
사랑하게 합니다
굳센 마음이
나아가게 합니다
마음이
나를 움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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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교우들 보아라>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1784년 최초의 영세자를 탄생시킨 한국천주교회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 1794년 12월23일 비로소 한국 땅에 처음으로 주문모 신부님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1801년 신유박해 때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후 1835년 조선에 입국한 모방 신부님은 방인 성직자를 양성할 목적으로 1836년 최양업, 최방제, 김대건 세 소년을 선발하여 마카오로 유학을 보냈습니다.
최방제는 그곳에서 병사하였고 김대건과 최양업은 사제로 서품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과 최양업 신부님은 서양학문을 정식으로 익힌 첫 조선인으로서 최고의 지성인답게 당시 조선 왕국의 국가 정세와 교회 사정 및 민생상태에 관하여 예리하게 관찰하였습니다. 두 분은 보고 듣고 체험한 내용을 유창한 라틴어로 써서 스승 신부님들께 보고하였습니다.
신부님께서 1845년 8월17일에 상해근교의 김가항에서 사제 서품을 받으셨습니다. 이때는 서품식이 요즘처럼 성대하지 않았습니다. 쪽배를 타고 그곳까지 간 11명만이 참석한 조촐한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날은 한국천주교 사상 가장 뜻깊은 날입니다.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사제품에 오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날이 진정 빛나는 이유는 우리 모두의 귀감이 될 만큼 명실공히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제였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탄생 200주년을 맞은 신부님의 마음을 헤아렸으면 좋겠습니다.
신부님께서는 서품을 받으시면서 무슨 생각을 하셨을까요? 15세에 영세 입교하시고 신학생으로 뽑혀 멀리 산 설고 물 설은 마카오로 떠난 그날부터 겪은 고초를 생각하며 감개무량했을 것입니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죽음의 고비를 넘겼겠습니까? 우리는 상상할 뿐이지 말로써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
분명한 것은 서품을 받으면서 그날 모든 감사를 하느님께 드리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리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신부님이 사제가 되어 고향에 돌아가면 무엇이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금의 환양이요. 개선장군같은 환영입니까? 아닙니다. 박해의 칼, 체포와 죽음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있어서 사제가 된다는 것은 어려움도 있지만 교회 내에서는 영광스럽고, 소중한 품위에 오르는 것입니다.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신분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께서 사제가 되었을 때는 사회적으로는 위험천만한 일입니다. 목숨을 바치는 순교정신, 곧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없이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안겨다 주는 일이었습니다. 명실 공히 십자가를 따르는 일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그것을 잘 아시면서도 바로 그 믿음과 순교정신으로 사제품을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목숨이 소중한 것이 아니라 한국 신자공동체가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한국땅의 복음화와 구원이 더 소중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당신의 목숨을 기꺼이 바쳐도 좋다고 생각하신 분입니다.
신부님은 자신을 위해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신 분이 아닙니다. 동포를 위해, 조국을 위해 세상에 대해서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해 1845년 10월에 배를 타고 조선의 충청도 해안에 상륙하는데 성공하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1846년 5월12일 순위도에서 잡혀 9월16일 새남터에서 순교하셨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양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바치셨습니다. 정말 어렵고 힘든 가운데 수품을 받고 조선에 입국하였지만 아깝게도 겨우 13개월 동안만 사제로 살았습니다. 그나마 2개월은 조선에 입국하기 위해 황해바다 위에서 보냈고 또 4개월은 감옥에서 지내다가 순교하셨으니 사목활동은 거의 하지 못하였습니다.
사실 한국 땅에 천주교가 들어온 것은 1784년, 지금부터 약 237년 전입니다. 당시 사회는 유교 사회였고 양반과 상놈이 구별되는 철저한 계급사회였습니다. 그리고 조상 제사에 대한 관습과 예절이 철저했던 시절입니다.
