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의 특성상 유니폼을 입는 것을 빼면
내 생활에서 한복을 입는 시간이 다른 옷을 입는 시간보다 훨씬 많습니다.
개량한복이라 부르는 옷은 지퍼도 달리고, 옷고름도 없고, 주머니도있어서
그런대로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지만 전통한복은 좀 다르지요.
오줌이라도 누기 위해 바지끈을 풀면 바지춤이 무릎 아래까지 주루룩 흘러
내려가버리는 민망한 꼴도 보이게되고, 지수에미가 짜줘서 쓰고다니는 모자
에 잿빛나는 옷을 입으면 중처럼 보이는지, 사람들 많은 곳에 가서 마음 놓고
무엇을 먹기가 어렵습니다.
엊그제 횟집에 가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데, 건너편에 앉은 어떤 노신사가
자꾸 나를 흘금거리더군요. 그 동안 신문이며 책이며 여기 저기에 사진이
나와서 혹 나를 알아보는 양반이신가싶어 조심성이 더해졌지요. 크게 웃지도
못했고,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으레껏 나오는 '씨발놈'소리 한번도 못하고
얌전을 빼고 있을 수 밖에 없었지요. 그런데 자꾸 눈이 마주치다 보니 이거
아무래도 그건 아닌듯 싶습디다. 왜냐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그다지 우호적
으로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나를 가르치셨던 선생님도 아니시고, 내게 그다지 좋은 감정이 있을 리 없는
군청 직원도 아닐테고, 아직 빌린 돈 떼먹어본적 없는데 대체 왜 저렇게 나를
쳐다볼까...궁금했지요.
'아, 혹시?'
나를 중으로 본다면 그럴법도 했습니다. 중이 태연하게 횟집에 앉아서 회를
먹고, 게다가 술에 담배까지 먹고 있으니, 혹시나 그 양반이 불자라면 내 행동에
눈썹을 있는대로 찡그릴만도 하다 싶었지요.
나의 가설을 검증도 할 겸, 장난끼가 슬슬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나는 그 양반의 시선때문에 여간 자연스럽지못했기
때문이지요.
복수는 나의 것.
일부러 큰 소리로 '이런 존만한 친구들아, 내 술 한잔 받고 아가씨 있는집으로
2차 가자.' 하면서 술잔을 높이 들었지요. 아니나 다를까 그 양반 나를 쳐다 보
십디다.
이 때다 싶어 모자를 확 벗었습니다. 모자를 벗자 마자 비닐 봉지에 담긴 콩나물
처럼 머리에 납작 달라붙어 있는 긴머리칼이 뛰쳐나왔겠지요.
하하하.
깜짝 놀라는 게 분명해보이는 그 양반의 표정이란...
여름엔 무명으로 지은 한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다닙니다.
한복집에 주문해서 맞춰입는 것인데, 나는 저고리의 고름 매는 것을 좋아해서
바지엔 지퍼와 매듭단추를 달지만 저고리만큼은 전통식으로 주문하지요.
그런데 요새는 하얀 한복을 입으면 상 당한 줄 알기 때문에 좀 불편합니다.
그것이 아무리 파격적이라 할지라도 멋부리는 것에 대해 비교적 관대한
어머니 마저 흰한복만은 입지 말라셔서 지난 번에 감물을 들였지요.
그래서 흰한복이 아니니 괜찮겠거니 하고 그 옷을 입고 어머니 댁을 몇번 들락였구요.
어느 날인가 어머니가 한숨을 푹푹 쉬시더니 내게 나직하게 이러십디다.
'성주야. 너 머리를 좀 길던가 한복을 안입던가 하믄 안되겄냐?'
'어째라. 또 누가 중같다고 헙디여?'
'차라리 내가 중이믄 암말도 안헐란다.'
'그라믄 또 뭣이락 헙디여?'
'지난 번에 아랫층 여자가 나한티 와서는 여간 꺽정시런 표정으로 그러드라.
'마음 고생이 을마나 심허요. 그래도 요새는 휴가도 준닥허드믄 참말로 그런갑소 이?'
해서 내가
'그라재라. 명절에는 못쉬어도 여름에는 다 휴가간닥 헙디다?'
했드만 아 글씨 이 여자가
'그나저나 은제나 나온다요. 면회 댕기기도 징헐턴디. 뭔 죄로 들어갔다요?'
허드라. 아가 성주야. 내가 너 우체부질 허는 것도 못마땅해 죽겄는디
내 이쁘고 귀헌 아들 전과자 소리까지 들어야 쓰겄냐?'
'......'
그 때는 몇 가지 이유로 머리를 삭발하고 다닐 때인 데다, 하얀 한복에 하얀 고무신
까지 신고 다녔으니 아랫층 아줌마 눈에는 뉴스에서 봤던 재판 받던 사람들
복장하고 비슷하게 느껴졌던가 봅니다.
이런 일도 있습니다.
역시 개량한복에는 소용없는 물건이지만, 두루마기나 전통한복의 저고리를 입을
땐 '동정'이 꼭 필요합니다.
