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아침이었다.
역시나 눈조차 뜨기 힘이 들었다. 과음 탓에 속은 쓰렸고 무언가 귓가에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시끄러운 소음이었다. 실눈을 뜨고 흐릿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침대 옆 탁자 위에 놓인 알람시계가 울리고 있었다. 손을 뻗어 서둘러 알람시계 버튼을 눌
러 껐다. 그러자 일정한 초침 소리 외엔 아무런 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시계를 가져다 가늘게 뜬 눈앞으로 들이밀었다. 정각 여섯 시에 맞춰놓았던 것이 많이 늦은
시각인 일곱 시가 가까워져 오는 시각에 울렸다. 주인을 따라 물건도 제 정신을 잃은 모양이
었다.
잘 떠지지도 않는 눈을 손등으로 문질렀다. 그렇게 힘겹게 눈을 뜨려는 순간, 환한 아침 햇
살이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와 눈을 부시게 했다.
절로 또다시 눈이 감겼다.
지각이라는 자각을 하기엔 너무 힘이 든 하루의 시작이었다.
해장도 하지 못한 채 종일 업무에 시달리고 사람에 시달리고 교통체증에 시달렸다. 정신은
이미 반쯤 나가 있었고 나머지 반도 나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어떻게 일어나서 회사를 나갔고 어떻게 일을 하고 또 어떻게 지금 운전을 하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허나 그 의문을 품을 시간도 없이 나는 차를 급하게 운전해 집으로 향했다. 지
금은 그저 빨리 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며 걸어 나
갔다.
막 문 앞에 당도했을 때였다.
누군가의 실루엣이 내 집 문 앞을 서성거렸다. 나는 곧 그 실루엣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내가 다가서자 그 실루엣이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이제 와?"
여자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늦은 시각까지 나를 기다리느라 서 있었을 여자의 두 다리
가 피곤해 보였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묻지 않았다. 어쩌면 여자가 나를 기다린 시간은 오
분도 채 안됐을 지도 모른다. 내가 도착하기 몇 분전에 올라왔을 수도 있고 다른 곳에서 쉬
다가 내가 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돌아왔을 수도 있다.
물론 이 모든 가정들이 그저 추측과 억측에 불과할 지라도 지금은 그 생각에 심지를 굳히고
싶었다.
"어쩐 일이야, 여기까지."
여자가 찾아온 이유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모른 척 퉁명스레 물었다. 전혀 기다린 적 없다
는 듯이, 전혀 반갑지 않다는 듯이 그렇게 여자를 대했다.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문 안 열어?"
여자의 반문에 다시 열려던 입을 닫고 키를 꽂았다. 문이 열리고 여자가 들어갔다. 그리고
내가 들어갔다.
여자는 저번과 똑같이 자신의 겉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자신의 피곤한 몸을 침대 위에 내
려놓았다. 똑같은 모습으로 이불을 만지고 똑같은 시선으로 나를 응시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은 투로 나에게 물었다.
"요즘 일 많이 바빠?"
"조금."
"밥은? 밥은 먹었어?"
"아직."
"그럼 내가 차려줄까?"
부엌을 향해 일어서려는 여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했다.
"됐어. 생각 없어."
"그래도 조금이라도 먹어두는 게 좋아. 숙면에도 도움되고."
"별로 익숙지 않은 일이야."
여자가 잠시 머뭇거렸다.
"아, 그래? 그래, 그럼."
또다시 여자가 침대 위에 앉아 이불을 만지작거렸다. 아마도 처음 말문을 어떻게 열어야할
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무턱대고 소리를 지를 수도 없을 것이고 무턱대고 따귀를 날릴 수
도 없을 것이다. 어찌되었건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었으므로.
여자는 최대한 침착하게 행동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여자의 모습에서 눈을 떼고 정장 상의를 벗어 소파에 던졌다. 목을 조여 오던 넥타이
를 느슨하게 풀어헤치고 단추 세 개를 끌렀다. 답답함이 어느 정도 해소되는 듯 했다.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 한가치를 꺼내 입에 물었다.