이때 천주교회의 기본 교리는 신분 계급과 조상제사라는 두 부분에 큰 충돌을 가져왔습니다.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양반 상놈 구분을 거부하며 우상 숭배의 제사를 거부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그리하여 103년 동안(신유1801, 기해1839, 병오1846, 병인1866) 산발적인 박해 속에 살아야 했고 그 와중에 한국인 첫 사제가 나왔지만 13개월 만에 목자를 잃고 만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면,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은 분명 다릅니다. 지나고 보니 신부님의 죽음은 우리에게 끊임없이 신앙을 일깨우고 있습니다. 출생하신 솔뫼, 순교하신 새남터, 묻히신 미리내는 오늘도 우리에게 신앙의 표징이 되고 있습니다.
당시의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지만 신부님께서는 더 많은 사람들을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몫을 여전히 하고 계십니다. 신부님께서는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위하여 죽으니 내 앞에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할 것입니다.”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천상에 대한 희망이 신부님을 지켜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46년까지 21통의 편지를 썼습니다. 그중 한문과 한글로 쓴 편지가 각각 한 통씩이고 그 외에는 모두 라틴어로 썼습니다. 최양업 신부님은 1842년부터 1860년까지 19통의 편지를 전부 라틴어로 썼습니다. 그런데 김대건 신부님의 편지는 대부분 사제 서품 전에 쓴 것입니다. 반면 최양업 신부님의 편지는 사제 서품 후에 쓴 것입니다.
오늘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편지를 한 통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이 편지를 통해 그분의 믿음과 하느님과 그 백성을 위한 사랑이 얼마나 간절하였는지 묵상하고 우리의 믿음을 새롭게 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스물한 번째 편지는 옥중에서 쓴 것입니다.
옥중에서 쓰신 마지막 회유문(1846년 8월말)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교우들 보아라. 우리 벗아 생각하고 생각할지어다… 온갖 세상일을 가만히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다. 이 같은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하느님)을 알지 못하면 난 보람이 없고, 있어 쓸데없고, 비록 주님의 은총으로 세상에 나고 주님의 은총으로 영세 입교하여 주님의 제자 되니 이름이 또한 귀하거니와 실이 없으면 이름을 무엇에 쓰며, 세상에 나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고 주님의 은혜를 배반하니 주님의 은혜만 입고 주님께 죄를 더하면 아니 남만 못하리.
이러한 어려운 시절을 당하여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하여 마치 용맹한 군사가 병기를 갖추고 전장에 있음 같이 하여 싸워 이길지어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돕고 아울러 주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환난을 걷기까지 기다리라.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하여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하고 더하여라….. 이런 군난 때는 주의 시험을 받아 세속과 마귀를 쳐 공덕을 크게 세울 때니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물러나지 말고 오히려 지나간 성인성녀의 자취를 가르쳐 성교회의 영광을 더하고 천주의 착실한 군사와 의자(의로운 아들)됨을 증거하고 비록 너희 몸은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 돌보고 불쌍히 여기며 주의 긍련(불쌍하고 가엾게 여기다) 하실 때를 기다리라.” 하시며 주님께 대한 믿음을 더하기를 촉구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큰 어려움도 역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니 너희가 감수 인내하여 주님을 위하고 오직 주님께 슬피 빌어 빨리 평안함을 주시기를 기다리라. 내 죽는 것이 너희 육정과 영혼대사에 어찌 거리낌이 없으랴. 그러나 하느님께서 오래지 아니하여 너희에게, 내게 비겨 더 착실한 목자를 상주실 것이니 부디 설워 말고 큰 사랑을 이뤄 한 몸같이 주를 섬기다가 한가지로 영원히 천주대전에 만나 길이 누리기를 천만천만 바란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큰 사랑과 믿음을 지키라는 간곡한 호소를 담았습니다. 혹 우리에게도 힘에 겨운 일이 생긴다면 더 큰 믿음으로 주님을 찾으시길 바랍니다. 농부가 수확을 기다리며 온갖 수고와 땀을 아끼지 않듯이 우리도 참고 견디며 천상 것에서 마음을 빼앗기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 가 되어야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17-22).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그뿐만 아니라 환난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자아내고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그리고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5,1-4). 하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우리 삶의 여정을 보면, 열심히 산다고 하는데 어려운 일이 생기기도 하고 받아들일 수 없는 실망과 좌절이 올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느님의 계획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고 그 안에서 좋은 열매를 맺게 하십니다. 