저고리의 깃에 덧대 입는 하얀 천을 말하는 건데, 색깔이 하얀지라 쉽게 때가 묻게
되어서 자주 갈아줘야 합니다. 까만 두루마기에 하얀 동정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한층 깔끔해보이지만, 동정에 때가 묻으면 사람이 좀 칠칠해뵈고, 한 방 쓰는 이의
내조에 대한 평가까지 위협을 받게되고는 하지요.
동정을 사러 영광 읍내엘 나갔습니다.
한복집을 들어가서 '동정 있나요?' 했더니 '그것이 뭣이다요?' 하더군요.
'아따 거 한복 저고리 깃에 대는거라.' 했더니 '아~ 동전?' 하십디다.
'동정이든 동전이든 맻개 주쑈.' 했더니 없답니다.
세상에 한복집에 동정이 없으면 어디서 동정을 살까. 세상이 산업화되면서 분업이
이루어지고, 그렇게 되면서 만드는 사람과 파는 사람이 달라지게 되었지요. 한복집
도 예외는 아니어서 한복집에서 한복을 짓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세상에
동정도 없이 주문 받아다 커미션만 챙기는 줄은 몰랐습니다.
몇 군데를 더 찾아다녔지만 동정을 동전으로 발음하는 것은 마찬가지였고 동정을
구하지 못한 것도 마찬가지였지요.
드문드문이긴 하지만 한복집이 몰려있는 길에 있는 모든 가게를 다 들어가봐도
동정이 없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남은 한 집, 주택가에 조그만 간판 걸어놓은 구식 한복집 한곳만 남았
지요. 왠지 옛날식 간판에, 촌스러운 마네킹에, 빛바랜 선팅지가 동정이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품게하기에 충분했습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가게엔 아무도 없었습니다.
'계시요?'
살림방으로 짐작되는 곳을 가려주는 문쪽에 대고 소리쳤지요.
'........' 테레비 소리는 들리는데 사람 소리는 없었습니다.
'암도 안계시요~~?'
두번째 부르자
'누구요?' 하며 좀 취해보이는 아줌마가 나왔습니다.
'동전 좀 주쑈.'
돌아다니느라 지친데다 동정도 없이 장사하는 한복집들에 부아도 살짝 났던 터,
동정 달랬다가 다시 동전으로 바꿔 말하는 것도 귀찮았고, 동정이 있느냐고 묻지
않고 대뜸 달라고 했던 것은 '여기는 꼭 있겠지' 하는 간절한 희망까지 버무렸기
때문이었지요.
'미안허요. 읎은게 나중에 오쑈.'
마지막 한 곳 남은 한복집이었는데, 여기에도 동정이 없다니....그럼 이제 약국에
가서 하얀 반창고를 사다 동정에 덧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얘기 아닙니까.
화가 날대로 났습니다.
'아니 뭔 동전 한나도 읎이 장사를 헌다요.'
'장사가 안되믄 그랄 수도 있재라. 그래도 아저씨는 양심적이요 이? 다른
사람덜은 천원만 주락허든디 아저씨는 동전 주락허요 이? 나중에 장사 잘
되믄 주께 그 때 오쑈. 요새는 너머 불경기여라.'
아...... 날씬하기라도 해서 그런 소리 들었으면 덜 서운했을텐데, 세상에 이렇게
살진 거지 봤냐고요. 이렇게 뚱뚱한 거지 봤냐고요.
제 몸에는 한복이 제일 잘 어울립니다.
5천년이 지나며 우리 체질과 활동에 맞게 만들어져온 옷이기 때문이지요.
누가 뭐라 그래도 나는 계속 한복을 입을 겁니다.
거지 아니라 상거지 소리를 듣더라도...
카페 게시글
그루터기
한복으로 인한 에피소드
유시유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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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69
04.01.17 16:33
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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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훗 ~~어떤 아찌 들으면 참 반갑다구 하시겠어요..그분도 아바타에 한복을 입으셧는디...ㅋㅋ...감사 합니다
^^
유시유종님 오랜만인데, 좋은 글 주셔서 고맙게 잘 보았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부럽기조차 한데, 비장이도 한복을 좋아하긴 하지만 맘 놓고 입을 처지가 못되서리.. 머슴(월급쟁이) 사는 주제에 한복을 입고 다니기는 좀 그렇더군요.. 전통한복은 아니라도 개량한복이 참 편하고 좋은데, 남들이 볼때 놀러 다니는 인상을..
먹물옷 입었다고 중넘 취급은 그렇다치고, 전과자 오해까지 받다니 그건 넘 심했네요.. 동정 얘기도 재밌었습니다, 양심적인 걸뱅이님..ㅎㅎ
ㅋㅋㅋ 재미있어요...
유시유종님의 글을 보면 재미있습니다. 진솔한 사람 살아가는 내용이 있거든요. 글을 보면 대단한 분이십니다. 언젠가 저도 스님들의 회색빛 바지가 탐이 나던데........그것이 참 편해 보이더군요.
자꾸 뵙고 낯익히려고 빤해 보이는 부족한 글 들고 들락입니다..예쁘게 봐주셔서 고맙기만 하지요..
'상거지 소리를 듣더라도'......유시유종님의 글을 보면 안면도의 소나무를 느끼게 됩니다. 재미있게 읽지만 아름다운 정신을 보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