"피우지마."
"뭐?"
여자가 다가와 내 입에 걸려있던 담배를 빼냈다. 그리곤 그것을 두 동강 내더니 미련 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담배 피지마."
여자를 응시했다.
"왜 그래야 하는데?"
"내가 싫으니까."
"잘 모르나 본데, 그건 네 문제야. 그리고 여긴 내 집이야. 싫으면 네가 나가."
다시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곤 보란 듯이 불까지 붙여 한 모금 깊게 빨아 들
였다.
여자를 향해 길게 연기를 내뿜었다. 탁하고 희뿌연 연기가 여자의 얼굴을 뒤덮었다. 그러나
여자의 두 눈은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똑바로 나를 주시했다.
"아주 싫은 눈치는 아니네? 정말 끊은거 맞아?"
빈정거리는 말투로 여자에게 말했다.
"당신 지금 이러는 거 투정부리는 어린애로 밖에 안보여."
"뭐?"
여자의 말에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다며 반박하고 싶었으나 지금 내 모습은 여자가
본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아니라고 말해봤자 여자의 말을 인정하는 것 밖
에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자가 말했다.
"화난 거 있으면 말로 해."
"내가 왜 화가 났을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렇게 느껴져. 그리고 그렇게 보여. 지금 당신 화난 사람처럼 굴고 있잖아."
"그럼 알아서 비켜주는게 예의 아닌가?"
"뭐?"
"난 눈치 없는 사람 별로 거든."
"......"
"그리고 날 더 화나게 만드는 사람도 별로야."
"그래서?"
"나 화난 사람처럼 보인다며? 그래, 나 지금 화났어. 그러니까 더 이상 나 건들지 말고 그
냥 얌전하게 돌아가."
여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말아 쥔 손이 떨려왔다. 여자가 굳은 얼굴로 뒤돌아 서
자신의 겉옷을 손에 쥐어 들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문을 열기 전에 뒤돌아 나를 바라보았다.
"한가지 물어볼게."
"......"
"당신이 화난 이유, 나 때문이니?"
너무도 당연한 질문에 기가 막혀왔다. 아무런 말없이 여자를 응시했다. 그러다 뒤돌아 여자
를 등졌다.
여자가 다시 물어왔다.
"물었잖아. 나 때문에 화난 거냐고."
여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래, 맞아. 너 때문에 화났어."
"그날 나도 당신 때문에 무척 화가 났었어."
"그래서? 안 따지고 그냥 가려니까 억울하고 속이 뒤틀려?"
"왜 그렇게 사람 말을 비꼬아 들어? 그저 당신처럼 나도 화가 났었다고 말하는 것뿐이잖아."
"너나 솔직히 말해. 넌 지금 나한테 따지고 싶은 걸 마치 성인(聖人)이라도 되는 양 참고 있
잖아. 내가 널 몰라? 예전이었다면 넌 내 따귀를 때리고 불같이 화를 냈을 거야. 그때처럼
어리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안 그랬다면 내 뺨은 너한테 전세 내줬어야 했을 걸?"
너무도 정곡을 찌른 것일까.
내 말에 여자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여자의 작게 떨리는 몸짓이 그녀의 말을 대신해
주었다.
담배를 입에서 빼들고 말했다.
"물어봐. 대답해 줄 테니까."
"......"
"......"
"좋아. 당신이 원한다면 아니, 당신 말대로 내가 원할 테니까 물을게. 그날 그 자리에 왜 나
타난 거야?"
"그때 말했잖아. 그곳에서 일이 있었다고."
"정말 일 때문이었어?"
"왜, 거짓말 같니?"
"......"
"내가 네 뒤를 쫓아다닐 만큼 한가한 사람일 거라고 착각하지마. 네가 가는 곳을 나라고 못
갈 이유 없잖아. 안 그래?"