따라서 다가오는 예기치 않은 어려움과 시련 속에서 주님의 안배와 섭리를 찾기 위해 기도하고 간구할 때 새 희망을 발견하게 됩니다. 김 대건 신부님의 삶은 하느님의 뜻과 세상의 일이 서로를 거스를 때 우리가 택해야 할 길이 무엇인지를 확실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시련 속에서, 억울함 안에서, 생각하지 못한 난관 앞에서 끝까지 견디며 하느님을 먼저 선택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더 좋은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만하면 됐지’,‘나도 사람인데’‘참는 것도 한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이것이 유혹입니다. 사실 천상을 바라보고 사는 이에게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인내가 행복입니다. 언젠가 천국에서 누릴 영광스러운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 흘리는 수고의 땀은 당연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께서도 눈물과 피로써 십자가를 짊어지고 세 번씩이나 넘어지면서 걸어가셨는데 우리가 아무런 수고 없이 공짜로 천국을 얻을 수는 없는 법입니다. 그러므로 인내에 인내를 더할 수 있는 은총을 간구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기뻐하는 날 되시기 바랍니다. 마음을 다하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어떤 신자분이 성경을 읽으라는 신부님의 말씀을 듣고 억지로라도 하루에 한 줄이라도 읽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리고는 매일 아침 성경을 펴서 첫눈에 들어오는 한 줄을 읽고 말씀대로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그 말씀이 마태오 복음 27장5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다는 그 은돈을 성전 안에다 내던지고 물러가서 목을 매달아 죽었다.” 그러니 아침부터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다시 찾아 읽겠다고 성경을 펼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 37절의 말씀이었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중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너무 기가 막혀 삼 세 번이다 하면서 다시 성경을 펼쳤습니다. 요한복음 13장 27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네가 하려는 일을 어서 하여라.”
우리 신자분들 중에는 오늘의 운세를 보듯, 점을 치듯 성경을 읽는 분이 계십니다. 말씀은 그렇게 읽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되는대로 눈이 가는 대로 읽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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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언젠가 지방 강의 때문에 숙소를 알아본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각 호텔에 대한 소개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습니다.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의 표현을 거의 모든 숙소에서 홍보 문구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실제로 ‘호캉스’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호텔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 방식으로 호텔에서만 지내면서 진정한 휴가를 즐깁니다. 이런 이유로 호텔 광고에 힐링, 행복, 정화 등의 단어들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는 청년이 있는데, 이 청년은 자주 호캉스를 가서 쉬고 온다고 말합니다. 처음에는 숙박비로 너무 큰 비용을 쓰는 것이 아닐까 싶었지만, 휴식으로 얻는 힘의 가치를 알기에 계속해서 이 호캉스를 즐긴다고 합니다.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 안에서 휴식은 분명히 필요합니다. 그런데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은 사실 주님 안에서 느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데 주님 안에서 이를 느끼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주말에 휴식을 주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얻으려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짜 휴식은 주님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성당에서 주님을 제대로 느낀다면, 그래서 이곳에서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 등을 체험하게 된다면 혹시 이제 ‘성캉스’(성당에서 바캉스를 보내는 휴가)라는 말이 유행하지 않을까요? 주님 안에서만 진정한 기쁨을 느꼈던 분들이 계십니다. 세상의 것을 다 뒤로 하고, 심지어 자신의 목숨까지도 주님을 위해 내어놓았습니다. 바로 순교 성인·성녀들이십니다.
오늘 우리는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 미사를 봉헌합니다.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께서는 우리나라 최초의 사제이셨습니다. 비록 사제 생활을 1년밖에 하지 못하셨지만, 신부님께서 보여주신 삶은 한국 성직자들을 비롯한 모든 교우들의 진정한 모범이 되셨습니다.