"......"
"왜, 내가 나타나서 당황했니?"
"당연하잖아."
"의왼데? 그땐 그런 기색도 없이 너무 태연했잖아. 그 정도로 실제상황에서 강한 건가? 역
시 윤희수야. 대단해."
"제발 비꼬지마."
"비꼰 적 없어. 내 느낌을 말한 것 뿐이야."
어느새 잿빛으로 변해 길어진 담뱃재를 털어 냈다.
"그냥 가지 그랬니? 그랬더라면..."
"오랜만에 내 여자를 만났는데 발길이 떨어져야 말이지. 만약 내가 그 자리에서 그냥 떠나줬
더라면 오늘처럼 네가 나한테 와줬을까?"
여자가 시린 눈초리를 내게 보냈다.
"너도 좀 다정하게 대해주지 그랬니? 친한 선배를 그렇게 딱딱하게 맞는 후배는 없어. 더군
다나 그때 우리는 몇 년만에 만난 사이였잖아. 얼싸안고 방방 뛰지는 못해도 미소는 보여줄
수 있었을 텐데 너무 야박했어. 안 그래?"
"그 부분은 미안해. 하지만 어쩔 수 없었어. 변명이겠지만 딱히 떠오르는 말이 없었어. 그리
고 맞는 말이잖아. 당신이 내 후배는 아니니까."
"그래, 그래서 더 화가 났어. 내가 친구였으면 친구라고 소개했을 거고 후배였다면 후배라
고 둘러댔겠지. 그런데 만약 이도 저도 아니었다면 넌 과연 날 뭐라고 소개했을까?"
"......"
"내가 언제부터 네 선배였니?"
"당신도 동조했던 일이잖아. 나한테만 떠넘기려고 하지마."
피식 웃음이 났다.
"동조라...... 그래, 결과적으론 그랬지. 난 그날 완벽한 네 선배였지. 그것도 아주 친분이
두터운. 그렇지?"
여자의 눈동자를 마주했다. 최대한 감정을 억눌렀다.
"이제 내가 물어도 되지?"
"뭘?"
"너희 남편 말이야, 원래 그렇게 순진하니? 아니면 가식인가?"
"무슨 뜻이야?"
"그게 아니면 너무 곱게 자라서 아직도 세상을 잘 모르는 건가? 원래 잘난 사람들 눈에는 다
른 사람들은 안보이나?"
"도대체 무슨 말이 하고싶은 거야!"
여자의 두 눈을 똑바로 직시했다. 여자의 눈에 뜨거운 불길이 타올랐다.
남편에 관한 이야기라서 흥분한 거야? 정말 그런 거니?
도대체 왜!
사랑으로 이루어진 가정도 아니고 사랑해서 결혼한 사이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 남편을 감싸
는 거야? 정신 차리고 똑바로 봐. 널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 앞에 있는 이 박정우라는 인
간이라고!
"아무리 선배라 해도 선배 나름이지. 난 선배이기 전에 남자였어. 보통 남자들이라면 자기
여자 앞에 다른 남자가 나타나면 그렇게 태연하게 행동할 수가 없어. 눈빛부터 달라져. 그리
고 무의식중에도 경계를 하기 마련이지. 그런데 네 남편은 전혀 그런 기색이 없었어. 오히
려 날 반기더군."
"그 사람 천성이야. 그게 나빠? 그게 뭐가 어쨌다는 거야?"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그게 남자한테는 무슨 뜻인지 알아?"
"......"
"난 당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습니다, 라는 뜻이야. 널 믿어서가 아니라."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 사람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마."
"화나니? 왜?"
"......"
"왜 화가 나냐고 묻잖아! 예전에 분명 네 입으로 그 사람은 사업 파트너일 뿐 사랑하지 않는
다고 했어. 그런데 왜 화가 나냔 말이야! 그새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거야?"
내 다그침에 여자가 잠시 숨을 고르곤 입술을 열었다.
"......남편이니까."
"뭐?"
"그 사람은 내 남편이니까."
여자의 말에 심장이 떨어지는 것 같았다. 숨이 절로 멎고 몸의 근육들이 뻣뻣하게 굳어져 그
대로 말라 버릴 것만 같았다. 살아있는 미라가 된 기분이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하니?"
"......"
"말해봐. 그를 사랑해?"
여자가 고개 들어 나를 바라봤다. 아무 말도 하지 않길 바랬다. 아니라고 고개를 저어주길
바랬다. 그러나 여자는 그렇게 따라주지 않았다.
"당신한테 말할 이유 없어."
"넌 참 편한 사고방식을 가졌어. 말하기 싫으면 안하고 하고 싶은 말은 무슨 일이 있어도 내
뱉고. 한마디로 넌 네 멋대로야."
"......"
"내가 말해볼까? 넌 네 남편을 사랑하지 않아. 네 입으로도 그랬잖아. 그는 사업 파트너일
뿐이라고. 사랑하는 사이가 아니라고. 그래서 넌 그를 사랑하지 않아. 웃기지도 않게 세월
핑계 댈 생각은 하지마. 세월이 흐르고 강산이 열 두 번이 변한다 해도 넌 절대 변하지 않
을 사람이니까."
여자가 나를 노려보았다. 그러나 여자의 차가운 시선을 무시한 채 계속 말을 이었다.
"난 그게 참 궁금했어. 내가 나타나면 그 사람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지. 얼굴이 딱딱하게 굳
어질지 아니면 내 행동, 내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움찔거리며 반응할지. 것도 아니면 너를
데리고 그 자리를 벗어나 버릴지. 그런데 너무 의외의 인물이더군. 내가 너무 깊게 생각했
던 거야. 그렇게 단순하고 경계망이 허술할 줄은 미처 몰랐어. 그런 사람은 난생 처음이었
어. 더군다나 어떤 상황에서도 적을 환대하는 장수는 없는 법인데 네 남편은 나를 마치 어
릴 적 소꿉친구 대하듯 했단 말이야? 물론 네 말대로 그 사람의 천성상, 그리고 내 진짜 정
체를 모르니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여자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럼 일부러 그랬던 거야? 말해봐. 그냥 갈 수도 있었는데 당신은 굳이 나와 그 사람 앞에
나타났어. 일부러 그랬던 거니? 그런 거야?"
여자의 언성이 조금씩 높아졌다.
"그렇다면?"
"뭐?"
"내가 네 남편 앞에 나서면 안될 이유라도 있어? 굳이 너 때문이 아니라도 나는 네 남편과
인연이 있는 사이였어."
"말도 안돼."
여자가 고개를 저으며 연신 말도 안된다는 말을 내뱉었다. 그렇게 여자는 내 유치한 질투심
을 비웃었다.
"뭐가 그렇게 말이 안되는데? 내가 계획적으로 접근한 거? 아니면 내가 나타나면 안될 자리
였니? 나와의 관계가 들통나서 네 그 잘난 체면에 먹칠이라도 할까봐 걱정됐어? 것도 아니
면 나란 놈이 너무 보잘것없고 창피해서 죽어도 나서지 않길 바랬니? 그래서 지금껏 날 외면
했던 거야? 그랬어!"
"비약하지마. 누가 그렇대?"
"그럼 뭐야! 도대체 뭐 때문에 내가 너한테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건데. 왜 내가 널 기다
려야 하고 왜 나만 널 바라봐야 돼? 왜 나만 이래야 하는데, 왜!"
"그건...!"
"다시 시작한 건 너야. 나한테 돌아온 것도 너고. 내가 언제 널 사방팔방 수소문하며 스토커
처럼 찾아 다녔어? 나한테 와달라고 울고 불며 붙잡고 애원했어? 네 두발로 날 찾아왔잖아.