제2독서의 바오로 사도의 말씀처럼,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겼으며 심지어 환난도 자랑으로 여기셨습니다.(로마 5,2.3 참조) 주님 안에서 기쁨을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걱정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이를 통해 죽음의 위협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기쁨을 얻고 있을까요? 세상의 것에서만 힐링, 행복, 영혼의 정화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찾아보십시오. 세상에서 주는 것 이상의 참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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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순교적 삶>
-“어떻게 살 것인가?”-
어제 받은 미사예물 봉투의 거친 글씨의 두 미사지향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어느 장로와 전도사의 “시냇가 교회(노숙인들) 사목, 간경화 환자들이 많습니다. 보호기도 부탁드립니다”의 미사지향과, “위암말기로 투병중에 있는 형제를 위한” 생미사 지향이었습니다.
요즘 알게 모르게 참 많은 사람이 세상을 떠나는데 거의 내전內戰 수준입니다. 전쟁시기가 아니지만 전쟁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이런저런 사유로 죽음을 당하거나 맞이합니다.
한번뿐이 없는 소중한 삶, 저절로 “어떻게 살아야 하나?” 라는 물음에 직면하게 됩니다. 우리는 참 고맙게도 이에 대한 답을 가톨릭 교회의 살아 있는 보물인 성인들을 통해 찾습니다. 참으로 파스카의 예수님을 추종하다 순교의 죽음을 맞이한 영원한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 되는 순교 성인들입니다. “순교는 성체와의 결합이다”라는 말마디도 새롭게 떠오릅니다.
오늘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신심미사를 성대하게 봉헌합니다. 특히 작년 2021년은 성인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였고, ‘2021년 유네스코 세계 기념 인물’로 선정된 뜻 깊은 해이기도 했습니다. 참 신기한 것이 죽으셨지만 주님 안에서 살아 계신 듯, 현존감을 느끼는 성인들입니다. 말그대로 “에버 오울드, 에버 니유(ever old, ever new)늘 옛스러우면서도 늘 새롭게 우리 마음에 와닿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답을 주는 성인들입니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의 삶과 죽음도 늘 새로운 감동과 충격으로 마음에 와닿습니다. 1821년에 태어나 1846년에 순교하셨으니 만25세 참 짧은 생애였으니 성인에 비하면 저는 무려 성인의 세배를 살고 있는 셈입니다. ‘얼마나’가 아닌 ‘어떻게’ 살아야 하나에 대한 물음이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방금 부른 성인에 관한 대표적 입당성가 287장은 성인이라 일컸던 ‘천상天上의 도반道伴’같은 사제, 최민순 작사와 이문근 작곡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들을 때마다 감동을 선사합니다.
“서라벌 옛터전에 연꽃이 이울어라, 선비네 흰옷자락 어둠이 짙어갈제
진리의 찬란한 빛 그몸에 담뿍안고, 한떨기 무궁화로 피어난 님이시여.
한강수 굽이굽이 노들이 복되도다, 열두칼 서슬아래 조찰히 흘리신피
우리의 힘줄안에 벅차게 뛰노느니, 타오른 가슴마다 하늘이 푸르러라.”
순교성인들의 DNA를 전수받고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5절까지 매절마다 감동이지만 1절과 4절만 옮겨 봤습니다. 성인의 순교 20일전 마지막 스무번째, 라틴어 원본에서 번역된 유언과도 같은 감동적인 장문의 옥중 서간 일부도 나눕니다.
“저의 어머니 우르술라를 주교님께 부탁드립니다. 저의 어머니는 10년 동안 떨어져 있던 아들을 불과 며칠 동안만 만나 보았을 뿐인데 또 다시 갑작스럽게 잃고 말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저의 어머니를 잘 위로하여 주시기를 주교님께 간절히 바랍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주교님의 발아래 엎드려 지극히 사랑하올 아버지이시고 지극히 공경하올 주교님께 마지막 하직 인사를 드립니다. 이 다음에 천당에서 다시 만나 뵙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감옥에 갇힌 탁덕 김 안드레아가 올립니다.”