네가 먼저 키스했잖아. 네가 먼저 기억하느냐고 물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날 죄인 취
급해? 네가 뭔데!"
"그런 적 없어. 난 당신 죄인 취급하지 않았어. 그렇게 느끼게 했다면 미안해. 내가 사과할
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의 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내가 살 수 있다.
"난 이제 네가 무섭다. 정말 미치도록 너한테 빠져드는 나란 인간도 무섭고 여기서 더 떨어
질 낭떠러지가 있다는 사실도 무서워."
"......"
"날 어디까지 끌고 가야 직성이 풀리겠니?"
"정우씨."
"가. 더 이상 언성 높이기 싫다."
그렇게 한동안 여자는 말이 없었다.
내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들은 듯 했다. 그럼에도 여자는 말이 없었고 내가 새로운 담배
를 입에 물었을 때에야 여자가 고개를 들었다.
목이 잠긴 목소리로 여자가 말했다.
"오지 말까? 여기 다신 오지마?"
"......"
소리 없이 주먹을 말아 쥐었다. 그 소리 없는 고통이 온 몸으로 퍼져나가며 전율했다. 손등
위로 푸르스름한 핏줄이 툭 붉어져 나왔다.
여자가 눈물 어린 모습으로 고개를 떨궜다.
"그래. 이제 다신 오지 않을게."
"......"
"다신 당신 찾지 않을게."
"......"
"잘 있어."
"......"
문이 닫히고 여자가 갔다.
다신 찾지 않겠다는 말과 함께 잘 있으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여자가 나에게서 떠나갔다.
여자의 흔적이 사라지고 휑한 공기만이 덩그러니 남아 허공에 떠다녔다.
주먹을 말아 쥐었던 손에 더욱 힘을 가했다. 손톱으로 인해 손바닥에 새겨진 상처가 더 깊어
졌고 쓰리고 아려왔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내 몸은 문을 열고 집을 뛰쳐나가고 있었다. 나 자신조차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고 아무런 자각도 할 수 없었다. 신발도 신지 않은 맨발로 긴 복도를 뛰었다. 무작정
여자를 찾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부서지도록 버튼을 눌러댔다. 그러나 엘리베이터는 위에서 내려올 줄
모르고 멈춰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급하게 계단으로 뛰어 내려갔다. 숨이 차도 찬 줄 모르
고 땀이 흘러도 흘러내리는 줄 몰랐다. 그저 여자를 붙잡아야한다는 일념 하나로 앞을 향해
내달릴 뿐이었다.
계단을 뛰어 내려와 막 출입구를 향해 뛰려던 순간이었다. 거짓말 같게도 내 앞에 여자가 나
타났다. 눈에 눈물의 흔적을 그대로 간직한 채 여자가 원망 섞인 눈빛으로 날 바라보며 서
있었다.
"희수야."
헐떡이는 숨으로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왜 나왔어?"
"......"
"나 가라고 등 떠민 사람 바로 당신이야. 그런데 왜 나왔니?"
"......"
"왜 나왔냐고 묻잖아. 대답해. 대답하란 말이야!"
여자가 그 작은 주먹으로 내 가슴을 때렸다. 아프지 않았다. 조금의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
다. 그저 내 앞에 서 있는 여자가 고마웠고 날 기다려준 여자가 고마웠다. 바보같이 아무 말
이나 쏟아내 버린 나를 기다려준 여자가 너무도 고마웠다. 미칠 듯이 불안했던 가슴이 여자
를 보는 순간 모두 사라졌다.
여자의 작은 몸을 꽉 껴안았다. 숨이 멎도록, 여자의 몸이 부서지도록 그렇게 힘껏 여자를
껴안았다.
"이렇게 뛰쳐나올 거였으면서 왜 그렇게 모질게 말했어? 내 가슴이 얼마나 아팠는데, 얼마
나 당신이 미웠는데!"
"미안."
"나도 힘들었어. 나도 힘들었다고. 누군 이렇게 찾아오는 게 마음먹은 것처럼 쉬웠는 줄 알
아? 내가 얼마나 생각하고 또 생각했는데.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데...... 알지도 못하면서
당신이 나한테 어떻게 이래."
"미안."
여자가 울먹였다.
"당신이 조금만 더 늦었으면 나 정말 이대로 가버렸을 거야. 그리곤 영영 당신 안 봤을 거
야. 여기서 우리 관계 끝냈을 거야. 거짓말 아냐. 정말이야."
"알아. 그래서 미안해. 정말 미안해."
"바보."
여자를 품에 안고 그녀의 몸을 어루만졌다. 손끝으로 여자의 보드라운 살결을 매만졌다.
여자가 새침하게 눈을 흘겼다.
"좀 전에는 왜 그랬어?"
"뭐가?"
"왜 나한테 가라고 했느냔 말이야."
여자가 야속하다는 말투로 물었다.
"......그냥."
"그냥?"
"어. 그냥."
"그런 말로 때울 생각하지마. 진짜 이유가 뭐야?"
"......실은 너무 보고 싶었거든. 그래서 그간 연락도 없이 며칠만에 찾아온 너한테 심술이
났었나봐."
"미처 당신 마음을 생각하지 못했어."
"이제라도 왔으니까 괜찮아."
여자가 내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도."
"어?"
"나도 보고 싶었다고."
"......정말?"
여자가 수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보름이 다 되도록 왜 날 찾지 않았어?"
"좀 혼란스러웠거든. 그래서 잠시 생각을 정리하고 싶었어. 그런데 이렇게 시간이 빨리 흐
를 줄은 미처 몰랐어. 그저 며칠이면 아니, 몇 시간이면 될 줄 알았는데...... 나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인가 봐, 이렇게 고민하는 걸 보면."
"그래서 정리는 했니?"
"대충은."
"......어떻게?"
여자가 나와 눈을 맞추고 입술을 뗐다.
"당신만 괜찮다면 아니, 당신이 허락해준다면 나 당신 옆에 있고 싶어."
5.
벨을 누르자 곧 문이 열렸다.
어깨까지 흘러내리는 커다란 티셔츠 차림에 수건을 이마에 두른 여자였다. 놀란 눈을 끔벅이
며 여자가 뒤켠의 벽시계를 보았다.
볼 것도 없이 여섯 시를 조금 넘긴 시각이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아직 퇴근할 시간 아니잖아?"
"보고 싶어서 외근 나간다는 핑계대고 일찍 퇴근했어."
"그래도 돼? 이러다 당신 짤리는거 아냐?"
"짤리면 다른데 들어갈 때까지 며칠 굶지 뭐."
"뭐?"
여자가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나를 흘겼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여자의 몸을 끌어 안아들
고 방으로 들어갔다. 침대 위에 여자를 내려놓고 그 위로 몸을 포갰다. 그리곤 살며시 입을
맞췄다.
"너무 보고싶더라. 참을 수가 없었어."
"실은 나도 당신 기다리기 지루해지려던 참이었어."
"텔레파시가 통한 건가?"
여자의 웃음 짓는 얼굴 위로 가볍게 입술을 갖다댔다.
속삭이듯 물었다.
"지금 괜찮아?"
"아마도."
익숙하게 여자의 몸을 쓸어 내렸다. 옷을 벗기려고 겉옷을 걷어올렸다. 그러다 여자가 입고
있는 낯익은 옷을 보고 물었다.
"이거 어디서 났어?"
"왜? 당신 거야. 서랍 맨 밑에 있던데? 다른 건 너무 커서 못 입겠고 그나마 이게 젤 낫더라
고."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그거 버리려고 모아둔 건데."
"뭐야, 그럼 내가 졸지에 재활용 센터가 된 거야?"