절박하게 마음에 와닿는 순교성인들의 죽음입니다. 죽음은 삶의 요약입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나?’ 물음은 저절로 ‘어떻게 죽어야 하나?’ 물음으로 직결됩니다. 말그대로 영적전쟁의 순교적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 자녀답게 존엄尊嚴한 인간 품위를 유지하며 한결같이 살아가는 것이 관건입니다.
늘 말씀드리는 바대로 우리 믿는 이들은 영적전쟁의 삶에서 제대가 없는, 죽어야 제대인, 살아있는 그날까지 싸워야 하는 ‘영원한 현역’의 주님의 전사들입니다. 오늘 말씀이 주님의 전사들인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 바로 하느님께 대한 궁극의 희망과 지극한 인내의 믿음입니다.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결정적 요소가 성령과 희망입니다. 제2독서 로마서가 이런 희망에 대해 좋은 깨우침을 줍니다.
“믿음으로 의롭게 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더불어 평화를 누립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영광에 참여하리라는 희망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수양을, 수양은 희망을 자아냅니다. 이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선물이 바로 신망애信望愛 향주삼덕向主三德입니다. 백절불굴의 믿음, 희망, 사랑으로 순교적 삶에 항구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성령의 힘, 하느님의 힘 덕분입니다. 오늘 복음의 두 대목이 이를 입증합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넘길 때, 어떻게 말할까, 무엇을 말할까 걱정하지 마라. 너희가 무엇을 말해야 할지, 그때에 아버지의 영이 너희에게 일러줄 것이다.---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새삼 성령은 우리의 궁극의 희망이요 지극한 인내의 믿음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임을 깨닫습니다. 이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성령과 희망, 인내의 믿음이 사라졌을 때 배은망덕한 우상숭배의 변절變節의 삶입니다. 바로 이의 반면교사가 바로 제1독서에서 은인恩人 여호야다 사제의 아들 즈카르야 예언자를 죽인 요아스임금입니다. 마지막으로 즈카르야는 순교직전 요아스 임금에게 미구에 있을 불행을 선언합니다.
“너희가 주님을 저버렸으니 주님도 너희를 저버렸다. 주님께서 보고 갚으실 것이다.”
결국은 주님을 저버렸기에 주님께 저버림을 당한, 스스로 자초한 심판의 불행한 죽음임을 깨닫습니다. 순교적 영적 삶에 비약이나 도약은 없습니다. 우리의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대로 하루하루 날마다 깨어 죽음을 눈앞에 환히 두고 살면서, 주님과 신망애信望愛의 관계를 날로 깊이함이 유일한 처방이자 답임을 깨닫습니다. 무엇보다 날마다의 이 주님의 거룩한 미사은총보다 순교적 삶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끝으로 ‘늘 읽어도 늘 새로운’ 제 좌우명 기도시, 마지막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일일일생, 하루를 평생처럼, 처음처럼, 마지막처럼 살았습니다. 저에겐 하루하루가 영원이었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이렇게 살았고, 내일도 이렇게 살 것입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찬미받으소서.”