"뭐, 재활용 센터?"
여자의 발언에 웃음을 터뜨렸다. 오랜만에 가슴이 시원하게 뚫리도록 웃어 재꼈다.
"내 말이 웃기니? 그렇다고 너무 웃는 거 아냐? 사람 무안하게."
"아, 미안. 미안. 이제 안 웃을게."
곱게 눈을 흘기는 여자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관계가 다시 진행되려는 순간이었다. 어디선
가 지지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소리지? 꼭 가스 새는 소리같네. 그러고 보니 냄새도..."
"뭐, 가스?"
"어."
여자가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부엌을 향해 뛰어갔다.
"어떡해!"
여자의 울음 섞인 목소리가 집안에 울려 퍼졌다. 침대에서 내려와 재빨리 여자에게로 다가갔
다. 여자가 가스렌지 앞에 서서 탁한 연기가 나오는 무언가를 들여다보았다.
여자의 뒤에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인데?"
"내 된장찌개."
"뭐?"
"가스렌지에 된장찌개 올려놨었는데 당신 때문에 잊어버렸잖아! 뭐야, 이게. 다 넘고 졸아
서 국물도 없어. 그나마 형태가 남아있는 재료들은 다 타버렸잖아. 이거 아까워서 어떡해."
여자의 얼굴이 울상이 되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귀엽던지 여자의 볼을 잡고 입을 맞췄다.
"뭐하는 거야!"
"너무 예뻐서 그런다."
"지금 그런 분위기 아니잖아! 애써한 찌개 맛도 못보고 끼니 때우게 생겼는데 그런 소리가
나오니?"
"나한테는 지금이 가장 적기야."
"뭐? 아악, 내려놔!"
여자를 번쩍 안아들고 침대로 향했다.
여자의 머리에 고개를 묻었다.
은은한 샴푸향이 풍겨져 나왔다.
"기분 좋다. 하루 종일 이러고 있었으면 좋겠다."
"나도."
"너한테서 나는 냄새가 너무 좋아."
"무슨 냄새나? 나는 모르겠는데?"
여자가 자신의 팔을 코끝으로 가져다대곤 연신 냄새를 맡았다. 여자의 팔을 잡아 부드럽게
내리고 말했다.
"그런게 있어. 그리고 설사 말해도 넌 잘 모를 거야. 그건 나만이 맡을 수 있는 거거든. 내
가 전세 냈으니까 아무한테나 풍기고 다니지마. 들키는 날엔 절대 가만 안 놔둘 거야."
"치. 무슨 냄샌지 말도 안해주면서 겁주기는."
"말해주면 나만의 비밀이 없잖아. 그냥 나만 알고 있을래."
"욕심쟁이."
여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걸 이제 알았어? 나는 너하고 관련된 모든 것들에 대해서는 욕심쟁이야. 내가 다 가질 거
야. 정말 그럴 거야."
"......"
여자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손가락을 매만지며 바라볼 뿐이었다. 눈을 들어 여자를
바라보았다.
"왜 말이 없어?"
"......"
"희수야."
불안한 마음에 여자의 이름을 불렀다.
"정우씨."
"어."
"난 당신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 것도 없는거 같애. 알고 있는 줄 알았는데 다 거짓이었어.
내 자만이었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남편에 대해서는 꽤 많은 부분을 알고 있어. 그 사람은 밝은 색상을 좋아해. 밝으면서도 편
안해지는 색으로 집안을 꾸미길 원해. 햇살 같은 따스한 분위기 말이야. 그는 어두운 걸 싫
어해. 난 어두운 색이 더 좋은데. 그 사람은 하루에도 몇 번씩 나에게 입을 맞춰. 그리고 나
에게 물어. 잘 잤느냐는 기본적인 아침인사를 시작으로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낼 건지, 오늘
하고 싶은 일은 있는지, 혹시 어디 몸과 마음이 불편한 곳은 없는지...... 아주 소소한 부분
들에 대해서 관심을 드러내."
"......"
"그리곤 자신의 일과를 나에게 읊어주지. 그게 습관인 것 같기도 하고, 나에게 더 많은 애정
을 쏟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도 같아. 그럼 나는 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그가 오늘은 어
떤 컬러의 옷을 입고 출근을 하는지, 나가서 무슨 일을 하며 어떤 곳에 가는지. 또 점심에
는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이며, 어떤 사람들과 만남을 가질 것인지. 그러다보면 그의 하루에
대해 나는 거의 모든 것을 알게돼. 내가 청소를 할 때 그는 그가 말한 까다로운 일을 처리하
고 있고, 내가 점심을 먹을 때면 그 또한 그가 말한 음식으로 배를 채우고 있고, 차를 마시
고 밖으로 볼일을 보러 나가면 그 사람도 어딘가를 향해 바쁘게 운전대를 붙잡고 있어. 그
와 나는 다른 공간에서조차도 함께 하는 거지."
"......"
"그 사람은 긍정적으로 생각하는게 몸에 배어있어. 무슨 일이든 다 좋은 쪽으로 먼저 생각하
고 행동에 옮겨. 너무도 생각이 바른 사람이야. 그래서 가끔은 답답함을 느낄 때도 있어. 이
따금씩 나와 생각이 달라 충돌이 생길 때도 있어. 그래도 그리 큰 지장은 없어. 언제나 그렇
듯 그가 한 발짝 물러서 주니까. 그리곤 내 입장에서 다시 생각을 하고 의견을 조율해서 결
정을 내려. 그럼 나 또한 그의 의견에 찬성표를 들어."
"희수야."
내 부름에 여자가 나를 바라봤다.
"나는 이렇게 그 사람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아. 그런데 정작 당신에 대해서는 너무도 아는
게 없어. 왜 아무 것도 알려주지 않니? 왜 그런 것에 대해 묻지 않아?"
"내가 아니까. 내가 널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너에 대해서 모두 다 알게 되면 그때 나에 대해서 알려줄게. 그러려면 아주 긴 시간
이 필요할 거야."
"난 지금 당장 알고 싶어. 당신이 좋아하는 작고 사소한 것부터 시작해서 당신이 하는 일에
대해서도 알고 싶고 누구를 자주 만나는 지도 알고 싶어. 전화번호에는 누구의 번호가 저장
되어 있고 여자는 몇 명이나 알고 있는지, 당신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는지, 당신이 나와 같
은 시간에는 무얼 하는지..."
"우리 시간 많잖아. 천천히 해나가자. 한꺼번에 너무 많은 것을 알아버리면 너무 빨리 잊어
버려.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알아가면서 영원히 잊어버리지 말자. 응? 네가 왜 그렇게 불안
해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가 불안하지 않게 도와줄게. 그러니까 흥분 좀 가라앉혀."
그렇게 불안해하는 여자의 마음을 달랬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점점 더 불안해지는 내 마음
을 스스로 다독였다.
그 불안이 여자때문인지 나때문인지, 아니면 여자의 남자때문인지, 그 모든 것의 종합인지
확실치 않았다. 하지만 그 불안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은 느낄 수 있었다.
****
오늘 하루는 어떠셨나요??
전 아~주 좋으려다 말았답니다..--;;
졸지에 거짓말을 한 양치기 처녀가 되었다고나 할까..??
암튼 맘이 이래 저래 불편하네요.. (물론 상황상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답니다..ㅠㅠ)
날이 어제보다 더 추운거 같아요..
바람 안들어가게 옷 꼭 여미시구요...
이제 얼마 후면 저녁이니까 밥도 맛있게 드세요!
오늘 하루도 모든 일에 최선을 다하시길 바라구요..
여우, 오늘은 여기서 그만 물러 갑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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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기억보다... 제5장 4,5
순진한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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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12.06 1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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