혼자가 아닌 주님과 도반들과 함께 이런 파스카의 여정을 살아가는 우리들입니다. 문제는 나에게 있고 답은 주님께 있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을 향한 부단한 자아초월自我超越의 비움과 겸손의 순교적 삶이 유일한 처방의 답임을 깨닫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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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이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마태10,22)
<본받자, 순교자 믿음!>
오늘은 한국 천주교회 첫 번째 사제이신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신부님께서는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 부모와 함께 경기도 용인 묵리와 양지로 이주하셔서 사시다가, 1836년(15세)에 세례 받으시고 신학생으로 선발되셨습니다. 마카오에서 공부하시고 1845년(24세) 8월17일, 중국 금가항성당에서 사제서품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1846년 9월16일, 25살의 젊은 나이로 서울 새남터에서 군문효수형으로 순교하셨습니다. 1925년 7월5일에 복자품에 오르셨고, 한국천주교회 창립 200주년 해인 1984년 5월6일에 서울 여의도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주례로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순교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믿음과 삶에 대해 묵상해 봅니다. 그리고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나의 믿음과 삶에 대해서 묵상해 봅니다.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인 스물한 번째 편지는 신자들에게 보내는 편지로서 옥중서신입니다. 마지막 편지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미구에 전장에 나아갈 터이니 부디 착실히 닦아 천국에 가 만나자. 마음으로 사랑하여 잊지 못하는 신자들에게 너의 이런 난시(難時)를 당하여 부디 마음을 허실히 먹지 말고 주야로 주우를 빌어 삼구(三仇)를 대적하고 군난을 참아 받아 위주광영하고 여등(汝等)의 영원 대사를 경영하라."
천국은 환난 뒤에 있으니, 모든 환난을 이겨내고 천국에서 다시 만나자는 내용입니다.
해가 될 듯한 말 한 마디를 듣거나, 무엇을 빼앗기기만 하면 발끈하여 내내 흥분하는 우리들! 장한 순교자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앞에서 너무 초라합니다.
"주님,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믿음을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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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lkNID3njxZ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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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임금들 앞에 끌려가, 그들과 다른 민족들에게 증언할 것이다."(마태 10, 18)
이 땅의
성직자들이
참으로
행복하길
진심으로
기도드린다.
하느님께
온전히
자기자신을
내어맡기는
믿음이
가장 큰
믿음이다.
신앙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 땅의
첫 사제를
다시 만나는
축복의
시간이다.
가톨릭과
우리 역사의
만남은 그냥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뇌와
절망속에서도
끝까지
진리와 더불어
이 시간을
헤치고 나간
첫 사제의
순교가 있었다.
이렇게
죽는 밀알이
되는 신앙의
새 역사를
맞이했다.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헌신적인 삶으로
이 시대를 밝히셨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한국 교회의
등불이 되셨다.
첫 시작은
언제나
철저하고
치열한
기다림이라는
실천을
동반한다.
김대건 안드레아
첫 사제는
우리 성직자들에게
실천을 보여주셨다.
진실과 힘은
참된 실천으로
탄생한다.
참된 사람은
진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주어진 진리와
함께 주어진
길을 기쁘게
걸어가신
첫 사제의 삶에서
진리와 실천은
둘이 아님을
배우게된다.
매일매일
새롭게
태어나고
새롭게
인내하는
성직자들의
삶이다.
자기모순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이시여
한국 성직자들을
위해 빌어주소서!
뜨거운 이 땅에
뜨거운 성직자들이
신앙의 뜨거운
중심을 되찾고 있다.
행복한 성직자
행복한 믿음이다.
행복의 출발점은
예수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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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의 마지막 옥중편지]
우리 벗이여, 생각하고 생각해 봅시다. 하느님께서 아득한 태초로부터 천지만물을 지어 제 자리에 놓으시고, 그 중에 사람을 당신 모상과 같이 내어 세상에 두신 목적과 뜻을 생각해 봅시다. 온갖 세상일을 생각하면 가련하고 슬픈 일이 많습니다. 이같이 험하고 가련한 세상에 한번 태어나서 우리를 내신 임자를 알지 못하면 태어난 보람이 없고, 살아있더라도 쓸데없습니다. 비록 주님 은총으로 세상에 태어나고 영세 입교해 그분의 제자 되니, 주님의 제자라는 이름도 귀하지만 실행이 없다면 그 이름을 무엇에 쓰겠습니까? 세상에 나서 입교한 효험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주님을 배반하고 그 은혜를 거스르는 것입니다. 주님 은혜만 입고 그분께 죄를 짓는다면 어찌 태어나지 않은 것만 같겠습니까?
씨를 뿌리는 농부를 보건대, 때맞춰 밭을 갈고 거름을 주며 더위에 그 고생도 아랑곳 않고 가꿉니다. 거둘 때에 이르러서 곡식이 잘 되면 땀흘린 수고를 잊고 즐기며 기뻐합니다. 거둘 때 빈 껍질만 있다면 주인은 땀 흘린 수고를 생각하고 오히려 그 밭을 박대할 것입니다. 이같이 주님께서는 땅으로 밭을 삼고 우리 사람을 벼로 삼으시고, 강생구속하신 피로 우리에게 물 주시어 자라고 영글도록 하셨습니다. 마침내 심판날에 거두기에 이르러, 주님의 은혜를 받아 좋은 결실을 보았으면 주님의 의로운 자녀로서 천국을 누릴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영글지 못했으면 주님의 의로운 자녀라 하더라도 영원히 벌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께서는 세상에 내려와 친히 무수한 고난을 받으시고 괴로운 데로부터 거룩한 교회를 세우시고 고난 중에 자라게 하셨습니다. 그러니 세상 풍속이 아무리 치받고 싸운다 한들 교회를 감히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예수 승천 후 사도시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두루 무수한 박해와 힘들고 어려운 중에 자라왔습니다. 우리 조선에 교회가 들어온 지 5,60년동안 여러 번 박해가 일어나 교우들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오늘날 박해가 불길같이 일어나 여러 교우들과 내가 잡히고 아울러 여러분까지 환난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에 우리는 한 몸이 되어 애통한 마음이 어찌 없겠으며, 사사로운 정 때문에 차마 이별하기에 어려움이 없겠습니까? 성경에 말씀하시되 작은 털끝이라도 주님께서 돌보신다 했고, 모르심 없이 돌보신다 하셨습니다.
주님의 거룩한 뜻을 따르며 온갖 마음으로 천주 성자 예수 그리스도 대장의 편에 서서 이미 항복받은 세속의 마귀를 공격합시다. 어쩔 줄을 모르는 이런 시절을 당해 마음을 늦추지 말고 도리어 힘을 다하고 역량을 더해서 마치 용맹한 군사가 무기를 갖추고 전쟁터에 나가는 것과 같이 우리도 싸워 이겨냅시다.
부디 서로 우애를 잊지 말고 도우면서 주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환난을 거두시기까지 기다립시다. 혹 무슨 일이 있을지라도 부디 삼가고 극진히 조심해서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조심을 배로 더해 갑시다. 여기 감옥에 있는 20인은 아직 주님의 은총으로 잘 지내고 있으니 설혹 죽은 후라도 여러분은 그 사람들의 가족을 부디 잊지 말아주십시오.
마음으로 사랑해서 잊지 못할 교우 여러분, 여러분은 이런 어려운 시절을 만나 부디 마음을 헛되게 먹지 말고 밤낮으로 주님의 도우심을 빌어, 마귀와 세속과 육신의 3구(三仇)에 맞서서 박해를 참아받으며, 주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대들의 영혼을 위한 큰일을 경영하십시오. 이런 박해 때에는 주님의 시험을 보게 됩니다. 세속과 마귀를 물리쳐서 덕행과 공로를 크게 세울 때입니다. 부디 환난에 눌려 항복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받들고 영혼을 구하는 일에서 뒷걸음치지 마십시오. 오히려 지난 날 성인성녀들의 자취를 살펴 이를 본받고 실행하여 우리 교회의 영광을 더하십시오. 하느님의 착실한 군사이며 의로운 아들임을 증거하십시오. 여러분의 몸은 비록 여럿이나 마음으로는 한 사람이 되어, 사랑을 잊지 말고 서로 참아나가고 돌보며 불쌍히 여기십시오.
할 말은 끝없지만, 있는 곳이 타당치 못해 더 적지 못합니다. 모든 교우들은 천국에서 만나 영원한 삶 누리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내 입을 여러분의 입에 대어 사랑으로 입맞춥니다. /1847년 8월말 부감목 김 안드레아
https://youtu.be/lR7S6MKcbk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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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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